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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집 제11권 / 시장(諡狀)
달성부원군 서공 시장(達城府院君徐公諡狀)
공의 성은 서(徐)이고 휘는 종제(宗悌)이며, 자는 효숙(孝叔)이고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고려 낭장(郎將) 한(閈)의 후손이다. 여러 세대를 내려와 휘 성(渻)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으로 선묘조(宣廟朝)의 명신(名臣)이 되었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 휘 경수(景需)는 전첨(典籤)을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휘 형리(亨履)는 첨정(僉正)을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문도(文道)는 사평(司評)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참봉(參奉)을 지낸 김정지(金鼎之)의 딸이자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지낸 김확(金鑊)의 손녀이고, 문과 급제하고 정(正)을 지낸 이지굉(李志宏)의 외손녀이며, 좌찬성을 지낸 이상의(李尙毅)의 외증손녀이다. 숭정(崇禎) 기원후 병신년(1656, 효종7) 3월 24일에 공을 낳았다.
자품이 순후하고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본래 청빈한 가문에 동생들은 대부분 어렸는데 대부인이 집안일에 골몰하느라 집안에 아이 울음소리가 가득해도 돌봐 줄 겨를이 없자, 공이 독서하고 난 여가에 매번 여러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온종일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16세가 된 신해년(1671, 현종 12)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공이 직접 노복을 이끌고 포천(抱川)의 농장으로 가서 밭에서 일하며 힘써 경작하니 온 집안이 도움을 받았다.
부모님의 연세가 더욱 많아지는데 다섯 형제들은 집이 가난하여 먹고살기에 바빠서 지방으로 흩어져 살았다. 그러나 공만은 부모님 곁을 떠나지 않고 매번 부모님의 부엌에 먹을 것이 자주 떨어질까 봐 근심하면서 온 힘을 다해 봉양하였다. 심지어 몸소 고향에 가서 널리 젖소를 구해 우유를 얻어다 죽을 쑤어 연이어 부모님에게 보내니, 부모님이 깊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늙은 부모를 봉양하는 효성이 우리를 감동시키는구나.”라고 하였다.
공이 농장에 머물던 어느 날 저녁, 문득 심장이 두근거리고 살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서 밭 갈던 노복을 불러 황급히 돌아와 보니 사평공이 이미 며칠 전부터 편찮은 상태였다. 때에 맞추어 약시중을 들었고 다행히 종효(終孝 어버이의 임종을 지킴)할 수 있었다.
초종(初終)과 염장(斂葬 염습과 장례)에 필요한 물품과 조석상식을 지내는 절차를 몸소 꼼꼼히 살펴서 조금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다. 매달 초하루가 되면 찾아가 성묘를 하면서 손수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거나 잡초를 제거하였으며, 종일토록 여막에 거처하며 죽만 먹으면서 애통함을 극진히 하였다.
슬피 곡읍(哭泣)하고 수척한 안색을 본 자들은 모두 슬퍼하면서 위태롭게 여겼으나 다행히 멸성(滅性)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니 공의 효성이 독실하여 신명(神明)이 도왔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대부인을 아침저녁으로 부드러운 낯빛으로 받들어 모친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렸다.
숭릉(崇陵 현종의 능)의 재실에 있을 때 지역이 어촌과 서로 가까워 공이 희귀한 물고기를 사서 날마다 어머니에게 들여보내니, 어부들 또한 효심에 감격하여 간혹 좋은 물고기를 헐값에 파는 자도 있었다. 기축년(1709, 숙종35) 봄에 대부인의 상을 당하였는데 공은 이미 노쇠한 나이였으나 항상 점악(苫堊 상제(喪制)가 거처하는 초막)에 거처하며 애통해하기를 아버지 상과 똑같이 하였으니, 친척과 동네 사람들이 공의 변치 않는 효성에 더욱 감탄하였다.
공이 어렸을 때부터 학업에 근면하여 주변에서 독려하지 않아도 부지런히 힘쓰며 게을리하지 않았다. 밤이 깊어 졸음이 밀려올 때면 꼭 연적을 베개 삼아 경계하였다.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 비록 이해하기 어렵고 까다로운 문장이라도 보기만 하면 대번에 외웠다.
일찍이 위양(渭陽) 교리(校理) 김환(金奐)의 집에서 청성(淸城) 김공(金公 김석주(金錫冑))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암송하다가 기억을 못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공이 묻는 대로 머뭇거리지 않고 외우며 한 글자도 틀리지 않으니 청성공이 감탄하며 기특하게 여겼다.
