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브론, 그대 오기 이전에 우리가 있었다네
느바포에버님의 요청글입니다.
르브론으로 인해 급부상하고 있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고,
그동안 캐벌리어스를 거쳐간 숱한 선수들로 All-Time Team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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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구단은 1970년에 신생팀으로서 창단되었습니다. 연고지는 27년동안 한번도 안 바뀌었지요. 첫 해에는 15승 67패를 기록함으로써 리그 최하위였었고, 덕분에 당시 대학최고선수였던 오스틴 카를 드래프트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성적이 하위권에서 맴돌았기에 거의 매년 대학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1975-76 시즌에는 49승을 올리면서 구단역사상 최초의 디비젼 타이틀을 따냅니다. 그 이후로는 다시 내리막 길이었죠. 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다시 한번 중흥의 길을 터보려 했던 이 팀의 발목을 매번 잡은 것은 마이클 조던의 불스였습니다. 그리고 20년후, 캐벌리어스는 르브론 제임스를 중심으로 구단 역사상 세 번째의 중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캐벌리어스는 3명의 명예의 전당 선수들을 배출했습니다. 네이트 써몬드, 웨인 엠브리, 레니 윌킨스가 그들입니다. 하지만 이 선수들의 전성기는 클리블랜드 소속 시절이 아니었기에, 이 구단이 이 세 명의 인물들을 배출했다고 말하는 것은 말에 좀 어폐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캐벌리어스 소속으로 뛴 선수들 중 6명의 져지넘버가 영구결번 됐습니다 - 빙고 스미스 (7), 래리 낸스 (22), 마크 프라이스 (25), 오스틴 카 (34), 네이트 써몬드 (42), 브랫 도허티 (43). 이 중, 네이트 써몬드는 그의 이름값 때문에 영구결번이 되었습니다. 사실 말년에 두 시즌 벤치멤버로 뛰면서 팀에 그리 공헌한 것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르브론 제임스가 다치지 않고 지금의 실력을 향후 4~5년간만 지속해 준다면, 구단 역사 뿐 아니라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로 자리매김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현역선수들을 제외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All-Time Team을 구성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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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팅 파이브
센터: 브랫 도허티
아마 역대 캐벌리어스 선수들 전체를 대상으로 투표해도 별다른 이견없이 뽑힐만한 선수라 생각됩니다. 1965년생이고, 키는 213cm입니다.
1986년 드래프트에서 전체순위 1번으로 영입됐습니다. 이 드래프트는 2번으로 셀틱스에 드래프트가 되자마자 사망한 렌 바이어스 (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로 인해 더 유명한 드래프트였죠. 이 드래프트에서 론 하퍼도 8번픽으로 뽑혀서 캐벌리어스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댈러스와의 트레이드로 인해 마크 프라이스까지 낚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존 “Hot Rod” 윌리암스라는 뛰어난 USBL출신 파워포워드까지 영입한 캐벌리어스는 아마도 NBA 역사상 드래프트 당일날, 유능한 선수들을 한꺼번에 가장 많이 영입한 팀일 것입니다. 프라이스를 제외한 이들 모두는 86-87 All-Rookie 팀에도 이름을 올렸지요.
마이클 조던과 함께 대학생활을 하며 딘 스미스 감독으로부터 철저한 기본기를 전수받은 도허티의 플레이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실속있었고 효율적이었습니다. 현재의 팀 던컨과 아주 비슷한 스타일의 농구를 했었지요. 팀 던컨이 조금 더 몸이 크고 느려서 센터를 봐야만 했다면 영락없는 도허티입니다. 물론 수비력과 리더쉽에 있어서는 던컨이 훨씬 더 뛰어나지만요. 도허티는 올스타게임에 다섯번 출전하며 (88, 89, 91, 92, 93) 8시즌을 캐벌리어스의 일원으로 뛰었습니다. 커리어 평균은 19.0점, 9.5리바운드, 3.7어시스트입니다. 센터로서는 상당히 높은 어시스트 수치가 눈에 띄지요?
