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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유대인의 미스테리아
유대인 사제들이 면류관을 쓰고 피리와 북 소리에 맞추어 찬송을 하곤 했다는 것, 그리고
황금 덩굴이 신전에서 발견되었다는 것, 그것을 미루어보면 그들이 숭배한 신은
디오니소스였다는 생각이 든다. ---타키투스
전통적으로 예수는 고대세계의 변두리 마을에서, 목동과 어부들 사이에서 성장했던 것으로
그려진다. 예수가 살았다는 시대에 유대지방은 다른 여러 지방과 마찬가지로 상당 부분
고대 그리스 문명에 물들어서 '헬레니즘'화 되어 있었다.
예수가 성장했다는 나사렛은 갈릴리 바다에서 남서쪽으로 19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나사렛에서 한 시간쯤 걸으면 헬레니즘화된 세포리스라는 도시가 나온다. 이 세포리스의
한 극장에는 디오니소스 아름다운 모자이크 작품이 새겨져 있었다. 나사렛에서 동쪽으로
하루쯤 걸으면 중요한 이교도 철학파가 있었던 가다라에 갈 수 있었다. 갈릴리 바다의 남쪽
변두리에 있던 스키토폴리스는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는 디오니소스가 세웠다고 전해질 정도였다.
예루살렘은 라리사와 아스칼론 동 철저하게 헬레니즘화된 도시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들
도시는 로마까지 이름을 떨칠 만큼 유명한 이교도 철학자들을 낳았다. 또, 유대인 경전
<마카베오Maccabees2서>(개신교의 외경)에는 예루살렘 성전 자체가 고대 그리스 신전으로
바뀌어 디오니소스 축제가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사장 야손은 고대 그리스풍의 교육 기관---육체적·지적·영적 교육을 위한 이교도 '대학'-
--을 신전 옆에 세웠는데, 유대인 성직자들은 전통적인 교육 방식보다 이 '대학'의 교육 방식을
더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카베오 2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사제들은 제단에서의 의무에 더 이상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신전을 경멸했고, 제사를 소홀히 했으며, 율법을 무시한 채 시작 종소리만 울리면 서둘러 레슬링을 배우러 달려갔다.
유대인 문화와 이교도 문화의 이 같은 통합은 수세기 동안 진행되었다. 고대 유대인의 역사는
여러 민족에게 반복적으로 정복을 당한 역사이다. BC 922년에는 이집트인들에게, BC 700년에
는 아시리아인들에게, BC 586년에는 바빌로니아인들에게, BC 332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하의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BC 198년에는 시리아인들에게, 마침내 BC 63년에는 고대 로마인
들에게 정복되었고, AD 112년에 유대라는 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이처럼 정복을 당하면서 유대인들은 불가피하게 정복자들의 문화를 흡수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예가 되어 지중해 전역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디아스포라(바빌론 유수 이후 팔레스
타인 이외의 지역으로 흩어진 유대인 무리)' 를 형성했다. 자유를 얻은 유대인들은 이교도
문명과 동화되었고,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은 후에도 대다수는 돌아가지 않았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 전통과 이교 신앙을 통합했다. 예컨대 바빌론에서도
유대인들은 바빌론의 점성술을 받아들인 것으로 유명하다. 최대 조상인 아브라함 자신도
점성술 교리에 통달한 바빌론의 유대인이었다. 철학자 아리스토불루스와 필론, 역사가
요세푸스와 같은 유명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점성술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유대인들은 이교도의 미스테리아도 받아들였다. 바빌론에서 그들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인
담무스(타무스)의 미스테리아 의식을 거행했다. 구약에는 선지자 에스겔의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여호와의 신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러 보니, 거기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에스겔 9:14).
