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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 사태 왜 일어났는가?
[민족주의가 재앙을 부른다]
우리와 같은 단일 민족에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민족주의, 하지만 오랜 세월 이곳 저곳을 오가며 서로 섞여 살아왔던 유럽인에게 민족은 국가와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금의 코소보 사태가 일어난 그 배경에도 지난번 발칸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보스니아 사태와 마찬가지로 민족 문제가
얽혀 있다.
코소보는 신유고 연방의 한 자치주로 세리비아 공화국, 몬테네그로 공화국,
코소보, 보이보디나 자치주가 신유고연방을 구성하고 있다. 신유고연방은
세르비아인들이 92년 4월 출범시킨 나라이며 그 중 코소보주는 총인구 2백만명 가운데 90%가 알바니인이다. 90%의 알바니아인이 신유고연방에서 분리
독립하려고 하고 이를 저지하는 세르비아인의 충돌, 이것이 바로 코소보 사태의 핵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알바니아인들은 왜 독립하려고 하고 세르비아인들은 이를 사력을
다해 막는 것일까?
여기서 잠깐 신유고 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민족들과 그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1100만의 인구 가운데 세르비아인이 62.3%, 알바니아인이 16.6%, 몬테네그로인이 5%, 헝가리인이 3.3%, 슬라브계 무슬림이 3.1%를 차지하여 그외 소수 민족으로는 크로아티아인, 집시, 슬로바키아인, 마케도니아인, 루마니아인, 불가리아인, 터키인, 우크라이나인등이 있다.
세르비아인의 발칸반도 정착은 서기 7세기경 남슬라브족인 크로아티아인,
불가리아인, 슬로베니아인과 함께 남하하면서 시작됐다. 이중 남슬라브족은
유고 북부 지방에 정착하여 독일과 프랑스의 전신인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카톨릭 문화권에 속하게 되었고, 남동부 지방에 위치한 세르비아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아 동방 교회를 받아들였다. 그후 879년에 세르비아인은 그리스 정교로 개종하였으며, 969년에는 비잔틴 제국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하고 다시 비잔틴 제국의 영향하에 있다가 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춘 세르비아 왕국이1217년 탄생하였다.
슈테판 두샨(1346-1355)의 통치시기에는 세르비아가 현재의 알바니아와 그리스 북부 지역을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고 수 많은 프레스코 장식을 한 정교 사원들이 세르비아의 '황금시대'기간 동안에 세워졌다.
그러나 슈테판 두샨이 죽은 뒤 세르비아는 점차 쇠퇴하가 시작하였고, 1389년 6월 28일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터키제국에 패함으로서 약
500년 동안 이슬람 통치를 받는다.
기독교 신앙을 지키려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이슬람 통치는 이슬람교로의 개종과 터키어의 사용등을 강요하고 이로써 세르비아인들은 이슬람 교도들에게 역사적인 증오심을 갖게 된다. 특히 코소보주에는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정통성의 뿌리로 삼는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유적들이 많이 있어 그들에게
'영원한 고향'으로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성지와 같은
곳이기도 하다.
반면 알바니아인들의 정착에는 여러 해석이 있는데, 알바니아 역사가들은
세르비아인 정착 이전 토착인인 일리리안족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은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 직전인 14세기에 알바니아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어째튼 이 두민족은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말과 종교가 다르다.
1830년 터키 제국으로부터 겨우 자치를 회복한 세르비아는 1,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코소보 수복과 상실을 거듭한다. 1차세계대전의 종결 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이보디나가 세르비아, 모테네그로, 마케도니아와 연합했고, 세르비아왕의 주도하에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왕국'이
탄생하며 그 후 1929년에 그 이름이 유고슬라비아(남슬라브족의 나라라는
뜻)로 바뀌게 된다.
2차세계 대전후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공산당이 국민 의회의 통제권을 장악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1945년 11월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 공화국'으로 독립하고 티토의 슬로건인 '형제애와 단결(bratstva i jedinstva)'
아래서 각 민족들의 민족주의 경향은 수르러졌다.
