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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 시인 노천명은 1935년 ≪시원(詩苑)≫ 창간호에 발표한 《내 청춘의 배는》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이래 줄곧 시를 통하여 자연에의 향수를 노래하면서 고독한 인생을 보낸다. 그녀는 여성 특유의 애수의 고독을 안으로 ‘심화하고’ 지성으로 감정을 절제하여 개성 있는 시를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시에는 주정적인 세계와 객관화된 향토적인 세계가 거의 동시에 나타나고 있으나, 대체적으로 초기에는 향토시가 많고, 후기에 이를수록 주정적 세계에 경도된 느낌을 준다. ‘어찌할 수 없는 향수 /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는 구절에서 나타나듯이 이상향에의 동경이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부구하고 이것이 진취적이거나 구체적인 행동으로 전개되지 않고 동경만으로 그친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며 체념적 색채가 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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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 시세계
․대표시 : <사슴38>, <푸른 오월45>
․시집 :
<산호림(珊瑚林)38> : 처녀시집. '사슴' '자화상' 등 초기 작품 49편 수록. ‘사슴’은 그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고독, 애수의 주정적(主情的) 시 세계.
<창변(窓邊)45> - 제2 시집. 29편 수록. 여기에는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되어 있다. 고독, 애수, 향토 소재. 객관 정경으로 건강미, 소박미를 보임. 첫시집 발간 후 알게 보성전문 교수김광진(金光鎭)과의 연애가 정신 세계와 시상(詩想)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노천명 시집49> -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53> - 제4시집. 전적으로 도시 취향의 고독으로 침잠(沈潛)해 가고, 드디어 현 실과 유리(遊離)된 자기중심적 주정(主情)의 성(城)을 쌓아 타인이 넘겨볼 수 없는 내적(內的) 세계를 이룩, 현대시다운 시를 쓴 최초의 여류시인으로 평가된다. 부역 혐의로 수감되었을 때 옥중의 고뇌를 읊은 시 21편 등 총 40편 수록.
<사슴의 노래58> - 유고시집(遺稿詩集), 제5시집
․수필집 : <산딸기48>, <나의 생활 백서54>
․저서 : <여성 서간문 독본55>, <이화70년사56>
․소설 : <사월이39>(단 하나의 단편임)
․기타 : <노천명 전집60>
<시풍>
초기 시는 넘치는 감상(感傷)을 절제한, 애수적이면서도 청순한 정서와 예리한 감각에 빛나는 영롱한 서정시로 일관되어 있다. 이것은 곧 우리 시사(詩史) 위에 던져진, 여성으로선 쓰기 힘든, 그러나 여성이 아니면 못 쓸, 최초의 ‘여성의 시’를 쓰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기 시엔 초기에 비해 한결 부득럽고 소박한 회구적(懷舊的) 정서로 기울어진 면도 엿보이나, 그의 대쪽 같은 기질과 고독벽은 현실에의 적응을 몰랐고, 섬세하고 연약한 영혼은 현실을 버티어 낼 기력과 여유를 지니지 못했다.
후기 시에선 현실의 냉시(冷視), 옥중(獄中)의 고뇌, 인정의 번민을 노래하여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울렸으나, 임종 직전에 카톨릭으로 귀의해 비로소 따뜻한 사랑과 종교적 참회의 경지에 도달했다. 옥돌같이 차던 그의 시에 따뜻한 사랑의 입김이 서리기 시작할 무렵, ‘천명’(天命)은 갔다.
- <사슴>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두 연만으로 된 단순한 구도의 이 작품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된다. 목이 긴 것과 슬픈 것과는 대체 어떤 관계가 있길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 것일까? 이런 물음에 논리적으로 분명하게 답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긴 목이 어떤 고고(孤高)함과 관계 있다는 데서 실마리를 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과 어울리게 사슴은 언제나 점잖은 편이어서 말이 없다고 한다. 그는 다른 동물들과 어울리지 않고 쓸쓸하다. 여기서 시인의 상상력은 사슴이 지나쳐 온 어떤 먼 과거로 돌아간다. 향기롭고 우아한 관(뿔)이 있는 것을 보건대 그는 아마도 예전에는 무척 고귀한 족속이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사슴은 때때로 물 속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잃어 버린 전설 ― 그가 예전에 누렸을 고귀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생각해 낸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향수(잃어 버린 옛날에 대한 그리움)를 어찌할 수 없어서 사슴은 먼 산을 바라본다. 그의 긴 목은 그럴수록 더욱 가냘프고도 슬프게 보인다.