성 제롬의 말에 따르면, 베들레헴에는 시리아의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인 아도니스의 신성한
숲이 있었다. 시리아 공회당의 벽에는 유대교의 전통 상징과 더불어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상징이 그려져 있는 게 발견되었다. 소아시아에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 여호와를 프리지아의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인 사바지우스와 동일시했다. 유대인들은 BC 139년에 로마에서 추방
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사바지우스 미스테리아를 로마에 퍼뜨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이 신은 '이아오Ioa'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아오는 곧 디오니소스이다. 예루살렘
에서 6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고고학적 유적지에서 동전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이 동전에는
여호와가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의 창시자로 묘사되어 있다. 정말이지, 플루타르코스와
디오도루스, 코르넬리우스 라보, 요하네스 리두스, 타키투스등 고대의 수많은 저술가들이
유대인들의 신을 항상 디오니소스와 동일시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평했다.
고대의 모든 신들 가운데 디오니소스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신과 가장 집요하게 동일시되었다.
유대인들의 신앙이 이교 신앙과 영적으로 전혀 달랐다는 관점은 후대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조작해 낸 것이다---그리스도교가 이교 신앙과 전혀 다름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사실상 과거의 유대인들은 이교도 문화에 대해 서로 다른 여러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일부는 전통적 근본주의자였고 일부는 열정적으로 이교도 방식을 채택했다. 대부분은 그들
자신의 전통과 이교 신앙을 종합해서 장점을 취하려고 했다
세계적인 도시 알렉산드리아
유대 문화와 이교도 문화의 대통합이 이루어진 것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4세기 말에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유대인들은 그를 도와 첩자나 용병
구실을 했다. 그들은 그 대가로 알렉산드로스가 세운 알렉산드리아라는 새 도시에 사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래서 대규모의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세련된 이교도 문화의 혜택을 누렸다. 이때 알렉산드리아 초기 인구의 반은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처음부터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적인 도시였다.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한 방대한 제국 내에서는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쓰였고, 온갖 민족이 알렉산드리아로 건너와 새로운 다민족 도시의
시민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첫 지배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집트에 작은 그리스를 건설하기로
결심했다. 계몽적인 그의 정치 철학에 따라 도서관과 박물관이 들어섰고, 고대세계의 지식이
체계적으로 수집되었다. 절정기에는 도서관에 수십만 권의 장서가 보관되었다고 한다.---
50만 권이 넘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알렉산드리아는 고대세계에서 아테네를 능가하는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는 새로운 절정기를 맞게 되었다.
엘레우시스에서의 대규모 행렬은 더욱 웅장하고 극적인 장관으로 발전했으며, 여러 하늘과
땅과 지하세계를 상징하는 여러 층의 무대에서 연극 공연이 이루어졌다. 아테네에서와 달리
알렉산드리아에서 치러진 미스테리아 의식은 비밀 엄수 규칙이 지켜지지 않아서, 누구나
신비의식mystical rites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처럼 세계적이고 관용적인 환경 덕분에
자연스럽게 여러 영적 전통의 결합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난 세련된 이교도 문화의 매력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전통 유대인들은 이교 신앙에 물들 것을 염려하여 대중적 연회, 축제, 연극공연 등에 참석하는
것을 종교적 금기로 삼았다. 당연히 그들은 위대한 문명의 일원이 되는 엄청난 이점을 포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금기를 어기고 이교도 사회에 동화되고자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또, 너무나 짧은 기간에 그들의 모국어를 버리고 공용어인 그리스어를 받아들였다.
유대 지방에서 이집트로 끊임없이 이주자들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아람어와 헤브라이어가
계속 사용되기는 했지만, 지배적인 언어는 그리스어였다.---도시 안에서 다른 민족과 거래를
할 때뿐만 아니라,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도 그랬다. 공회당의 예배 때와 집안의 예배 때에도
그리스어가 사용될 정도였다.