도허티는 1993-94 시즌을 끝으로 28세의 젊은 나이에 농구인생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고질적인 허리 디스크때문이었지요. 도허티가 건강했었더라면 90년대 4대센터들의 각축전에도 뛰어들만한 실력의 선수였습니다. 현재는 기독교인으로서 수많은 사회봉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파워포워드: 존 “Hot Rod” 윌리암스
존 “Hot Rod” 윌리암스는 1962년생으로 신장 211cm의 전형적인 수비형 파워포워드였습니다. 1985-86년 시즌에 USBL에서 뛰었던 숨은 진주를 캐벌리어스가 건져낸 거였죠. 이 선수의 수비력과 블라킹 능력이 워낙 뛰어났기에, 상대적으로 이 부분들이 약했던 도허티를 드래프트하는데 있어서 별 고민을 안했었다고 전해집니다. 1988-89 시즌에는 16.8점, 8.1리바운드, 2.1블락샷을 기록하며 식스맨으로서 맹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존 윌리암스라는 이름이 워낙 흔한 이름이라서 그의 어렸을 적 별명인 “Hot Rod”를 미들네임처럼 사용했습니다. 당시에 해설자들도 ‘핫 로드 윌리암스’라고 했지 ‘존 윌리암스’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Hot Rod는 어렸을때 윌리암스가 집안에서 자동차의 엔진소리를 내며 집안을 가로질러 뛰어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엔진이 밖으로 드러나서 엔진소리가 유난히 크게 나는 차를 가리켜 미국에선 Hot Rod라고 하거든요.
윌리암스는 9시즌을 캐벌리어스 유니폼을 입고 뛰었으며, 그의 1,200 블락샷과 20,802분의 출장시간, 그리고 1,620개의 공격리바운드는 아직도 프랜차이즈 올타임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윌리암스의 40분 대비 커리어 평균은 14.9점, 9.1리바운드, 2.4어시스트, 2.2블락샷입니다.
스몰포워드: 래리 낸스
피닉스 선즈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낸스는 1988년부터 1994년까지 캐벌리어스의 일원으로 뛰었습니다. 1959년생이며 신장 208cm인 낸스는1981년 드래프트에서 전체순위 20번으로 드래프트 되었습니다.
올스타게임에 3번(85, 89, 93) 출전했고, 1984년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는 35세의 줄리어스 어빙을 결승에서 누르고 NBA 첫 슬램덩크 우승자가 됐었지요. 대학 졸업시의 서전트점프가 102cm였던 낸스는, 프로 초창기에는 주로 선즈의 칼 매이시의 앨리웊 패스만 받아먹는 단조로운 공격패턴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6-87 시즌에는 22.5득점을 기록하며, 더이상 덩크만이 아닌 미드레인지 점퍼와 다양한 공격루트를 자신도 장착했음을 과시했습니다. 낸스는 또한 자신이 스타팅 멤버로 뛴 11시즌동안 매시즌 평균이 최소 16득점에 8리바운드로써 ‘꾸준함’에 있어서도 유명했던 선수였습니다. 1989년과 1992년, 93년에는 All-Defensive Team에도 뽑혔었죠.
1988년에 있었던 피닉스와 클리블랜드 (케빈 존슨, 댄 말리)의 트레이드로 인해 클리블랜드에 새둥지를 튼 낸스는 젊은 피의 수혈로 점점 강해지던 캐브스를 당장에 파이널 컨텐더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문제는, 같은 컨퍼런스에 조던의 불스가 있었다는 점과, 이때부터 그의 고질적인 허리부상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습니다.
3번부터 5번까지를 모두 커버할 수 있었던 낸스의 커리어 평균은 17.1점, 8.0리바운드, 2.6어시스트, 2.2블락샷입니다.
슈팅가드: 오스틴 카
오스틴 카는 클리블랜드가 창단 첫해에 리그의 쓴 맛을 본 덕분(?)에 다음 시즌인 1971년의 드래프트에서 전체순위 1번으로 뽑힌 대학 최고의 득점기계였으며 대학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1948년생이며 193cm였던 이 슈팅가드는 노틀댐 대학시절 34.5점이란 대학 커리어 평균을 해내어 세상을 놀라게 했었지요. “피스톨” 핏 마라비치와 비견될 만한 득점기계였습니다. 코트 어느 위치/각도에서도 터지는 그의 슛감각은 가공할만한 무기였습니다.