지학(志學)의 나이가 되어 온 힘을 다해 과거공부에 전념하니 문사(文詞)가 전아하고 넉넉하였으며, 《예경(禮經)》을 심히 좋아하여 밤낮으로 낭송했다. 침착하고 과묵한 성격이어서 비록 사람들이 모여앉아 잡다하게 장난치고 시끄럽게 떠들더라도 홀로 책 속에 파묻혀 강독을 멈추지 않았다.
교유(交遊)를 일삼지 않아 문을 닫아걸고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정묘년(1687, 숙종13)에 사마 양시(司馬兩試 생원시와 진사시)에 입격하자 동료들이 모두 공을 추중하였다. 조만간 높은 성적으로 급제하리라 기대했는데 끝내 급제하지 못하고 말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며 애석하게 여겼다.
갑신년(1704)에 왕실과 혼인을 맺자 공이 아침저녁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몸가짐을 삼가고 신칙하였다. 규례에 따른 문안 이외에는 절대 계집종을 궁궐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고, 집안의 말을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고 바깥의 말을 집안에 들이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공이 왕의 외척으로서 잘 처신한다고 칭송하였다.
이해 겨울에 사릉 참봉(思陵參奉)에 제수되었는데, 능졸(陵卒)을 어루만지며 아끼니, 능졸들이 비석에 새겨 추념하였다. 병술년(1706)에 명릉 봉사(明陵奉事)로 옮겼으며, 정해년(1707, 숙종 33)에 숭릉 직장(崇陵直長)으로 승진하였다. 임진년(1712)에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에 제수되었고,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ㆍ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승진하였다.
계사년(1713)에 임피 현령(臨陂縣令)에 제수되었다. 당시 남쪽 지방은 연이은 흉년으로 백성들의 생계가 크게 곤궁하였는데, 공이 정성을 다해 조처하여 곡식 수천 곡(斛)을 모아서 읍민(邑民)을 진휼하고, 또 남은 곡식으로 다른 지역의 유리걸식하는 자들에게 나눠 주니 목숨을 보전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암행 어사가 두 번이나 표창해야 한다고 조정에 보고했는데 공이 자급이 오르는 것을 혐의하여 극력 피하여 마침내 면하였다.
임피현 남쪽의 한 방(坊)은 백성들이 가난하여 소가 없으므로 대부분의 밭을 경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소를 마련하고 종자(種子)를 주어 그들에게 농사를 폐하지 않게 하였다. 어민들 중 가난한 자에게는 관에 바치는 공물을 헤아려 덜어 주고, 상인 및 장시(場市)의 세금도 아울러 견감(蠲減)해 주었다. 세시(歲時)에는 기로(耆老)에게 쌀과 고기를 내려 주었으니, 고을 백성들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복종했다. 병신년(1716)에 병으로 체직되었다.
정유년(1717)에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다. 당시 숙묘(肅廟 숙종(肅宗))가 온천(溫泉)에 거둥하기로 한 날이 박도했으나 삼강(三江 한강ㆍ용산강ㆍ서강)의 배가 미처 모이지 않아, 수부랑(水部郞 공조(工曹)의 낭관(郎官))들이 죄를 얻게 될까 두려워하면서 모두 체직되기를 도모하고 있었다.
공이 그 직임을 대신 맡자, 친척들과 벗들이 체직할 것을 권유하였는데 공이 개연히 말하기를 “이와 같은 때에 신하가 되어서 감히 회피할 것을 생각하겠는가.” 하고는 곧바로 여강(驪江)으로 나아가 강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배를 찾아 모아 마침내 준비가 미흡하다는 우려를 불식시켰다.
겨울에 신천 군수(信川郡守)에 임명되었다. 당시 총수참(蔥秀站)의 참사(站舍)에 불이 나서 남김없이 모두 타 버렸는데, 공이 백성들에게 돈 한 푼도 걷지 않고 몸소 관봉(官俸)으로 참사를 조성하여 새롭게 하였다. 기해년(1719, 숙종45)에 감영(監營 관찰사)의 뜻을 거슬러 체직되었다.
