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좌(李台佐)
[생졸년] 1660년(현종 1) ∼ 1739년(영조 15) / 수(壽) 79歲.
[문 과] 숙종(肅宗) 25년(1699) 기묘(己卯) 정시(庭試) 병과(丙科) 3위
[생원진사시] 숙종(肅宗) 10년(168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48위
▲아곡(鵝谷) 이태좌(李台佐)선생 초상화(肖像畵)
■ 先考忠定公墓誌
男敬倫識。昌寧曺允亨書。
先考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府君好李氏。諱宗城。字子固。號梧川。慶州人。新羅佐命元臣謁平後也。五世祖領議政文忠公白沙先生諱恒福。曾祖吏曹參判諱時術。祖刑曹參判文敬公龜川先生諱世弼。考左議政忠定公諱台佐。妣貞敬夫人南陽洪氏。觀察使諱得禹女也。府君以肅宗壬申十一月十三日酉時生。辛卯中進士。今上丁未。擢文科。壬子陞通政。丙辰嘉善。癸亥資憲。甲子正憲。壬申拝相。歷官侍講院說書,弼善,弘文館正字,著作博士,修撰,校理應敎,副提學,司諫院献納,大司諫,司憲府大司憲,承政院承旨,都承旨,成均館大司成,漢城府左右尹,吏曹佐郞,參議,參判,判書,戶曹參議,參判,禮曹判書,兵曹佐郞,參知,參議,參判,刑曹參議,參判,判書,工曹參判,判書,議政府左議政,領議政,中樞府判事,領事。兼帶則知製敎,說書,司書,文學,校書,校理,東學西學中學漢學敎授,副捴管,同知義禁,成均館事,藝文館提學,知經筵事,世子左右賓客,守禦使,扈衛大將, 十八司提調。外職則北評事京畿都事安城郡守廣州府尹,京畿忠淸平安咸鏡道監司開城廣州留守。惟開城不赴。奉命按廉七路。道試關西。己卯正月十二日。考終于正寢。葬于豊德治東鵲谷庚坐原。元配坡平尹氏。判官諱寀女。生以癸酉。卒以丁亥。繼配達城徐氏。判書諱文裕女。生于癸酉。卒于壬戌。並祔焉。三娶靑松沈氏。學生諱墰女。徐夫人二女適都事崔弘簡,進士趙宗鉉。不肖敬倫以府君從弟判書諱宗白子。爲府君後。嗚呼。府尹立朝三十年。正道自持。經術政事。茂績內外。名德雅望。冠冕當世。遭際聖主。 位至上相。生則奬之以魏徵,李綱。沒則悼之以至老篤忠。恩言如綍。昭垂來許。尙論君子。庶有徵於斯焉。小子蒙無知識。不敢猥有稱述。只謹書官歷系承。納諸壙上。攀號罔極。嗚呼痛哉。
<끝>
梧川先生集附錄卷之五 / 墓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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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선고(先考) 충정공(忠定公) 묘지명(墓誌銘)
돌아가신 아버님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로 퇴임하신 봉조하(奉朝賀) 부군이시며, 성은 이씨(李氏), 휘는 태좌(台佐), 자는 국언(國彦), 호는 아곡(鵝谷)이시니 경주 사람이다. 신라의 좌명원신(佐命元臣) 휘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영의정 문충공 백사(白沙) 이항복, 관찰사 남각 박동설, 대사헌 무당 홍이상, 좌의정 월사 이정구, 영의정 상촌 신흠이 실제로 부군의 내외 고조부가 된다. 백사의 손자인 이조참판 휘 시술(時術)이 할아버지이고, 문경공 귀천(龜川)선생 휘 세필(世弼)이 아버지이며, 남각의 손자인 예조참판 세모(世模)가 외할아버지이다.
정경부인 반남 박씨가 어머님이다. 부군은 현종 경자년(1660) 11월 3일 오시에 태어났다. 갑자년(1684)에 진사에 합격하고 기묘년(1699)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무자년(1708)에 통정대부로 올랐고, 갑오년(1714)에 가선대부, 임인년(1722)에 자헌대부, 계묘년(1723)에 숭정대부에 올랐으며, 무신년(1728)에 정승(상신)에 임명되었고, 병진년(1736)에 물러나 봉조하가 되었다.
예문관 검열·대교: 시강원 사서·문학: 홍문관 수찬·교리·응교; 사간원 정언·대사간: 사헌부 지평·집의·대사헌: 승정원 승지: 장례원 판결사: 한성부 우윤: 병조 좌랑·정랑·참지·판서: 이조 정랑·참의·판서: 형조 참판·판서: 공조 참의·판서: 호조·예조 판서: 의정부 사인·우의정·좌의정: 중추부 판사를 역임하였다.
지제교, 설서, 사서, 문학, 필선, 교서, 교리: 동학·서학·한학 교수: 지경연춘추관사: 판의금부사: 세자 좌우빈객, 도총관, 진무사, 수어사, 금위대장, 호위대장, 기사당상, 14사 제조 등을 겸임하였다. 외직으로는 북평사, 강원감사, 풍덕·남양 부사, 강화 유수를 지냈다. 명을 받들어 영남을 염찰(암행어사 등)하고, 외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기미년(1739) 3월 25일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셨다. 풍덕현 동쪽 화곡리 자좌(子坐, 북쪽을 등진 방향) 언덕에 장사 지냈으며, 정경부인 홍씨가 합장되었다. 부인은 남양의 대성(大姓)으로 관찰사 휘 득우(得禹)의 딸이며, 우의정 휘 중보(重普)의 손녀이고, 관찰사 충렬공 휘 명구(命耈)의 증손녀이며, 부제학 김경여(金慶餘)의 외손녀이다. 정숙하고 예의가 있어 일가친척들이 칭송하였다. 기해년(1659)에 태어나 임인년(1722)에 돌아가셨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맏이는 불초한 나(이종성)이고, 다음은 종원(宗垣, 정랑)이다. 딸 둘은 군수 윤희계(尹煕啓)와 진사 신호(申濩)에게 시집갔다. 서녀는 김상두(金尙斗)에게 시집갔다. 아아! 부군께서 조정에 서신 지 40년에 이름과 덕망이 무성히 드러났고, 슬픔과 영광이 지극하였다. 우리 전하(영조)께서 조정 가운데서 추념하며 전교하시기를,
"이 봉조하는 순수한 충성과 큰 덕을 지녔으니, 쇠락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라고 하셨고, 또 전교하시기를,
"이 봉조하는 한 움큼의 붉은 마음(일국단심)으로 두 조정(숙종·경종)을 거쳐 나(영조)에게까지 이르렀다. 지위가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나 조용히 물러났고, 성품이 맑고 단아하며 독실하였다. 정성스럽게 위를 충성으로 섬겼으니, 비록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겪어서도 물들지 않고 당파를 만들지 않아 온 세상이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소나무와 잣나무, 강한 풀(송백경초)이라 할 만한 재상이다."라고 하셨다. 이토록 칭찬하고 총애하신 말씀이 해와 별처럼 빛나 국사에 기록되었으니 백세토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소자(이종성)가 불초하여 선군(부친)에 대해 다 알기 부족하나, 다만 가계와 관직 경력의 대강을 기록하여 광상(무덤 위)에 묻는다.
이어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거듭 성주(임금)의 은혜로운 말씀을 삼가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고한다. 뒷날 보는 이들이 내가 감히 어버이에게 사사로이 아첨한 것이 아니라, 이곳에 증거(임금의 말씀)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아아, 슬프도다! <끝>
국역 이상훈(李相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