이렇게 보아 오는 동안 우리는 이 작품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고귀한 꿈을 자키며 외로이 살아가는 사람의 체험을 노래한 것임을 알게 된다. 사슴은 그것을 노래하기 위한 하나의 은유 내지는 상징일 따름이다.
- 김흥규 -
사슴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고상함, 외로움... 사슴은 그런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시는 그런 사슴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시 속에 다른 사슴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한 마리 외로운 사슴을 볼 수 있다. 숲에서 뛰놀다 즐겁게 샘물을 마시는 경쾌한 분위기는 아니다. '슬픈'이라는 형용사가 이 짧은 시에 두 번이나 나온다.
이 시 속의 화자는 한 마리 사슴을 보며 시를 써 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사슴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 감정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
1연은 사슴의 모습을 통해 본 사슴의 본질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이 느끼는 사슴의 본질, 사슴은 모가지가 길다. 목이 길다는 말에서 우리는 우아함, 고고함을 느낀다. 그 긴 목에서 시인은 슬픔을 느낀다. 곱고 아름다운 것에서 느끼는 슬픔이다. 또 하나 사슴의 특징은 관처럼 머리에 드리워져 있는 뿔이다. 그 향기로운 관은 사슴이 고고한 존재임을 느끼게 해 준다
2연은 사슴의 행동이다. 그러나 그 행동은 고즈넉하다. 그래 외롭다. 사슴은 외로이 물 속을 들여다본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르시시스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황홀함에 빠졌듯이 사슴은 물 속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쳐다본다. 그 때 사슴이 생각해 낸 잃었던 전설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 더러움에서 초연했던 아름다운 시절인지도 모른다.
그 전설의 시간을 그리워하며 사슴은 그 긴 목, 슬픈 목을 들어 먼 산을 바라본다. 우리는 이 시에서 사슴이 시 속의 화자 더 나아가서는 시인과 일치되어 있음을 느낀다. 시인은 사슴을 빌어 자신의 모습을 노래했다. 세상의 시끄러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의 고결한 모습, 그리고 자신의 고독과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노래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 노천명을 '고독한 사슴'이라고 부른다.
- <고독한 사슴의 여인 - 노천명> -
▶ 타협을 몰라서 더욱 고독했던 여인>
노천명의 원래 이름은 기선(基善)이었다. 그러나 여섯 살 때 홍역을 심하게 앓으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자 그의 부모님은 하늘이 준 목숨이라는 뜻의 ‘天命’이란 이름을 다시 지어 주었다. 자연과 벗하여 살던 이 어린 시절, 부모의 따스한 사랑 속에서 보낸 이 시절이야말로 노천명 평생에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천명은 자존심이 강하고, 결벽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결코 세상과 타협하며 살지 못하는 자신을 높은 족속, 외로운 존재로 생각했던 것이다.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 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세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데가 있다는 것을 잘 알건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그만 유언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가한다 대처럼 꺾어는질지언정 구리처럼 휘어지며 꾸부러지기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 「자화상」에서 -
▶ 그리움을 숨쉬며 살다간 여인
노천명에게도 뜨거운 첫사랑이 있었다. 천명이 조선일보 편집부에서 <여성>지 편집일을 하던 중 극예술연구회가 공연하는 안톤 체홉의 「앵화원」이란 연극에 출연한 적이 있었을 때 연극 관람을 왔던 보성전문 경제학 교수 김광진이란 사람이 바로 천명과 사랑을 나눈 첫사람이었다. 김광진은 아내가 있는 몸이었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래 그런지 평생 독신으로살았으며, 원래 자존심 강하고, 고독 속에서 살던 사람이 더욱 고독과 친해진 것이다. 그의 시를 보면 곳곳에서 고독을 노래하고 있다. 두 번째 시집 <창변>에는 고독의 감정과 함께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담은 시들이 많이 담겨
있다.
서리 내린
지붕 지붕엔 밤이 안고
그 안엔 꽃다운 꿈이 뒹굴고
뉘집인가 창이 불빛을 한 입 물었다.
- 「창변」에서 -
▶ 그러나 현실을 초극하지 못했던 여인, 노천명의 친일 활동
노천명은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산하 기관으로 1942년 1월에 발족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朝鮮臨戰報國團 婦人隊)에서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직(幹事職)을 맡았으며, 「조선문인보국회」에서 개최한「해군을 찬(讚)하는 시 낭독회」(1943년 5월) 등에도 참가하면서 몇 편의 친일 작품을 남겼다.