공이 상중에 있을 당시 집상(執喪)을 예절보다 지나치게 하다가 마침내 평생의 고질이 되었다. 이해 7월 이후로 증세가 더욱 심각해져 자제들이 의원을 불러 진찰받기를 청하였으나 공이 만류하며 말하기를 “살고 죽는 것이 운명에 달려 있으니, 의원과 약이 모슨 보탬이 되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때 잠저(潛邸)에 있던 중궁(中宮 정성왕후(貞聖王后))이 직접 와서 문후(問候)하려고 하자 공이 놀라 말하기를 “사제(私第)를 오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병이 악화되자 중궁이 숙묘에게 아뢰어 직접 와서 문후하였는데 병은 더 이상 손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이날 별세하니 바로 8월 3일로, 향년 64세이다.
규례에 따라 좌찬성에 추증되었다가 신축년(1721, 경종1)에 금상(今上 영조(英祖))이 세제(世弟)로 책봉되어 규례에 따라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갑진년(1724, 영조 즉위년)에 금상이 즉위하자 영의정에 추증되고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처음에 양근(楊根) 화다곡(花多谷) 묘좌(卯坐 정동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정미년(1727) 4월에 용인(龍仁)으로 이장하였다.
부인 잠성부부인(岑城府夫人) 이씨(李氏)는 고려의 벽상공신(壁上功臣) 잠성부원군(岑城府院君) 이공정(李公靖)의 후손으로, 집의(執義) 이집(李緝)의 7대손이자 통덕랑(通德郞) 이사창(李師昌)의 딸이다. 2남 4녀를 낳으니, 장남 명백(命伯)은 통덕랑 이제(李齊)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차남 명휴(命休)는 통덕랑 구성문(具聖問)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장녀는 진사 이중경(李重庚)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사인(士人) 신정집(申正集)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바로 중궁 전하(中宮殿下)이고, 다음은 사인 임거(林蘧)에게 시집갔다. 명백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덕수(德修)와 인수(仁修)와 신수(信修)이다.
명휴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노수(魯修)와 맹수(孟修)이다. 이중경은 2남 2녀를 두었으며, 임거는 1남 3녀를 두었다. 덕수는 현감 이현도(李顯道)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필복(必復)을 낳았다. 인수는 사인 한배명(韓配命)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다.
공은 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에서 태어나 문장을 잘 짓는 재주를 지니고도 끝내 재주를 펼치지 못한 채 지방관에 그치고 나이는 중수(中壽)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공이 생전에 받지 못한 보답을 후손에게 기대할 만하였다. 그런데 묘소의 풀이 채 묵기도 전에 공의 손자 덕수(德修)가 무옥(誣獄)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천고의 참혹한 화를 당하였으니, 하늘의 보답이 어쩌면 이리도 어그러진 것인가.
그렇지만 돈독히 성녀(聖女 정성왕후(貞聖王后)를 낳아 일국(一國)의 국모가 되어 우리 성상이 집안을 다스리는 것을 도와 나라의 무강한 아름다움을 열게 하였고 공은 증직(贈職)의 은혜를 받아 사후의 영예가 모두 지극하였으니, 만일 공이 두터이 선을 쌓고 깊이 경사를 길러 온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능히 이에 미칠 수 있으리오. 여기에서 천도(天道)가 어긋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변변치 않은 내가 소싯적에 이웃으로 살면서 공의 행실이 순수했음을 자세히 알았다. 지금 가승(家乘)을 취하여 조금 가감을 한 뒤, 태상시(太常寺)에 보내어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청한다. <끝>
[註解]
[주01] 정(正)을 지낸 이지굉(李志宏) : 이지굉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냈다. 《星湖集 卷65 載道壙誌, 韓國文集叢刊 200輯》
[주02] 멸성(滅性) : 《예기》 〈상복사제(喪服四制)〉에 “상중(喪中)에 슬픔으로 몸을 손상할지라도 목숨을 잃는 데 이르지 않게 하니, 이
는 죽은 사람 때문에 산 사람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이다.[毁不滅性, 不以死傷生也.]”라고 하였다.
