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음악감상실 스크랩 정선 아리랑
백합 추천 0 조회 38 10.02.26 10: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북한에서의 정선아리랑   
  
      정선아리랑 1

      강원도 금강산 일만 이천봉 팔만 구암자
      유점사 법당뒤에 칠성단 돋우모고 팔자에 없는
      아들딸 낳으라고 백일정성 석달열흘 기도 노구매
      적성을 말고 타관객리 외로운 사람 괄시를 말라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봉우리마다 해금강 밑으로
      히끗히끗비는데 우리님 신관은 어데가고 아니 보이나

      임자당신 날 싫다고 울치고 담치고 열무김치 소금치고
      배추김치 소금치고 칼로 물빈듯 삭돌아 서드니
      이천 팔백리 다 못가서 날 찾노라

       * 『조선고전문학선집』(제2권), 평양문예출판사 , 1983.
 

      정선아리랑 2

      꽃본나비 물본 기러기 탐화봉접인데
      님자 보고서 그저 갈소냐

      송죽같은 이내 몸이
      님자로 하여금 단풍이 들었네

      앞남산 적설이 다진토록
      뒤동산 행화춘절아 왜 모르나

      출문망 출문망하니
      원쑤오동 상상지라

       * 『조선고전문학선집』(제2권), 평양문예출판사 , 1983.


      정선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오-

      강원도금강산일만이천봉팔만구암자법당우에다가
      네가 불공-말고-타관객지 난- 사람 네가 괄세를 말아-

      임자당신이날버리고가실적에앞벽치고뒤벽치고
      열무김치소금치고배추김치초치고칼로물벤듯이 그냥 싹돌아서더-니
      춘천 팔십리 다못가고 왜또 날찾아왔-소-

=================================================


강원도 정선지방에서 불려지는 민요. <아라리>라고도 한다. 사화나 당쟁으로 인하여 낙향한 선비들과 불우한 사람들에게 애창되었다. 모심기·김매기를 하면서도 부르지만 노동과 상관없이 폭넓게 부른다. 노랫말의 내용은 남녀의 사랑·이별·신세한탄·시대상·세태풍자 등이 주류를 이루고 사설 중에 정선에 있는 지명이 빈번하게 등장하여 지역적 특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형식은 2행 1연의 장절형식(章節形式)에 여음이 붙어 있다. 가창방식은 혼자 부르는 독창의 경우가 많으나 여러 명이 부를 때에는 메기고 받는 선후창형식(先後唱形式)으로 한다. 곡조는 메나리토리로 가락이 늘어지고 애조를 띠며 콧소리가 섞여 있다. 이 민요는 <강원도아리랑>에 연이어서 부르는 노래이다. 긴 사설을 빠른 가락으로 촘촘히 엮어가다가 뒷부분에서 높은 소리로 한 가락 길게 빼는 민요로서, 원마루에서는 무장단 자유리듬으로 사설을 부르다가 후렴에서는 느린 세마치로 바꾸어 부른다. 후렴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라는 부분은 구슬프고도 아름다워 듣는이로 하여금 애처러움을 자아내게 한다. 이 민요는 태백산맥의 동쪽 전지역과 한강 유역에서 광범위하게 불려지고 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기 위하여 전국의 장정을 끌어다 부역을 시켰을 때, 태백산에서 나무를 나르던 정선 사람들이 불러서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정선(旌善)아리랑은 ‘아라리’라는 이름으로 정선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역, 충북지역, 경기도 동부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구비전승 되어온 민요다. 정선아리랑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인 조선시대 초기(朝鮮 初期)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가 망한 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다짐하던 선비들이 송도(松都)에서 은신 하다가 그 중 7명이 정선(지금의 남면 거칠현동 居七賢洞)으로 은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들은 지난날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忠節)을 맹세하여 일생 동안 산나물을 뜯어먹으며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입지 시절의 회상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심정(心情)을 한시(漢詩)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부르곤 했다. 이들이 지어 비통(悲痛)한 심정을 담아 부르던 시는 마을 사람들이 부르던 소리 가락에 실려 애절함을 더해갔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던 조선 후기부터 아리랑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자 명맥을 이어온 정선의 소리에 “아리랑 아리랑...”이라는 음율을 붙여 부르면서 ‘후렴구’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선아라리’ 또는 ‘정선아리랑’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사람들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民族)의 서러움과 울분을 애절한 가락에 담아 불렀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이 분단되자 반공(反共)의 분위기를 드러냈고,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아 부르기도 했다.

