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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첫 공판이 있었습니다.
2013년 8월의 검찰조사를 시작으로 12월 26일 기소.
2014년 3월 12일 첫 공판.
내가 살았슴이 내가 없었슴보다 나았다는 생각으로,
살면서의 행동으로 지옥 갈 걱정하지 않으면서,
잘 살았고,
그렇게 잘 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합니다
라며,
마지막순간(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꿈을 계속 키우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어제 피고인으로 법정에 섯습니다.
19명이나 되는 피고인들.
법정이 죄인들과 그 변호인들로 꽉 찼습니다.
저를 포함한 19명의 피고인들.
모두들 돈이 넘쳐났던 신용카드인터페이스 시장에서 넘쳐나는 돈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유통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넘쳐나는 돈을
영업에 활용한 사람, 영업하는 사람이 갖다주니까 받아서 쓴 사람.
어떻든 돈을 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버는 대신에 재산을 축내고, (현재도) 빚을 늘리고 있으면서도, 돈을 벌엇던 그들과 함께 피고인으로 법정에 섰습니다.
지난 20여년 동안, 신용카드 밴 시장은 그런 시장이었습니다.
밴사, 밴사의 대리점, 가맹점의 담당자들에게 돈이 넘쳐나서 그 돈을 어떻게 활용할까를 생각하게 했던 시장이었습니다.
나는?
첫 직장, 첫 일이
밴사에서 밴사와 가맹점을 연결해주는 역할, 그 중에서도 가맹점에서 밴사에 연결하기 위해서, 그 환경을 갖춰주는 역할이 첫 직장에서 첫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일과는 상관없는 일로 독립해서 1996년 11월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신용카드와 관계되는 일을 다시 시작한 것은 1998년.
1998년 경제 활성화 정책으로 신용카드를 활성화하는 정책을 펴서, 당시까지는 신용카드를 결제수단으로 받지 않았던
병원, 극장, 놀이공원, ..... 기타 모든 개인을 상대로 영업하는 곳에서는 신용카드를 결제수단으로 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 때, 제가 근무하던 회사(A정보통신)에서 저에게 제안이 왔습니다.
A정보통신은 신용카드 인터페이스를 한국에 처음 도입한 회사로,처음 제가 입사할 당시 시장점유율이 80% 이상이었었고, 1998년 당시에도 시장에서 부동의 1위 업체였습니다.
제안 내용은 전국 85개 병원에 신용카드인터페이스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데, 당신이 했던 분야이니까, 그 프로젝트를 진행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잠시의 외도를 거쳐서 그런 협약으로 다시 첫직장, 첫일을 하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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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하나하나를 별개의 시스템으로 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에, 서버를 두 개를 클러스터환경으로 묶어서 별도의 장비를 만들어 병원들에다 설치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병원에서는 내가 제공하는 라이브러리를 병원프로그램에 연결하는 역할만으로 일을 줄이고, 모든 것은 제공된 서버에 있고, 데이터 정산까지 가능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제공하는 것.
특히 당시 클러스터링 툴이 몇천만원이 되는 상황에서, 서버 2개를 클러스터링 툴을 사용하지 않고 듀얼 백업이 되게 하겠다고 제안한 것이 시장에 먹혀들어서,
제안했던 대부분의 병원에서 제가 제안한 시스템을 채택하였습니다.
서울대병원, 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성모병원, 백병원,....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은 80% 이상 제가 제안한 시스템을 채택했습니다.
당시 서울대병원 등 상위 5개 이상의 병원에서 나오는 밴사의 수익은 병원당 매월 2천만원 이상.
병원당 연 2억 이상의 수익이 있는 아주 수익성 좋은 사업에서 그 중심(내가 없으면 안되는 상황)에서 사업을 시작했으니까, 나는 아주 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2005년 경에 망하고 다시 돌아본 것이었지만, 그 때 그 10%만이라도 수익으로 나눌 수 있었다면, 저는 돈 많이 벌었을 것입니다.
멍청한 엔지니어.
“너 같은 사람이 사업을 하면 망한다” 고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많은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저는 멍청한 엔지니어였습니다.