하지만 입단 첫시즌부터 입은 발과 다리부상의 어두운 그림자는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혔고, 결국 그는 대학때의 명성에 걸맞지는 않는 수준으로 농구인생을 마쳐야만 했습니다. 1973-74 시즌에는 21.9점, 3.6리바운드, 3.8어시스트에 86%의 자유투 성공률을 보이며 잠시나마 그가 어떠한 능력의 소유자인지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 다음 시즌에 곧바로 무릎부상을 입으며 다시 힘든 커리어를 보내게 됩니다.
오스틴 카는 캐벌리어스의 일원으로 뛴 9시즌동안 16.2 평균득점을 기록했습니다. 계속되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던 그의 모습은 많은 젊은 농구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구단은 그의 져지넘버를 영구결번시켜 주었습니다.
포인트가드: 마크 프라이스
생긴 것 부터가 남달리 영민하게 생긴 마크 프라이스는 “생긴대로” 플레이했던 뛰어난 포인트가드였습니다. 1964년생이며 농구명문 조지아 공대를 졸업한 마크 프라이스는 183cm라는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코트를 휘젓고 다니는 카리스마 넘치는 민완가드였죠. 너무 작고, 느리고, 너무 정석적인 플레이만 한다며 그를 드래프트 2라운드까지 끌어내린 스카우터들의 안목을 비웃기라도 하듯, 프라이스는 보란 듯이 12시즌 동안 NBA 코트의 야전사령관 역활을 멋지게 해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이 기억하실지 모르겠으나, 마크 프라이스의 플레이를 보다 보면 저의 경복고 1년 선배셨던 유재학 감독님의 전성기적 플레이가 떠오르곤 합니다. 허재나 강동희같은 특출난 기술이 없었어도 언제 패스하고 언제 외곽슛을 날려야 할 지를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던 분이었죠. 낮고 불규칙한 드리블, 경기를 읽는 영리한 두뇌, 그리고 단신임에도 인사이드를 향해 치고 들어가며 완벽하게 빼주는 킥아웃 패스나 직접 시도하는 반박자 빠른 레이업은 그 분의 전매특허였습니다. 프라이스는 그러한 스타일의 농구를 했습니다. 키는 작았지만 드리블을 치다가 순간적으로 점프하며 높은 타점에서 터뜨리는 풀업점퍼가 예술이었죠. 그리고 강한 손목힘에서 터지는 3점라인 훨씬 뒤에서의 안정된 롱슛이나 빠른 드리블에서 변칙적인 타이밍으로 나오는 패스는 역대 최고수준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자유투 성공률도 커리어 평균이 90.4%에 달했고 3점슛 성공률도 40%를 상회했습니다. 1988-89 시즌에는, 야투성공률이 50%를 넘고, 3점슛이 40%를 넘으며, 자유투까지 90%의 성공률을 보인 역대 5인 (버드, 노빗츠키, 내쉬, 레지 밀러)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4번의 올스타 게임에 출전했던 프라이스는 1992-93 시즌에는 All-NBA First Team에 선출되기도 했지요. 프라이스의 40분 대비 커리어 평균은 20.4점, 9.0어시스트, 1.6스틸입니다.
