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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무장헬기서 유혈진압 지시"
시위대 -31사단 93연대 세차례 대치
해남 군수 유지 청년설득 무기회수
우슬재 상등리 고개 시민군 발포 배경.사망자수,당시대대장.목격자 주장 엇갈려.
시위확산 해남 <하>
80년 5월 23일 새벽 해남군 해남읍 우슬재와 마산면 상등리 고개에서 경계근무중이던 계엄군에 의해 사살된 시민군의 숫자와 사망경위는 어떠한가. 계엄상황일지 기록과 당시 부대 책임자였던 장윤태씨 (당시 31사단 2대대장 중령 .전 광주시 북구의회의원)는 사망자는 2명이며 군부대를 기습해와 발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목격자와 당시 참여자들은 무기탈취와는 무관하고 시위대 사망자도 4명이상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장씨와 목격자 및 참여자의 상반된 주장을 들어본다.
장씨는 [5.18당시 우슬재 차단은 해남군민 보호대책][5.18당시 해남 우슬재사건에 대한 나의 증언]이라는 2개의 문건을 본 취재팀에 보내와 다음과 같이 당시 군부대와 시위대상황을 밝혔다.
시위대 4명이상 숨져
[5.18확대 계엄당시 목포가 소란할 것으로 판단한 상급부대의 명령에 따라 해남 대대병력을 목포연대에 인계하고 장교 3명 사병 6명정도 밖에 없는 상태였다. 광주에서는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항하기 위해 일부 군중들이 나주 지역으로 무기를 가지러 광주 외곽으로 놔왔으며 그때 공수부대가 광주외곽으로 통하는 도로를 거의 대부분 봉쇄했기 때문에 광주에는 못들어가고 나주 영암 해남지역의 경찰서 지서 예비군 무기고등에서 무기를 탈취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해남군 계곡지서에서 무기와 탄약,수류탄을 탈취하고 옥천지서에서 무기탈취후 시위대는 해남군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을 성토하고 해남경찰서 무기고를 파괴한후에 해남에는 공수부대가 없으니까 해남지역 일대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평상시 계속주둔하고 있는 31사단 소속 해남대대에 들이닥치게 됐다...
그당시 부대상공에는 무장헬기가 계속 정찰하면서 무전으로 무력행사를 작전장교에게 강요하기도 했으니 이 사실을 보고받은 대대장은 역사의식을 가지고 정치군인들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해남군민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현명한 판단을했기 때문에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위험한 위기를 넘겼다고 자부한다....
시위대는 주간 기습을 포기로 일시 대치한 실태였으므로 수천명의 예비군및 탄약이 있었기 때문에 기습으로 무기와 탄약이 탈취당할 경우에 광주.전남뿐만아니라 전국이 혼란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기에 부대도 보호하고 인명피해도 최소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연구한 끝에 우슬재를 차단해야 된다고 판단돼 해남군수와의 협의 ,5시간후에 차단하기로 하고 시위군중에게 군배치 사실을 통보해 무기와 탄약을 회수했었다.
그러던중 새벽 4시 30분께 부대를 기습하러오던 시위대와 우슬재에 배치된 방위병간에 교전이 발생했으며 이는 발포명령이 하달된 며칠후의 상황이었다.
자신이 책임지고 있던 부대에 의해 시민군이 죽은것에 대해 변호하는 입장을 서술한 이 증언에서 중요한 대목은 22일 무장헬기에서 무력행사를 지시했고 발포명령 하달도 23일 시점에서 며칠 전이었다는 사실이다.
장씨는 자신과 함께 사태 후 정치에 입문한 정웅씨 (당시 31사단장)의 국회대정부 질문내용(5.18당시 31사단상황)까지 다음과 같이 곁들여 자신과 정씨를 변호하고 있다. [정 국회의원 정웅씨의 국회 대정부 질문내용 12.12이후 5.18이 일어나기 전에 육군본부에 있었던 이야기로는 [김대중씨를 감옥에 가두면 광주에서 소요가 일어날것이다.그러면 공수부대 1개대대가 광주에서 하루만 작전하면 끝난다(정호용)]고 호언장담했다. 이말은 광주에서 소요가 일어나기 전에 육군본부에서 흘러나왔으며 부마사태때도 공수부대 작전으로 단시일내에 끝났다. ]이같은 내용은 [장씨와 정씨는 사적으로는 죄가 없다]고 넘길수 있을지언정 그러나 중요한 핵심은 전두환.정호용등 신군부의 명령에 따라 해남에서 살상이 가해졌으므로 분명한 공범관계가 성립된다.
사체,군복으로 갈아입혀
이점이 개인사와 역사가 다른점이다. 무장시위대는 31산 93연대 2대대병력과 세차례 대치한다.
첫번째는 21일 오후 7시 20분,두번째는 22일 오전 8시 세번째는 22일 오후 4시 5분께다.
장소는 해남-완도13번국도변에 위치한 이부대 정문이다. 시위대는 총과 실탄을 달라며 요구하면서 트럭을 타고 부대에 접근했지만 대대장과 시위자 대표가 대화해 충돌은 일어나지 않는다.