일본군은 1942년 2월 15일, 말레이 반도 남단 싱가폴을 공략했는데, 기대 이상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일본 전역을 열광케 하면서 제1차 승전 축하회가 전국에서 개최되었는데, 그녀의 시 <싱가폴 함락>은 그같은 분위기 속에서 발표된 것이다.
‘부인대’라는 이름으로 군복 수리에 동원된 부인을 통해서 임전 태세의 확립과 애국의 지성(至誠)을 노래한 <부인 근로대>도 있으며, 김상용의 시와 마찬가지로 징병제 실시 감사 결의 선양 주간(宣揚週間)에 발표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도 같은 맥락이다.
- 대중 실화 : 1989. 12월호 -
▶ 비운의 여인-노천명
비운의 역사를 겪은 뒤 해방과 6.25를 겪으며 노천명은 민족의 수난 못지 않게 개인적 고난을 겪어야 했다. 6.25가 일어났을 때 피난을 못가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문학가 동맹에 나가야 했고 이 일로 9.28 수복 뒤에는 적에 부역했다 하여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동료 시인들의 석방 운동으로 다음해에 겨우 풀려날 수 있었지만, 자존심 강하고 고고했던 시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고초를 받는 것이냐
누가 알아주는 투사냐
붉은 군대의 총부리를 받아
대한민국의 총부리를 받아
새빨가니 뒤집어쓰고
감옥에까지 들어왔다.
어처구니없어라 이는 꿈일 게다
- 「누가 알아주는 투사냐」에서 -
이 시는 감옥 속에서 쓴 시다.
어찌 보면, 천명은 비운의 여인이었다. 일제하에서는 친일 운동을 했는가 하면, 해방 이후에는 또 인민군 치하에서 그들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러한 행동은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오점(汚點)이었다. 그래선지 천명은 더욱 자신의 운명을 고독으로 휘몰아갔는지도 모른다.
임종이 가까울 무렵, 천명은 결국 카톨릭에 귀의하여 베로니카라는 세례명을 받고 독실한 신자가 된다. 그의 말기에 속하는 53년 발표한 그의 제3시집에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한 시들이 많이 담겨 있다. 무슨 의미일까. 현실세계에서 이루지 못한 간절한 소망 같은 것을 내세에서나마 이루고 싶어했던 마음 속의 고독한 ‘외침’은 아니었을까.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좋은 사람과 살고 싶다던 그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시들은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 그리움을 간직한 사람들의 마음에 지금도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겨 주고 있다.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 「이름없는 여인 되어」에서 -
▶ 외로움 속에 살다간 처녀
노천명은 현실의 운명에 타협하지 못하고 결혼까지 물리친 채, 고독과 빈궁 속에서 일생을 마친 애처로운 시인이다. 초기에는 여류시인의 일반적 특징인 서정시를 쓰다가 후기에 카톨릭에 귀의하면서부터 독자적인 경지를 열어, 감상(感傷)을 억누르고 스스로의 불행을 초극하여 사랑과 종교적 참회를 그린 극기적(克己的)인 시를 썼다. 그의 사람됨과 시의 특징을 이헌구(李軒求)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그렇게 외롭고 박행(薄幸)했던,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잠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미로,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하던 이 여인의 마음 속에는 슬픔보다 더 화사(華奢)하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꿈이 5월의 푸르름처럼 번지고 터지어 이 땅 위에 오래오래 빛나게 하는 시혼(詩魂)을 가졌던 여인이었습니다. 치렁치렁 삼단 같은 머리에 갑사 댕기를 드리고, 칠보단장으로 고궁을 거니는 단아하고 청초한, 맑고 높은 한국 고유의 전형적 여성의 기품에, 사무치는 순수한 처녀로서의 서글픈 사랑에 황홀했던 한 여인을 보내는 이 자리입니다.
- ‘고(故) 노천명 여사 추도사’에서 -
[출처] 노천명 시인의 시세계|작성자 시인광장
노천명의 친일문학
여인연성
노천명 作
咸南女子訓練所 參觀記
이번씨 인문사(人文社)의 의뢰로 함남에 있는 여자훈련소를 참관했읍니다. 연성 참관에 좋은 기회라 싶어 쾌히 승락하고, 때마침 등화관제증(燈火管制中)인 칠흑 같은 경성(京城)을 빠져나와, 일로 한남으로 향하였읍니다.
