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처음 불교가 들어오는 과정을 정리한 기록은 [삼국사기]이다. 이를 받아 [삼국유사]는 ‘흥법’ 편에서 세 나라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년)에 순도(順道)가, 백제는 침류왕 즉위년(394년)에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신라는 눌지왕 때 묵호자(墨胡子)가 각각 처음 전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와 백제가 왕실 차원에서 맞아들여 절을 짓고 승려를 배출해 낸 데 반해, 신라는 승려를 마치 불법입국처럼 대하였다. 묵호자는 믿고 따르는 신도의 집에서 굴을 파고 숨어 지내다 제대로 뜻을 펴보지 못한 채 떠나야 했다. 뒤를 이어 비처왕 때 아도(阿道)가 찾아왔는데, 불법체류자 처지는 같았으나 그나마 신도 몇을 만들고 죽었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신라 불교의 처음을 아도로부터 본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일연은 김용행의 ‘아도본비(我道本碑)’를 들어가며 그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였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 어머니는 고도녕(高道寧)인데, 위나라 사람 아굴마(我崛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그를 가까이 한 다음 돌아갔다. 이 때문에 임신하여 아도를 낳았다. 다섯 살 때 출가하였고, 열여섯 살에 위나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난 다음, 현창화상(玄彰和尙)의 가르침을 받아 공부했다. 열아홉 살에 귀국하여 어머니에게로 돌아가자 어머니가 신라로 갈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가 미추왕 2년(263)이었다. 신라 불교의 미추왕 전래설은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일연은 아도가 미추왕 때 사람임을 부정했다. 비처왕 때라야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다. 다만, 아도가 공주의 병을 낫게 한 일, 비밀리에 신도를 모아 가르친 일 등은 받아들이면서, 묵호자에게도 똑같은 일화가 전하므로 아도와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묵호자건 아도건 이름을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승려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다. 묵호자는 검은 승복을 입은 모습에서, 아도는 아두(阿頭)라고도 하는데, 삭발한 머리 모습에서 나온 말이다. 공주의 병을 고치자 묵호자에게 많은 상을 내리려 하였지만, 잠깐 사이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고, 아도는 후원자인 왕이 죽자 사람들이 해치려고 해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신라에서 불교가 자리 잡기는 이렇게 어려웠다. 심지어 아도는 신도인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손수 무덤을 만들고 문을 닫고 자결했다고, ‘아도본비’는 적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