A정보통신과의 계약에서, 85개 병원을 기준으로, 순 이익은 병원 당 100만원 정도로 계약했습니다. 그 100만원으로 개발하고 1년가 무상 유지보수까지.
그런데, 10여개의 대형병원을 진행한 선에서 정리되고, 다른 업체를 개입시켜서 개발을 맞기는 것을 감수했습니다.
85개의 약속을 어겼는데도, ‘을이니까’ 감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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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 과정.
개발이 끝나고 첫 병원을 Open하고 1년이 지났는데도 (모든 병원을 일괄 결제하겠다고)결제를 안해줍니다.
대충 대형병원이 마무리되고 결제를 위한 정리를 하는 상황.
영업과 협상에 의한)계약서를 작성하고 시작한 일인데, 관리부에서 ‘현금’을 전제로 재협상을 하자고 합니다.
영업부 쪽에서는 앞으로 많은 것을 하면 되니까, 일단 관리부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라고.
그래 ‘을이니까’.
그래서 다시 다운된 금액으로 계약서를 다시 썼습니다.(그것도 개발이 다 끝나고도 상당 시간이 지난 다음에)
이제 지급을 하라고 하니까, 경리부에서 다시 품의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계약서를 두 번이나 고쳐 쓴 상황에서)
영업부에서는 “우리도 노력하는데 잘 안된다고... 요구 들어주고 다음에 잘해봅시다”
이런 젠장.
‘을이니까’
드디어 현금을 전제로 ‘세 번째 계약’.
이제는 돈을 달라고 하니까, 자금 사정이 안 좋아서 다음 달에.
다음 달에는 다음 달에는 꼭.
그렇게 두 달을 넘기고 세 번째 달.
사원들의 급여가 밀릴 수 있는 상황에서 ‘이번 달에는 주겠지‘ 라며 찾아갔는데,
‘헉’
4.5개월짜리 어음. 개발 다 끝나고, 1년이 다되어가는데, 현금지급을 전제로 계약서를 세 번이나 고쳐썼는데,
4.5개월 어음이라니?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사원들에게
“도저히 못받아 가겠다. 안 받아가면, 이번 달 월급이 밀리는데, 그래도 되겠나? 얘기들 해보고 알려줘”
하니까
“그냥 들어오세요” 한다.
그것이 사업을 시작하고 밀렸던 첫 월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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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Open하고, 이제는 유지보수비를 안 준다.
잔금을 준 날짜가 마무리된 날이란다. 그래서 그 후 1년간은 무상유지보수 기간이란다.
(이미 2년이나 다돼서 잔금을 준 상황에서....)
한 6개월 더 지나서, 유지보수비를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독촉에 유지보수 협상.
병원 하나에 매월 30만원 이상은 안된단다.
병원당 5만건 이상은 다 됐고, 큰 병원은 10만건 이상인 상황에서
병원당 월 매출이 1억 정도인 상황에서, 그 시스템 유지보수비를 30만원.
아무 것도 안하는 대리점에는 병원당 월 1천만원 이상을 지급하면서, 개발하고 유지보수하는 업체에는 월 30만원.
매월 5억 이상의 매출(그 대부분이 순수익)을 내는 시스템을 유지보수하는 댓가로 월 300만원 정도가 책정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을 또 받아들였다. '이런 바보같은 놈'
한 두달 입금하더니 유지보수비를 입금하지 않는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라고.
바보같이 그런 상황에서 6개월을 끌었다.
그리고 비용 지급이 안되면 서비스 진행하지 못하겠다고 하니까, 알아서 하란다.
그리고 밀린 금액을 계산하니까, 2,000만원 정도.
그런데???
줄 돈이 남아있지 않단다.
그동안 가져갔던 단말기 가격이 그 이상이므로 줄 수 없단다.
POS사업을 병행하던 당시에 단말기가 필요하다는 가맹점을 연결시켜주면, 영업상의 목적으로 단말기를 무상제공한 것을 나보고 부담하란다. 자기네 영업을 도와준 것인데, 그 댓가는 1원도 없었으면서, 단말기 가격을 나보고 부담하란다.
