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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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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수필 산문 및 기행문 스크랩 낙안읍성민속촌(樂安邑城民俗村)/전남 순천
은하수 추천 0 조회 520 16.03.09 08: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낙안읍성민속촌(樂安邑城民俗村) ▶

▲ 낙안읍성 입구인 동문/낙풍루

 

2008년 7월 5일(토) 호남정맥 제18구간(접치~석거리재) 산행을 마치고 산행날머리인 15번국도상의 석거리재휴게소에서 귀가길에 10여분 정도 떨어저 있는 낙안읍성에 들러 성내 주막에서 산행뒤풀이와 점심식사를 하고 읍성 관광을 하였다.

산행과 관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하루였으며, 체류시간이 약 2시간 밖에 되지 않아 여러가지 체험(짚물공예, 길쌈시연 등)과 민속공연 등은 관람하지 못하였지만, 성 전체를 둘러보기에는 충분하였고 동문에서 거행된 수문장 교대 광경까지 구경을 하여 짧지만 알찬 관광이 되었다.

이곳 여행기에서는 낙안읍성내 전경과 음성내 민속 문화재 등을 사진과 함께 약간의 설명을 첨부하여 기재하기로 한다.

입장료는 어른 기준 \2,000 이며, 주차료는 무료이다. 성내에는 실제 주민들이 거주를 하고 있으며 식당(주막)과 기념품점, 가게 등 편의시설이 있다.

 

▲ 동문 앞 매표소의 관람요금표

 

♣ ♣ 낙안읍성(樂安邑城)

*사적 제302호

*소재지: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낙안읍성은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읍성들 가운데 보존이 가장 잘 된 곳으로 특히 성안에는 전통적인 마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읍성은 고려 후기에 왜구의 잦은 침입이 있어 조선 태조6년(1397)에 흙(토성)으로 쌓았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그로 1423년 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쌓아 성의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음성 전체 모양은 네모졌으며 성곽 전체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 3곳에는 성 안의 큰 도로와 서로 연결된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4군데의 치성이 성 밖으로 돌출되어 있다. 성 안에는 100여 가구의 민가들이 있는데 보통 1가구당 2~3채의 초가집과 마당 텃밭으로 구성되었다. 초가집들은 3칸 정도의 일자형 안채와 아래채, 그리고 농기구 등을 보관하거나 외양간으로 겸용하는 헛간채와 재래변소로 이용하는 잿간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대화 물결에 따라 전통적인 마을의 모습이 변향하기 시작하고, 성의 일부가 자연적으로 붕괴, 유실됨에 따라 1983년 사적으로 지정하고 읍성의 종합적인 보존 사업을 시작하였다. 특히 주민들이 살던 초가집들 가운데 보존가치가 높은 9동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하엿고, 일부 변형되거나 낡은 집들은 복원 수리하였다.

관청터에서는 관아와 객사 주변의 담장, 월대, 삼문 등을 발굴, 복원하고 성곽과 문루 등을 복원하였다.

여러 성씨가 모여사는 이 마을 중앙에는 선정을 베풀었던 군수 임경업(1594~1646)의 선정비가 있는데, 지금도 그의 영혼이 이 마을을 수호한다는 전설이 있어 매년 정월 보름에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동문 밖 읍성의 입구에는 낙안향교가 있어 예전에는 이 지역의 교육을 담당했었으나 지금은 당시의 풍속과 생활문화를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있다.

 

 ▲ 성내 마을길

 ▲ 돌담과 초가집

 ▲ 성벽위에서 바라본 동문 주변의 초가집들

▲ '소가 끄는 수레' 모형이 설치된 대로변의 초가집 

▲ 전형적인 시골 풍경을 느끼게 하는 초가집 전경

 

♣ 낙안읍성 민속마을 연력

□ 마한의 옛터로서 맥제때 파지성, 분차, 분사로고 부름

□ 고려 태조23년(940) 낙안군(양악)으로 개칭

□ 고려 현종9년(1018)에는 나주목으로 편입

□ 조선 태조6년(1397)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토벌함

□ 세조12년(1466)에 군, 중종10년(1515) 현령, 명종10년(1555) 현감, 선조8년(1575)에 낙안군으로 승격

□ 1908년에 낙안군을 폐지, 순천군으로 편입(순천군 낙안면이 됨)

