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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安東) 병산서원(屛山書院) 및
봉화(奉化) 닭실마을(酉谷)을 가다.
글 쓴 이 都 寅 高 枓 永
6월12일, 대지는 침묵으로 고요한데... 오늘따라 날씨는 더 후덥지근하도다!
간단히 조반을 들고는 여러 가지 준비물을 챙겨 차에 도착하니 김병무 전 회장님께서는 선착으로 도착해 계신다.
이것 저것 준비물을 점검하는 동안 한분 두분 연이어 모든회원님들이 속속 도착하시고, 총무님(김상철 전 회장님)은 승용차에 가득(준비물)싣고 부부함께 도착하신다. 중식(中食)은 홍여사님(남산산악회원)에게 주문하여서 제시간에 도착하니... 반갑기 그지없다!
오늘은 “서원회(西元會 : 서문시장 전 회장단모임)”의 ‘부부동반 야유회행사’가 있는 날이다. 청춘에 상계(商界)에 몸담아서 서문시장 발전과 활성화에 노력을 경주해 오신 분들이라, 봉사정신과 상인들에 대한 사랑이 남달리 투철하신 분들이다.
올해는 예년과 달리 ‘답사를 겸한 야유회 행사’를 하기로 결정하여서 차는 안동으로 신나게 달린다! 김총무님의 진행으로 전호경 회장님의 간단한 인사말씀이 계신후 준비해온 음식물들을 골고루 나눠드시니... 차내 분위기는 화기애애(和氣靄靄)하고, 차창밖으로 다가오는 산천들은 푸르름으로 한껏 부풀어 있어 보는 눈이 다 시원하도다!
이런 저런 여담(旅談)으로 차내는 시끌벅쩍한데 차는 어느덧 남안동 IC를 벗어나 금계리(錦溪里)로 달린다.
930번 지방도를 따라 30여 분을 달려 “마늘재(해발 약 320고지)”정상에 이르러 잠시 조망(眺望)하는데... 지근한 거리에 ‘검무산(劍無山331.6m)’이 눈앞에 우뚝하고, 청룡(靑龍 왼쪽)방향으로 수려(秀麗)한 정산(289m)과 백호(白虎 우측)방향으로 미려(美麗)한 거무산(227m)이 아름답게 양 날개를 펼치며 오롯이 감싸 안으니... 그 앞으로 가곡리, 산합리, 갈전리의 넓고 풍요로운 들이 펼쳐져서 “신도청 이전지”로는 좋은 길지(吉地)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그 앞으로는 낙동강이 휘돌아 감기우고, 아름다운 시루봉(169.8m)이 적당한 거리에서 안산(案山)으로 봉긋하게 솟아있고 그 너머로 봉화산(401m), 마늘봉(361m)들이 조산(朝山)으로 찬란히 빛나도다!
검무산(劍無山331.6m)은 백두대간의 봉화 문수산 부근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져 내려 안동의 진산(鎭山)인 학가산(870m)을 지나 다시 보문산을 거쳐 검무산에 이르고, 다시 그 여맥을 낙동강에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문수지맥’이라 한다.
아울러 조산(朝山:마늘봉,봉화산)으로 감싸주는 산들은 낙동정맥의 “내연산” 부근에서 서쪽으로 보현산, 팔공산을 거쳐 그 잔여지맥(殘餘支脈)들이 이곳 조산으로 이어져서... 백두대간의 정기와 낙동정맥의 정기가 마주하여 어우러지니... 어찌 길지(吉地)라 하지 않으리오! 여러 회원님들께서도 고개를 끄덕 끄덕 하시면서 모두들 공감하시는 눈치다!
비탈진 고갯길을 굽이굽이 돌아 풍천면 ‘하회마을’을 돌아드니... 언뜻 언뜻“하회촌(河回村)”의 고풍스런 모습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겸암정사 입구에서 잠시 나려 오솔길을 따라 10여 분을 걸어드니... 높다란 강언덕에 고풍스런 정자(겸암정사)가 숲속에서 은근히 자태를 뽐내고 있슴니다! 입구에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선생의 거대한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고, 겸암정사(謙巖精舍) 바로 옆에는 겸암(謙巖) 류운룡(柳雲龍:1539~1601)선생의 시비가 입석(立石)으로 세워져 있으며, 정사(精舍) 입구의 한켠에는 누렁이가 빈번(頻煩)한 답방객(踏訪客)에 지쳤는지 개집에서 꾸벅 꾸벅 졸며 경계를 늦추고 있으니... 한결 마음이 편하도다!