제소하겠다고 하니,
“할테면 해보세요”
‘그래, 다 버리자’ 로
그 업체와의 거래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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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스템 유지관리하던 업체들의 관리를 끝냈는데
바보 같이 그 이후에도 6개월 이상 무상 서비스를 더해줬다.
나스텍이 안하겠다고 하니까, 나스텍과 비슷한 사업을 하던 회사에 관리를 맞겼는데, 그 회사가 나스텍이 관리하던 업체들을 수용하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업체들은 문제 생길때마다 나스텍에 요청하였는데, 그 때마다 그 요구들을 다 들어줬다. - A정보통신에 큰 돈을 요구해도 되는 상황에서 '바보같은 놈이 또 바보같은 짓을 했다'
6개월 이상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서울대병원을 정상적으로 Open하고 나서야 하나씩 나머지 업체들을 스스로 관리하게 되었는데, 그 공백을 나스텍에서 보수 한푼도 없이 메워줬다.
‘이런 바보같은 놈(바보같은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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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정보통신과 진행했던 병원 Open과정을 살펴본다.
하나의 병원을 Open하기 위해서는
1. A정보통신의 영업사원, 2. 대리점 영업사원, 3. 나스텍, 4. 병원 이렇게 4업체가 연관돼 있었다.
먼저 병원에서 입찰공고.
A정보통신에서 나스텍에 입찰하기 위한 시스템구성을 요청.
나스텍에서 해당 병원의 담당자들과 협의해서 병원환경에 맞는 적절한 시스템 구성을 만들어서 A정보통신에 전달.
나스텍에서 병원 실무 담당자 설득.
A정보통신과 대리점에서 실세에 영업.
이렇게 해서 선정되고 나면
나머지는 모두 나스텍의 역할이었다.
미팅하고, 개발하고, 유지보수하고.....
그런데, 수익배분은?
서울대병원을 예로 들어보면
총 수입이 월 2천만원.
나스텍은 개발비 500만원으로 끝.
대리점은 월 200만원.
나머지는 모두 A정보통신 즉, 매월 1800만원 이상의 수익.
그런데 그 500만원을 깎기 위해서 계약서를 3번 썼고
첫 병원과 끝 병원의 Open이 1년여 차이가 나는데, 그것을 한꺼번에 하면서, 그것도 4.5개월 어음으로 했던 것.
결제하고 1년여를 또 무상서비스.
그 후에 또 월 2천만원이나 수입이 있는 업체의 유지보수를 월 30만원으로 책정.
그 30만원을 두어달 주고는 결국은 안주고 끝냄.
결국 개발비 조금 받고, 3년여를 유지해준 것.
그렇게 멍청하게 사업을 진행했는데도,
이렇게 아직도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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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신용카드 관련 사업은 하지 말자.
대신에 다른 것을 하자고 하면서 신용카드와 관련된 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 때, 이번 사건의 주범으로 2012년 검찰에 고발된 B씨와의 관계가 시작되었다.(현재는 수감되어 복역중)
당시 (지금도 그러는지?) 내가 근무했던, 내가 신용카드 관련 거래를 했던 A정보통신에는 일종의 줄이라는 것이 있었다.
B씨는 그 줄을 잘못서서 피해봤던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당시 A정보통신의 영업부에는 영업부장과 조직상에는 없는 실질적 영업부장이 있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당시의 영업부장은 따돌림을 당하는 상황. 영업부원들은 영업부장에게는 형식상의 보고를 하고, 실질적 영업부장에게도 보고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B씨는 조직상의 영업부장에게만 보고를 하는, 실질적 영업부장에게 줄 서지 않는 유일한 사원이었다.
그리고 영업부장이 쫓겨나고, 그 때 같이 B씨도 쫓겨났다.
B씨는 회사를 쫓겨난 이후, 공개적인 스토킹을 당했다.
B씨의 회사 동료였던 사람이 매일 B씨를 뒤따라 다니면서, 타 밴사로 가는 등을 막으려는 상황까지 경험하였고, 결국 A정보통신에는 한이 맺힌 사람이었다.