함남도청의 하이칼라 자동차에 몸을 싣고 흔들리며 함주(咸州)라고 하는 곳을 향하는 것입니다. 동승한 스즈끼(銘木) 내무부장과 총력과의 기요까와(淸河政夫)씨로부터 훈련소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동차로 30분 가량 달렸다 싶었을 때, 갑자기 기요까와씨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흑림교(黑林橋)라고 하는 다리 저편에, 솔밭을 배경으로 거의 한 마을을 이루다시피 줄지어 서 있는 훌륭한 건물 몇 채가 보였읍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들이 찾아가는 여자훈련소입니다. 마침 내가 찾아가던 날, 제5기 훈련생들이 입소하는 참이라 여간 분주하게 돌아가지 않았웁니다. 총력과의 기요까와씨가 훈련소 소장에게 나를 경성의 인문사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자,
"아, 그렇습니까 ? 어제 인문사에서 전보가 왔읍니다. 자, 어서 이리로"하고 페스탈로찌를 연상케 하는, 몸집이 작은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이 훈련소는 함남도청의 경영으로, 1만 7천 평이나 되는 대규모입니다. 연 4회, 1회에 64명씩 입소시켜 3개월간에 걸쳐 훈련시킨 다음, 각기 고향으로 돌려 보낸다는 것입너다. 훈련생은 각 군(郡)의 군수가 선발한 14 ~20세까지의 국민학교를 졸업한 건강하고 품질이 방정한 미흔녀에 국한되어 있읍니다.
나도 이 연성대에 참가하여 아름답고 탐스러운 소녀들과 함께 이곳의 청명료(淸明寮)에 합숙토록 정해졌읍니다.
훈련의 증심은 신은(神恩)과 황은(皇恩)를 외우며, 신체제에 잘 어울는 황국(皇國) 여성이 되게 하고, 또 생산 확충의 지식기능을 이수시키여 것입니다. 입소로 단체생활의 훈련을 받으며, 매일 일인일역의 당번제아래, 가사나 농장, 축사 내의 미화작업으로 심신을 훌륭히 훈련시키는 것인 러다. 입소생 64명은 8명씩 하나의 애국반으로 제1반 ,제2반 등 나누어저 있으며, 각 반에는 반장이 있고 자치제가 실시되어 있읍니다. 입소 첫날은 가지고 온 짐을 들여놓는다, 반원과 당번을 정한다, 요(寮) 생활에 관해서 이것저것 이야기하느라고 하루종일 바빴읍니다만, 이튿날부터는 본격적으로 긴장된 훈련생활이 시작되었읍니다
뒤쪽 솔밭 위에 아직도 샛별이 반짝이고 있는 이른 아침 5시 반에, 먼저 취사반(炊事班)이 일어납니다. 그 다음 6시 30분 직원실에서 전원 기상(全員起床)의 북이 울립니다. 30분 안에 모두 우물가로 가서 얼굴을 씻고 실내 청소를 하고 의용을 단정히 하고, 제복인 몸빼 차림으로 각자 자기방 앞에 정렬한 다음, 소장 선생을 비롯한 직원 일동이 모인 가운데 점호를 합니다. 반장이 번호를 부르면 '하나, 둘......' 하고 또랑또랑한 아름다운 목소리가 뒷산에 메아리칩 니다. 그러면 반장이, '제1반 정원 8명, 현재 8명, 이상 없음'하고 어느 시대의 여장군을 연상시키는 늠름한 목소리로 군대식의 보고를 합니다.
다음에는 운동장에 나가서 조례를 하고, 곧 이어서 도장(道場)으로 가서 정좌하고 성스럽게 신배(神拜)를 합니다.
그러고나서 7시 반, 식당에 들어가 식탁을 향해 앉습니다만, 먼저 일배이박수(一拜二拍手)를 하고, 식사 전의 말을 외며 이박일배 (二拍一拜)를 한 다음, '들겠읍니다' 말하며 젓가락을 두 손으로 정중하게 잡고 경례를하고 나서 식사를 시작합니다. 밥은 외미로 밤색이며 미역국에 다꾸앙 세조각입니다. 밥을 먹을 때는 소리내지 않도록 조심함니다. 그릇과 그릇이맞부딪치는 소리, 국물을 흘짝흘짝 마시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반찬은 이것저것 가려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밥이건 반찬이건 남김없이 모두 깨끗이 먹습니다. 그 다음 숭늉으로 공기 속에 있는 밥알을 하나라도 붙어 있지 않게 씻어 그 물을 마십니다.식사가 끝나면 이박일배를 하면서 '잘 먹었읍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고나서 이번에는 청소작업에 착수합니다. 방안의 구석구석부터 복도, 닭집, 운동장 어디에서나 몸빼 부대는 비와 걸레, 양동이를 들고 깨끗이 청소하니다. 쓰레기는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한 군데 모아놓고 비료로 사용합니다.