겸암정사는 겸암 류운룡이 1567년에 세워 도학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르던 곳으로 2층 누마루에 정면4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 형식의 건물이다. 후손의 말씀에 의하면, 부재(部材)는 봉화 춘양목을 사용하여서 그 단단함이나 결이 고와 건축의 백미라 하시며, 게다가 세월의 무게가 더하여 고풍스런 멋을 풍겨 주신다.
좌우로 크기가 다른 방 2개와 가운데 우물마루를 깔았으며,앞쪽으로 빙 둘러 난간대를 설치해 놓아 고졸(古拙)하고도 단아(端雅)한 미(美)를 볼 수 있도다! 아울러 뒤뜰에는 살림집의 공간이 연이어져 있고, 언덕 아래는 하회마을을 돌아 흐르는 낙동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정사(精舍) 주위로는 아람드리 거목들로 둘러 싸여서 고즈넉한 정취와 더불어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은둔자의 공간으로는 더 없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능허대(凌墟臺)를 한바퀴돌아 정사 2층으로 오르니... 서애 선생 후손께서는 원로회원님들을 잠시 쉬었다 가시라면서 선조님의 자랑에 입에 침이 마르게 열변을 토하신다!
앗뿔사! 이러다간 답사일정에 큰 차질이 나는데... 회원님들에게 곁눈짓을 보내면서 서둘러 부용대로 향합니다.
부용대(芙蓉臺)로 가는 오솔길은 그윽한 솔향기가 코 끝에 즈며들고, 옛 선현들의 발자취가 녹아 있어 향기롭기 그지없다. 오를수록 ‘하회촌(河回村)’의 정겨운 모습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높은 대(臺:부용대) 아래는 낙동강물이 거대한 비단폭을 펼쳐놓은 듯 도도히 흐르고 있슴니다!
차례 차례 회원님들이 도착하시니, 모두들 탄성을 지르면서... “이야! 여기는 처음 와본데이! 참좋다! 참좋아!”를 연발하신다! “여산(廬山) 진면목(眞面目)이 여긔야 다 뵈나다!”라드니... 부용대(芙蓉臺)에 오르니 ‘하회의 진면목’이 한눈에 다 뵈도다!
얼마간 넋을 놓고 바라보니 시원한 강바람이 산들 산들 불어와서 유월의 강렬한 땡볕도 잠시 비켜가는 듯 합니다. 질펀하고도 옹기종기 모여사는 “하회촌”의 모습들이 16세기와 21세기를 동시에 넘나드는 듯... 고금(古今)의 시차(時差)를 결코 느낄 수 없으며, 있는 그대로가 풍요롭게 느껴집니다!
지세(地勢) 또한 특이해서 혹자는 “자루달린 다리미형”이라고도 하고, 풍수적으로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연꽃이 물위에 뜬 형상)”이라 일컬어지는데,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요, 낙동강이 마을 전체를 감싸흐르니, 이런 형국을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이라 하며, ‘물돌이동’을 한자로 하회(河回)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땅모양이 “행주형(行舟形:배가 나아가는 모양)”이어서 마을에서는 샘을 깊이 파지도 못하고 오랜세월 물을 길어다 먹었다 하며, 마을 북서쪽에는 인공조림(人工造林)한 “만송정(萬松亭)”의 넓은 솔밭이 있어, 방풍(防風), 방수재(防水災), 방사(防沙) 효과를 지니고 있으며, 그보다 숨은 뜻은 풍수적 비보림(裨補林)으로 수구(水口)의 물빠짐을 가려주는 역할이 더 크다 하겠슴니다.
지금은 풍산 류씨들의 집성촌이 되었지만, 초기에는 김해 허씨가 마을을 개척하고, 뒤이어 광주안씨가 일가를 이루었으며, 류운룡과 류성룡의 6대조인 전서공 류종혜대에 길지를 찾아 하회(河回)로 이주하여 크게 번성하니, 허씨와 안씨들은 차츰 몰락하여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류씨들이 정착하는데는 풍수에 밝은 어느 지사(地師)의 조언에 따라 여러대에 걸쳐 마을사람들과 길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등 큰 공덕을 쌓은 후에 얻은 길지라 하니... 가문의 번성은 물론이요, 선조님들의 음덕으로 불세출(不世出)의 인물이 나온 것이로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 인심은 다를바가 없어서...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드니... 과연 허언(虛言)이 아님니다 그려! 모든 회원님들이 단체로 기념촬영을 마치고 옥연정사로 향합니다.
