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구징(李耉徵) / 28世
[세 계] 익재공후→판윤공후 →청와공파
[생졸년] 1609년(광해군 1)∼1688년(숙종 14).
[문과] 효종(孝宗) 8년(165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4위
[생원진사시] 인조(仁祖) 17년(163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39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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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대년(大年), 호는 죽헌(竹軒). 경주 출생. 아버지는 상일(尙一)이며, 어머니는 아주신씨(鵝洲申氏)로 간(僩)의 딸이다. 7세부터 글을 배웠으며, 12세에는 숙천도호부사로 떠나는 할아버지인 경한(景漢)을 따라 숙천으로 갔으며, 연일(延日)에 귀양온 이유성(李惟聖)의 문하생이 되었다.
스승이 영천으로 이배되자 함께 갔으며, 스승의 아들인 이태운(李泰運)과는 동갑으로서 경쟁하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1636년(인조 14) 향시에 합격하고, 1639년 명경시와 사마시에 모두 합격, 진사가 되었으며, 1657년(효종 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권지성균관학유가 되었다.
이듬해 봉상시봉사, 1659년 박사겸봉사, 1660년에 율봉찰방(栗峰察訪)· 전적·병조좌랑을 거쳐 예조좌랑· 군위현감· 사헌부감찰· 진도군수·성균관직강· 옥구현감· 함안군수· 사제감첨정· 제용감정· 봉상시부정· 춘추관편수관 등의 직을 지냈으며, 1688년에 80세로서 부호군에 제수되고, 죽은 뒤 첨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죽헌문집(竹軒文集)》 3권이 있다. 아들 8형제를 두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國朝榜目 ◇竹軒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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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자 : 대년(大年)
◇생년 : 기유(己酉) 1609년(광해군 1)
◇졸년 : 무진(戊辰) 1688년(숙종 14)
◇본관 : 경주(慶州)
◇거주지 : 경주(慶州)
[이력사항]
◇문과선발인원 : 34명(甲科3名/乙科7名/丙科24名)
◇전력 : 진사(進士)
◇품계 :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 : 판교(判校)
[가족사항]
◇부(父) : 이상일(李尙一) / 進士試
◇조부(祖父) : 이경한(李景漢)/武科
◇증조부(曾祖父) : 이진(李津)
◇생가증조부(生家曾祖父) : 이홍(李洪)
◇외조부(外祖父) : 신한(申僴)
본관 : 아주(鵝洲)
◇처부(妻父) : 유현(柳現)(
본관 : 서산(瑞山)
[안항(鴈行)]
◇제(弟) : 이창징(李昌徵)
◇제(弟) : 이광징(李光徵)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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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내용]
종 목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1호 |
명 칭 | 경주이씨 양월문중 소장 고문서 및 전적 (慶州李氏 楊月門中 所藏 古文書 및 典籍) |
분 류 | 기록유산 / 문서류/ 관부문서/ 소지류 |
수량/면적 | 일괄(317점 2책) |
지정(등록)일 | 2007.01.08 |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양월리 777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경주이씨 양월문중 |
관리자(관리단체) | 경주이씨 양월문중 |
설명
이 고문서(古文書) 및 전적(典籍)은 경주(慶州)에 세거(世居)해 온 경주이씨(慶州李氏) 양월문중(楊月門中) 소장(所藏)의 교지(敎旨), 호구단자(戶口單子), 소지(所志), 완의(完議), 입의(立議), 유향소(留鄕所) 관련 고문서 및 필사원본류, 구강서원(龜岡書院) 관련 필사원본류, 죽헌집(竹軒集) 등이다.
이들 고문서(古文書)는 유일본(唯一本)으로서 관찬사료(官撰史料)의 미비점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특히 조선시대 유향소(留鄕所) 관련 문건과 경산 자인현 유향소(留鄕所) 분설(分設)에 따른 서목(書目), 보문평(普門坪) 개간(開墾)을 둘러싸고 야기된 갈등으로 품관(品官)과 역리(驛吏)들이 작성한 완의(完議)와 소지(所志) 등은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 및 전적 317점 2책을 일괄하여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
▲죽헌집(竹軒集)/필자 소장본(1911년 간행본)
▲통정대부 이구징 교지: 1688년(숙종 14) 음력 02월 05일
▲전적(典籍)
▲전적(典籍)
▲전적(典籍)
▲1667년(현종 8)년 3월 5일 교지
“丁未拾捌”(우측하단 별기)
敎旨
李耈徵爲通
訓大夫行司
憲府監察者
康熙六年 三月 初五日
1667년 이구징(李耈徵) 고신(告身)
[기본정보]
분류 |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고신 |
작성주체 | 현종, 이구징 |
작성지역 | 서울특별시 |
작성시기 | 1667년(현종 8) 3월 5일 |
형태사항 | 크기: 55 X 7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
소장정보 | 원소장처: 경주 양월 경주이씨 양월문중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양월리 현소장처: 경주 양월 경주이씨 양월문중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양월리 |
[안내정보]
1667년 이구징(李耈徵) 고신(告身)
1667년 3월 5일에 이구징을 통훈대부 행 사헌부감찰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통훈대부는 정3품 당하관의 관품이고, 사헌부감찰은 종6품직이다.
