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엠비에는 대정 몽생이덜이 젤 많다.
이번 소개하는 상모리가 고향인 상훈이, 하모리가 고향인 태길이와 호남이,
무릉1리가 고향인 용비와 그리고 저 세상으로 떠난 가파도 출신 수옥이 까지...
대정이란데가 이렇다.
인성, 안성, 보성을 일컬어 대정골이라 칭하고
상모, 하모를 모슬포라 하는데 또 여길 아울러 통칭하여 읍5개리라 한다고 한다.
또한 무릉 1, 2리와 신흥 1,2,3리 그리고 영락리를 합쳐서 서6개리라 한다고 하니
우리같이 외방사람덜은 외우려해도 외워질 턱이 없다.
송악산 입구, 형제섬이 보이는 상모리 바닷가
상모리(上摹里)
제주도 서쪽 , 아름다운 분화구와 해안절경을 자랑하는 송악산을 품고 있는 제주도 서남부의 관광요충지인 마을. 산이수동 포구에서 유람선이 출발하고 멀리 가파도와 마라도가 보이는 천혜의 관광자원을 가진 21C 제주관광의 미래를 간직한 곳이다.
앞으로 송악산 관광지개발예정지로서 더욱 많은 편익시설과 휴양시설이 들어서면 이곳을 찾는관광객 들에게 더 많은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게 할 것이다.
해안가 낚시터에서 사계절 갯바위 낚시를 즐길 수 있고, 일제시대 군사유적이 산재해 있어 레저 및 교육적으로도 가치있는 마을이다. 갯바위에서 해녀들이 직접 잡은 싱싱한 해산물과 구수한 인심을 맛볼 수 있다.
마을약사
상모리는 하모리와 함께 모슬포에 속하였으며 처음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제1모슬포리, 제2·3모슬포리라고 하였다가 상·중·하 모슬포리로 개칭 되었고, 그 뒤 1749년경 중모슬포리는 폐지되었다.
상모리의 설촌은 처음 '들메기(정지논 서북)'에서 취락이 형성되었다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모슬봉앞 절왓에 두 번째로 취락이 형성되고, 세 번째로 현재 위치로 남하하여 먼저 대동과 서상동(2리)이 형성되고 차차 남쪽으로 확장되어 중하동, 서하동(3리)이 생기고 한편 동쪽으로는 이교동과 산이수동(1리)이 형성되었다.
잠시 동안 알오름에도 마을이 생겼다가 일제시대에 폐동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상·하모리로 개칭하였고 1914년 5월 15일 소유주를 등기하도록 고시하여 토지 세부측량을 실시하면서 마을 경계가 확정되었다. 1985년 7월 1일 남제주군 동리명칭과 구역에 관한 조례 개정으로 상모 1·2·3리로 분리하였다.
지명유래
상모리(上摹里), 하모리(下摹里)
모슬포는 상모 1리 동북쪽에 위치한 들메기와 하모 3리 서쪽에 위치한 논물거리에 처음으로 부락이 형성되어 모슬개(모슬포)라고 부르다가 동서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제 1모슬포리, 제 2모슬포리, 제 3모슬포리로 분리하였다. 영조 25년(1749)경에 제 1, 2, 3을 상, 중, 하로 고치고 포(浦)를 줄여 상모슬리(上摹瑟里), 중모슬리(中摹瑟里), 하모슬리(下摹瑟里)로 분리하였다.
상모슬리(上摹瑟里)는 서쪽으로 절을 거쳐 남쪽으로 점차 발전되어 갔고 하모슬리(下摹瑟里)는 동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상모슬리(上摹瑟里)와 하모슬리(下摹瑟里)사이에 중모슬리(中摹瑟里)가 있었다. 나중 상모슬리와 하모슬리에 분산 통합 되었으며 한일합방후 '슬(瑟)' 자가 줄어져 상모리, 하모리로 개칭되었다.
알뜨르
·위치 : 대정읍 상, 하모리
모슬봉 앞의 상모리와 하모리의 들판을 말한다. 대정 지방에서는 북쪽 산간부락이 있는 곳을 웃뜨르라고 하며 남쪽 모슬봉 앞들을 알뜨르라고한다. 이 지방에서는 북쪽을 '우'라고 하고 남쪽을 '알'이라고 하는데 우와 알은 위와 아래의 제주어이다. 이들(평지)은 제주도 굴지의 넓은 들이기 때문에 일본은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 하기 위해 비행장을 설치한 바 있다.
극대왓
·위치 : 대정읍 상, 하모리
상모리와 하모리 사이에 경계표시로 세운 극대가 있다고 하여 이루어진 이름인데 극대는 돌로 깍아 만든 장승의 한가지이다.
걸매물
·위치 : 대정읍 상, 하모리
상모리와 하모리 두 마을 길이 두갈래로 남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서로 만나 한줄기로 합해진 곳에 이루어진 못인데 걸매물이라는 이름은 이러한 지리적 조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걸매물의 <걸>은 개울 또는 도랑의 옛말이고 <메>는 메다로서 막히다의 뜻이다. 위에서 뻗어내리는 두 갈래 길옆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막혀 모여서 이루어진 못으로 개울, 도랑물이 막힌 물이라는 뜻이다.
짐개동산
·위치 : 대정읍 하모, 동일리 경계
동일리와 하모리의 경계에 있으며 김가(金家)가 살았다 하며 사투리로 김가를 짐개라고 부른데서 연유한다.
모슬봉
·위치 : 대정읍 상모리, 하모리, 보성리, 동일리
모슬포에 위치하였다 하여 모슬개 오름이라 부르다 차츰 변하여 모슬봉이라 불렀다.
모슬포(摹瑟浦)
현재의 상모리, 하모리는 옛부터 모슬개(모실개)로 불리웠으며 모슬은 모래의 제주방언 "모살"에서 변한것이고 '개'는 포구를 뜻하는 <浦 >로, 모슬은 한자음을 빌어 <摹瑟 >로 표기한 것이다.
대정(大靜)
·위치 : 대정읍의 행정구역 명칭
조선 태종 16년(1416년) 縣(현)의 설치와 함께 붙여진 이름으로 당시에 <크게 고요하고 평온하다 >는 뜻의 한자 표현을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문헌상의 기록은 찾을 길이 없다.
조배기왓
·위치 : 대정읍 상모리
상모리에 위치해 있으며 흉년에 식량이 떨어지자 조배기 한 그릇에 밭을 팔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진적이동산
·위치 : 대정읍 상모리
상모리에 있는 진적이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하여 이루어진 이름.
개쟁이왓
·위치 : 대정읍 상모2리
옛날 개장국 한 그릇에 밭을 바꾸었다 하여 개쟁이왓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제동산(西東祭)
·위치 : 대정읍 상모 3리
마을 안녕을 위하여 제사 지내는 곳으로 지금은 마을 집들이 들어 서 있다.
진동산(丈棟山)
·위치 : 대정읍 상모3리
동산이 동서로 길다하여 긴동산이란 뜻으로 부르고 있음.