그런 B씨가 나를 찾아오면서, 다시 신용카드 사업이 시작되었다.
(A정보통신에 한 맺힌 두사람의 만남)
신용카드 사업은 안하겠다는 내게
신용카드 사업이 돈 되는 사업이고, 자기를 도와주면 사업을 키우겠다고 설명했다.
당시 B씨는 A정보통신에서 쫓겨나서, 이번 사건의 고발자인 나이스정보통신(당시에는 은행연합회가 주인)에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일단 계약직이지만, 실적을 내서 제대로 해보겠다며, 내가 도와준다면 많은 것을 할 수 있겠다는 제안이었다.
은행연합회 소유의 회사이고 계약직이어서 영업비를 쓸수있는 상황이 아니고, 내가 영업비를 도와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주 많은 시장이라고 설득하는 것으로
나와 B씨의 거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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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씨는 가장 먼저, 내가 관리하던 업체를 가자고 했었다.
(당시에는 A정보통신과 결별하고 무보수로 관리하던 상황)
그런데, ‘이런 바보같은 놈의 바보같은 결정’ 이 있었다.
“나는 내가 했던 것으로 다른 회사로 돌리는 작업은 하지 않는다”(뭐 이런 바보같은 놈이 있을까?)
그렇게 배신을 당하고, 무상으로 서비스하면서 그것으로는 수익을 얻지 않겠다?
그런데, B씨도 바보같이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나좀 제대로 설득해줬더라면, 지금처럼 내가 법정에서 교도소 가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될텐데. 그랬더라면, 많은 돈 벌었을텐데)
결국 내가 작업하지 않았던 업체만 작업하는 식으로 신용카드밴사업을 계속했다.
내가 작업했던 업체는 시장에서 알짜 중의 알짜였는데, 내가 그 곳으로 A씨를 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름 B씨에게 고마워하는 부분이 있다.
내 생각을 지켜준 것에 고마워하고 있다.
그냥 손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을, 내 도덕기준을 존중해서 들어준 것에 대해서는 고마워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를 좀 무시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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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점에 또 다른 공기업 성격의 B밴사에서도 찾아왔다.
나스텍이 A정보통신과 결별했다는 소식에 함께하자고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B밴사와 나이스는 서로 겹치는 부분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나는 두 회사와만 거래하겠다는 생각으로 나이스와 B밴사와 거래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두 업체의 좋은 점.
결제가 칼이다. 현금으로 날짜를 어기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매번 결제를 미루고 결제를 하면서도, 몇 개월짜리 어음으로 하는 A정보통신과는 차원이 달랐다.
또 좋은 점.
담당자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면이 좋았다.
일만 잘되면, 서로 고맙다며 거래하는 모습. A정보통신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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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같이
B밴사에도
내가 작업했던 업체에 대해서는 재작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적용했다.
B밴사의 사람들도 그런 바보 같은 원칙을 인정해주는 좋은 사람들(? 똑같이 바보들)이었다.
결국 알짜 업체들을 내가 나서서 방패막이가 돼준격.
배신당한 A정보통신을 거꾸로 도와주는 멍청한 짓.
그로 인해서 나이스나 B밴사에서도 특별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위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멍청한 짓을 10 여년 전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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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름 계속 이 분야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가면서 나이스나 B밴사의 영업에 도움이 되는 역할로 사업을 키워나갔습니다.
(지금도 이 분야에서는 제일 선진화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고, 계속 새로움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2003년을 맞으면서 드디어 흑자 전환을 했습니다.
이제 됐다.
고정수입으로 흑자경영이 가능해진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위기가 왔습니다.
이번에는 금강산 관광지구내의 전자결제시스템환경 사업(금강산 관광지구에 전자화폐로 결제가 가능한 환경을 구축하고 그 결제액의 3%를 수익으로 하는 사업으로, B밴사, 신한은행, 나스텍이 컨소시엄으로 나스텍이 개발 운영하는 것으로 시작된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잘 되는 일은 겹쳐서 오네!!!!!