이어서 학습시간, 그 다음은 작업시간으로, 이것은 계절에 따라 다릅니다만 가마니를 짜거나 새끼를 꼬거나 닭집을 짓거나 또는 밭에 나가 일을 하거나 산에 가서 풀을 베어오거나, 아무튼 굉장한 활동입니다. 교련시간도 있읍니다만 지난해 2기생 때는 12월에 개울에서 목욕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잠시도 헛된 시간이 없고,마치 군대식으로 규칙이 엄합니다.
나 같은 초년병(初年兵)은 좀 고되다고 생자되었지만 별일없이 하루의 일과를 마쳤읍니다. 목욕을 하고 저녁식사를 한 다음, 밤의 훈련으로 정좌독서(靜坐讀書), 훈화(訓話), 서도(書道) 등이 있읍니다. 여덟 시에 또다시 도장에 가서 바바(馬場) 선생님의 지휘하에 신배를 하고 방에 돌아와 점호, 아홉 시가 되면 각자 자기의 고향을 향해 감사의 절을 한 다음 불을 끄고 잡니다.
이곳에서 합숙하면서 훈련을 받고 있는 동안, 여러가지로 감격스런 일이 많았읍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감은(感恩)의 생활이었읍니다.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일본사람만큼 고마움을 알고 있는 국민은 아마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규율이 바른 생활-시간과 물질에 있어서도 허비하지 않는 생활-이것은 즉 신은과 황은의 고마움을 알아야만 비로소 이런 생활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우리는 모든 일에 걸쳐 아직도 감은의 생활이 미흡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낯선 소녀들과 함께 빈틈없는 주의와 지도를 받고 있노라면,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절실하게 가슴에 와닿아 감명이 깊었읍니다. 얼마나 부끄리운 생활을 우리들이 지금까지 해 왔던가 하고 크게 반성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매우 감동적인 것은 훈련소의 소장님을 비롯한 직원 일동의 그 헌신적인 지도 태도였읍니다. 1년에 4회, 그것도 5개월간 계속되니까 결국 더울 때나 추울 때나 선생님들은 쉬는 날이 없읍니다. 3개월간 훈련을 시켜 겨우 제 몫을 하게 될쯤이면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야 하고, 그러고나서 또 새로운 훈련생을 받아 수고를 하게 됩니다. 그것도 아침의 기상에서부터 밤의 훈련이 끝날 때까지 훈련생들과 한 몸이 되어 철저하게 지내야 하니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었읍니다.
소장님을 비롯하여 청명료의 관리와 살림을 맡은 모리노(森野)여사도 그렇거니와, 교련을 담당한 바마 선생님, 농사일을 지도하는 미야따 선생 님, 서기의 니시하라(西原禹規)씨와 가와노(阿野)씨, 어느 분이나 다같이 이루 말할 수 었이 열성입니다. 이분들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자가 아닌가 생각되었웁니다. 소장 선생님에게 , '그동안 고생한 이야기라도 한 마디......'하고 물었더니, '별로 고생이랄 것은 었었읍니다. 다만 오랫동안 남자들의 교육에만 관계하여 왔던 탓으로, 여자들의 교육은 처음이어서 좀 어떨까 하고 생각했읍니다만......'
이떻게 하여 그분들은 이 위대한 교육사업을 조금도 자랑하지 않고 묵묵히 이루어나가는 것이었읍니다. 이번의 연성훈련에서 나는 정말 여러가지로 많이 배웠읍니다. 오래오래 머물러서 연성을 계속 받고 싶었으나, 사정으로 4월 7일 여러분의 행복을 빌고 한없는 감격을 느끼며 이 여자훈련소를 떠나,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봄비를 맞으면서 귀로에 올랐읍니다.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노 천 명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요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한마디로 노천명이 친일 행각을 벌이면서 쓴 시입니다. 일본이 '내선일체'라는 명목으로 조선인들에게 징용, 학병제도를 강요하면서 조선인들을 노무자, 병사로 끌고 갔습니다. 2차 대전에서 영국,미국과 싸우면서 우리 민족을 총알받이로 쓰려고 했던 것이지요. 이런 일제의 행각을 찬양하고 미화하는 내용의 시입니다.
