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델과 그레텔에 대한 다른 이야기
강병철(소설가)
젊은 날에는 외국여행이란 단어를 떠올려본 적조차 없었다. 57세 장년의 몸으로 처음 스칸디나비아 반도 비행기를 탔는데 그 이유가 공짜 여행 티켓을 땄기 때문이었다. 신동엽 시인의 문장에 등장하는 ‘자전거에 막걸리통 싣고 벗님 시인’을 만나러 페달 돌리는 대통령’의 사연이 배경으로 나오는 그 반도는 한마디로 황홀했었다. 그 풍경을 담으며 수백 년 전 제국주의와 식민지 바이킹들의 처절한 생존을 겹쳐 떠올렸던 것은 나의 복잡한 심장 탓이리라. 그 후 7년 후 이차구차 이국 땅 산악열차 몸을 싣게 되었으니 행운이랄까.
스위스 흑림 등반 팀에 끼어 버스와 전차, 케이블카까지 연동으로 이어져서 마침내 꼭대기 종점에 도착했으니 조금은 즉흥적 판단이다. 시커먼 숲은 아니고 짙은 녹색의 울울창창 가문비나무가 망망대해처럼 쏟아져있다. 산악 코스 내내 30미터 장대군단 나무 기둥으로 도열되어 하늘이 가려져서 어두워진 숲을 흑림이라고 부른다. 날다람쥐 하나도 함부로 범할 틈새조차 없는 빽빽한 수직도열 위용 사태이다. 샌들을 신고 온 게 패착이니 고난의 행군이었고.
모래알에 발바닥 시달리며 절룩절룩 노래를 불렀다. 노래방 등장 이후, 나는 자막이 없으면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체질로 바뀌었는데 딱 한 부류인 운동권 노래만큼은 가사를 잊지 않아서 다행이다. 김남주의 「노래」, 박영근의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문병란의 「직녀에게」그리고 흘러간 포크송 송창식과 조용필, 양희은, 김민기, 정태춘들의 노래를 번갈아 풀밭 위에 올려놓았다. 박영근을 떠올릴 때는 눈시울도 시큰했으나 해외 도정의 호사함과 전혀 걸맞지 않았음도 인정한다.
흑림은 ‘그림 형제’의 동화 「헨델과 그레텔」의 원조 모델 그 자리이다. 계모의 계략으로 오두막에 들어간 가련한 남매, 숲길을 잊지 않기 위해 빵 조각을 떨어뜨렸는데 그걸 새떼들이 쪼아먹어 길을 잃었을 때의 안타까움, 살찐 후에 잡아먹으려는 마귀할멈의 신체검사를 피해 뼈다구를 내밀어 죽음을 피하는 오라비의 지혜, 그리고 화덕 속에 마귀할멈을 밀어 처넣고 탈출하는 남매의 해피엔딩이 내 유년을 갸우뚱갸우뚱 성장시켰다.
그런데 이상하다. 독일의 어느 학자가 실체를 확인하려고 그 장소에서 검증된 어린이 보폭으로 아무리 걸어도 장소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몇 차례 실패 끝에 어른 걸음으로 바꿔서 답사하니 문장 속의 현장이 딱 발견되었다. 또 있다. 화덕의 자리 현장을 발굴해서 나온 뼈를 조사해보니 노파가 아니라 20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자의 실체로 확인된 것이다.
그 사실 확인은 15세기 궁중제빵사 한스라는 사내와 뉘렌브르크 여자 제빵사 카타리나의 스토리에서 출발한다. 문제는 카타리나가 구운 빵의 인기가 너무 좋아 사람들이 한번 먹어본 사람은 무조건 그 빵만 선호하니 권력형 한스가 너무 괴로운 것이다. 한스가 카타리나에게 청혼을 한 것은 순전히 제빵 기술을 훔쳐오기 위해서이다. 카타리나는 당연히 거절한다. 그리고 스토커 한스를 피해 숲속에서 몰래 빵을 구웠는데 여전히 백성들에게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것이다. 질투가 솟구친 한스는.