1994년에는 세계농구선수권에서 샤킬 오닐, 숀 캠프, 레지 밀러등의 공격을 이끌어내며 미국에 금메달을 안기는데 있어 큰 공헌을 했던 주전 포인트가드 마크 프라이스. 그의 캐벌리어스 All-Time Team 선정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벤치 멤버들
센터겸 파워포워드: 숀 캠프
별다른 프로필이 필요치 않은 수퍼스타 숀 캠프의 클리블랜드에서의 3시즌은 상당히 화려했습니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캐벌리어스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18~20점에 9~10리바운드를 기록해 줬지요. 1998-99 시즌에는 자신의 커리어 하이인 20.5점을 득점했습니다. 1998년에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올스타 게임에 스타팅 멤버로 ‘선발출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에 온 후에 시작된 그의 체중조절의 문제는 그의 커리어를 단축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슈팅가드겸 포인트가드: 월드 비 프리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원래의 이름은 Lloyd Free였는데, 나중에 커리어가 쌓임에 따라 자기는 이 세상을 품는 대인이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World B. Free로 개명한 선수입니다 (가운데 B는 아무 의미가 없답니다.^^;)) 월드 비 프리는 1975년부터 1988년까지 활약했는데, 신장은 188cm였지만 44인치의 점프력을 이용해 가공할 덩크를 많이 보여줬던 선수입니다. 몸은 뚱뚱한(?)편으로 둔해보이기까지 했는데도 몸놀림이 무척 민첩했습니다. 79년과 80년에는 조지 거빈과 득점왕을 다툴 정도로 득점력도 뛰어났습니다. 커리어 평균은 20.3점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루키시즌과 말년 두시즌 동안에 많이 까먹은 수치고, 나머지 10시즌 동안에는 대체적으로 23점에서 30점 사이를 득점해 주었죠. 클리블랜드에서는 82년부터 86년까지 뛰면서 평균 23점을 득점했던 뛰어난 슈팅가드였습니다.
스몰포워드겸 슈팅가드: 론 하퍼
90년대 시카고 불스에서 뛰던 선수로만 기억하실 분들이 많을텐데요.... 론 하퍼는 1985년에 입단할 때부터 ‘조던의 라이벌’, ‘오렌지 조던’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닐 정도로 조던과 여러면에서 비슷했던 선수였습니다. 훌륭한 점프력을 바탕으로 한 그의 올라운드 공격력은 클리블랜드에서의 루키시즌에 이미 평균 22.9점이라는 수치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클리블랜드에서의 3시즌을 보낸 뒤에 LA 클리퍼스에서 맹활약을 했던 하퍼. 그를 멈춘 것은 무릎부상이었습니다. 그 후, 레이커스와 불스에서 롤플레이어로 뛰며 우승반지를 5개나 챙겼지요. 무릎부상을 당하기 전까지의 클리블랜드와 LA 에서의 8시즌 동안에는 꾸준히 18점에서 23점 사이를 득점해주며 리바운드와 어시스트도 5~6개씩 해주던 올라운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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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로이 힌슨, 키이쓰 리, 타이론 힐, 마이크 밋첼, 빙고 스미스, 필 허바드, 테럴 브랜든과 같은 많은 좋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위에 언급된 선수들만큼 긴 시간동안 꾸준한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다고 판단되어 All-Time Team에서는 제외시켰습니다. 이제 르브론을 중심으로 클리블랜드에 새 태양이 떠오를 것을 기대하며 여기서 글을 줄일까 합니다.
글: Doctor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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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봤습니다~
하퍼가 우승반지가 5개라니요? 허허허...
덴버도 부탁드려요.. 덴버 과거 하면 키키 밴더웨이랑 알렉스 잉글리쉬 그리고 맥다이스밖에 잘 모르겠어요 ㅠㅠ
그 외에 디켐비 무툼보와 라폰소 엘리스같은 선수도 뛰어났었죠. 그리고 리바운드를 가장 잘 잡아내었던 단신 포인트가드 라파옛 리버도 덴버에서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데이빗 톰슨, 댄 이셀과 같은 레전드급 선수들이 아주 많았던 팀이었습니다. 제가 약속은 못드리지만 시간이 되면 덴버 너겟츠의 올타임 팀도 만들어 보지요. 얼핏 봐도 All-time team 두 팀은 쉽게 나오네요.^^
감사합니다..^^
테럴브랜든 무시하나요? <- 이거 농담글인데 혹시 모르실지도 모르겠네요. 잘봤습니다. 카페가 훈훈해지네요. 왠지 덕담이나 무용담 얘기 듣는거 같기도 하고..
