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4.05일 날씨가 너무 좋았다.
화창한 날씨가 나를, 내 가슴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가기도 뭣해서 딸아이를 통닭으로 꼬셔서 산행길에 올랐다.
고향 뒷산에 모악산이 있다. 호남의 명산이다.
김제 평야를 아우르고 호남의 든든한 기둥이 되는
어머니같은 산이라 하여 이름도 모악(母岳)산이란다.
남북으로 능선이 서 있고 동쪽으로는 완주군, 서쪽으로는 김제군이다.
전주(완벽한 고을)는 완주(완벽한 고을)에 둘러 쌓여 있는데
모악산은 전주에서 10여분 거리라서 제법 사람이 똥파리처럼 꾄다.
왜 똥파리냐구? 똥파리처럼 사람이 많이 다니니까 그냥^^.
전주로 이사 나오니까 고향집은 잘 들르지가 않는다.
모악산. 내 어릴 적 꿈같은 놀이터이었다.
봄에는 칡뿌리를 캐먹고,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에서 멱감다가 가재를 잡아먹고
가을에는 배고픈 시절에 온갖 먹을 것을 제공하였고
겨울에는 어른들 꿩사냥, 토끼몰이를 따라 다녔다.
그런 모악산에 약 20여년 만에 정상을 향하여 출발하니 가슴이 설레인다.
내가 처음 정상(680미터)에 올랐을 때가 7살이었는데
마침 딸아이도 7살이 되어 무슨 운명과 같은 인연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모악산 입구는 유원지 개발한답시고 야산과 전답을 밀어 붙여
온갖 상가들이 가득 차 있고 주차장은 이미 차가 빼곡하게 가득 차있다.
전에 없던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도 서 있고 "고은"씨의 시도 붙어 있다.
입구를 넘어서니 "김양순" 할머니 묘지가 있다.
동곡 하주(불교도 아니고 그냥 시골 사람들이 공양 드리는 곳에서 제례를
주관하던 사람)로서 시집도 안 가고 95~6세 쯤 돌아가셨다는데 눈물이 괸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동곡이라는 절에 이름을 등재하여 무병 장수를 기원한다.
물론 나도 동곡 절 어느 한귀퉁이에 이름이 새겨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대대로 신도회장을 지냈는데 난 아니겠지.
이미 동곡이라는 곳은 "단학선원"에 팔려서 옛 흔적도 사라졌다고 하던데..
단학선원의 창시자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고 해서
그곳은 마치 미국 아리조나 세도나처럼 성지와 같은 곳이다.
내가 이처럼 인생이 이상하게 된 것은 그 분을 고교 2학년때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인생이 아닌 다른 인생을 살아 갈 것인데 말이다.
죽음, 건강, 선도, 신선, 증산도(그때는 아주 미미한 조직이었음), 불로장생,
단전호흡, 기, 허무, 깨달음 등등 그 나이에 그런 것들이 신기하기만 하였고 그래서 동곡이라는 곳에서 여름 한 달 동안 귀동냥으로 배우고 듣다 보니
내 초라한 인생의 갈림길이 정해져 버렸다.
할머니 비석에 마음의 합장을 하고 작은 개울을 건너니 선녀 폭포가 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던 폭포는 사라지고 그냥 흔적만 남아있다.
아마도 대홍수때 계곡의 바윗돌들이 밑으로 내려와 폭포자리를 메꿨나보다.
아이는 지친 기색도 없이 잘도 오른다.
난 이미 호흡이 가파지기 시작하고 있는데 아이는 끄덕도 없다.
역시 젊은(?)것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부지런히 올라가다 보니 동곡사와 대원사의 갈림길에 나온다.
혼자만 같으면 약간은 험한 동곡사로 가고 싶고 궁금하기도 했는데
대원사 길로 접어들었다.
아이가 땀이 나서 계곡에 잠시 앉아 머리의 시원한 계곡물로 씻어낸다.
아이가 갑자기 진지하게 나를 사랑스럽고 조용하면서 은근하게 불러보더니
"아빠 도대체 통닭은 언제 먹는거야?"
"조금만 참아. 우리 정상에 올라가서 우리 둘이서 맛있게 먹자. 알았지?"
"응, 근데 정상이 뭐야? 왜 모악산을 간다고 해놓고 정상을 갈려고 그래?"
"정상은 산꼭대기를 말하는 거야. 일단은 우리 힘차게 갑시다. 따님아!"
계곡 능선을 올라서 한참을 가다보니 대원사가 나타난다.
국민학교 4년 동안(5학년때 전주로 전학감) 소풍을 갔던 곳인데 지금 보니 왜소한 절이다.
그때는 전교생이 모여서 밥 먹고 노래도 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세월무상이다.
대원사는 진묵대사가 한동안 수행을 했던 곳이란다.
제법 오래된 절인데 왜란때 불타고 해서 여러번 중창불사를 하였다는데
지금도 조그만 조계종 산하의 조그만 사찰에 불과하다.
절을 나와 가파른 능선에 올라선다.
나 어렸을 때도 제일 힘들었던 곳이었는데 내심 아이가 걱정된다.
가파른 능선을 오르려니 나도 죽겠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자꾸
쉬어 가자고 보챈다. 난 이럴때는 잔인한 아빠이다.
"너 빨리 올라가서 통닭을 먹을래? 천천히 쉬어 가면서 이따가 먹을래?"
"아빠 그래도 쉬어 가자, 너무나 힘들어 죽겠단 말이야!"하면서 울상이다.
물도 아껴 먹으라고 물먹는 법을 가르친다.