하면서 들떠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시작하자마자
‘사스’로 중단,
‘정몽헌회장의 사고’ 로 중단...... 하면서 진행도 힘들었고
수익 예측이 잘못되어
결국 2004년에는 파산의 상황으로 더 이상 사업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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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경영이 더 이상 불가할 정도의 상황(미지급 급여, 미지급 장비 대금이 쌓여있고, 매월 적자가 수천만원)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 밖에 없다고, 정리하려 과거를 뒤돌아보는데
‘뭐 이런 멍청한 놈이 있어?’
남들은 다 돈을 뭉텅이로 버는 시장에서 가장 그 중심에 있었던 나는 계속 빚을 늘리면서, 결국 파산의 지경.
잘 나가는데 ‘금강산사업‘을 잘못 시작해서 망했다고 생각했었는데, 금강산이 아닌 사업가 답지 않은 멍청한 놈의 멍청한 짓 때문에 가족, 사원들, 심지어는 거래처들까지 힘들게 하는 ‘미친 바보같은 놈’ 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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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주가 꿈이라며 공부도 안하며(중학교 때 하위 5% 성적, 고등학교 때 하위 10% 성적) 학창시절을 보내고 농사짓다가 ‘우르과이라운드라는 수입자유화’로 농사의 꿈을 접고
서울로 와서 노가다, 공장을 전전하다가
‘나도 대학 갈 수 있나? 너는 안돼. 30분이상 책상앞에 앉아서 공부할 수 없잖아‘ 하다가
30분을 아프지 않고 책상에 않을 수 있으면 대학가겠다고, 공장에 휴가내고
정독도서관에 가서 ‘햄릿’을 빌려서 시계 올려놓고 ‘안아프고 30분’을 테스트했는데, 시계를 보니까 1시간이 지나서
“그래 대학가자” 고 9월에 실업고등학교에서도 내신 13등급이 대학 가겠다고 공부 시작해서 이듬해 ‘한양대학교 경영학과’에 합격.
‘1년 했는데, 이정도니까 1년 더하자. 내신이 13등급이므로 서울대는 못가지만, 더 좋은 학교를 위해서 1년 더하자‘ 고 하면서, 종로학원에서 1년 더 재수.
결과는 연고대는 안되고, 서강대 경제과 원서를 쓴 상황.
한양대에서 서강대로 바꾸자고 1년을 더했는가 라는 생각에서 ‘당시 졸업정원제 처음 실시로 장학재원이 넘쳐나는 상황. 하위 학교에서는 장학금재원을 신입생 뽑는데 투자’ 하는 상황이어서
4년간 등록금 무료에 더하여,
매달 일정액의 월급을 받는 조건으로 건국대학교 진학 이후에는 많이 건방지게 살았었다.
회사생활에서도
‘금성사 PaperLess 컴퍼니 프로젝트’
‘(MBC가 파업하는 상황이어서 진행했던)1992년 대통령개표방송’
‘만 2일만에 GateWay 만들어서 현대백화점압구정점 Open'
'컴퓨터발신형 우편 시스템‘
......
등 지금도 어떻게 그런 환경에서 그런 것이 가능했느냐고 자랑할 만한 많은 것을 했었고,
사업을 시작해서도 나름 거의 10년 가까이 잘 이어와서 안정적인 경영상태를 만들었다고 자랑스러워 했었는데,
재수없게 금강산사업을 시작해서 망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멍청하게 사업을 한 이상한 놈‘ 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 많은 좋은 기회를 스스로 멍청한 판단으로 날리고
이제 파산이라니?
가족들, 사원들, 거래처들,..... 심지어 내가 그렇게 미워하던 A정보통신까지.
그 때까지는 내가 잘해왔다고 생각했고, 잘해줬다고 생각했었는데, 모두 나 때문에 피해를 봤던 사람들이 내 주위에 널려 있었습니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일 밖에 없는 생활을 했던 것을 돌아보며,
내가 만든 회사에서는 ‘일 이외의 시간’도 있는 사원을 만들겠다며
야근은 없다.