옥연정사 가는길은 경사가 심하여서 모두들 조심! 조심! 혹여나 다칠세라! 힘들어 하심니다. 서원회가 20여 년전 처음 발족될때만 해도 모든회원님들이 기운이 펄펄한 청춘이었는데... 세월도 무심하여서 두분은 벌써 타계하시고, 대부분(50대에서 70대 후반까지) 원로하신분들도 많이 계셔서 스릴 넘치는 답사는 계획하기 힘듬니다.
나지막하고 좁은 출입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서니 낯익은 관리인이 바지런히 움직이신다. 마당 한켠에 고송(孤松)은 해묵은 연륜(年輪)을 보여주시는 듯... 생육상태가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옥연정사(玉淵精舍)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선생이 노후에 학문을 닦고자 지어진 정자로서, 관직에서 파직된 후 이곳에서 “징비록(懲毖錄:1592년 임진란 당시에 영의정으로서 몸소겪은 상황을 기록함)”을 저술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곳이라 선생의 높은 덕망과 인품이 느껴지는 것 같슴니다. 정자 앞으로는 넓은 모래사장과 그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며, 넓은 평야는 머무는 사람에게 참으로 여유로움을 가져다 주심니다.
모든 회원님들이 그저 좋다! 좋다!를 연발하시면서 정사(精舍)의 마당을 왔다 갔다 하심니다.
선생은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 이황선생의 양대 제자의 한사람으로 25세에 문과에 급제한뒤 승정원, 홍문관, 사간원 등 관직을 두루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영의정 당시에도 이순신 장군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손수 지어주고 실전에 활용하도록 했다 한다. 이 외에도 [신종록], [영모록],[지행설] 등을 지어 청사에 길이 빛날 업적을 남기셨으니... 그의 위패를 병산서원에 모셔서 영구토록 인류의 스승으로 숭앙을 받고 계심니다.
병산서원가는 길은 아직도 비포장으로 자연 그대로이다. 혹자는 “포장을 하지, 와 이래 먼지가 나도록 놔두노!”라고 불평을 하시는분들도 있다. 하자! 말자! 의견들이 분분한데... 필자는 ‘자연 그대로 두자!’입니다.
서원에 도착하니 차량도 사람도 넘쳐난다. 회원님들도 차츰 차츰 답사의 열기가 높아져서 임하는 자세가 자못 진지하시다. 복례문(復禮門)을 들어서니 병산서원의 상징이라 할만한 “만대루(晩對樓)”가 정면 7칸의 길다란 건물이 마주하고, 그 밑으로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지나면 중심건물인 입교당(立敎堂)이 “병산서원(屛山書院)”이라는 커다란 편액을 달고 장중히 서 있으며, 정면5칸 측면2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동쪽방은 원장이 기거하던 명성재(明誠齋)이고, 서쪽의 조금 더 큰 2칸짜리 방은 유사들이 기거하던 경의재(敬義齋)이며, 마루는 원생들에게 강학을 하던 공간이다.
입교당 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뜰아래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던 건물이 좌우에 나란하고, 맞은편 축대아래는 아래층이 축대높이와 비슷한 2층으로된 만대루가 길게 가로질러 지어져 있으며, 그 너머로 “청천절벽(晴川絶壁)”이라는 병산(屛山)이 솟아 마치 병풍을 길게 펼쳐놓은 듯... 수려하게 솟아있다.
만대루 기둥사이로 언뜻 언뜻 흐르는 강물이 보이고, 화산(花山)아래 지어진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국이다. 건물의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위의 자연환경이 워낙 뛰어나서인지 서원내의 꾸밈은 비교적 단조롭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선생과 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을 배향하고 있으며, 모태는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1572년에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한다.
임진왜란때 불탔으나 광해군 2년(1610)에 류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를 중심으로 한 사림(士林)에서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여 존덕사(尊德祀)를 짓고 향사 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은 철종 14년(1863)의 일이며, 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폐철되지 않고 남은 47곳 가운데 하나이다. 얼마전 까지만 하드래도 만대루(晩對樓)에 올라 주변의 풍광을 볼 수 있었건만 답사객이 많아 그 훼손을 염려해서 인지 지금은 “출입금지”라 회원님들에게 더 멋진 풍광을 보여 드릴 수 없슴이 못내 아쉽슴니다 그려! 오래 오래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안동 서후면에 학봉종택으로 향합니다.
34번 국도를 타고 30여 분을 달려 서후면 금계리에 이르니, 지방도로를 새로 높여서 인지 학봉종택이 훤하게 내려다 보인다.