그러나 각 공화국 사이에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코소보는 연방 내에서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했고 세르비아 자치주(코소보와
보이보디나)를 68년 시범적으로 허용하자 이에 고무된 알바니아계 대학생들의 대규모 항의 시위가 발생하여, 코소보는 74년 헌법에 따라 세르비아 공화국에 편입된 자치주로 남게됐다. 그러나 유고 건국의 아버지인 티토가 사망한 직후 81년 코소보는 공화국 승격을 요구하는 시위가 격화되었고 세르비아 정부는 주변 알바니아와 통합하려는 시도로 간주해 강제 진합했다.
이 와중에 상당수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불안한 코소보를 버리고 떠남으로써 알바니아인들은 자연스럽게 80년대 말까지 주민구성의 90%를 차지하게
된것이다. 티토 사망후 유고는 집단 지도체제로 변모했고 80년대말 동유럽에 불어온 개혁과 개방의 바람과 함께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유고연방은
무너진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유고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여 6월 27일 유고연방군이 슬로베니아를 침공함으로써 유고 내전이
발발한다. 유고내전은 250만명의 난민과 1만 5000여명의 사망자를 낸 인류
최악의 민족분규라는 오명을 2년반 이상을 끈 뒤 데이턴협정을 맺으면서 휴전했다. 92년 4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유고연방을 계승한다는 신헌법을 채택하여 '신유고연방'으로 독립한 후 신유고 연방은 세르비아 공화국,
몬테네그로 공화국과 2개의 자치주인 코소보와 보이보디나로 구성되었다.
문제는 당시 세르비아 공산당 지도자였고 현 '신유고 연방'의 대통령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87년 코소보를 방문, 세르비아계 주민들에게 600년전
오스만 터키의 침공을 거론하며 "이곳은 당신들의 땅"이라고 외친후 89년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밀로셰비치가 코소보의 자치권을 빼앗고 알바니아계
언어 사용을 금했으며 나아가 알바니아계 사람들의 자녀의 취학 마저도 금지하면서 보스니아지역에서 피난 온 세르비아인들에게 코소보에 정착하라고
장려까지 하는데서 시작된다.
회교도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이같은 압제를 견디다 못해 91년 밀로세비치가
금지 시킨 주민 투표를 통해 자치 독립을 천명했지만 밀로셰비티는 코소보에 군대를 파견하고 이 지역을 철권통치하는 것으로 답했다. 1389년 세계를
주름잡던 오스만 터키군이 '한손에 칼과 한손에 코란'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기독교의 땅 코소보를 침공하여 세르비아를 패배시킨후, 500년 가까이 회교도들의 지배에 놓이면서 회교도의 땅으로 변한 코소보에 현재 90%의 회교도인 알바니아계들이 남아있으면서 자신들의 성지를 더럽히고 있다고 생각하는 세리비아의 민족주의에, 말하자면 밀로셰비치는 기나긴 역사의 한풀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회교도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밀로셰비치의 압제에 저항, 봉기하면서
분리독립을 위해 '코소보 해방군(KLA- Kosovo Liberation Army)'을 조직했고 이로써 사태는 점점 심각한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코소보 해방군(KLA)은 세르비아군의 무기고를 습격, 탈취한 무기로 세르비아군에 대항하고 대원들이 리코산 마을을 순찰하던 세르비아 보안군 6명을 살해하는 등
독립을 위해 투쟁했지만 오히려 역부족으로 세르비아에게 인종청소의 불씨만 제공하는 꼴이 되어 그것에 대한 보복으로 세르비아 무장병사들이 코소보 마을의 집들이 샅샅이 뒤져 알바니아계 주민들에게 조준 사격을 가해 주민 74명을 무참히 살해하는 일까지 생기게 했다.
이중에는 성폭행당한 뒤 살해된 젊은 여인, 머리가 뭉개지고 사지가 찢어진
채 죽은 청년, 조준 사격된 어린이등도 포함돼 있다. 독립운동을 시작한 코소보 해방군과 세르비아군의 알바니아계의 가혹한 탄압으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고 나토의 평화안인 코소보 주의 '구유고'때의 자치권을
인정하라는 안을 거부한 유고연방에 대한 나토의 공습이 99년 3월 25일 단행되었다.
오랜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지구평화는 요원한 일이 되고, 인류는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민족은 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할 만큼의 소중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36년간의 식민지를
경험했던 우리에게 500년간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강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민족주의에 대한 신비감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역사의 뼈아픈 기억을 가진 우리에게 지금의 코소보 사태는 어떠한 교훈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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