이구징은 같은 종6품의 군위현감을 2년 동안 재직하고 다시 내직인 사헌부감찰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경국대전』 예전에는 ‘문무관 사품이상 고신식’이 규정되어 있다.
문서에는 왕의 고유 임명권한을 밝히는 ‘교지’를 첫머리에 쓰고, 본문에 ‘인명+위+품계+관직+자’의 순으로 임명 내용을 기입한다. 관계와 관직에 차이가 날 경우에는 관직명 앞에 ‘행’과 ‘수’자를 넣어 구분하였다.
마지막에는 행을 바꾸어 중국연호와 발급일을 쓰고 연호 위에 ‘시명지보’를 찍어 임명당사자에게 발급한다. 이구징은 관품은 정3품계이고, 관직은 종6품직으로 관품이 관직보다 높기 때문에 조선시대 행수법에 따라 ‘행’을 관품 뒤, 관사 앞에 명시하였다.
『경주이씨세보』, 경주이씨종친회,
『경주이씨양월문중』, 한국국학진흥원, 성심, 2009
『죽헌선생문집』, 이구징, 경인문화사, 1997
『진단학보』 71, 한우근, 진단학회, 1981
정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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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1667년 3월 5일, 현종이 이구징을 통훈대부 행 사헌부감찰에 임명하는 문서
[내용 및 특징]
1667년(顯宗 8) 3월 5일에 李耈徵을 通訓大夫 行 司憲府監察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통훈대부는 조선시대 문신 정3품 당하관의 관품이고, 사헌부감찰은 종6품직이다. 이구징은 軍威縣監으로 있다가 2년 만에 사헌부감찰로 자리를 옮겨 이 문서를 발급받은 것이다.
문서 우하단에는 소자로 “丁未拾捌”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정미년에 발급한 문서로 이구징의 임명문서 중 열여덟 번째라는 말이다.
이 기록은 이 집안에서 이구징의 문서를 정리하면서 발급년과 문서의 순서를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는 臺諫의 署經을 거치지 않고 왕명에 의해 바로 발급하는 임명장으로, 4품 이상의 관원을 임명할 때 쓰인다.『경국대전』 禮典에 ‘文武官四品以上告身式’이 규정되어 있다. 문서에는 왕의 고유 임명권한을 밝히는 ‘敎旨’를 첫머리에 쓰고, 본문에 ‘인명+爲+品階+관직+者’의 순으로 임명 내용을 기입한다.
관계와 관직에 차이가 날 경우에는 관직명 앞에 ‘行’과 ‘守’자를 넣어 구분하였다. 마지막에는 행을 바꾸어 중국연호와 발급일을 쓰고 연호 위에 ‘施命之寶’를 찍어 임명당사자에게 발급한다. 이구징은 관품은 정3품계이고, 관직은 종6품직으로 관품이 관직보다 높기 때문에 조선시대 行守法에 따라 ‘行’을 관품 뒤, 관사 앞에 명시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구징이 1653년 權知로 성균관에 임명되어 1689년 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기까지의 관련 문서가 상당 부분 남아 있어 이구징의 관직 이동 경로 및 문서의 양식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01-18호에 등록되어 경주이씨 양월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구징의 문집인 『죽헌선생문집』의 「가장」에는, 같은해에 어머니의 3년 상을 마치고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최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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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잇는 교통네트워크 조선시대 이미 있었다"
조병로교수, 驛站관련 문서 찾아
[조선일보 유석재, 최순호 기자]
“사람이 오가고 묵고, 물자를 옮기고 사신을 접대했던 역참(驛站)은 전국에 500여개가 있었고 여기서 일하는 사람만 13만명이었습니다. 국토 곳곳에 뻗친 교통 네트워크가 조선시대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교통사(交通史) 전문가인 조병로(趙炳魯) 경기대 사학과 교수가 최근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찰방해유(察訪解由) 문서’를 찾아냈다. ‘찰방’이란 조선시대에 각 도(道)의 역참을 관리하던 종6품의 관직이며, ‘해유’란 재직 중 책임을 완수했다는 일종의 인수인계 증명서다.
가로 270㎝, 세로 40㎝ 크기의 이 문서는 찰방 이구징(李耉徵)이 1660년(현종 1년) 3월 지금의 충북 청주 시내에 있던 율봉도(栗峯道) 찰방에 부임해 8월에 교체된 사실을 적어 충청도 관찰사에게 보낸 것이다. 왜 이 자료가 중요할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시대 역의 건물 구조가 적혀 있습니다.
기와집과 창고건물 등을 합쳐 모두 89칸으로 상당히 큰 규모죠. 비치해야 할 물품들도 매우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율봉역이 관리하는 역마(驛馬)는 모두 134필. 이 말들은 상등·중등·하등으로 분류돼 관내 17개 작은 역으로 보내진다. “역참 제도는 중앙과 지방이 서로 신속하게 정보를 전달받을 수 있는 사회간접자본이었습니다. 이 제도가 17세기 당시에 상당히 완비된 상태였음을 이 문서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조 교수는 2002년엔 국내 처음으로 ‘한국역제사’를 써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 옛길 문화의 원형을 복원하는 디지털 콘텐츠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역참 유적의 자취가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옛길이야말로 선조들의 국토관리와 교통 시스템 운영의 지혜를 알 수 있는 장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