당시 92연대 2대대에는 행정병밖에 없는 상태여서 방위병 1백 20여명에게 현역복장을 입혀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시위대는 이날 군부대 상공의 헬기에 밀려 후퇴한후 군청으로 돌아와 일반인들에게 공포감을 주지 않기 위해 소총 2백여정을 회수 군부대에 반납한다. 장씨는 이대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시 대대에 보관한 무기는 2개대대 1천5백명이 완전무장할 수 있는 신형전투장비와 공용화기가 있었고 예비군 무기와 탄약도 수천명분이 있어 부대가 만일 시위대로부터 무기와 탄약을 탈취당한다면 사태가 극도로 악화될것이라고 판단돼 본인은 부대도 보호할수 있고 시위군중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우슬재에 초소를 운용하게 됐다.
그리고 본인은 당시 해남군수.지역유지들과 긴급협의해 무장하고 있는 청년들을 설득,다음날 새벽까지 무기 5백여점과 다량의 실탄을 회수했다. 이렇게 무기가 회수되고 진정된 상황에서 이날 새벽 시위대 일부가 우슬재와 상등리 고갯길에서 매복군인에 의해 사격을 받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다.
장씨의 상황증언은 이렇다 . [23일 새벽 5시께 그들이 야간에 기습하겠다고 말한대로 군부대를 기습하러 오다가 우슬재 초소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교전에서 시위대 1명이 사망하교 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CAR 3정과 실탄 50여발을 현장에서 회수했다.
같은날 오전 9시께 해남군민을 보호키위해 배치됐던 상등리 옆 초소 가까이에서 차량 2대가 돌진해오자 방위병들이 겁을먹고 차를 세우기 위해 차량바퀴를 보고 사격했으나 사격술의 부족으로 유탄이 생겨 1명 사망 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와 정반대의 증언을 들어보자.
먼저 사망자수가 2명이 아니라는 김성윤씨(54,황산면사무소복지계장)의 증언 [당시 해남군청 사회과 보건기원(8급)으로 근무하던 중 23일 오전 6시께 군부대로부터 시체를 수습하라는 연락을 받고 이날 새벽 총격전이 벌어졌던 우슬재와 상등리 고갯길에 가보니 우슬재 정상 도로가에 사체 3구가 상등리 고갯길 도로가에 민간이 시체 1구가 각각총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
당시 해남군 촉탁의사와 군부대에서 나온 키작은 상사등과 함께 이들 시체들이 각각 총에 맞아 숨진 사실을 확인한 뒤 부대로 옮겼다. 이들 4구의 민간인 시체가 입고 있던 옷이 피로 범범이 돼 있어 군부대에서 지급해준 군복으로 갈아입힌뒤 연고자가 나타날것에 대비해 군용천막을 치고 그 천막안에 시체를 안장해 두었다. 사태후 군부대에 가보니 현재의 수송부 자리에 4개의 무덤이 쓰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다음으로 사망자가 해남시위가 아니고 부대 기습 목적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당시 군부대시위 참여자 김병일씨(39.해남군 수협계장)의 증언 [해남청년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들이 21일과 22일 군부대에서 무기를 달라고 시위했으나 22일 밤까지 군부대에 대부분의 무기와 실탄을 자진반납한 상태였다. 23일 우슬재와 상등리고개에서 교전한 시위대는 해남 시위대도 아니었고 무기탈취 목적도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었다. 또 군인들이 해남 시위대로부터 무기탈취 위협을 느껴 이를 방어하려 했다면 군부대근방에 초소를 설치해야 마땅한데 읍에서 군부대로가는 도로와 전혀 관계없는 우슬재와 상등리에 초소를 설치해 놓고 시위대가 군부대를 습격하러 오기때문에 발포 했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증언이다. 당시 사망자가 7명이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무기 탈취 의도 없었다 "
이때문에 김씨등 5항동회원인 당시 해남시위참가자 11명은 장씨를 광주지검에 지난 6월 9일 [5.18학살자]로 고발해 놓고 있다. 상등리 고개에서 당시와 마찬가지로 상등음식점을 운영하는 이병일(45)는 [상등리에서 총격을 받은 시위차량들은 화원면 쪽에서 올라오는 것들이었고 버스 좌석 부근만 집중 사격해 1명이 죽고 4-5명이 부상당했다고 증언했다.
해남 총격사건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는 박상일 해남 신문 편집국장(39)은 [해남사건은 향토사단에 의한 유혈진압이 분명하며 국회청문회때 평민당이 같은당 소속 정웅의원을 몰아붙일수 없어 어물쩍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며 진실규명이 이뤄져야한다고 주장했다.
김병일씨도 [청문회때 국회로 올라가 진실규명에 노력했으나 해남동지들이 모여 있던 국회대기실에 정웅의원이 찾아와 사망자가 있었다는 부분을 빼달라고 했으며 장윤태씨도 군인매복사실도 없었는데 사망자가 발생했다는것은 정신병자들의 주장이라고 몰아붙였다]고 지금도 분개하고 있다.
첫댓글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잘읽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의 희생 이세상 모두가 가슴에 새겨야 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