"물을 바로 생키지 말고 입안에서 잠시 머금고 있다가 서서히 넘겨야 목이
덜 마르다" 하니까 곧잘 흉내를 한다. 그러다 저러다 능선을 기어서 오른다.
산에는 분홍빛을 품어내는 진달래가 여기저기서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아이는 산 구경은 뒤로하고 자꾸만 쉬어 가자고 보챈다.
나도 죽겠는데 아이도 힘들겠지. 그러나 내가 누구냐? 빙혼 아니든가!
"세령아 토끼하고 거북이가 경주하면 누가 이기지?"
"거북이" "왜"
"거북이는 천천히 가면서도 쉬지 않고 가니까 낮잠 자는 토끼를 이겼지"
"그럼 세령이는 거북이편? 토끼편?"
"거북이편"
"좋았어, 그럼 다시 출발이다. 우리 거북이편 파이팅!!!"
"아빠 근데 난 토끼도 좋아"
"아니야 넌 이미 거북이가 좋다고 했으니까 출발해야 해.
자 통닭을 위하여 우리 거북이처럼 쉬지 말고 가자!"
"그럼 이제는 한번도 안 쉬고 올라 갈거야?"
"아니 이따가 조금씩만 쉬면서 가자 알았지"
기어기어 가다보니 수왕사가 나타난다.
물이 많아서 수왕사라 했는데 어찐 된 일인지 물이 찔찔찔이다.
줄을 서서 20분 가량 기다리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출발.
이제부터는 경사가 더욱 심하다. 그래도 어쩌랴!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아이에게 통닭이 멀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재촉하면서 오르다보니
드디어 주능선에 올랐다.
건너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멀리 전주가 보인다.
고향 마을도 보이고 어렴풋이 고향집도 보인다.
"세령아! 저기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시던 집이야!"
"어디?" " 바로 저기 산 옆에 있잖아"
"난 안 보이는데?" "그것은 네가 마음씨가 나빠서 그래"
"아하..그래? 아빠 나도 이젠 조금 보인다. 나 이제 착하지"
장군봉에 오르니 여기저기서 등산객들이 음식을 먹고 있다.
사진 찍어 준다는 말에 얼른 포즈를 취하더니 이내 가방을 뒤진다.
"너 뭐해?"
"우리도 이제 통닭을 먹어야지. 다른 사람도 밥 먹고 있잖아"
숫제 울다시피 애원을 한다. 하기야 배도 고플때가 되었겠다.
한적한 곳을 찾아서 마침내 통닭을 개봉하였다.
난 양념통닭에 맥주 2캔. 아이는 후라이드 치킨에 콜라 한병.
똑같은 통닭도 이름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서 먹는다.
상쾌한 바람을 맞으면서 대자연에 파묻혀 사랑스러운 아이와
통닭을 먹는 기분이란 그야말로 캪이다. 짱이다.
다음에 또 산을 오자는 말에 아이는 연신 말도 없이 먹기에 바쁘다.
점심을 마치고 정상곁에 오르니 거대한 송신탑이 철조망에 둘러 쳐져 있다.
정상은 못 가고 철조망을 따라서 하산 길로 접어든다.
아이는 신나게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도 잘도 가는 데
난 내려가는 길은 이미 다리가 풀려서 후들거린다.
산밑자락에 도달하여 산꼭대기를 바라보면서
어이도 스스로 대견한지 연신 싱글벙글이다.
산속 길을 따라서 내려나기 금산사가 나타난다.
조계종 본사로서 유서깊은 절이지만 다른 절에 비하면 조용한 절이다.
호남에서는 장성 백양사, 해남 대흥사에 못지 않다.
후백제를 창건한 서인석(견훤)이 아들에 갇혀있던 절로 인식되어 있기도 하다.
국보로 지정된 동양 최대의 토불은 금물로 덮여 있어 돈냄새가 물씬 풍긴다.
석가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미친 중들은 그냥 지맘대로 하고들 있다.
아수라 지옥에 떨어질 중놈들이다.
저 돈 가지고 중생구제나 좀 해주지.
삼성각에 가서 로또 당첨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싶은데
차마 속보일까봐 말도 못하고 아이에게 대신 예불을 시켜본다.
아이는 곧잘 한다. 손바닥 벌리는 것도 어디서 배웠는 지 잘도 한다.
아이는 천원씩 넣어 가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절을 한다.
명부전 앞에서는 갑자기 천원은 너무 조금이니까 만원을 달라고 한다.
"너 이따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만원을 시주하고 싶어?"
자본주의 아이답게 아이스크림을 선택하여 난 돈이 굳었다.
4.5일 식목일에 나무는 심지 않았지만
아이와 난 영원한 추억의 나무를 심은 것이 못내 기쁘고
이제는 아이와 등산을 자주 해야겠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던 하루였다.
첫댓글 흠!... 내가 누구냐? 꽃삔이지! 나두 당장 아이들을 데리구 산에 가서 추억의 나무를 심고 올테다. 머리에 꽃삔도 하나 꽂아야지~~
4월 27일 지리산 바래봉 철쭉제를 한다고 합니다. 바래봉은 전혀 험하지 않으니 아이도 충분히 갈 수 있답니다. 인파는 많겠지만 그 또한 즐거움이 될 수 있으니 한 번 가보시길 추천합니다.
아주 잼나게 보았어요...아빠 못지않게 지혜롭고 귀여운 딸내미가 몹시 사랑스럽군요...엥? 그럼 아빠도 귀엽단 말인가???? 몰것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