.
문서왓·文書
·위치 : 대정읍 상모 3리
밭을 팔고 살 적에 최초로 문서로 작성 하였다 하여 문서왓으로 부르고 있다.
매안진돌·세매자
·위치 : 대정읍 상모 3리
매가 하늘에 떠다니다가 돌 위에 자주 앉으니 그 일대를 매안진돌이라 부르고 있다.
닥밭
·위치 : 상모리 대정초등학교 뒤
·유래와 현황 : 이 일대에 닥나무가 숲을 이뤘던 데서 연유한 이름
옛날 이 지역들은 이 나무를 이용하여 종이를 생산하는 등 생활용품을 제작하는데 활용했다한다
대낭골
·위치 : 상모리 개다리구석 서쪽
·유래와 현황 : 이 골짜기에 대나무가 숲을 이루었던 데서 연유한다. <대낭 >은 대나무의 제주어이다.
도롱곶
·위치 : 상모리 3105의 1번지 일대
·유래와 현황 : 도랑이 깊이 패인 지형에 잡목림이 울울창창하게 우거져 뒤덮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롱 >은 「도랑」의 변형이며, <곶 >은 <고지 > 등과 아울러 깊은 숲 따위를 일컫는 제주어이다.
들메기/들먹이
·위치 : 상모리 1085번지 일대
·유래와 현황 : <모슬포리 > 즉 지금의「상모리」설촌터,들판의 한 조각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 처음 주민이 이주해와 터 잡고 살기 시작했으나 샘이 없어 서쪽으로 이동해 갔다고 한다. 지금은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비께통코지
·위치 : 상모리 산이수동 바다
·유래와 현황 : 「산이물」 동쪽으로 바다를 향해 비죽이 내민 곶으로 이 주변 바다에 수염상어가 서식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비께 >는<빅게 >등과 아울러 수염상어의 제주어 이다.
산이물구석원
·위치 : 상모리 산이수동 앞 바다
·유래와 현황 : 「캔돌목」과「산이물개」사이 구석진 바다에 원시어로의 한형태인 돌담을 쌓아 간만의 차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포획하는 시설인 <원 >을 설치한 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살레덕코지
·위치 : 상모리 산이수동 바다
·유래와 현황 : 「산이물」동쪽에 찬장처럼 생긴 곶(串)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바로 정면에 있는 마라도의 「살레덕」을 향해 뻗어나간 곶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전한다, <살레 >는 찬장의 제주어이다.
솔대왓
·위치 : 상모리
·유래와 현황 : 마을의 허한 방위를 보완하고자 세우는 솟대가 섰던 밭으로 이를 <솔대 >라고도 하며, 또한 같은 목적으로 탑을 쌓기도 한다. 솟대는 방위가 허한 곳을 막아 보할 목적으로 소위 터진방의 동산에 돌무덤을 쌓고 그위에 높다랗게 대를 세운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마을마다 <솔대 >를 세우는 방법이 다르다.
본디 솟대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위해 그 마을 입구에 높이 세우던 붉은 장대이며 그 끝에 푸른 칠을 한 나무로 만든 용을 달았으며 민간에서는 다음 해의 풍년을 비는 뜻으로 볍씨를 주머니에 넣어 높이 달아매었다. 이러한 풍습의 기원은 소도(蘇塗)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원래 목적에서 다소 변용되어 마을을 수호하는 보편적인 상징을 띄게 되었다
용다리창
·위치 : 상모리 산이수동 전경초소 앞
·유래와 현황 : 안덕면「사계리」 산방산 밑 용머리에 연이은 지대로 용의 다리에 해당하는 바닷가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창 >은 바위투성이 갯가 혹은 포구를 일컫는 제주어 <성창>의 준말이다.
거욱
대정읍 모슬포 우체국앞에 거욱이가 있는데 상모리, 하모리의 경계표시를 나타내기도 하고 마을의 허한 방위를 막아 마을을 수호하는 주술적 기능도 수행한다. 이 석상은 두 기가 서로 다르다. 1기는 모난 기둥돌(角柱)이며, 다른 1기는 벙것을 쓴 사람 형상으로 가슴에는 임금 王자 아니면 干자가 새겨져 있고 주먹 쥔 손에 힘을 쥐고 서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상모리, 서러워 더욱 아름다운 이름
비극의 현대사, 그 긴 터널을 지나온 마을
장태욱 시민기자 <제주의 소리 2008. 9. 29>
제주섬의 모습은 서남단 끝에서 남쪽으로 돌출되어 있는데, 그 돌출부의 동쪽 해안에 '상모리'라는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행정구역상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로 되어있다.
최근에는 송악산과 산방산 일대의 자연절경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두 산을 연결하는 해안벨트는 전국에서도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이 와중에 상모리 산이수동 마을과 그 동쪽 사계리를 잇는 도로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고, 이런 유명세를 배경으로 이 해안도로 주변에는 펜션과 음식점들이 줄을 잇고 있다.
▲ 산이수동마을 상모1리 해안가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상모리유적지가 있다. ⓒ 장태욱
이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도로 중간 지점에 상모리선사유적지를 알리는 표지가 있다. 이 일대에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유적이다.
주민들이 정착하기 까지 이 유적지에서는 구멍무늬토기·돌아가리토기·붉은간토기 등과 더불어 가락바퀴·어망추·뼈바늘 등이 출토되었다. 상모리 일대에서 출토된 이들 유물들은 한반도에서 출토된 6세기 청동기 시대 유적들과 일치한다. 따라서 아직까지 제주도 유적에서 청동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이 유적을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분류한다.
이 유적지에서는 또, 원통형의 돌도끼·대팻날·끌·숫돌 등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는 이 시기에 이곳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주거지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6세기경 사람들은 이 주변의 평야와 해안을 터전삼아, 이곳에 주거지를 만들어 정착했던 것이다.
▲ 공렬토기 상모리유적지에서 발굴된 토기다.(국립제주박물관에서 촬영) ⓒ 장태욱
모슬포리의 설촌은 고부(古阜) 이씨(李氏) 제주입도(濟州入島) 시조(始祖)인 이세번(李世蕃)의 현손(玄孫) 이상길(李尙吉)이 마을에 거주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상길의 출생연도가 1640년이고, 그의 부(父) 이광춘(李光春)의 묘(墓)가 일과리(日果里)에 있는 것으로 감안하면, 그는 일과리에서 태어나 부친 곁에서 살다가, 17세기 중반에 모슬포리로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모슬포리는 처음에 서쪽에서부터 제1모슬포리․제2모슬포리․제3모슬포리로 분류하였다가, 이들이 상·중·하 모슬리로 개칭 되었고, 그 뒤 1749년경 중모슬리는 폐지되었다. ‘상모리’라는 이름은 일제시대에 상모슬리에서 '슬(瑟)' 자가 떨어져 만들어진 이름이다.
