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7:48-89
찬송가 515장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이스라엘 지휘관들의 봉헌물(48-83)
민수기 7장은 시편 119편에 이어 성경에서 두 번째로 긴 장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지파별로 드린 헌물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을 때 시간의 흐름을 잘 고려해야 합니다. 민수기 1장 1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라고 합니다. 즉 민수기 1장은 출애굽한지 1년 1개월이 지난 시점을 말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민수기 7장은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7장 1절을 보면 장막 세우기를 끝내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제단과 그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이라고 합니다. 어제도 다루었지만, 출애굽기 40장 17절을 보면 둘째 해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니라고 증거합니다. 즉 애굽을 떠난 후 1년 되는 날에 성막을 세운 것입니다. 따라서 민수기 7장 1절에서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끝내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일은 민수기 1장 1절보다 앞선 사건입니다. 그리고 민수기 7장부터 민수기 10장 10절까지는 계속해서 이 시점을 다루고 민수기 10장 11절에 와서야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올랐다고 합니다. 이렇게 중간에 다른 이야기들을 배치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군대로서 계수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레위기와 함께 조화롭게 읽어 보겠습니다. 성막을 세운 날, 즉 둘째 해 첫째 달 첫째 날에 성막과 그 기구에 기름을 바르고 각 지휘관들에게 헌물을 받기 시작합니다. 레위기 8장 10절-12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모세가 관유를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또 제단에 일곱 번 뿌리고 또 그 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또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거룩하게 하고 그렇다면 제사장 위임식 역시 같은 날에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9장을 보면 여덟째 날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와 위임식을 완수합니다. 즉 각 지파에서 헌물을 드리는 동시에 제사장 위임식을 함께 거행했던 것입니다. 성막이 세워지고, 제사장이 세워지고, 각 지파에서 헌물을 드렸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이 순간 12일에 걸쳐 즐거이 제사를 드리고 곧이어 유월절까지 지켰습니다. 가히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허니문 기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즐겁고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48-53) 일곱째 날에는 에브라임 자손의 지휘관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가 헌물을 드렸으니 그의 헌물도 성소의 세겔로 백삼십 세겔 무게의 은 쟁반 하나와 칠십 세겔 무게의 은 바리 하나라 이 두 그릇에는 소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웠고 또 열 세겔 무게의 금 그릇 하나라 이것에는 향을 채웠고 또 번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한 마리이며 속죄제물로 숫염소 한 마리이며 화목제물로 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라 이는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의 헌물이었더라
한 지파가 헌물을 드리면 그것을 취하여 그날에 제사로 드렸습니다. 그래서 총 12일이 걸리는 행사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일곱째 날 에브라임 자손의 지휘관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의 헌물로 시작합니다. 일곱째 날은 안식일이었지만, 헌물을 드리는 일은 지속됩니다. 그리고 모세는 특별히 성실하게 이 기록을 남깁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내용은 한 번만 기록하고 이하동문이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민수기를 영어로 하면 Numbers인데 사람 계수뿐 아니라 헌물 계수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이 행렬은 일종의 일람표로 기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양식은 성전에 보관해 놓는 예물 등을 그 크기, 성격, 값어치 등에 따라 기록하는 문서 작성 요령에 따른 것입니다. 여기서 성소의 세겔을 약 12그램 정도로 본다면 그들이 드린 기물은 소제물을 드리기 위한 1.5kg 정도의 은쟁반과 800g 정도의 은대접, 향을 담는 120g 정도의 금잔입니다. 그리고 번제물을 위한 수송아지 하나, 숫양 하나, 일년 된 어린 숫 양 하나, 속죄제물을 위한 숫염소 하나, 화목제물을 위한 소 둘, 숫양 다섯, 숫염소 다섯, 일 년 된 어린 숫양 다섯을 헌물로 바쳤는데, 물품을 값어치 순으로 정리한 것처럼 동물들의 경우에도 덩치가 큰 짐승부터 시작해서 점점 작은 짐승 순으로 제시합니다.
간혹 몇몇 병원 로비 벽면을 보면 후원자의 이름과 그 금액을 기록해 놓은 모습을 봅니다.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라야 뭘 저런 걸 해놨나 싶을 수도 있지만, 당사자나 그 가족이 보면 의미 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막을 완성하고 그 필요한 기물을 공급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두어 후손들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로 한 그날을 기리며 가슴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12일간 이어지는 각 지파의 헌물과 제사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을 알았을 것이고, 이후 두 번째 지키는 유월절과 첫 인구 조사를 통해 하나님의 군대로 거듭나게 됩니다.