‘저 여자가 빵속에 마약을 넣었다. 저 빵을 먹으면 모두 악마가 된다. 두꺼비 눈에 뱀대가리 아기를 낳게 된다. 몸을 만지면 전염되어 마을이 망한다. 죽여라.’
그렇게 마녀사냥으로 우우 몰아쳐서 오랏줄로 묶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카타리나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는다. 마침내 한스와 그의 동생 그레텔이 숲속에 침입하여 빵을 굽던 그녀를 화덕 안에 쑤셔 넣고 불에 태워 죽였으니 이게 ‘그림 형제’ 동화의 원조모델이다. 15세기 재판 기록에서 발견되었다는데 정확성 여부는 모른다. 그리고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치면서 수풀이 온통 검게 변했다는 결말은 동행한 벗 중 김명원 시인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그미들은 단지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중세시대의 권력형 가부장적 잣대로 악마나 마귀할멈으로 변신되었다. 분명한 것은 독일의 동화작가 그림 형제가 교정본으로 만든 마귀할멈이 바로 착한 제빵사 카타리나요, 실력이 딸린 음흉한 궁중제빵사 한스 남매가 청순가련한 소년 헨델과 그레텔로 변신한 것이다. 작금의 정세나 활자 습성이 대개 그렇다. 싸움이 붙을 때마다 강약의 무게를 저울질한 다음 약자를 겨냥해 마녀로 둔갑시키고 구경꾼들까지 동조하니 그게 ‘악의 축’이다.
그랬다. 서양동화의 대부분의 원조 설화는 잔혹하고 끔찍한 건데 후대작가들이 그들의 눈으로 맞춤형으로 재단하여 각색했을 뿐이다. 신데렐라 역시 원래 잔혹사부터 시작되었으니 대개 계모나 늙은 할머니들이 왜곡된 각색으로 희생양이 된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그리고 떠돌이 백마 탄 왕자의 실체도 파헤치면 모두 베일에 가려졌던 잔혹사가 등장하는데 차마 원고지에 옮길 자신이 없다. 장애의 몸을 가진 헌신적 심장의 사내들은 오로지 백마 탄 떠돌이 사내와 잠자는 여자의 행복만 빌어야 한다는 잔인한 구조이다.
마찬가지다. 원본에 의하면 신데렐라도 계모가 아니라 친엄마였는데 한국어판 번역과정에서 갑자기 의붓엄마로 둔갑시킨 것이다. 나중에 왕비가 된 신데렐라가 친엄마에게 이글이글 끓는 신발을 신게 하는 벌을 준다. 그리고 모친이.
"악 뜨거워."
울부짖으면 복수심에 불 탄 신데렐라가.
"재밌다."
깔깔 박수를 쳤단다. 그랬다. 사내들은 숱한 여자를 데리고 살아도 권력의 상징으로 남았지만 남편을 잃은 여자가 재가를 하면 악마로 변신시켰다. 착하고 예쁜 여자들이 ‘일면식도 없는 왕자에게 시집가는 게 행복의 종착역’이라고 가르치는 것도 모순이다.
그래서 작가나 기자들이 글을 바르게 써야 하며 특히 정치인에 대해서가 그렇다. 엄혹한 독재 시국에서는 자라목 집어넣던 문장가들이 베일을 제켜주는 순간 ‘우히히 펜이 칼보다 강하다’ 하며 난도질을 벌인다. 문제는 올곧게 살아도 음지의 신상털이를 시작하면 대개 치부가 드러나고 상처를 입는다는 점이다. 나중에 해명이 되더라도 이미 구석구석 얼먹은 자리가 그늘로 남아있게 되면 날개를 펼 때마다 우두둑 소리가 난다.
내일이면 여정의 마지막 날이다. 마음이 수수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