상모리는 현재 이교동과 산이수동을 포함하는 1리와, 대동과 서상동을 포함하는 2리와, 중하동과 서하동을 포함하는 3리로 나눠져 있다. 2007년말 기준으로, 상모1리에 316가구 844명이, 2리에 721가구 1983명이, 3리에 415가구 1089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상모리 마을 남쪽에는 '알뜨르'라고 불리는 너른 평야지대가 있다. '알'은 아래를 의미하고, '뜨르'는 마을 혹은 동네를 의미한다. 주민들은 알뜨르 평지에서 마늘․감자․보리 등을 재배하며 생활을 영위한다. 이 농작물중에서도 특히 대정지역에서 생산되는 난지형 마늘은 연간 생산량이 5000톤에 이르러 전국 생산량의 10%를 차지할 정도로 그 비중이 높고, 그 품질 또한 우수하다고 평이 나있다.
▲ 일제가 만든 비행기 격납고 1943년에 일본군이 만든 군사시설이다.
당시 20동을 지었는데, 현재 19동이 남아있다. ⓒ 장태욱
알뜨르, 현대사 비극이 압축된 역사박물관
알뜨르 군데군데에는 원통모양의 구조물이 눈에 보인다. 2차 대전 말기인 1943년에 일본군이 만든 비행기 격납고다. 이 격납고는 공군 비행기를 점검 혹은 수리하거나 보관하는 장소로 쓰였다. 당시 일본군은 이 일대에 격납고 20동을 지었는데, 그중 현재 19동이 남아있다.
비행기격납고가 있는 곳에서 해안에 가까이 이르면 넓은 초지가 펼쳐진다. 경작을 포기해서 방치된 농지로 보이는데, 가까이 가보면 일제시대 만들어진 알뜨르비행장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 비행장은 1930년대 중반에 일본군이 해군비행기지로 활용했던 것으로, 지금은 대한민국 공군 소속으로 되어 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 알뜨르비행장 1930년대 일본군이 해군비행장으로 건설한 비행장이다. ⓒ 장태욱
알뜨르 비행장에서 동쪽으로 500미터 쯤 되는 거리에 그 규모도 매우 초라하지만, 전국에 그 이름만은 널리 알려진 오름 하나가 있다. 한국전쟁당시 예비검속자에 대한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던 현장인 섣알오름이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경당국은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예비검속자들을 색출했다. 당시 당국은 모슬포 경찰서 관할지역에서 색출된 예비검속자들을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와 한림지서 관할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했다. 그리고 이들을 1950년 7월16일 새벽에 20명을, 8월 20일에 새벽 2시경에 한림수감자 60여명을, 같은 날 새벽 5시에 모슬포 수감자 130여명을 송악산 '섣알오름'에서 총살하고, 그 시신을 현장에 집단 암매장했다.
1956년에 이르러서야 유가족들은 시신을 수습하여, 한림에 수감되었던 자들의 시신은 금악리 '만벵디 공동묘지'에, 모슬포에 수감되었던 자들의 시신은 섣알오름 근처에 있는 상모리 586-1번지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址)에 안장하였다.
섯알오름 학살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경 당국이 예비검속자를 수감한 후,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이곳에서 총살했다. ⓒ 장태욱
당시 예비검속에 의해 수감되고 재판도 거치지 않고 총살을 당한 희생자 유족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과 더불어, 연좌제에 의해 활동에 제약을 받는 고통까지 감수해야 했다. 섣알오름에서 목숨을 잃은 예비검속자들과 그 유족들이 겪은 비극은 해방이후 한국전쟁 당시까지 국가가 공권력의 이름으로 국민들에게 행사했던 수많은 폭력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섣알오름에 서서 당시 참극이 일어난 현장을 보고 있노라니, 어디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당시 일어난 일들을 연상하기 때문에 환청이 들린 것으로 생각했는데, 가만 들어보니 진짜 총소리다. 알뜨르비행장 인근 사격장에서 군인들이 사격연습을 하는 소리였다. 1950년 그날 들었던 총소리를 생각해도 소름이 끼칠만한데, 주민들은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저 총소리를 참고 들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 백조일손지지 섯알오름에서 총살당한 주민들 중, 모슬포 절간 창고에 수감되었던 자들의 유골이 뭍인 곳이다.
뒤에 보이는 산이 산방산이다. ⓒ 장태욱
비행기 격납고와 알뜨르비행장과 섣알오름과 백조일손지지가 모두 반경 1km이내에 있어서, 알뜨르는 마치 우리 현대사의 고통을 전시해놓은 역사박물관과도 같다.
조화가 장난친 아름다운 곳, 송악산
알뜨르를 지나 백호 임제가 일찍이 ‘참으로 조화가 장난친 곳’이라고 감탄한 바 있는 송악산을 올랐다. 모슬포의 동쪽 해안선은 남쪽으로 길게 뻗어 곶을 이루고 있는데, 송악산은 그 곶 위에는 솟아 있다. 마치 상모리의 평야가 남쪽으로 내닫다가 바다에 다다를 즈음에 언덕을 넘은 후, 땅이 끊겨 바위 절벽을 이루는 형세를 띠고 있다.
▲ 송악산, 바다에 돌출된 곶 위에 봉우리가 솟아 있다. ⓒ 장태욱
송악산입구에서 바다를 끼고 안쪽으로 들어서면 해안에서 쉬지 않고 파도를 맞으며 송악산을 떠받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눈에 들어온다. 그 병풍 같은 절벽위에 평평한 대지가 펼쳐지는데, 그곳에서 사람들은 농사도 짓고, 말도 방목한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옛 화가가 그린 무릉도원에 들어온 듯했다.
상모리를 방문한 참에 전국농민회 제주도연맹 허창옥 위원장을 만났다. 허위원장은 상모리1리에 속한 이교동에 살면서, 밭농사를 1만평 정도 짓고 있다. 전에는 대정농협의 감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허 위원장과 오래전부터 농민운동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마을을 방문하고서야 만남이 성사되었다.
▲ 말, 송악산 입구에서 말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멀리 보이는 섬이 형제섬이다. ⓒ 장태욱
“벼랑 끝 농촌 살리려면 지자체가 친환경농업 육성해야”
허위원장에게는 부인과 더불어 1남 2녀 가족을 거느린 40대 가장이다. 생활비도 적잖이 들 것으로 생각되는데, 농사를 짓는 입장에서 경제적 형편이 어떤지 궁금했다. 이 궁금증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10년 전에는 20kg들이 요소비료 한 포 가격이 5000원 정도였는데, 지금은 2만원이 넘습니다. 영농비가 4배 정도 상승한 셈입니다. 그런데 농산물 가격은 10년 전과 같거나 그보다 못한 형편입니다. 저도 작년까지는 농사를 2만평정도 짓다가 최근에는 영농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규모를 줄였습니다."
농가부채가 농촌의 심각한 사회문제이기에, 미안함을 무릅쓰고 허위원장 개인이 지고 있는 농가부채가 어느 정도인지 물었다.