□ 1949년에 순천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승주군 낙안면이 됨

□ 1983년 6월 14일 사적 제302호로 지정, 복원사업 추진

□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승주군이 순천시로 흡수 통합되어, 행정구역이 순천시 낙안면으로 됨

□ 면적 : 223,108㎡ (성내:135,597㎥, 성외 보호구역:87.511㎥)

□ 인구 및 가구 : 232명 90세대(성내:66가구, 성외:24가구)

 

 

▲ 주막거리의 식당들

 

▲ 임경업 장군 비각

 

♣ 임경업 군수 비각(林慶業 郡守 碑閣)

조선 인조6년(1628) 4월 1일 건립한 임경업 장군의 선정비는 인조4년(1626) 임 장군이 낙안군수로 봉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정묘호란 때에는 큰 공을 세운 것을 기리기 위해 군민이 세운 것이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은행나무 노거수/주막 앞에 위치 

 ▲ 객사 뒷편에 위치한 노거수

▲ 낙안읍성 성벽을 따라 서 있는 노거수들

 

♣ 낙안읍성 노거수

*전라남도 기념물 제133호

*소재지: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낙안읍성 안에는 팽나무 7주, 푸조나무 2주, 개서어나무 2주, 느티나무 1주, 은행나무 3주 등 모두 15주의 노거수가 자라고 있으며, 이들 나무의 나이는 대략 100~400년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나무들의 위치를 보면 객사 뒷편 성벽을 따라 약 150m에 이르는 거리에 10주의 노거수가 한줄로 이어져 있고. 후정과 앞쪽에 푸조나무 1주와 은행나무 3주가 자라고 있다.

특히 객사 후정과 앞쪽에 서 있는 푸조나무와 은행나무는 흔하게 볼 수 없을 정도의 고령의 거수이다.

푸조나무는 높이 23m, 가슴 높이의 두가지 둘레(쌍간주) 4.2m+6.4m에 이르고, 은행나무는 높이 28m, 가슴 높이의 둘레 10.2m로서 이들 나무의 수령은 약 4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 노거수들은 방풍 또는 차폐 목적으로 심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낙민루

 

♣ 낙민루(樂民樓)

낙민루는 조선 헌종때 군수 민중헌이 중건하였다고 전해지며 1924년 일부분을 수리하였다고 한다. 남한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로서 오랜 세월동안 희로애락을 나눈 누각이었으나 6.25전쟁 당시 불타 소실되었던 것을 1986년 기존의 초석 위에 17평 규모로 겹처마 팔각집의 누각형으로 복원하였다.

 

 ▲ 동헌

 ▲ 성벽위에서 바라본 동헌의 뒷 전경

 ▲ 동헌마당에서 바라본 내아(내동헌) 전경

 ▲ 내아/내동헌 전경

▲ 내아의 장독대

 

♣ 동헌(東軒)=사무당(使無堂)

이 건물은 조선왕조때 지방관청으로 감사, 병사, 수사, 수령 등이 지방행정과 송사를 다루던 곳으로 동쪽은 수령이, 서쪽방은 관리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좌측에 있는 건물은 내아로서 수령의 안채로 사용하던 건물로 내동헌이라고도 한다. 당초 건립연대나 퇴락한 연대는 기록에 없어 알 수 없으나 문헌을 참고하고 옛 터의 발굴조사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1990년 복원하였다.

 

♣ 수문장 교대식

 

 ▲ 교대식을 위해 성문으로 향하는 행렬

 

 

 

▲ 수문장 교대식 모습들

 

♣ 낙안읍성 성벽

 ▲ 성벽위의 모습

 ▲ 동문위 성밖으로 돌출된 치성 모습

▲ 성벽의 석축형태

 

♣ 기타 사진들

 

▲ MBC드라마 '대장금' 촬영세트장

 ▲ 성벽위에서 바라본 객사

 ▲ 낙안읍성 판소리 계보도

 

 

▲ 성내에 세워져 있는 다양한 장승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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