[주03] 위양(渭陽) : 외삼촌을 뜻하는 말이다. 진(秦)나라 목공(穆公)의 아들 강공(康公)의 외삼촌이 진(晉)나라 공자(公子) 중이(重耳)인
데, 중이가 진 나라에 망명해 있다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강공이 태자로 있으면서 중이를 전송하여 위수의 북쪽까지 이르러 “내가
외삼촌을 전송하여, 위수의 북쪽에 이르렀네.[我送舅氏, 曰至渭陽.]”라는 시를 읊었던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詩經 渭陽》
[주04] 지학(志學) :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라는 뜻으로 ‘15세’를 가리킨다. 공자는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吾十有五而志于
學]”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注)에 예전에는 15세에 대학(大學)에 입학하였으며, 여기에서 말한 학문은 곧 《대학》의 수
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도(道)에 뜻을 둔 것이라고 하였다. 《論語 爲政》
[주05] 왕실과 혼인을 맺자 : 《국역 숙종실록》 30년 2월 21일 기사에,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이 서종제의 딸에게 장가들었다는 내용
이 실려 있다.
[주06] 집안의 …… 않았으니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바깥의 말을 문지방 안으로 들이지 않으며, 집안의 말을 문지방 밖으로 내
지 않는다.[外言不入於梱, 內言不出於梱.]”라고 하였다.
[주07] 숙묘(肅廟)가 …… 날 : 1717년(숙종43) 2월 6일에 약방(藥房)의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 등이 숙종의 안질 치료를 위해 온천에 거둥하는 일을 논의하였고, 예조(禮曹)에서 3월 3일로 택일
(擇日)했다. 이후 3월 3일에 서울을 떠나 온양으로 거둥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43년 2월 6일, 3월 3일》
[주08] 총수참(蔥秀站)의 참사(站舍)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1권 〈황해도(黃海道)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에 총수산(蔥秀山)은 부
의 북쪽 30리에 있으며 총수관(蔥秀館)은 중국 사신이 머무르던 곳이라고 한다. 총수참의 관사는 보산관(寶山館)을 가리키는 듯하
다.
[주09]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 서종제를 우의정에 추증하라는 내용이 《국역 경종실록》 2년 1월 10일 기사에 보인다.
[주10] 부인 …… 딸이다 : 잠성부부인에 대한 기사는 한국문집총간 195집에 수록된 《도암집(陶菴集)》 권44 〈잠성부부인 이씨 묘지(岑
城府夫人李氏墓誌)〉에 자세히 보인다.
[주11] 중수(中壽)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 80세를 살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이다. 《장자》 〈도척(盜跖)〉에 “인생은 상수(上壽)가 100세
요, 중수가 80세요, 하수(下壽)가 60세이다.”라고 하였다.
[주12] 덕수(德修)가 …… 당하였으니 : 1722년(경종2)에 발생한 임인옥사(壬寅獄事)를 가리킨다. 김창도(金昌道)ㆍ이정식(李正植)ㆍ
조흡(趙洽) 등이 승복한 초사(招辭)에서, 서덕수(徐德修)가 독약을 사용하여 임금을 시해하려는 역모에 참여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김용택(金龍澤)ㆍ심상길(沈尙吉)ㆍ이천기(李天紀)ㆍ정인중(鄭麟重) 등과 함께 국청(鞫廳)에 잡혀 들어가 심문을