"연말이 되면 그해 수입과 지출을 비교해보는데, 한 번도 수지를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작년에도 지출이 소득을 크게 앞질렀습니다. 이러다보니 21년 농사 끝에 빛만 2억이 남았습니다. 제가 가진 농지 3000여 평과 집을 팔고 부채를 갚으면, 총 자산이 제로가 될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농지를 다 팔아도 부채를 갚을 수 없는 농민들이 제 주변에 너무나 많다는 점입니다."
갈수록 부채가 불어나는 상황에서도 농사를 지어야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 허창옥 위원장 상모1리에 거주하면서 농사를 짓고 있다.
올해 전국농민회 제주도연맹 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 장태욱
"농업은 우리의 식량주권을 지키는 일이고, 우리의 자연을 지키는 일이며, 농업과 연계한 다른 산업들을 지키는 일입니다. 제주도 용암동굴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제주의 자연환경이 푸르게 보존되었을 때만 유지 가능한 것입니다. 농촌이 황폐화되고 농지가 모두 골프장으로 덮이면 세계자연유산은 물 건너가는 겁니다."
농업과 농촌을 지켜야하는 일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하지만 농민들이 수지를 맞추지도 못해 빛에 허덕이는 상황에서는 이웃들에게 농사를 짓자고 권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과제에 대해 허위원장은 친환경농업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농약․비료의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폭등하고, 이 비료와 농약에 의해 땅과 농민이 모두 병들어가는 상황입니다. 그간 농사를 지어 터득한 결론은 친환경이 아니면 다함께 몰락한다는 사실입니다."
허위원장은 아직 국내 농산물 시장에서 제대로 된 유통구조도 마련되지 있지 않고, 친환경농산물 시장도 너무 작아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고 말했다.
"농산물 총 수요에서 친환경농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5%이하입니다. 그런데다가 친환경농산물 유통을 담당하는 업자들이 모두다 규모가 영세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생산한 친환경농산물을 처리 난을 겪는 실정입니다. 만약 친환경농산물을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에 상장하면, 헐값에 낙찰되고 맙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합니다."
친환경농산물유통을 기존의 유통시장에만 맞길 수는 없다는 얘기다. 음식점이나 학교 급식에서는 재료비를 아끼기 위해 값싼 농산물만을 선호하다보니, 친환경농산물의 수요가 늘어나지 않고 유통구조도 제대로 서지 않는다며, 이에 대한 지자체의 역할을 강조했다.
"지자체가 청정 환경과 자영농을 모두 지키겠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전향적으로 나서야합니다. 조례로 각 농가에 친환경농산물을 비율을 할당하고, 학교 급식․호텔․골프장․대형음식점에서 이를 의무적으로 사용하게 해야 합니다. 제가 조사해보니 뉴질랜드에서는 이미 이런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시일이 아주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농업이 살 길은 대부분 농가가 친환경농산물을 생산하고, 대다수 국민이 친환경농산물을 먹는 데에 있습니다."
이 일대는 사람이 살기 힘들어 '못살포'라 부르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이 일대를 군사 기지화 하면서 주민들을 수탈했고, 4.3의 광풍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국가 공권력이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제 비료․농약 값이 폭등하고 물가가 폭등해서 영농수지를 맞추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WTO체제가 출범했고, 거기에 이어질 수많은 FTA가 농민들을 다시 고통의 구렁텅이로 내던지기 위해 벼르고 있다. 한 번도 터널을 빠져나와보지 못한 이 곳 농민들에게도 고난의 끝이 있을까?
송악산 자락에서 바라 본 산방산
송악산
대정읍 상모1리 산이수동에 소재한 송악산은 그 모양이 다른 기생화산과는 달리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모여 이루어졌다. 해발 180m인 주봉(主峰)에는 둘레 500m, 깊이 80m 가량되는 분화구가 있으며 그 안에는 지금도 검붉은 화산재가 남아있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해안절경과 주봉(主峰)을 중심으로 서북쪽에 펼쳐 진 넓고 평평한 초원지대는 장관을 이룬다.
또한 바닷가 절벽에는 일제 때 일본군이 뚫어 놓은 동굴이 있어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지만 지금은 넓은 초원의 장관과 바닷가의 기암절벽을 구경하기 위하여 많은 관광객과 해안가에서 바다 시를 즐기려는 강태공 들이 많이 찾아드는 유원지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픈 역사 간직한, 아물지 않은 흉터
[제주의 오름기행 ]기생화산체의 비운 송악산
<제주의 소리 2006. 6. 25> 김강임 시민기자
▲ 송악산 해안가의 진지동굴 ⓒ 김강임
'파도가 부딪혀 울린다'는 오름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바다만 바라본다. 구름을 이고 있는 산방산도, 이어도를 꿈꾸는 형제섬도, 하늘을 비상할 듯 웅크리고 앉아있는 용머리 해안까지도 바다 속에 잠겨 있는 것 같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바람이 일었다. 제주 사람들은 "대정고을에만 가면 바람이 많다"고들 하지만 왜 이곳에 이렇게 바람이 많은지는 잘 모른다. 그렇다보니 제주바다를 통째로 안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상모리 해안도로에 바라보는 송악산은 마치 바다위에 떠있는 섬 같았다. 깎아 세운 절벽 위에 길이 보이고 봉긋봉긋 솟아있는 봉우리는 섬의 지붕처럼 보였다.
▲ 사계리 해안도로에서 바라본 송악산 ⓒ 김강임
기암괴석을 연상케 하는 송악산 해안절벽에도 파도가 일었다. '파도가 부딪혀 울리는 오름' 송악산. 그래서 송악산은 '절울이 오름'이라 불렸다. 어떤 이는 송악산을 SBS <올인>촬영지로 기억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MBC <대장금> 촬영지로만 알고 있다.
이렇게 방송을 통해 잘 알려진 송악산에 늘 바람이 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파도가 부딪혀 울리는 소리'그 오름에는 어떤 아픔이 있을까? 송악산 해안절벽의 흉터를 보는 순간, 대정고을에 부는 바람의 특별함을 알게 될 것이다.
▲ 기생화산체의 흔적을 보다 ⓒ 김강임
탄성을 자아내는 기생화산체
제주의 아름다운 비경 뒤에는 꼭 아픔의 역사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아픔의 역사를 딛고 풍경을 말한다. 굳이 송악산의 풍경을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남쪽 끝 섬을 전망하는 마라도와 가파도의 전망대라고도 부른다. 어디 그뿐인가? 오름 중턱에 서면 섬과 바다,푸른 초원이 펼쳐진다. 특히 송악산이 품고 있는 또 하나의 보물은 깎아질 듯 서 있는 기암괴석 전시장이다. 그렇게에 송악산 해안절벽의 풍광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낸다.
▲ 송악산의 전경 ⓒ 김강임
송악산은 표고 104m, 비고 99m, 둘레 3,115m로 제주도 지형과 형성사를 밝히는 심장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질 측면에서 기생화산체로 단성복식 화산이면서 2개의 분화구를 가졌다. 제1분화구는 직경 약 500m, 둘레 약 1,7Km로 응회환분화구 침식이 많이 진전되어 있으며 제2분화구는 둘레 약 400m, 깊이가 69m로 수직경사를 나타내고 있다. 송악산은 응회환과 화구중앙에 분석화구로 구성 당시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더욱이 송악산은 99개의 봉우리를 가졌다고 하며 송악산 능선을 오르노라면 왕릉같은 봉우리의 위엄함을 볼 수 있다.