왜 브랜든을 무시하겠습니까?^^ 브랜든은 자신의 프로 첫 6시즌을 클리블랜드와 함께 했는데, 좀 뒤늦게 핀 대기만성형이었습니다. 첫 4시즌은 벤치멤버로서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고, 그 후 나머지 두시즌동안 좋은 활약을 보여줬죠. 하지만 위에 언급된 선수들과 어깨를 겨루기엔 한 2% 부족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브랜든을 좋아하신 팬이셨다면 좀 죄송하네요.^^;)
잘 봤습니다. 어릴때하던 런앤건게임이 생각나네요 그당시 클리블랜드로하면 프라이스로 3점만 주구장창 던지던 기억이나네요.
와우~ 드디어 Doctor J님의 글을 보게 되는군요. 왠지 멋진 편지를 받은 기분이 드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도허티와 하퍼는 참 아쉽군요. 두 선수가 계속 건강을 유지했더라면 당시의 클블도 더 높은 위치를 차지했을 수도 있었겠군요. 만약 브롱이가 당시의 클블 멤버와 같이라면 지금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지 않을까요? 특히 마크 프라이스는 정말 탐이 나는군요. 브롱이가 쉽게 받아먹을 수 있을텐데... 몇년 내에 더 좋은 조력자들을 찾을 수 있겠죠? 근데... 왠지 대니 페리는 믿음이 가질 않는군요;;;;;
잘 읽고갑니다. Doctor J 님도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길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사는 호주는 꽃피는 봄입니다. 연휴도 아니고요.^^;;)
아무튼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담에 또 부탁드려도 될런지^^;;; 그리고 유재학 감독님의 1년 후배시라면 나이(연세?)가 계산되는군요. ㅎㅎㅎ 혹시 직접 농구를 하셨던 건가요?
네.^^
저는 칼럼보다 이 개인적인 사실이 더 궁금했다는...ㅎㅎ
캠프가 성적이 워낙 좋았지만, 타이론 힐도 클리블랜드에서 블루워커 스타일로 좋은 모습 보여주었었죠^^
물론이지요.^^ 블루칼라워커의 전형이었죠. 클리블랜드에서는 모두 여섯시즌을 뛰었는데 평균적으로 더블 더블이 채 안되는 스탯을 기록했습니다. 이 골밑에서의 궂은 일이란 것이 모두 스탯으로 환산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존 윌리암스와 캠프에게는 포스면에서 뒤지는 듯 해서 위에 포함시키지는 않았습니다.
94-95엔 올스타에도 선정되고..탄탄한 선수생활이 시작되려나 했지만,95-96시즌 중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시즌의 대부분을 날렸죠..이후에도 오랫동안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사고 이전만은 못했던것 같아요..
참... 클리블랜드 출신들은 부상의 악령과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존 윌리암스..댄 멀리와의 트레이드로 피닉스로 갔죠..피닉스의 구멍이던 센터 자리를 잘 메워줄거라 기대받았는데,이상하게도 그 때부터 노쇠화가 진행됐어요..-.-댄 멀리는 클리블랜드에 머문건 95-96 단 한시즌 뿐이었지만,베테랑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구요..
잘봤습니다~제목이 구수해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 아, 미국에 계시는 줄 알았는데 호주에 계시는군요.
월드 비 프리 였군요;; 이름은 이제 알았내요ㅎ 클블 오래된 경기가 하나 떳었는데 시대에 안맞는 독보적인 운동능력을 보여주더군요ㅎ
클블에서 뛸 때만 해도, 이미 30줄에 운동능력이 감퇴하고 있을 때 였습니다. 이 선수가 70년대 후반에 어빙과 필라델피아 식서스의 일원으로 있을 때의 경기를 보면 입이 벌어집니다. 한번은 경기중에 빌 월튼을 앞에 놓고 360도 투핸드 덩크를 성공시킨 적도 있었습니다.
마크프라이스가 워싱턴으로 오던해... 워싱턴 불릿츠가 불스를 꺽고 우승할줄 알았습니다. ㅠ,.ㅠ 아흑.. 웨버의 운은 그때부터..