한마디로 쓰레기같은 시지요. 노천명은 자신의 안일을 위해 이런 반역적인 시를 쓴 것입니다. '님의 부르심'이라는 것도 결국, 일본 천황의 '일시동인' -조선인과 일본인을 똑같이 사랑한다는.... 되먹지 않은 헛소리-이라는 허울좋은 사탕발림앞에 전쟁터 나가서 일본인과 똑같이 싸우다 죽고, 일본을 위해서 죽어라.... 라는 전시 동원령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세아의 큰 운명이라는 것 역시,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 곧 서구 열강의 침략을 막고, 황인종끼리 소위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자는 것으로 미화를 시킨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망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일본은 영국, 미국과 전쟁을 하면서 우리 민족에게도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어넣으려고 했습니다. 우리 민족과는 전혀 상관없는 전쟁에서 우리 민족을 총알받이로 쓰려고 별의별 헛소리를 다 한 것이지요. 그리고 일제는 그런 사상을 우리 민족에게 주입시키려고, 각계의 저명한 지식인들을 회유와 협박을 통해서 친일 행각을 벌이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시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파시즘의 선전 문구와 전혀 다를게 없습니다.
그 다음 <부인 근로대> - 한마디로 우리 민족 여성들이 정신대로 나가서 일본군을 위해 노동을 하라... 이런 내용입니다. 정신대를 모집하면서 이런 선전 문구를 써댔습니다.
부인근로대
노 천 명
부인근로대 작업장으로 군복을 지으러 나온 여인들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 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은 나비인가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 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탄환에 맞던 광경이 머리에 떠올라 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한 땀 두 땀 무운을 빌며 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이여 훌륭히 싸워주 공을 세워주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오늘도 산만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네
- 매일신보.1942.3.4. <친일 작품의 전형임.>
부인근로대는 일본군을 위해 끌려간 정신대를 다른 이름으로 말한 것입니다. 일제는 남자들을 노무자, 군인으로 끌고간 것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고 갔습니다.
물론 일본군의 성적 위안부로 끌고간다는 사실은 싹 감춘채, 위 작품처럼 일본군을 위해서 공장에서 일하는 것으로 속이고 끌고 간 것이지요.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노천명은 죽을 죄를 한 겁니다. 이 시는 근로정신대를 미화하고, 더 많은 여성들을 근로정신대로 끌고 가기 위한 선전 수단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위 시에서 보면, 여자들이 군인을 위해 군복을 짓고, 군복을 기우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술성은 0%이며, 군국주의에 철저히 복무하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합니다. 비유하자면, 독일에서 '하일 히틀러!' 하고 외치는 것과 전혀 다를게 없지요. 다만, '시'라는 형식을 빌려서 그런 낯뜨거운 짓을 했다는데서, 노천명은 문인의 자격이 없다 할 수 있습니다.
싱가폴 함락
노 천 명
동양 침략의 근거지 싱가폴 구석구석의 작고 큰 사원들아 얼마나 기다렸던 아침이냐 일본의 태양이 한번 밝게 비치니 점잖은 신사풍을 하고 쌓이고 쌓인 양키들의 굴욕과 압박 아래 대동아 공영권이 건설되는 이날 우리들이 내놓는 정다운 손길을 잡아라 얼굴이 검은 친구여! 잔을 들자 종려나무 그늘 아래 횃불을 질러라 ※ 친일시의 한 모형으로 제시함 ※ 노천명(1913-1957) : 황해도 장연. 여성의 감수성이 드러난 절제된 내면의 시로 개성적인 세계를 개척함. 그러나 식민치하에서 일제를 찬양하는 다수의 작품을 발표함.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함. ※ 일본군은 1942년 2월 15일 말레이반도 남단 싱가폴을 공략했는데,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말레이, 싱가폴작전에서 기대 이상의 승리를 거두었다. 서전에서의 이 승리는 일본 전역을 열광케 하면서 제 1차 승전축하회가 전국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시는 그같은 분위기 속에서 발표된 것이다. ※ 9연- 일제의 지배아래서만이 평화와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인데, 이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와 자유는 아니다. 식민통치하의 민족은 지배자의 착취대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와 평화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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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출처: 혜천 + http://jjs63.com.ne.kr/시/해설/노천명-싱가폴함락.hw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