▲ 해안절벽은 기암괴석의 전시장 같다. ⓒ 김강임
아픈 역사 간직한 해안절벽 흉터
사면이 바다인 제주도. 역사적으로 제주도를 탐했던 나라는 참 많았다. 그 중에서도 제주땅에 가장 많은 상처를 남긴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은 제주의 절경마다 흉터를 남겼다.
▲ 송악산 주변에는 기생화산체의 흔적을 볼 수 있다. ⓒ 김강임
6월 햇빛이 반짝이는 송악산 산이수동 해안은 여느 바닷가 해안이나 다름이 없었다. 바닷물결에 부딪히는 조약돌, 오랜 침식작용으로 굳어진 퇴적층 그리고 파도가 칠 때마다 쌓여가는 모래알. 그러나 시루떡처럼 한켠한켠 쌓아올린 퇴적층에 왜 이리도 상처가 많은지 모르겠다. 이렇게 아름다운 해안풍경에 흉터자국을 남긴 자는 누구인가?
송악산 해안가에 파놓은 인공동굴. 일명 일오동굴이라 불리는 해안동굴은 일본이 판 군사시설이다. 해안절벽의 흉터는 이미 검게 멍이 들었다. 아픈 역사 간직한 화산체의 흉터 앞에서 풍경을 말하자니 말문이 막혔다. 아름다운 풍경 뒤에 숨겨져 있는 아픈 흔적을 보고 있으려니 제주도가 21세기 동북아의 거점도시로 발돋움하는 시대적 현상에 일본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태평양전쟁 당시 제주의 해안에 뚫어놓은 진지동굴은 어뢰와 폭탄이 숨겨져 있었다 하니, 그들이 제주민들과 제주의 자연에 얼마나 혹독한 짓을 했는지 가히 짐작할 만 하다.
▲ 일제시대 해안가에 파놓은 인공동굴 ⓒ 김강임
퇴적층에 쌓여있는 약자의 아우성
그들이 남기고 간 상흔을 차곡차곡 쌓여있는 화산체에 묻을 수 있을까? 해안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를 들으니 '절울이 오름'의 원한과 한이 마치 화산쇄설성의 퇴적층처럼 켠켠이 쌓여 있는 듯 하다.
▲ 비운의 역사를 딛고 바다를 낚고 있는 강태공들 ⓒ 김강임
그렇지만 퇴적층에 쌓여있는 억겁의 한이 언제쯤 풀릴 수 있을런지. 역사를 밟고 푸른 바다위에 낚싯대를 드리우는 강태공들의 손놀림을 보니 '역사는 흘러도 산천은 말이 없다'는 말이 무색하다.
▲ 송악산에서 본 형제섬 ⓒ 김강임
송악산 중턱으로 발길을 옮겨 보았다. 소나무 우거진 오름 기슭을 지나자 화산쇄설물인 송이(scoria)가 상흔의 잔해물처럼 발바닥에서 아우성친다. 오름의 몸통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느낌이랄까, 약자가 겪어야 했던 아픔의 아우성 느낌이랄까, 송악산을 오르다가 뒤돌아보니 손에 잡힐 듯 바다위에 떠 있는 산방산과 형제섬, 그리고 멀리 마라도와 가파도가 보인다. 그리고 망망대해 바다위에는 송악산 해안절벽 아래에서 보았던 흉터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인공동굴이 태평양전쟁의 군사물자 보관의 장소였다는 사실은 치가 떨리는 사실이다. 특히 약자를 짓밟고도 모자라 약자의 영토를 전시물로 이용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행위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조명될까?
▲ 송악산 중턱에는 평화가 살아 숨쉰다. ⓒ 김강임
나즈막한 오름속에 숨겨진 비운이 아픈 역사를 말해주기에 아름다운 풍경속을 걷는 이는 늘 많은 숙제를 가슴에 안고 뒤돌아 온다.
☞ 송악산 찾아가는길 : 제주시 → 서부산업도로 → 덕수마을 → 산방산
육군 제1훈련소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 <사진-문화재청>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 육군제1훈련소는 1951년 창설 이후 1956년 해체되기까지 50만명의 장병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고 전선으로 투입됐다.
제1훈련소는 60만평 규모였지만 지금 남아있는 유적이 별로 없다. 대정여고 역시 훈련소 부지였다. 당시 98의무대 건물이 지금도 남아있어 실습실로 쓰이고 있다. 강병대는 강한 병사를 키우는 터전이란 뜻이다.
모슬포 일제 강점기 때, 군사시설이 많았던 관계로 군사적, 지리적 중요성이 도내에서는 제일이었다. 8. 15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과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점철된 격동기와 4. 3, 그리고 6.25를 거치면서 “모슬포는 군사도시”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되었다.
6.25 발발 후 국군이 패퇴하여 간신히 낙동강 전선에서 버티게 되었다. 이 무렵 임시정부가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밀려오게 되어, 나라를 지킬 병사를 훈련시킬 훈련소가 급히 만들어져야 했다. 육군 제1훈련소가 대구5훈련소에서 제주도로 옮겨와 자리를 잡게되자, 뒤이어 필요한 군 야전병원인 98병원까지 들어서고, 육군 제29사단이 최홍희 준장에 의해 이 곳에서 창성되었다. 당시 전황은 맥아더 사령관이 직접 지휘한 인천상륙작전(1950. 9.15)성공으로 9.28 서울 수복까지 이어져, 90일간의 적 치하에서 서울이 자유를 되찾게 된 후, 국군은 연합군과 함께 북진을 시작하게 된다. 평양 탈환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 우세한 연합군이 지원으로 많은 포로들을 생포 부산과 거제도에 포로수용소에 수용하였으나 포화상태가 되어 이곳 모슬포에도 중공군 포로수용소가 속칭 “만다리 - 아홉동산, 염수굴, 멜케” 이상 세군데나 들어서게 된다.
모슬포의 육군제 1훈련소.1951년 10월 21일 신병교육을 받고 있는 모습
해군도 훈련장정과 전선으로 향하는 장병들을 수송하기 위한 항만 부대를 화순 백사장과 산방산 밑에 이르는 백사장지역에 배치했고, 훈련소에 물자수송을 담당했다.
이와 함께 공군도 공군사관학교를 대정초등학교에 임시로 이전하여 총 1,073명을 교육시켰다.(대정초등학교에 공군사관학교훈적비 설립) 또한 공군은 모슬포 알뜨리비행장을 모슬포공항으로 부르면서 정부고위인사는 물론 외국 귀빈들과 장성급들의 이동과 급한 물자를 수송하였고, 이때부터 모슬포비행장으로 인해 미 공군이 부대를 배치하여 미군들까지 모슬포에 주둔하게된 것이다.