BC 2세기 무렵에 이러한 문화적 동화 과정은 더욱 심해져서 유대인 극작가 에스겔은 유대인의
출애굽기를 에우리피데스 스타일의 그리스어 희곡으로 고쳐 쓸 정도였다! 유대 지식인들은
조상의 신앙과 타민족의 지혜가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중재하려고 했다. 그들은 유대 경전을
문자 그대로의 역사로 보는 근본주의적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신비한 비유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영향을 받아 유대 철학이 활짝 꽃을 피웠고, 모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빛'으로
알려지게 된 알렉산드리아의 랍비들을 대단히 자랑스러워 했다.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의 신 여호와를 그들 부족의 신으로 보았다.---항상 유대인을
도와서 압제자를 무찌를 수 있도록 해주었고, 이교 신앙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보편적인 하나님으로
보았고, '지고의 하나the supreme oneness' 인 플라톤의 신과 동일시했다.
그들이 전통을 버렸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이교도 철학이 원래
유대인의 것이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헤르미푸스는 피타고라스가 유대인들에게서
지혜를 얻었다고 단언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발전시켜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세의 지혜를 차용했다고 선언했다. 아르타파누스는 이집트
미스테리아의 창시자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와 그리스 미스테리아의 신비한 창시자인
무사이우스를 모세와 동일시한 허구 역사서를 집필했다.
터무니없는 발상인데도, 그런 발상 덕분에 유대인들은 수월하게 민족적 자긍심을 확보하면서도
동시에 이교도 이웃의 철학을 수용해서 세계시민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헬레니즘화된 유대 경전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지혜가 유대인에게서 비롯했다고 주장한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이교 신앙과 유대교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종교 전통의 일부라고 보았다. 그런 주장 덕분에
이교도 철학과 개념을 유대교에 도입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2세기에 헤브라이어 경전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 아래서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도 수많은 새 경전을 만들었는데, 이 경전에는 유대인과 이교도의 사상이 혼합되어
있었다. 이 경전들은 유대 구약과 그리스도교 신약 사이의 언약이라는 뜻에서 '간약적
(間約的)intertestamental' 저술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는 여호와와 제우스를 동일시하며,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의
조화를 주장한다---두 민족이 올바른 삶에 대해 같은 문화와 같은 견해를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또 다른 경전인 <마카베오 4서>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문헌은 경이로운 모순, 혹은 좋게 말하면 모순의 해소를 보여 준다. 표면적으로는 헌신적인
정통파 유대인이 안티오코스 4세(BC 169년에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했으며 유대교률 박해한
시리아의 왕 : 옮긴이 주)를 공격하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이 문헌은 그리스 사고의 훈련을
받은 철학자가 현란한 그리스어로 쓴 것이며, 소크라테스의 논법을 사용하고 있다.
<에녹의 서>도 역시 이교도의 주제를 차용한다. 이들 경전은 고대 유대인의 조상인 에녹이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헬레니즘화된 유대인에 의해 에녹은 위대한 신화적 인물로 탈바꿈
해서, 전설적인 이집트 현자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와 동일시되었다. 한 학자는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경이적이고 초월적인 시적 비전을 지닌 이들 문서에는 범민족적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이 이야기를 고대세계의 다른 위대한 신화와 연계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간약적 '지혜의 문헌'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고, 다만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만을 구분한다. 이 문헌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는 영적 신앙을 강조하며,
여호와를 유대인의 작은 신이 아닌 전 세계의 주로 묘사한다.
유대인들은 이교도의 <시빌의 신탁>을 각색하기도 했다. 수백 년 전의 여자 예언자로 숭배된
시빌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원래의 이교도 신탁은, 시빌이 황홀경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BC2세기에는 알렉산드리아의 한 유대인이 유대인 시빌을 만들어서 완벽한 6보격(步格)
운율의 그리스어로 그녀의 신탁을 새로 썼다.
유대인의 간약적 문헌에서는 고대 이교도가 그랬던 것처럼 흔히 지혜를 소피아로 의인화한다.