아마도 지하철 역사를 다니시면서 연예인 생일을 축하하는 광고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주 앳된 연예인들 사진과 더불어 누구누구야 우리에게 와줘서 고마워, 태어나줘서 고마워 등등의 문구를 보면서 생소함을 느낍니다. 몇 백만 원에 달하는 그런 광고를 기꺼이 내는 이유는 그 사람이 보고 기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입니다. 또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알리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이것도 모자라 연예인들에게 소위 조공이라고 해서 값비싼 선물을 줄지어 보내는 팬들도 있습니다. 사실 연예인이 팬들보다 일반적으로 돈도 많고 좋은 물건을 접할 기회가 많을텐데도 굳이 그렇게 합니다. 저는 이런 문화를 잘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가끔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우리나라 팀을 승리로 이끌어 주면 고마운 마음이 들기는 합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 지휘관이 드린 헌물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모가 뛰어나거나 노래나 연기를 잘하기만 해도, 그리고 그들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 따뜻한 말을 던져도 그들을 동경하고 기쁨을 주기 위해 돈을 모아 생일 축하 광고를 하고 또 비싼 선물을 보냅니다. 연예인이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소유를 줌으로써 더 그 대상에게 충성심을 품고 그 대상을 더 기뻐하게 됩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는 예수님 말씀처럼 마음이 있기에 보물을 두고, 보물을 두기에 마음이 가는 법입니다. 연예인들은 그들과 함께하지도 않고, 그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주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팬들은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보물을 두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고, 영원히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잃지 않도록 붙들어 주신다고 약속하며 또 이루어주시는 하나님께는 얼마나 큰 감사를 드려야 마땅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그 높으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찾아오셔서 거주하신다는 사실에 감격하였고, 자신의 것을 드림으로 그 감사함을 표출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이러한 감사의 마음이 있는지, 하나님께 기꺼이 보물을 드릴 용의가 있는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에 대한 열망에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봉헌물의 총합과 회막에 들어간 모세(84-89)
84절부터 88절까지는 그 헌물과 제물로 드린 짐승의 총합을 기록합니다. 따라서 날마다 드린 양의 열 두 배에 해당합니다. 이 통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성소를 후원하는 일에 모두 균등하게 책임을 져야 함을 자각했을 것입니다. 큰 지파라고 많은 부분을 감당하지도 않고, 작은 지파라고 적은 부분을 감당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친 자로서 동등하게 그 책임을 다하여 몸 된 교회를 섬깁니다. 자신을 온전히 바친다고 할 때 그 절대적인 분량의 크고 작음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과연 남과 비교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있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배하는 감격에 겨워 자진하여 헌물을 드렸습니다. 이미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해 백성이 예물을 드릴 때 너무 많이 가져와 쓰기에 남음이 있어 가져오지 말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더 드리고 싶어 하였습니다. 드림이 기쁨입니다. 사랑하면 주고도 또 주고 싶습니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고봉밥을 퍼주는 마음, 고향집에 가면 바리바리 넘치게 싸주시는 어머니의 마음이 그에 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드리고도 또 더 드리고 싶은 이 마음이 우리에게 과연 있는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둡니다. 그리고 드리면 모자를 것 같지만 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셔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할 수 있게 도우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감사하며 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이러한 봉헌물은 그들이 제단에 나아갈 때 어떠한 절차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예로 작용합니다. 우리는 생활의 예배화를 많이 말합니다. 하지만 예배의 생활화 역시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방식으로 예배하는 일이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말씀에 의거하여 우리의 예배 태도 역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새번역은 이렇게 옮깁니다. 모세는, 주님께 말씀드릴 일이 있을 때마다 회막으로 갔다. 그 때마다 모세는, 증거궤와 속죄판 위에서, 곧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그 목소리를 듣곤 하였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모세는 회막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증거궤란 증거 즉, 두 개의 십계명 판을 담은 용기를 말합니다. 또 속죄소는 증거궤 덮개 위에 깔린 평판으로서 그 위에 그룹이라고 하는 천사의 형상 두 개가 있었습니다.
사실 성막의 가장 큰 의의는 하나님의 임재를 그곳에 붙잡아 두었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어제 수요성경공부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나눈 내용과도 유사한데, 성전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기보다는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서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이었습니다. 장막의 가장 큰 특징은 이동성에 있습니다. 장막은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성막 역시 정해진 제의 양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저기 있다는 위안을 누리는 곳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과 대화하며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전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귀중한 부르심을 주신 하나님께 응답하여, 고개를 들지 말라고 우리의 뒤통수를 때리며 이 세상에 눈 박고 코 박고 살라는 세상을 이기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중심 삼고, 마태처럼 이 나를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진리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가 기쁨으로 하나님께 헌물을 드린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께 기꺼이 드릴 수 있게 하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보다 더욱 큰 복과 기쁨은 없음을 알고 이 세상의 하나님 대용품에 우리의 귀한 시간과 삶을 소비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감사함으로 진리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헌물의 목록을 길게 작성한 이유를 묵상해 보십시오.
2. 하나님께 드림이 참된 기쁨이 되고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 은혜가 충만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때 나의 예배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자의적으로 예배하고 있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십시오.
4.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듣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께 나아가 대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계십니까?
(작성: 이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