수많은 피난민들과 훈련병 가족들이 연일 물려들어 모슬포를 중심으로 대정면의 상주인구는 무려 7만 이상이나 되었다. 제1훈련소는 경제, 산업, 사회, 교육, 의료, 문화, 예술 등 여러면에서 많은 여향을 끼쳤다.
육군 제1훈련소 관련 간략연표
1950. 6.25 6.25 동란 발발
1951. 3.21 육군 제1훈련소 모슬포에 창설(소장 백인엽 준장)
1952. 8.9 장도영소장 전출
1952. 8.14 오덕준 준장 부임 겸 제주지역위수사령관 취임
1952. 9.15 권준 소장 취임
1953. 1.21 육군제1훈련소를 강병대로 통칭 결정
1954. 7.27 이응준 중장 훈련소장 취임
1956. 1 해체
1950년대 초반 제1훈련소에서 훈련소장이 훈련병들로부터 종합 사열을 받고 있다.
“제주 구 육군제1훈련소 지휘소(등록문화재 제409호)’는 일제강점기에 건립돼 광복 전까지 일본군(오무라부대)이 주둔했고, 1946년 육군 제9연대 창설 및 1951년3월31일 육군 제1훈련소 창설시 지휘소로 사용됐던 역사적 가치가 큰 시설물이다.
현재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는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위치해 있으며,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되는 것은 단층 건물 1동 637㎡과 세면장 1동 117㎡로로 현재 국방부 소유다.
또한 이번에 같이 문화재로 등록되는 ‘제주 구 해병훈련시설(등록문화재 제410호)’은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해병 3기생들이 훈련을 받았던 역사적인 군사 유적으로, 병사(兵舍)와 함께 세면장 등이 남아 있어 당시의 훈련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으며, 한국전쟁과 관련한 상징물로서의 의미가 매우 크다.
특히, 광복 직후 한국군 창설과 훈련 상황 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상모리 해병훈련시설
◆ 상모리 해병훈련소세면장
◆ 상모리 해병훈련소 동측
문화재지정 ; 등록문화재 제410호(2008년 10월 1일)
위치 ; 대정읍 상모리 해병91대대 안 서쪽
옛 해병훈련시설(등록문화재 제410호)은 인천상륙작전에 혁혁한 전과를 올린 해병 3~4기생들이 훈련을 받았던 군사 유적이다. 병사(兵舍)와 함께 세면장, 구령대 등이 남아 있어 당시의 훈련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한국전쟁과 관련한 대표적인 상징물로서의 의미가 매우 크다. 당시 여기서 훈련받은 해병은 3,000여 명이다.
현재 이 건물은 석조 벽만 그대로 남아 있고 지붕은 시멘트 기와로 바꾸었으며 출입문과 내부는 개조하였고 현대식 화장실 등을 갖추어 병영체험을 실시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세면대는 수도꼭지를 현대식으로 바꾸었지만 기본 구조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부 시멘트가 부서진 곳만 보수하였고 지붕을 새로 씌웠으며 주변에는 인도블럭을 깔았다
강병대 군인교회(유치원)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38호 ‘강병대교회’.
제주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에 위치한 이 교회가 건립 52년만에 새로운 복음의 명소로 거듭난다. 이곳은 6·25전쟁 당시 육군 제1훈련소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당시 육군 제1훈련소 제9대 소장으로 부임했던 장도영 육군 소장은 훈련병들의 종교생활을 위해 1952년 9월 185평 부지에 교회를 건립했다. 이름은 강병을 기른다는 의미에서 강병대교회로 지었다.
국방부는 이 일대 75만6000평을 모슬포 군사유적지로 복원한다는 계획을 마련 중이나 현재 남아있는 유적 중 원형이 완벽하게 보존된 것은 강병대교회가 유일하다. 강병대교회는 현재 공군 8546부대가 관리하고 있다. 아담한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어 외형도 볼만하다.
강병대교회 입구에는 “1951년 3월21일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가 정식으로 출범된 이후 훈련장병들의 정신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당시 훈련소장이었던 장도영 육군소장의 협조로 교회가 건립됐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강병대교회는 이후 1965년 공군 제8546부대의 기지교회로 발족돼 부대장병들과 지역주민의 신앙생활 터전으로 자리 잡았다. 또 신우학원을 설립, 불우한 환경에 처한 젊은이들에게 고등교육을 실시했다.
이 교회는 후세들에게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의 쓰라린 과거를 알리는 역사교육의 장으로서 가치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담당목사가 없어 관리가 부실해지면서 성도도 하나둘 떠나버리는 등 한동안 방치돼 왔다. 군목 손지승 목사 부임 이후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교회의 역사성을 눈여겨본 손 목사는 사진자료 수집에 착수, 30여점을 모아 지난 6월30일 역사전시관을 개관했다. 이 사진들은 교회 초창기 모습과 활동을 담은 소중한 역사자료들이다.
역사전시관 개관에는 당시 육군 제1훈련소에서 군복무를 했던 조국선, 허창희 장로의 도움이 컸다. 이들은 지휘관ㆍ군ㆍ교회ㆍ샛별유치원 관련 등 주제별로 사진을 모아줬다. 현재 강병대교회의 성도 수는 군 장병과 가족 등 20여명에 불과하다. 주민 성도는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역사전시관 개관을 계기로 적극적인 전도에 나선다.
국방부와 남제주군이 추진하는 모슬포 전적지 관광자원화 계획에도 적극 참여해 강병대교회의 역사성을 알린다. 강병대교회가 문화관광지로 개발되면 성도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교회의 역사적 중요성을 알 수 있게 돼 복음이 활성화되는 기초가 마련된다.
공군 제8546부대 이재원 군목은 “강병대교회는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단순히 교회사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전쟁을 이기고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에 한국 근대사적 가치도 가진다”고 말했다.
신앙을 담는 그릇으로서 종교건축은 동서양을 통하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문화의 근원이 종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음악이 종교예식의 양념이라면 건축은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사찰, 성당, 사원 등은 동서양 종교건축을 대표하는 것들로 서양의 종교건축이 동양의 그것보다 오래되었는데 그것은 재료에 기인한다. 대부분 건축 재료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것, 그 지방의 기후적 특성을 고려하여 선택하는데 서양에서는 돌, 동양에서는 나무를 많이 사용하였다.