일 독촉안하고.
샌드위치데이는 3일 연휴.
명절연휴에는 앞뒤로 1일씩 더 휴일.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원들에게 좋은 역할을 했다고 했었는데, 사원들도 나 같이 멍청한 사장 만나서 박봉에 시달리다가 이제 갈 곳을 찾아야 되는 상황. 여유를 준다고 지가 대부분을 하면서, 일을 배우지 못한 직원들은 어디로 가야하는지.....
가족들에서 시작해서 심지어는 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까지 미안해야 할 수 밖에 없는 멍청한 놈.
그런 나를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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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한 변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잘난 놈이 그렇게 열심히 해도 않됐다고 생각하며 힘들어했는데,
멍청한 놈이 그렇게 바보같은 짓을 많이 했는데도, 이 모습인 것.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운이 없었다 생각했었는데, 운이 좋았던 것이었습니다.
주변환경은 아주 좋았고, 살펴보니 아직도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놓으려다가 놓지 않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시작하려면
에스원, B밴사, 그리고 사원들 이 셋의 협조를 얻어야 가능했습니다.
1. 금강산사업을 하면서 B밴사에서 장비대금으로 받은 금액을 당겨써서 1년 이상 연체된 몇억원의 에스원에 지불해야하는 장비대금에 대해 에스원에서는 법무팀이 나선 상황.
에스원 법무 담당자에게 내 개인 재산이 있는데, 그것을 담보로 참아줄 수 있는가라는 제안에 1년을 기다려 주겠다는 응답(2005년 말까지 상환).
2. 직원들의 월급, 퇴직금이 밀려있는 상황에서 매월 할부로 1년에 걸쳐서 갚겠으니까 동의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준 직원들
3. 에스원, 직원들의 양해를 받았으니까, 회사에서 조치하지 않도록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준 B밴사 영업사원(B밴사에서는 나스텍에 매월 몇천만원을 지급하고 있었으므로, B밴사에서 에스원에 줄 비용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상황)
이렇게 세 그룹의 협조를 얻어서 2004년 말에 다시 시작했고, 그 첫해인 2005년에 다시 흑자전환.
그런데, 에스원 장비대금은 부동산이 팔려야 가능한 상황인데, 10월이 되기까지 임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 10월 중순 경에 구매자가 나와서 나름 할인해서 팔아서 에스원이 해결되면서 파산을 걱정했던 상황에서 벗어났습니다.
직원들 월급도 할부로 다 메웠고, 에스원 부채도 해결하였고
단기 수지로는 안정적인 흑자상태를 이루면서, 드디어 살아났다.
그 와중에서
그 때까지 신용카드 환경에서는 워낙 변수가 많아서 정산서비스가 불가하다고 하는 상황에서
‘나는 할 수 있다’ 고 만든 PLUSCCMS가 시장에서 호응을 얻어서 영업도 활성화되는 상황.
‘이제는 살아났다’ 며
그 동안 관계했던 분들게 연하장도 (2006년 새해인사글 http://cafe.daum.net/heiheihei/61rk/4) 보내면서 2006년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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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위기를 벗어나는데, A씨의 도움도 있었습니다.
회사가 어려운 상황을 나이스정보통신에 알려서, 나이스정보통신으로부터 5000만원을 차입하게 해줘서 살아나는데, 큰 힘이 되었었습니다.(2006년에 상환)
A씨는 지금 1심에서 4.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입니다.
A씨가 나이스정보통신에 계약직으로 입사할 당시, 나이스는 적자였고, 업계 4위 정도였는데, A씨가 영업책임자가 되면서 영업이 활성화되어서 곹 흑자전환되고, 2010년 경에는 업계 1위의 위치까지.
나이스가 은행연합회에서 개인에게 매각하면서, A씨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고, 2012년 한국신용정보(나이스의 모회사. 항상 임원은 모회사에서 임명. 나이스에서 A씨가 유일한 한국신용정보 출신이 아닌 사원에서부터 승진한 임원)에서 새 경영진이 부임하면서, A씨와 새로운 경영진과의 갈등이 시작되고, 결국 신용카드 밴 시장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인 개인 리베이트를 문제삼아서 회사에서 A씨를 비롯한 영업사원들(영업본부의 팀장 이상 거의 전부)을 검찰에 고발하면서, 사건이 시작된 것.