 정선아리랑에는 시대 정신이 그대로 배어있다. 그러면서 남녀간의 사랑과 그리움, 남편에 대한 원망, 시집살이의 서러움, 고부간의 갈등, 산골마을의 지난한 삶, 떼타는 일의 고단함과 유희 등 삶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렇게 구전되어온 정선아리랑은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강원도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유산이 되었고, 체계적인 전승과 보전으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수많은 아리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아리랑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가 사 ==
정선아리랑 가운데 즐겨부르는 긴 아리랑과 엮음 아리랑 가사다. 이 가사들은 정선아리랑의 특성화교육을 위해 정선아리랑학교 교사로 활동하는 소리꾼들이 선정한 가사로 『함께하는 아리랑』(1999, 정선아리랑학교)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정선아리랑의 현장성을 중시하고자 주제별 분류를 하지 않고 가나다순 분류를 했다.


  1. 정선의 산세를 그리며 소리를 길게 끌어가며 구성지게 부른다.
  2. 가사의 음절과 어절 끝소리에 흔들림의 변화를 주어 부르는 연습을 한다.
  3. 다양한 가사의 내용을 이해하고 익혀 부르는 연습을 한다.
  4. 가사를 이어서 부르다가 막힐 때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를 부른다.
  5. 서양 음악의 후렴(refrain)과는 달리 정선아리랑에서 '아리랑~'은 덧붙임(addition) 소리다.   


  1. 정선의 산세를 그리며 소리를 길게 끌어가며 구성지게 부른다.
  2. 가사의 음절과 어절 끝소리에 흔들림의 변화를 주어 부르는 연습을 한다.
  3. 다양한 가사의 내용을 이해하고 익혀 부르는 연습을 한다.
  4. 가사를 이어서 부르다가 막힐 때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를 부른다.
  5. 서양 음악의 후렴(refrain)과는 달리 정선아리랑에서 ?아리랑~?은 덧붙임(addition)소리다. 


*참고문헌

  진용선, 『함께하는 아리랑』, 정선아리랑학교, 1999
 
** 참고적적으로 **

 홈페이지: http://www.arirang.re.kr
 조회: 53697
 
 떼꾼들이 부른 정선아리랑  
 태어나서부터 정선 산골에서 뼈가 굵어온 떼꾼들에게 '아라리'라고 하는 정선아리랑은 노동요이자 생활요로 자리잡았다.
 떼꾼들이 거친 여울을 지나 물살이 완만한 곳에 이르면 따분함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정선아리랑을 부르게된다. 험난한 물길에서 겪는 갖가지 위험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 무사함을 빌며 적막함을 달래기 위해 아라리를 불렀다. 떼꾼들이 즐겨 부르는 정선아리랑에는 위험한 고비에서 벗어나 그들을 억눌러온 현상을 해소하려는 몸부림과 신명이 그대로 표출되어 있다.
    
     황새여울 된꼬까리에 떼를 지어 놓았네
     만지산 전산옥(全山玉)이야 술상 차려놓게

     황새여울 된꼬까리 떼 무사히 지냈으니
     영월 덕포 공지갈보 술판을 닦아놓게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뜬구름만 흘러도
     팔당주막 들병장수야 술판 벌여 놓아라

 떼꾼들이 부르는 아리랑 가락은 강가에 빨래하러 나온 아낙네들이나 밭일을 하는 여자들에게 귀익은 소리가 되었다.
 떼꾼들이 떼를 타고 지나가면 주막의 여자들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술을 팔기 위해 큰 소리로 아라리를 불러댔다.

    지작년 봄철에 되돌아 왔는지
    뗏사공 아제들이 또 니려 오네

    놀다가세요 자다가세요
    그믐 초성달이 뜨도록 놀다가 가세요

 그러면 다시 떼꾼들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받아 불렀다. 머물고 싶은 아쉬움 속에 갈길이 바쁜 떼꾼들은 보다 적극적이고 원색적인 표현의 아리랑으로 화답을 했다.

