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시호는 가장 영예로운 표창으로 존중되어 족보(族譜)에는 물론 묘비(墓碑)에 기입되어 있다.
시호를 받는다는 것은 그 자손과 일족(一族)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이었다. 왕실(王室)의 종친(宗親)과 문무관(文武官)중에서 정2품(正二品) 이상의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이 죽으면 시호를 주었는데 생전의 행적(行跡)에 따라 알 맞는 글자를 조합하여 두 자를 만들고 시호아래 "공(公)"자를 붙이어 부른다.
시호를 정하는 법은 중국고대 시법(諡法)이 많이 적용되었는데 <주공시법(周公諡法)>, <춘추시법(春秋諡法)>등이 있으며 시호에 적용된 글자는 문(文), 충(忠), 정(正), 공(恭), 양(襄), 정(貞), 효(孝), 장(莊), 안(安), 경(景), 익(翼), 무(戊), 경(敬)등 120여자인데 한자 한자마다 뜻이있어 그 사람의 행적에 따라 정의(定義)하였다.
그런데 고려말, 조선시대에는 숭문주의(崇文主義)로 인한 문반(文班)우위의 시대였던 만큼 "문(文)"자 시호를 최고의 영예로 여겨 자손들이 이를 자랑으로 삼는 것이 당시의 통념이었다.
무인(武人)의 시호로는 충무공(忠武公)이 가장 영예로웠는데 충무공하면 이순신 장군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밖에도 조영무(趙英茂), 귀성군준(龜城君浚), 정충신(鄭忠信), 김시민(金時敏), 김응하(金應河), 이수일(李守一), 남이(南怡), 구인후(具仁 )등 충무공(忠武公)이 8명이나 더 있었다.
시호를 둘러싸고 시비와 논란도 많았는데 시호 중에서도 "문(文)"자와 "충(忠)"자가 들어간 시호를 가장 존귀하게 여겨 뒷날에 이르러 개시(改諡)를 요구하는 일도 많았다.
한편 정2품(正二品)의 벼슬을 못하여도 임금의 특별한 교시(敎示)가 있을 때에는 시호를 추증 받았는데 유현(儒賢)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문순공(文純公), 김광필(金광弼) 문경공(文敬公), 정여창(鄭汝昌) 문헌공(文獻公), 서경덕(徐敬德) 문강공(文康公), 조광조(趙光祖) 문정공(文正公), 김장생(金長生) 문원공(文元公)등이 있다.
시호의 결정은 시호를 받을 사람이 죽으면 그의 자손들이 먼저 자기들이 선정한 행장(行狀)을 예조(禮曺)에 내면 예조에서는 봉상시(奉尙寺)에 전하며, 다시 홍문관(弘文館)에 보내어 봉상시의 정(正)과 홍문관의 응교(應敎)이상이 한자리에 모여 시호를 정한다. 이 때 시호를 받을 사람의 공적을 보아 시호를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