현대의 고전학자가 주석을 단 것처럼 이 문헌은 '전부 그리스어로 씌어졌으며, 정통 유대교
신학과는 전혀 다르다'. 유대인의 소피아는 이미 BC 3세기경부터 나타난다. 이때 소피아는
구약 잠언에서 여호와의 배우자로 묘사된다.---여호와께서는 소피아를 시켜 땅을 세우셨다.
(잠언 3:19)
3세기가 지난 후 이교도 미스테리아 교리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을 철학자 필론은 모세를
'전혀 오점이 없으며 청렴결백한 부모의 아이'로 묘사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다른 모든
존재의 아버지인 하나님이며, 그의 어머니는 이 세계를 존재케 한 소피아이다'.
영지주의자들처럼 필론에게도 소피아는 '로고스의 어머니' 였다. 이교도 철학자들과, 간약적
저술의 시대에 살았던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과, 후대의 영지주의자들이 모두 여성 신격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다는 것은 이들 세 전통이 서로 연계되어 진화해 왔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모세의 미스테리아
그 후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지혜와 자신들의 영적 전통을
통합하고자 한 게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를 통해 예견한 유대인 버전의
미스테리아를 만든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요한 단서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론(BC20-AD40)이 남긴 저술
속에서 발견된다. 필론은 매우 존경 받은 유대인 지도자이자 유명한 철학자였다. 필론은
유대교에 헌신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헬레니즘화되어서 이교도 철학에도 심취해
있었다. 그는 '자기들과 같은 세계적 도시에 사는' 세계시민들의 범민족적 형제로 간주한
철학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찬사를 바쳤다.
그러한 사람들은 비교적 소수이기는 하지만, 세상의 수많은 도시에서 지혜의 불씨를 은밀히
지켜 왔다. 우리 인류의 마음에서 미덕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도록.
필론은 고대인들 가운데서도 특히 피타고라스와 그의 추종자 플라톤을 숭배했다. 그는 두
사람을 '위대한', 그리고 '가장 신성한자'라고 일컬었다. 그리스도교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필론을 '피타고라스 학파'로 보았다. 피타고라스의 다른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필론은 음악과 기하학, 점성술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그리스 문헌에도
능통했다. 여느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필론은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신비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필론은 유대인 경전이 은밀한 영적 가르침을 암호화한 비유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그가
'미스테리아의 방법' 이라고 부른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모세와 출애굽기의 '역사적' 이야기가
하나님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는 신비한 은유라고 해석했다.
이 여행의 안내자는 이교도에게 친숙한 '로고스' 라는 인물이다. 미스테리아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필론에게도 로고스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다. 미스테리아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필론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경이가 인간을 하나님과의 신비한 합일 체험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필론은 미스테리아의 철학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입문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입문자는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이교도 입문식을 치르지 말라고
촉구했다. 자신들만의 유대인 미스테리아를 가졌기 때문이다---다름 아닌 모세의 미스테리아를!
필론의 말에 따르면, 모세는 위대한 창시자였고 '신성한 교사이자 신성한 의식의 히에로판테스'
였다. 필론도 스스로 유대인 미스테리아의 창시자이자 히에로판테스라고 자칭했다.
그는 '가장 신성한 입문식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입문자들에게 전수할 비전(秘傳)'에 대해
썼다.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처럼 그의 입문자들은 비밀 종파를 형성했고, 도덕적으로 순결할
것이 요구되었다.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처럼 그들은 입문하지 않은 자들에게 '참으로 신성한
미스테리아'를 누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혹시 무지한 자가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 전해서 어리석은 대중들이 미스테리아를 비웃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필론에게 입문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세계는 '정화된
자들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순결하고 무구한 본성을 묵상할 수 있으며,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였다.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처럼 입문식의 목적은 종교적
황홀경 체험을 통해 입문자가 신적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이었다.