    제남문 제적은 앞사공이 하고요
    아가씨 중등 제적은 거 누가 하는가

    갈보야 질보야 몸걸레질 말어라
    돈없는 백수야 건달이 애가 말러 죽는다

 영월 삼옥의 제남문이라고 하는 험한 물길은 앞사공이 겨우겨우 지나가는데 아가씨와 몸을 섞는 일은 누가 하냐고 반문을 한다.
 사실 서울까지 힘겨운 여정을 가야하는 떼꾼들에게 강변의 술집과 밥집들은 안식처였다. 떼꾼들이 떼를 강가 나루에 대고 버렛줄로 묶은 후 든 술집에서는 여자들과 어울려 한바탕 아라리를 불렀다. 이 때 부르는 아라리는 집을 떠나 객지로 향하는 쓸쓸함을 원색적으로 불러 맺힌 응어리를 시원하게 풀어놓았다. 또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난봉 기질'이 농익게 배어 외설에 가까운 내용도 많았다. 

    산에 올라 옥을 캐니 이름이 좋아 산옥이냐
    술상머리에서 부르기 좋아서 산옥이로구나

    산옥이의 팔은야 객주집의 벼개요
    붉은에 입술은야 놀이터의 술잔일세

    ㄱ에 ㄴ ㄷ ㄹ은 국문(國文)의 토바침이요
    술집갈보 열 손가락은 술잔 바침일세

    술은야 안먹자고 맹세를 했더니
    술잔보고 주모보니는 또 한 잔 먹네

    못먹는 막걸리 한 잔을 내가 마셌더니만
    아니나던 색시 생각만 저절로 난다

 그러나 떼꾼들이 뗏목을 운송하는 댓가로 받는 떼돈은 "보는 게 임자"라고 했다. 그만큼 셈이 견실하지 못한 떼꾼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작부들과 술집이 많았다. 술과 노름과 여자에 돈이 떨어져버리면 떼꾼들은 넉두리로 아리랑을 불렀다. 이 때 부르는 아리랑은 원망과 후회가 뒤섞여 곧바로 신세타령이 되었다.

    천질에 만질에 떼품을 팔아서
    술집 갈보 치마 밑으로 다들어가구 말았네

    돈 쓰던 남아가 돈 떨어지니
    구시월 막바지에 서리맞은 국화라

    술 잘 먹구 돈 잘 쓸 때는 금수강산 일러니
    술 안 먹구 돈 떨어지니 적막강산 일세

    금수강산이 그렇게 두야 살기나 좋다더니
    돈씨다가 똑덜어지니는 적막강산일세

    국화꽃 매화꽃은 몽중에도 피잔나
    사람의 신세가 요렇게되기는 천만 의외로다

 정선 떼꾼이 오고가던 곳에 심어진 정선아리랑은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는 구성진 가락으로 인해 입에서 입으로 곳곳에 전해지게 되었고, 그곳의 가락과 문화적인 특징이 더해지고 용해되면서 또 다른 아리랑을 싹틔워 놓았다.
 동강 물길은 물론 남한강, 한강 유역과 그 내륙에 이르기까지 '아라리' 또는 '아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선아리랑 가락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영월 단양 충주 여주 등지의 강마을에서는 떼꾼들이 즐겨 부르던 정선아리랑이 보편화된 소리로 자리잡아 지금도 널리 불려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아리랑은 후렴이 변형되거나 생략되면서 유사한 소리로 바뀌어 불려지기도 했다. 단양 지방에서 불리는 '띠뱃노래'는 정선아리랑 가락을 바탕으로 해서 새롭게 생겨난 노래로, 아리랑은 마치 풀씨처럼 그 가락이 머문 곳에서 그 땅의 토양에 맞게 또 다른 소리로 태어나기도 했다.
 정선 뗏목이 당도하던 서울의 나루터 주변까지 아라리나 아라리 가락과 유사한 소리가 많다는 사실은 떼꾼들이 정선아리랑을 전파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음을 증명해준다.                                

 다른 게시물 
번호 제 목 첨부 작성일 조회 DN
 
7   일제강점기 때의 정선아리랑    11/03-17:37  59982  
 
6   굿판에서 불리는 정선아리랑   10/10-18:47  56468  
 
5   떼꾼들이 부른 정선아리랑    10/10-18:36  53697  
 
4   북한에서의 정선아리랑   10/10-18:33  50987  
 
3   중국에서의 정선아리랑   10/10-17:40  46406  
 
2   가려뽑은 정선아리랑 가사  정선아리랑_가사.hwp(37KB)  10/10-02:07  11993  3676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