1952년 건립된 강병대교회는 서양 고딕식 건축양식에 충실하려 하였던 흔적이 역력하다. 뾰족 첨탑과 늑골궁륭(아치형 문, 창 등), 스테인드글라스 등은 중세 고딕건축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것으로, 아마 처음 설계와 시공을 담당하였던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것으로 보여진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장에 내보내기 위하여 제1훈련소를 서귀포시 대정읍에 개소하게 되었다. 충남 논산에 있는 훈련소를 제2훈련소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서양 고딕건축을 지향하였지만 건축소재의 선택에 있어서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주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무암 조적조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특이한 것은, 건립 당시에 식재하였을 것으로 보여지는 조경수들이다. 섬회양목, 아왜나무, 배롱나무 등이 의도적으로 식재되었는데, 백일홍이라고 불리우는 배롱나무는 사찰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로 교회건축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물다. 서양건축이 제주문화에 융화되어 형성되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서귀포성당, 한림성당 등이 제주와 융화된 종교건축의 대표적인 것들이었는데 불행하게도 낡았다는 이유로 모두 헐어버리고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콘크리트 건물로 대치되고 말았다. 강병대교회는 건축사적(建築史的)으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픈 역사의 상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건축물로서 보존의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
2회까지 유치원을 강병대에서 직접 운영하다가 3회부터는 교인들이 교회 아래쪽 건물에 샛별유치원으로 개명되면서 지역주민 자녀들도 유치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고, 그후 미군 부대내에 한국 공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야간학교(중학교과정)로도 활용되었다.
제주올레 11코스
모슬포항(하모체육공원)에서 시작하는 11코스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길, 근대사와 현대사가 녹아 있는 올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대의 공군 병력을 집결시켰던 야욕의 현장인 알뜨르 비행장, 4•3사건 이후 최대의 양민 학살이 자행된 섯알오름, 정마리아 성지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증언한다.
모슬봉
11코스의 절정인 모슬봉은 이 지역 최대의 공동묘지가 있는 곳으로서, 제주올레는 이곳 정상부로 올라가는 ‘잊혀진 옛길’을 산불감시원의 조언을 얻어 복원했다. 모슬봉에서는 흔들리는 억새 사이로 드넓게 펼쳐진 제주 남서부 일대의 오름과 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신평-무릉간 곶자왈
신평-무릉간 곶자왈 올레는 제주올레에 의해 처음 공개된 ‘비밀의 숲’으로 또 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길이가 21.5km로 길고, 곶자왈이 포함돼 있다. 곶자왈에서는 길을 잃으면 위험하므로, 리본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걸어야 한다. 곶자왈이 포함된 코스에서는 역방향 올레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정난주 마리아 순교자
유명한 백서(帛書) 사건으로 순교한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마리아),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이기도 한 그녀가 남편을 잃은 뒤 두 살 난 아들을 데리고 하염없이 뱃길을 가야 했던 곳이 바로 제주이다.
제주가 맞이한 첫 번째 신앙인으로 기록되는 정난주는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大靜)에서 관비(官婢)가 되어 천수를 다한 뒤 모슬포(慕瑟浦) 뒷산에 묻힌다.
당당한 모습으로 천주를 증거하고 목숨을 바친 남편은 비록 천상의 영복을 누릴 것을 의심치 않았기에 영광이요 환희이기도 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엄청난 고통과 실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거기에 겨우 두 살 난 젖먹이 아들 경헌(敬憲)을 데리고 떠나는 유배의 길은 너무나도 외롭고 고통스런 일이었다. 죄인으로 제주 땅을 밟은 자신은 물론 두 아들마저 죄인의 자식으로 평생을 멸시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궁리를 거듭하던 정난주(마리아)는 뱃사공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하고 사공은 다시 두 명의 나졸에게 술을 먹여 역시 그들을 매수한 뒤 젖먹이를 추자도 예초(禮草)리 서남단 언덕 위에 내려놓는 데 성공한다. 나졸들은 뱃길에서 아이가 죽어 수장(水葬)했노라고 보고함으로써 이 일은 무사히 마무리된다.
추자섬에 남은 경헌은 오씨 성을 가진 어부의 손에 의해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장성하게 되는데 그 후손이 아직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경헌이 추자도에 떨구어졌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저고리 동정에서 나온 기록에 의해 그가 바로 황경헌임을 알게 됐고 오씨의 아들로 키워졌기에 아직도 추자도에서는 오씨와 황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며 어머니 정씨는 끝도 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 틀림없기에 그의 발자취를 뒤쫓는 순례자의 눈가도 뜨거워지게 된다.
혈혈 단신으로 제주목 관비(官婢)로 신분이 추락하게 된 정씨는 제주의 거친 바람결만큼이나 모진 시련을 신앙과 인내로 이겨 냈다. 뿐만 아니라 풍부한 교양과 뛰어난 학식 그리고 굳건하고 깊은 믿음의 덕으로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그래서 그는 비록 노비의 신분이었음에도 ''서울 할머니''라고 불리며 이웃의 사랑을 받았다.
그 후 37년간을 정씨는 오직 신앙에 의지해 살아가다가 1838년 음력 2월 병환으로 숨을 거두고 이웃들은 그 유해를 바로 이곳 모슬포 뒷산에 묻었다. 비록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는 않았지마 그 삶 전체가 순교자의 생애를 방불케 하는 굳건한 신앙의 증거로 가득했기에 후손들은 그를 순교자의 반열에 올리고 있다. 1994년 9월 5일 순교자 현양 대회 강론에서 김창렬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의 탓으로 이 고장에 유배된 유일한 증거자인 정 마리아 난주님을 순교자라고 말씀드리는 것에 대해 놀라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보편 교회도 피 흘려 순교하지 않은 이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제주 대정 성지 - 유배지에서 부른 신앙의 노래
천주교 신앙이 가장 늦게 전파된 한반도의 남쪽 섬 제주 땅에는 남과 북에 하나씩 사적지가 자리잡고 있다. 정난주(마리아)의 무덤이 있는 ''대정 성지''(남제주군 대정읍 보성동)와 제주의 ''황사평''(제주시 봉문동)이 그곳이다. 이제서야 버젓한 사적지로 조성되어 순례객들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그 동안 방치되어 오다시피 하여 제주의 신자들조차도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 정도였다. 이 사적지들은 제주 복음 전래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제주의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노력하여 일군 탓에 더욱더 신자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
정난주(마리아)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한 순교자 황사영(알렉시오)의 부인으로, 양근 땅 마재의 유명한 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계 상으로 마리아는 순교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조카며 정하상(바오로) 성인의 누님이 된다. 18세가 되던 1790년 무렵 16세의 황사영과 혼인을 한 마리아는 서울 아현의 시집에서 생활하였다. 바로 그 해 진사시에 합격한 황사영은 이승훈, 정약종 등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과거를 포기하교 교회 일을 도왔으며, 마리아는 이러한 남편을 도와 아현의 집을 신앙 공동체로 가꾸는 데 노력하였다.
마리아는 혼인 초기에 자주 자식을 잃은 것 같다. 그러다가 1800년에 아들 경한(景漢)을 낳게 되었으나,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모든 가족이 수난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황사영이 교회 재건을 위해 제천 배론으로 몸을 숨긴 뒤, 1801년 2월 10일경 아현의 가족들은 모두 체포되어 갖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 때 마리아는 특히 어린 경한이를 옥에서 키워야 했으므로 육정에서 오는 또 다른 고통까지 감내해야만 하였다.