당한 뒤, 군기시(軍器寺)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국역 경종실록 2년 5월 14일》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오항녕 이주형 강지혜 전형윤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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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達城府院君徐公諡狀
公姓徐諱宗悌字孝叔。達城人。高麗郞將閈之後也。累世至諱渻。判中樞府事贈領議政諡忠肅。爲 宣廟朝名臣。寔公高祖也。曾祖諱景需。典籤贈吏曹判書。祖諱亨履。僉正贈左贊成。考諱文道。司評 贈領議政。妣安東金氏參奉鼎之之女。都護府使鑊之孫 。文科正李志宏之外孫。左贊成尙毅之曾孫也。以崇禎後丙申三月二十四日生公。資品醇厚。孝友篤至。家素淸寒。而弟妹多穉弱。大夫人汩於家事。滿室呱呱。不遑顧復。公每於讀書之暇。看護羣穉。終日不暫離。及年十六値辛亥大無。公親率奴僕。就抱川庄所。服田力穡。擧家賴之。親年益高。而兄弟五人以家貧。衣食於奔走。散在外方。公獨不離親側。每以親廚屢空爲憂 。竭力供奉。至於躬往松楸。廣求乳牛。取酪作粥。連送親庭。父母深歎曰。此兒養老之誠。令人 感動。留庄未歸。一夕忽覺心驚肉顫。急招耕奴。蒼黃馳還。司評公愆和已數日矣。及時侍湯。幸得終孝。初終斂葬之具。朝夕祭奠之節。躬自檢察。俾無少憾 。每朔輒往省丘墓。手植松栢。親芟蓬蒿。終日居廬。啜粥致哀。哭泣之戚。顔色之毁。見者莫不哀而危之。幸不至於滅性者。得非公誠孝之篤而神明佑之耶。奉大夫人愉婉晨夕。甚適親意。其在崇陵齋室。地與漁村相近。公貿得魚族之稀貴者。逐日入送親廚。漁人亦感其孝。或有以輕價賣美魚者。己丑春丁大夫人憂。公年已衰。恒處苫堊。哀痛一如前喪。親戚隣里益 感其孝之不衰。公自幼少時。勤於學業。不待課督。孜孜不怠。夜深睡至則必枕硯滴以警之。聰明過人。雖佶屈聱牙之文。過眼輒誦。嘗於渭陽金校理奐座。淸城金公記誦左氏傳。有所遺忘。公應問誦無疑。不錯一字。淸城歎異之。年至志學。力攻擧子業。文詞典贍 。酷好禮經。朝暮吟哦。性簡默。雖稠人廣坐。雜戱紛聒。而獨沉潛書籍。不撤講讀。不事交遊。閉門罕出。丁卯中司馬兩試。儕流咸推重之。登上第朝夕期。而終莫之售。人皆嗟惜。甲申托姻天朝。公夙夜戒懼。謹飭自持。循例問安之外。絶不使婢隷出入闕中。內言 不出。外言不入。人皆稱公之善處戚畹。是年冬。除思陵參奉。撫愛陵卒。陵卒刻石追思之。丙戌移 明陵奉事。丁亥遷崇陵直長。壬辰除尙衣院直長。陞掌苑署別提。禁府都事。癸巳拜臨陂縣令。時南土荐飢。民生大困。公竭誠區畫。聚穀數千斛。以賑邑民。又以其餘。分俵他境之流丐。所全活甚多。繡衣再褒公嫌。其陞資力避乃免。縣南一坊。民貧無牛。田多不闢 。公買牛給種。使不廢農。漁戶之貧者。量减其捧。商賈及塲市之稅。並蠲减。歲時賜耆老米肉。縣人皆悅服。丙申病遞。丁酉拜工曹佐郞。時値肅廟幸行溫泉。期日甚促。三江船隻。未及聚集。水部郞恐得罪皆圖遞。公代其任。親友勸遞。公慨然曰如此之時。爲臣子敢思規避乎。馳進驪江。沿江上下。搜括船隻。卒無苟簡之患。冬拜信川郡守。時蔥秀站舍失火。凡百燒燼無餘。公不出民一錢。自以官俸造成而一新之。己亥觸忤營門遞。公當衰麻在身之年。執喪過節。遂成終身之疾。是年七月以後。證情添谻。子弟邀醫請診視。公止之曰死生有命。醫藥何益。時中宮在潛邸。欲親臨問候。公驚曰往來私第不便。不許。病甚 中宮稟于肅廟而臨候。則疾不可爲矣。是日捐舘。 寔八月三日也。享年六十四。例贈左贊成。辛丑今上封世弟。例贈右議政。甲辰今上卽位。追贈領議政封達城府院君。始葬于楊根花多谷卯坐之原。丁未四月。移窆于龍仁配岑城。府夫人李氏。高麗壁上功臣岑城府院君公靖之後。執義緝之七代孫通德郞師昌之女也。生二男四女。長命伯娶通德郞李齊女。次命休娶通德郞具聖問女。女長適進士李重庚。次適士人申正集。次卽中宮殿下。次適士人林蘧。命伯三男。德修,仁修,信修。命休二男。魯修,孟修。李重庚二子二女。林蘧一子三女。德修娶縣監李顯道女。生一子必復。仁修娶士人韓配命女。生一女。公生於簪纓世家。挾其詞華。終不得展其才。跡屈墨綬。而年未中壽。不食之報。可責後昆。而墓草未宿。公之孫德修橫罹誣獄。禍慘千古。天之報施。何其舛哉。然而篤生聖女。母臨一國。贊我聖上自家之治。以啓國家無疆之休。而公克受貤贈之恩。哀榮備至。倘非公積善之厚。毓慶之深。則曷能及此。此可見天道之不爽矣。不佞少接芳隣。備諳公內行之醇。今就其家乘。略加櫽括。歸之太常。以請易名之典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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