미스테리아와 마찬가지로 필론은 엔토우시아제인enthousiazein(신적 영감 상태), 코루반티안
Korubantian(신비한 열광 상태), 바큐에인bakeuein(신적 광기 상태), 카테케스타이Katechesthai
(신들림 상태), 에크스타시스ekstasis(황홀경) 등에 대한 글을 썼다. 그는 유대인 미스테리아
입문자의 황홀경을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 입문자의 신성한 열광과 예언적 영감상태에
비유하며 이렇게 썼다.
자아로부터 벗어나 디오니소스의 신비의식에서 신들린 자와 같이 신성한 열광에 휩싸이고,
신들림을 통해 예언적 영감을 얻도록 하라. 마음이 입을 다물고, 다만 거룩한 열정으로
황홀경에 휩싸이는 그러한 순간이야말로 네가 물려받은 유산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그리스도교인?
로마 교회가 고대 문헌을 대규모로 파괴할 때, 필론의 저술은 역사의 이상한 변덕 덕분에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4세기의 교회 선전자 유세비우스 주교는 필론의 저술에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구성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거의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필론의 책 가운데 테라페우테
Therapeutae('병을 고치는 자들'이라는 뜻 : 옮긴이 주)라고 불린 유대인 집단에 관한 구절
하나에 매달렸다. 그 집단의 봄철 축제에 대한 필론의 언급이 그리스도교의 부활절 축제를
연상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유세비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한 가장 초기의 그리스도교인
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테라페우테의 고위층이 최초의 주교와 사제·부사제 등이며, 이들이야말로 최초의
그리스도교인이라는 데 아무도 이의가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물론 봄철은 이교도가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의 축제를 연 때였다. 그러니 유세비우스의 가정은 옳지 않다. 필론은 AD 10년의
테라페우테에 대해 기록했는데, 그때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때보다 20년쯤 앞선다.
그러니 유세비우스의 주장과 달리, 테라페우테는 초기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유세비우스의 말은 어느 면에서 옳다고 할 수도 있는데, 물론 그건 그가
의도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니까 테라페우테는 분명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유대인 버전을
행한 유대인 집단---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와 예수 이야기를 합성했다고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에서 제창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집단---이었던 것이다.
테라페우테는 유대인 집단이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의 오순절
축제를 열었고, 안식일을 신성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방식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공동체와 닮았다. 그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테라페우테는 흰옷을 입었고, 모든 재산을 공유
했으며, 여자들을 평등한 존재로 인정했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열정을 지녔고, 남자와
똑같이 사려 깊은 선택을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필론은 <관조적 삶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테라페우테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다. '관조적 삶'
이란 고대세계에서 피타고라스 학파가 그들의 금욕적 공동체 삶의 방식을 묘사할 때 사용한
말이었다. 실제로 필론은 테라테우테가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든 완벽한 선을 공유하며,
그리스와 비그리스 세계 온갖 곳에서 발견된 인종' 이었다고 기록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필론은 '피타고라스 학파'로 알려져 있었고 피타고라스 추종자들만의
신비한 수학적 언어로 테라페우테에 대한 글을 썼다.
특히 그들은 일곱 번째 주말마다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7일이라는 단순한 날만이
아니라, 7의 제곱이 되는 날도 신성시했다. 7이 영원한 처녀처럼 순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이 일곱 번째 주말의 축제는 쉰 번째 날에 여는 가장 큰 축제의 서곡이었다. 50은 수
가운데 가장 신성하고 자연스러운 수이며, 완벽한 직각삼각형의 각 변의 거듭제곱의 합과
같다. 그들에게 50은 우주 원소들의 생성 기원으로 간주되었다(완벽한 직각삼각형은 각 변의
길이가 3:4:5가 되는 직각삼각형을 말한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직각을 이루는 두 변의 제곱이
빗변의 제곱과 같다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신성시했다 : 옮긴이 주).