나는 A씨와 처음 영업활성화하자고 약속한 것도 있었고, 그로 인해서 살아난 상황에서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와의 관계를 끊었을 때의 위험부담 등으로 이어져오다가 신용카드시장의 영업환경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불법관계가 정리되었었다. 계속 생존을 걱정하는 상태가 그런 관계를 길게 하는 원인이기도 했슴.
그것이 제가 법원을 처음 구경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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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스 관련해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로 인해서 A밴사로 사건이 확대되었습니다.
2000년대 초중반때만 하더라도 신용카드밴 시장은 개인 리베이트가 관행처럼 이어졌었습니다.
그런 밴시장에서 A밴사 같은 경우는 개인 리베이트를 할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나스텍이 활용되었습니다.
영업과정에서 개인리베이트가 필요한 경우에, 나스텍에 그 역할을 부탁하는 경우었습니다. 물론 2006년 이후에는 그런 일을 새로 벌인 것은 없었지만, 신용카드밴 시장의 특성상, 또 나스텍의 서비스를 받으면, 다른 업체로 바뀌지않는 특성상, 그 처음의 약속이 계속 이어져서, 검찰조사과정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여기서 또 나의 미숙함에 의한 고객들의 불편이 있었습니다. 검찰조사 첫날, 그런 개인리베이트 용도로 활용되던 통장내역을 가져오라는 요청에 따라 통장내역을 뽑아보니까,
사업초기부터 그 통장만을 계속 활용하면서,
통장의 적요란에는 누구에게 주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자세히 표시돼 있었습니다.
검찰에서는
그냥 통장내역을 보면서,
'적혀있는 이 사람은 누구예요?'
물어보기만 하면 모든 것을 밝혀낼 수 있는는 상태의 통장으로 인해,
이번 법정에서 같이 나란히들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나스텍에서는 영업사원이 거의 없어서, 주로 밴사의 영업사원들이 영업한 것을 프로그램 설치하고 서비스 제공하는 식으로 이어와서, 가맹점을 직적 영업하는 것은 밴사 영업사원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래도 A밴사 사원들이 개인적으로 연루되지 않은 것은,
평생직작이 가능한 좋은 회사이기도 하지만,
신용카드밴 영업부문이 한직이고
(그 업체는 주로 내근이고, 갑으로서 진행하는 업무가 많음. 그런데 신용카드밴은 돈이 넘쳐나므로 영업사원들의 경쟁이 치열하므로 선호하지 않는 보직),
자주 순환하여 보직을 맞기는 조직 특성상 계속 이어서 가맹점을 상대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영업사원이 연결했지만, 곧 다른 부서로 옮겨가고, 그 뒤는 나스텍에서 이어가는 형식이어서 담당사원이 개인적인 리베이트에 연루된 것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부정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년퇴임까지 상대적으로 높은 연봉으로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상황에서, 3년 이내의 단위로 순환보직을 시키는 것. A밴사에서 배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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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스는 영업사원들이 가맹점들을 직접 지속적으로 영업관리하는 방식.
A밴사는 영업사원들이 가맹점들을 영업한 것을, 나스텍에서 관리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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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 밴사 중에서 내가 적극적으로 거래했던 업체는 2개 업체이다.
그 중에서 나이스 관련해서 20 여명이 재판을 받고 있거나, 수감 중이다.
나머지 밴사들에는 그런 불법적인 거래가 없었는가?
돈이 넘쳐났던 시장이었고, 개인적인 리베이트는 이번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공공연한 비밀상황이었었다.
나이스는 해당임원을 잡기 위해서 경영진에서 적극적으로 검찰에 협력하면서, 많은 불법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이지 나이스의 특별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에서 무감각하게 이어졌다는 변명도 했었다.