프라이스가 방출된 이유가 부상으로 인한 노쇠화였기 때문에, 저는 워싱턴에서의 그의 플레이에 큰 기대를 걸진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1996년 당시 워싱턴에 웨버와 주완 하워드, 라쉬드 월레스의 조합을 극대화 시킬만한 플레이메이커의 부재가 컸었던 것 같습니다. 로버트 팩은 이들을 끌고갈 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마크 프라이스 워싱턴에서 일곱경기인가밖에 못 뛰었어요..이후 골든스테이트나 올란도에서도 주전으로 (확실히 이전만은 못했지만)괜찮은 모습을 보여준걸 감안하면,그가 워싱턴에서 정상적으로 뛰었다면 확실히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을 거라 생각합니다..게다가 로버트 팩도 얼마 안 뛰고 시즌 아웃되어서,그나마 스타팅 포인트 가드로는 마크 프라이스의 동생으로 와이드 오픈 3점슛 외엔 별볼일 없던 브렌트 프라이스가 뛰었습니다..95-96의 워싱턴은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움이 많은 팀 중 하나입니다..정말 핵심 선수들의 부상만 없었다면,어느 정도의 성적을 올렸을지 감이 안 오는 라인업이에요..
루키시즌의 라쉬드 월러스는 아직 궤도에 올라서기 이전이었지만,식스맨으로 많이 배우는 시즌이 되리란 예상과 달리,웨버의 부상으로 주전으로 뛰면서 뛰어난 운동능력과 사이즈를 바탕으로 꽤나 좋은 경기력을보여주었는데..50경기인가 뛰고나서 시즌아웃..웨버도 부상으로 늦게 시작한 시즌을,그나마 7경기밖에 못 뛰고 찰스 오클리의 잔혹한 팔로 다리걸기 파울로 시즌 아웃..그의 짧은 경력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이며 MIP를 수상하게 되는 무레샨도,결국 시즌의 끝을 못 보고 아웃..CNN 스포츠 레이트 나이트에서,사복 입고 경기 지켜보고 있는 프라이스,웨버,쉬드,팩,무레샨을 풀샷으로 잡아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차떼고 포땐..마지막 10경기의 스타팅은 브렌트 프라이스-팀 레글러-칼버트 체이니-주원 하워드-맥길바인..하지만 비교적 대진운이 좋기도 했지만,이 기간에 꽤 좋은 성적을 올리며 막판에 마이애미와 8번 시드를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죠..하워드의 가치가 이 때 폭등했구요..마지막 10경기에선 거의 30-10을 기록했고,그 덕에 그를 오랜기간 '먹튀의 상징'으로 만드는 초대형 계약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블록슛만 잘 하던 짐 맥길바인은 주전 센터로 뛰며,결국 시즌 평균 2개가 넘는 블록슛을 기록하고..FA로 시애틀과 계약하는데..그 금액이 켐프의 연봉보다 비쌌고,그것이 켐프 분노의 직접적인 이유가 됐죠..
감사합니다~이런 글 너무 좋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부탁드려요~~
너무 재밌게 봤습니다.
저 때가 참 매력적인 클블의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프리선수 져지 뒤에는 FREE가 적혀있지요 ㅋㅋ
공짜...^^;;) 그래서 Free 선수도 대머리...???
하퍼는 덩콘에서 드렉슬러와 맞짱을 뜨기도 했을 정도로 운동능력이 대단한 선수였죠. 블랙캣 조던과 흡사한 면이 정말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날아다니던 젊은시절부터 수비력이 좋았나요? 하퍼 날아다니던 시절엔 수비력이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불스에서의 수비는 진짜 토나올 정도였으니 매우 궁금하네요.
하퍼의 80년대 당시의 수비력은 그저 중간 정도 수준이었습니다. 클리퍼스 시절때만 해도 수비가 뛰어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습니다. 94년 시즌을 앞두고 시카고 불스에 합류한 후에야 수비에 대한 눈이 떠졌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필 잭슨으로부터 도움받았을 수도 있고, 전부터 친한 친구였던 스카티 피픈으로부터 비밀교습(?)을 받았을 수도....
잘 보고 갑니다...
안타깝게도 이 글이 작성된 3년 뒤에 르브론의 입장이 이렇게 달라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진 못했겠죠...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