7개월 후, 황사영은 배론에서 체포되어 11월 5일(양력 12월 10일)에 능지처참의 판결을 받았다. 이어 11월 7일에는 마리아와 남은 가족들에게도 연좌죄가 적용되어 유배형이 내려졌으며, 시어머니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로, 마리아는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유배되었다. 다행히도 어린 경한은 두 살이었던 까닭에 역적의 아들에게 적용되는 형률을 받지 않고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노비로 유배되었다. 이들이 서울을 떠나 유배지로 향한 것은 11월 8일이었다.
마리아와 어린 경한의 유배지인 제주도와 추자도는 조선의 유배지 중에서도 서울 한양에서 가장 먼 곳이다. 이름하여 유배 3천리다. 훗날의 전승에 따르면, ''마리아는 유배형을 받은 뒤부터 어린 경한이만은 일생을 노비로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사공과 나졸들을 구슬렀다고 한다.
제주도를 향해 오던 중 마리아는 추자도 가까이 왔을 때 뱃사공에게 패물을 주면서 애원하여 경헌이만을 살릴 생각으로 ''경한이는 죽어서 수장했다''고 조정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패물을 받은 사공들은 나졸들에게 술을 먹여 허락을 받고 추자도에 이르렀을 때 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 물산리 언덕빼기에 어린 경헌이를 내려놓았으니, 마리아의 애간장이 얼마나 탔는지 기절까지 했다고 한다. 추자도에 내려오는 전승을 보면 "어린애 울음소리를 듣고 소를 뜯기던 부인이 가 보니 아기가 있어서 집으로 데려와 저고리 동정에 무엇인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펼쳐 보니, 여기에는 부모 이름과 아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후 아기를 그 집에서 기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그 곳에 사는 뱃사공 오 씨(吳氏)였다."고 한다. 이후 추자도 오 씨 집안에서는 황 씨를 기른 인연으로 해서 오늘까지도 황 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초리 산 위에 가면 경헌이의 묘가 있다(김병준, <항사영 처자의 피난길>, 「교회와 역사」 제25호, 1977. 10.).
박해가 끝난 뒤 마리아와 아들 경한은 오랫동안 잊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09년에 제주 본당의 2대 주임 라크루(Lacrouts, 具) 신부가 전교를 위해 추자도를 왕래하던 중에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라크루 신부는 곧 파리의 샤르즈뵈프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의 아들 경한과 그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렸고,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를 전교 잡지에 소개하였다. 그 후 라크루 신부는 프랑스 은인들의 후원금으로 경한의 손자에게 집과 농토를 사 줄 수 있었다.
한편 제주에 도착한 마리아는 그 곳에서 대정군으로 배소가 결정되었고, 관비(官婢)의 쓰라린 유배 생활을 시작하였다. 다행한 것은 관비를 담당하던 관리 김씨 집안에서 마리아의 성품을 높이 사서 어린 아들을 맡긴 일이었다. 마리아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집안의 배려로 점차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명색이 관비의 몸이었으므로 아들을 만나러 추자도로 갈 수는 없었다. 그 후 김씨 집안에서는 마리아를 ''한양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양모와 같이 봉양하였으며, 1838년 2월 마리아가 사망하자 추자도의 증손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그 서한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마리아는 유배된 후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비밀리에 기도 생활을 하였다. 김씨 집안에서는 마리아가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누구도 이를 막지는 않았다. 그의 일상 기도는 30여 년 동안 유배지에서 외롭게 불린 신앙의 노래였다. 마리아는 이처럼 어린 아들을 추자도에 떼어놓았던 생이별의 아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였다.
마리아의 무덤은 김씨 집안 사람들이 모슬봉 북쪽에 있는 속칭 한굴밭에 조성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초, 교회사가 김구정과 김병준 신부는 수소문 끝에 그 무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김씨 집안에서 대를 이어가며 무덤을 돌보아 왔기 때문이다. 이 무덤은 1977년에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되었다가 1994년 제주 신자들의 염원을 담은 ''대정 성지''로 조성되었다. 이제 제주의 신자들은 마리아를 ''백색(白色) 순교자''로 공경해 오고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54호(2000년 3월호), pp.74-76]
▒ 노비(奴婢)
한국 전근대 사회의 최하층 신분인 천민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신분제는 크게 귀족·양인·천민으로 구분되는데, 노비는 사내 종[奴]과 계집 종(婢)을 일컫는다. 조선 초의 노비 수는 성종 때 전국의 호구가 100만 호에 340만 명이며, 노비도 총 150만에 이른 것으로 추산되므로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려 이래로 노비의 소생은 부모 중에 하나가 노비이면 노비가 되게 하였기 때문에 숫자가 늘어났다. 그러나 태종, 영조와 같은 국왕들은 아버지 신분을 따르는 종부법(從父法)이나 어머니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從母法) 등을 적용하면서 노비 수를 줄이고 국가재정의 근간이 되는 양역(良役, 평민들이 국가에 부담하는 역)을 확충하려고 하였다. 그 후 정조의 주도면밀한 준비 하에 순조 1년(1801년)에 공노비가 전면적으로 해방되고, 사노비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886년(고종 23년) 노비 세습제를 폐지하고 노비 소생의 매매를 금지하고 그들이 양인이 될 수 있도록 규정하였으며, 1894년 최종적으로 사실상 노비제를 폐지하였다
▒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신앙의 자유를 강구하기 위해당시 베이징[北京] 주교에게 보내고자 했던 청원서다. 두 자가량 되는 명주천에 썼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하는데, 깨알같이 작은1만 3311자나 되는 방대한 내용의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먼저 당시의 천주교 교세와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활동, 신유박해 사실과 이때 죽은 순교자들의 약전을 기록하고, 다음에는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처형 사실, 끝으로 당시조선 국내의 실정과 이후 포교하는 데 필요한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황사영백서》는 민족 감정에서 나오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한편 교회의 평등주의라는 원칙과 근대적 인권운동의 선구자로서 당시 조선 사회에 미친 혁명적인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일부 사가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황사영은 이 백서가 관변 측에 압수됨으로써 1801년 대역 죄인이 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원본은 현재 로마 교황청 민속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황청에서는 이를 200부 영인(影印)하여 세계 주요 가톨릭국에 배포하였다고 한다.
묘지입구
동영상을 보시려면 상단중앙에 있는 배경음악은 꺼주세요
첫댓글 카페지기님! 정말 고맙습니다!! 내가 태어난 곳을 이렇게 역사적인 기록을 중심으로 상세하게 알려주어서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여야 할지~~~이 자료를 참고하여 새롭게 고향을 생각하고 더 더욱 사랑하도록 하겠습니다!!!
탄생지가 고향이라면...
우리 백작부인도 모슬포가 고향이라 할 수가 있다네.
경주가 고향이신 장인이 육군장교로 근무했던 곳이 모슬포...
백일 쯤 되는 시기에 거길 떠났다고 하더구만.
혹시 우리집에 살았던건 아닐까? 그 당시 군인 장교 가족이 살았었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거든....ㅎㅎㅎ
그게 사실이라면...
참 기이한 인연일 수도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