고대 이교도 현자들처럼 필론은 종교를 잘못 배운 자들이 반지성적인 허례허식을 숭배하는
것을 배척했다. 그리고 그는 테라페우테처럼 관조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참된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을 칭송했다. 이교도 입문자들처럼 테라페우테는 그들의 <성서>가 은밀하고
신비한 의미를 감추고 있는 비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성한 저술의 주석은 비유로 전달된
내적 의미를 다룬다'고 그들은 믿었다. 필론은 이렇게 썼다.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그들은 공부에 몰두한다. 그들은 신성한 저술을 펼쳐 놓고, 조상들의
암호를 해독하고 철학화하며 시간을 보낸다. 축어적 의미의 말은 이면적 의미에 의해서만
밝혀지는 상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론은 특히 테라페우테 구성원들의 신성한 소명 의식을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의 입문자들이
체험하는 신비한 열정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그들이 신성한 소명에 몸을 바치는 것은 어떤 관습이나 타인의 충고, 혹은 부탁 때문이
아니다.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처럼 그들은 다만 거룩한 사랑으로 몸을 바치는
것이다. 그들은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을 보게 될 때까지 신명을 불태운다.
테라페우테의 의식에서 남자와 여자들의 무리가 따로 모여드는 것을 묘사하며
필론은 이렇게 썼다.
디오니소스 의식에서 사람들이 순수한 포도주를 마시듯이 두 무리는 신의 음료를 마시며,
따로 향연을 연 후 함께 모여서 두 무리가 한 목소리로 찬송한다. 그것은 홍해에서 바다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후 홍해 제방에서 유대인들이 한 목소리로 찬송했던 것을
본받은 것이다.
테라페우테의 무리를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 입문자에 비유하면서 동시에 홍해의 제방에서
찬송한 모세의 추종자들에 비유하고 있는 필론의 위 문장을 보면, 이교도와 유대인 전통이
어떻게 종합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런 문장으로 미루어 볼 때 일부 유대인들이 진정으로
이교 신앙을 포용했고, 그것을 유대교와 결합시켜 고대미스테리아에 대한 유대인 버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 우리는 예수 미스테리아를 능히 만들 수 있었던 공동체를 발견한 셈이다.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대로 이교도와 유대인 문화의 위대한 용광로였던 알렉산드리아 근방에서 살았다
필론은 이렇게 썼다.
그들 무리는 이집트의 모든 지방에서 살았지만, 특히 알렉산드리아 둘레에 많이 모여 살았다.
모든 면에서 가장 진보한 그들은 식민지 개척자로 이 땅에 왔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목적에
가장 적합한 곳을 찾아서, 알렉산드리아 남쪽 접경 지역의 마레오티스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꽤 높은 지대에 홰를 틀고, 테라페우테의 뿌리를 내린 것이다.
마레오티스 호수는 헤로도토스가 500년 앞서서 도착해 수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시리스
미스테리아 의식이 거행되는 것을 목격한 곳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곳이다.
필론의 말에 따르면 테라페우테도 '신성화된 삶의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자들이었다. 또 그들
이전의 이교도 미스테리아 현자들처럼, 그리고 그들 이후의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인들처럼
그들은 '선보다 더 낫고, 하나One 보다 더 순수하며 더 오래된 것'을 직접 체험하고자 했다.
결론
유대인들이 이교도 미스테리아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처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지만,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문화만 없었다면 그것은 그리 특별한
일로 여겨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유대 문명을 주변의 이교도 문명과 반대되는 별개의 문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문화 때문이다. 지중해 세계의 다른 모든 문화는 미스테리아를 포용했다.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이 범민족적 신비 신앙을 유대 신앙과 통합하게 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우리가 발견한 증거 일부를 되돌아보자.
이교도와 유대인 문화는 역사 시대 내내 서로 만나서 통합되어 왔다.