그런 불법 리베이트를 문제삼았던 나이스의 새로운 경영진에서 조차도,
그 짧은 기간에도 여전히 똑같이 불법 리베이트를 행했었다.
그런데 검찰은 그들을 기소하지 않았다.
10몇년 전부터 관행적으로 이어오던 것을 경쟁하기 위해, 회사를 위해 적극적으로 영업하면서 한 것과
그런 것은 나쁜 짓이라며 검찰에 고발하는 사람들이 한 범죄와 어떤 것이 더 나쁜 것인가?
나이스 영업사원들이 그 돈을 혼자서 썼을까?
물론 배달사고는 있었겠지만, 많은 부분이 영업적인 용도로 사용된다는 것을 믿었었다고 변명하고 싶다.
나이스는 경영진에서 적극적으로 검찰에 협력하면서, 많은 불법 사실이 밝혀졌지만,
돈이 넘쳐나는 시장에서 경쟁했던,
다른 밴사들에는 그런 불법적인 거래가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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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큰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습니다.
나로 인해서 밴사도 득이되고, 가맹점도 신용카드밴서비스 중에서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이므로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져 왔는데
이제 그 일로 인해서 교도소를 걱정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도 해봅니다.
대부분 12년 전에 약속했던 것을 지킨 것이었고, 새롭게 5년 이내에 시작한 것은 없다는 것으로도 변명을 해봅니다.
이번 사건으로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2005년에도 그랬듯 오히려 좋은 계기라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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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검찰 조사를 받은 이후, 오히려 사업규모를 늘려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원의 숫자도 10명 이상 늘림. 지금은 부동산들을 매물로 내놓고, 사옥을 준비하는 등의 사업적인 확장을 시도하는 중)
(
받은 선물 사용하기2 http://cafe.daum.net/heiheihei/90Du/130
받은 선물 사용하기1 http://cafe.daum.net/heiheihei/90Du/129
)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2만만평 이상의 땅을 유산으로 받았었는데,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그 중에서 몇천평 밖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처음 사업할 때도 1000만원 빌려서 시작했고, 계속 빚쟁이로 생활했습니다. 물론 땅이 있다는 것으로 빚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빚으로 생활하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땅을 팔았습니다.
팔 때도 빚을 다 갚을 정도를 팔지 않고, 버틸 수 없는 빚을 갚는 정도만 갚았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빚쟁이로 살면서, 한편으로는 땅이 많이 있었습니다.
작년 검찰조사를 받고 되돌아보면서, 또 ‘이런 바보 같은’ 이라는 생각을 했고
지금은 ‘쓰고 죽겠다’ 고 말하면서 적극적으로 사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업을 위해서 쓰는 것을 적극적으로 하자.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지만, 언제나 시작은 지금.
아내와 아이들.
이제 적극적으로 저를 돕고 있고
회사 사원들.
회사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상황입니다.
운이 좋아서 교도소에 수감되지만 않는다면, 2005년에도 그랬듯,
‘경험할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고, 감사합니다’ 라고 할 수 있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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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제 글의 끝은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내가 이 모습에 있는 것에 감사합니다.
죄를 짓고도 구속되지 않은 것에 감사합니다.
교도소에 수감되지 않을 방법을 찾으며 노력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이런 사장을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사원들에게 감사합니다.
이런 가장을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가족들에게 감사합니다.
내게 협조해주시는 많은 분들게 감사합니다.
부족한 내 능력에 과분한 환경을 누리는 것에 감사합니다.
이것이 내가 ‘행인’인 이유입니다.
첫댓글 나름대로의 변명 :
시장의 관행이었다.
대부분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된 것이었는데, 약속을 이어간 것이었다
2005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계기가 있었고, 2006년 이후 새로 시작된 불법은 거의 업섰고, 대부분 그 이전에 약속된 것을 지킨 것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 나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었다.
자서전 출간하셔도 될거 같습니다.
나중에 이글을 모두 엮어서 나스텍과 함께한 경영수업 책 한권 내시죠..
금강산 사업을 함께 하였던 인연이 있는 저로서는 금강산 사업에서 맺어진 인연이
좋은 결과의 밑거름이 되었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