안동의 진산(鎭山)인 학가산(870m)에서 동남쪽으로 작은 지맥이 흘러나와 천등산(574m)을 거쳐 금계리 학봉종택의 뒷산에서 아름다운 아미산(蛾眉山)으로 그맥을 떨구고 있으며, 청룡(靑龍)보다는 백호(白虎)가 길게 뻗어나와 지근한 거리에서 안산(案山)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으니 참으로 길지(吉地)로다! 연(連)하여 명당 앞쪽으로 우(右)에서 좌(左)로 실개천의 명당수(明堂水)가 흐르고 있어 지세(地勢)를 더욱 감싸주고 있슴니다.
높다란 솟을 삼문(三門)에는 “학봉종택(鶴奉宗宅)”이라는 편액이 달려있고, 마당에는 잔디가 깔리고 수석과 아름다운 조경수(造景樹)가 심어져 있다. 수년전만 하드래도 흙마당에 몸채와 기념관인 운장각(雲章閣), 사랑채, 사당 등 비교적 단촐하였는데, 2~3년사이 많이도 단장을 하였다.
모두들 학봉종택에서 느끼는 아름다움과 고풍스러움에 감탄을 연발하면서, 명당 길지의 기운을 많이 받아 가자며 이곳 저곳 거닐며 산책하신다. 현대식 건물이 아무리 편리하고 실용성이 좋다고들 하지만, 고택을 답사할 때 마다 느끼는 것은 한옥만큼 자연친화적이고 사람이 살기에 정감이 가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듬니다.
종택안에 있던 기념관인 운장각(雲章閣)을 대문밖 종택옆에 새로 지어서 학봉선생의 유품과 고문서 등을 따로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내에는 보물 제905호로 지정된 고문서 56종 261점과 제906호로 지정된 17종 241점 등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학봉(鶴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내앞의 의성김씨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공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이곳으로 분가해 왔으며, 서애 류성룡과는 퇴계 이황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을 하였다.
1568년 문과에 급제 했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임금 앞에서도 직언을 굽히지 않았고,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도 머리를 수그림이 없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전에 왜국에 부사(副使)로서 갔다 돌아온 후 정사(正使) 황윤길과는 달리 왜적이 침범해 올 기미가 없다고 보고하여, 당시 상황판단을 잘못하여 임진란에 대비하지 못하게 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지만, 당시 다르게 보고해서 조선에 안정과 민심의 동요를 막을 생각으로 했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스로 의병장이되어 진주성 싸움에서 1593년에 돌아가시니, 후세 사람들은 그의 학덕과 업적을 추모하여 안동시 임하면 임천서원(臨川書院)에서 향사를 하다가, 대원군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었다가 1909년에 안동시 송현동으로 옮겨 다시 세워졌다.
학봉 선생과 서애 선생은 여러 가지로 얽힌 인연이 깊어서 그 중에서도 스승 퇴계 선생과 세분의 위패를 모시는 문제에 있어, “병호시비(屛虎是非)”를 간단히 적어봄니다.
이황의 제자들은 1573년에 호계서원(虎溪書院)을 세워 이황선생을 모시다 서애와 학봉선생의 사후에 세분을 함께 모시는데, 가운데 퇴계선생을 모시고, 좌, 우에 어느분을 모시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조정에서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순이었으니, 서애선생 제자들은 영의정을 지낸 서애선생을 왼쪽에 모셔야 한다고 하고, 학봉선생의 제자들은 나이로 보나(4살위임) 학문으로 보나 학봉을 윗사람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당시 상주에 있던 우복 정경세에 판단을 물었는데, 그가 서애쪽에 가까웠기 때문인지 류성룡을 왼쪽에 모시라고 했다.
시비(是非)는 여기서 일단락 되어 한동안 잠잠 했는데, 1805년에 다시 영남유림들 사이에 문제가 되어 200여 년에 걸쳐 세 번이나 서열이 문제가 되자 결국 서애파가 호계서원과 결별하고 서애를 병산서원에 모셔가게 되었다. 인하여 퇴계 이황은 도산서원에, 학봉은 임천서원에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사자(死者)는 말이 없건만 생자(生者)는 끝없는 논쟁(論爭) 속에서 아직도 영남의 유림들 사이에는 “병호시비(屛虎是非)”의 논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시니... 그놈의 자존심(自尊心)과 명예(名譽)가 뭔지...
(다음편에 계속됨, 이상은 오전답사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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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서원회(서문시장 회장단 모임) 회원님들을 모시고 답사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감상하시고 많은 질책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