예수가 살았던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갈릴리는 헬레니즘화된 도시들로 에워 싸여 있었고,
그 도시들은 이교도 철학자들의 고향이자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의 중심지였다.
바빌론에서 유대인들은 이교도 점성술에 능통한 것으로 유명했고, 담무스(타무스) 미스테리아
의식을 거행했다. 다른 곳도 아닌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미스테리아 의식을 거행했다는
것이 구약에도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와 오시리스-디오니소스를 관련시켰고,
사바지우스 미스테리아를 유포한다는 이유로 로마에서 추방되기까지 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어를 일상어로 채택했고, 그리스 '대학'에 다녔으며, 출애굽기를 그리스
스타일로 고쳐 썼고, 이교도 철학의 방식대로 유대인 경전을 번역했으며, 유대인 문화와
이교도 문화를 결합한 새로운 경전을 쓰기도 했다.
유대인 철학자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구약의 지혜를 물려받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교 신앙과 유대 신앙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종교 전통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인 필론은 자신이 이교도 미스테리아를 닮은 모세 미스테리아의 히에로판테스
라고 주장했다.
테라페우테는 유대인 피타고라스 학파였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처럼 테라페우테는 그들의 신화가 은밀하고 신비한 진리를
암호화한 것이라고 믿었다.
필론은 테라페우테를 디오니소스 추종자에 비유했다.
테라페우테는 알렉산드리아 인근의 호숫가에 살았는데, 그곳은 오시리스 미스테리아 의식이
수백 년 동안 거행되어 왔던 곳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테라페우테는 원시 그리스도교인들이었을까?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후기에
이교도 신비 신앙의 중심지였고, 유대 지방을 떠난 유대인이 가장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또, AD 첫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그노시스의 최대 스승들의 고향이기도 했다. 클레멘스의
말에 따르면, 가장 초기의 신약인 마가복음이 씌어진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그곳이야말로
예수 미스테리아가 창조된 곳이 아닐 수 없다.
고대 미스테리아의 유대인 버전을 발전시킨 테라페우테는 논리적으로 어떤 단계를 거쳤을까?
그들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 신화를 받아들여 예수라고 불리는 유대인 신인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까? 그 답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미스테리아
의식을 거행했다는 것은, 테라페우테와 같은 유대인 집단이 예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데
한몫 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한다.
미스테리아의 신비한 지혜는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에 암호화되어 있었다. 유대인 양식의
특별한 미스테리아를 만들어낸 후, 위대한 고대 신화까지 수용한다는 것은 분명 거역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출애굽기를 에우리피데스 스타일의 그리스어 희곡으로 새로 썼다.
그렇다면 에우리피데스의 <바카이> 또한 유대인 양식으로 새로 쓰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바카이>에서 디오니소스가 테베에 도래하듯이, 유대인 희곡에서 그 신인이
예루살렘에 도래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이제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가 이제까지 살펴본 모든 증거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명제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몇 가지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예수 이야기가 신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이 역사로 해석되기에
이르렀을까? 어떻게 바울의 신비한 그리스도가 나사렛 출신의 남자로 탈바꿈하게 되었을까?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에 대한 이교도 이야기들은 그것이 실제 사건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 이야기는 왜 문자 그대로 실제 전기라고 믿어지게 되었을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 신화 자체를 분석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 신화가 어떻게 창조되었고, 어떻게 역사화 되었는지를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그 신화의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는 너무나 명백한 나머지 쉽게 지나쳐 버렸던 것을 재구성해
보는 것이다. 유대인 미스테리아 신화의 주인공은 혼성적인 인물이다. 예수는 앞서 존재한
두 신화적 인물---이교도 신인과 유대인 메시아---의 종합인 것이다
첫댓글 교주님
지리산 끝자락에 다녀왔다가 본것이 있었습니다.
삼성궁.................
교주님 이곳에서도 윗글 처럼 아직도 괞찬은 곳이 많습니다.
일대 종사 : 빙혼
분파................................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