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이 자료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은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한 분으로 자칭 군자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점을 통해서 본다면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자료출처: 심백강 원장
3) 부여의 습속[은나라와 관련 하여 점복신앙,은력,흰색(백의민족)을 숭상하는 풍속, 순장 습관등도 은나라 왕족인 기자로 부터]
부여[扶餘, 혹은 夫餘]는 우리나라 고대 국가 중의 하나로서 발해연안 북,동부 지구에 위치했다. 부여에서는 제사, 군사, 정치면에서 고대 동방 사회의 중요한 싱앙 활동의 하나인 갑골을 통하여 점복을 행하고 있었음을 사서[史書]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선 중국의 진[晋]나라 진수(233~297)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서 보면, 군사라든가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먼저 소를 잡아 그 굽뼈를 보고 좋고 나쁨을 점친다. 이때 소의 발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합해져 있으면 길하다고 판단하여 일을 행하였다,[한자원문 생략]"고 하였다. 이는 군사 활동이 있을 때마다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소의 제골[굽뼈]로 점을 쳐서 출진[出陳] 여부를 결정했다고 하는 기록이다.
부여의 점복기사는 원래 위나라 어환이 편찬한 <위략>에 실려 있는 기사이나 전문은 전하는 바가 없고, 그 일문[佚文]이 당초 장초금이 편찬한 <한원>번이부 부여조에 발굽으로 점을 쳐서 그 조짐을 보고 길흉을 판단하여 일을 행하였다,[한자원문 생략]"고 한 것을 옹공예가 <위략>의 기사를 할주(割註)로 <왜략>에 이르기를 부여의 풍습 가운데 군사가 있을 때에는 소를 잡아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소의 굽뼈로 점을 보아 합할 때는 길하다,[한자원문 생략]"라고 인용하였다. 그리고 <한원>고려[고구려]조에는 <왜략>에 이르기를 고려<고구려>의 풍속 가운데 ...군사가 있을 때에는 역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굽뼈를 관찰하여 길하고 흉함을 판단하다,[한자원문 생략]"고 하였다.
그리고 <한원>이외에 <왜략>의 일문을 중화 민국 초기(1925)의 장붕일이 모아 편찬한 <위략집문>이 있는데, 이 책의 부여조에는 점복기사를 따로 싣지는 않았으나, 당나라 은공로의 <북호록>의 <위략>을 인용하면서 고구려조의 점복기사 말미에 부여국에서도 이와 같았다[한자원문 생략]"라고 덧붙여놓았다. 즉, 부여국의 점복습관이 고구려와 같다"고 하는 기사이다. 이는 사서에서 볼 수 없는 고구려와 동질성을 잘 나타내주는 기사이다. 동진(東晋)시기의 범엽(398~445)이 찬한 <후한서>동이전 부여조에도 <삼국지>에 실린 기사와 같은 내용[한자원문 생략]의 부여의 점복기사에 관한 기록이 실여있다. <위략>의 저작 연대에 대하여 전해종 선생은 찬자인 어환이 진나라 초기(270년 전후)에 편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진수가 <삼국지>를 편찬하면서 상당부분 <위략>을 근거로 삼고 있었으므로 적어도 <삼국지>보다 10여 년 이전에 저술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부여의 점복기사는 중국인에 의하여 3세기 후반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 때의 방현령이 편찬한 <진서>열전 사이 부여조에도 <위략>이나 삼국지 기사와 같은 내용[한자원문 생략]이 실려 있다. 그리고 송대(宋代) 이방이 편찬한 <태평어람>권 783사이 동이전 부여조에는 후한서 왈 부여국..[한자원문 생략]이라고 하여 <후한서>의 동이전 부여조를 인용하였다고 직접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여러사서를 통하여 부여의 점복 신앙을 확인하였다. 고대사회에서 국중대사는 사祀와 융戎이라 하였는데 이처럼 동양의 고대사회에서는 국가의 대사가 있을 때마다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아울러 희생물로 바친 소의 굽뼈(우제골)를 이용해 점복을 하였다.
갑골신앙이 가장 유행한 은나라에서는 국중대사를 비롯하여 왕이나 귀족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점복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제천, 제조, 정벌, 년세, 천기, 복화, 전렵, 유력, 질병, 생육 등을 대상으로 점복을 했다. 한편 은대의 갑골문 중 제천과 군사에 관한 복사(卜辭)가 가장 많이 기록된 것을 보면 이는 역시 제천과 군사가 있을 때마다 점복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과 부여와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갑골문화는 신석기시대에 발해연안에서 발생하였는데, 청동기시대에 발해연안에 살고 있던 은인의 선인들이 갑골문화를 대동하고 황하 하류지역으로 이동하여 은나라를 세우고 살면서 은나라에서 갑골문화가 성행하였다고 생각된다.
발해연안 초기 갑골문화에는 사슴, 양, 돼지 등 동물의 견갑골이나 늑골을 이용하여 점복을 하였고, 황하 하류 지역으로 내려와 살면서 주로 소의 견갑골이나 거북의 뱃바닥을 이용하여 점을 쳤다. 그래서 구복갑의 甲자와 견갑골의 骨을 합쳐서 갑골[甲骨]이라 한다. 다시 말해서 갑골은 발해연안에 분포하여 생활하던 동이족(사서에는 동이족이지만 실제로는 천자국 혹은 중국)들이 사용하던 생활습관인데 그들이 이를 대동하고 황하 하류로 서남향하여 은왕조를 건설하고 살면서 갑골문화를 발전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갑골 재료 중에 동물의 견갑골 이외에도 늑골, 두개골, 굽뼈등을 이용한 경우를 은나라 수도 은허의 발굴품 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은허에서 기사각사가 있는 소의 굽뼈(우제골) 가 출토된 바 있는데 이는 아마도 부여의 굽뼈[우제골]와 마찬가지로 제사와 점복을 마친 유품이 아닌가 한다.
문헌상으로 기록되었던 부여의 갑골문화를 실물로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상의 갑골과 복갑 자료가 만주 지방의 송화강 유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즉, 1957년에 길림시 교외 송화강 연안의 용담산에서 청동기시대의 무자복골이 출토되었고, 1961년에도 송화강 유역에서 신석기시대의 복골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들 갑골이 발견된 지역은 바로 부여의 옛 수도인 남성자토성이 있는 지역이다. 한편, 동부여의 옛지역인 두만강 유역의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백초구 유적과 함경북도 무산읍 범의 구석 집자리에서도 청동기시대 내지 철기시대의 무자골복이 출토된바 있다. 부여의 갑골문화가 은의 갑골문화와 동일계열이란 점을 이미 놀술하였지만 양자 사이에는 갑골문화 이외에도 관습상 여러 공통점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중국 사서를 통하여 찾을 수 있다. 전술한 것처럼 <후한서>가 <삼국지>보다 150년 이후에 찬수되었다고 하므로 우선<삼국지> 기사를 살펴보면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서 특별히 주의할 기사로 以殷正月祭天과 在國衣尚白및 白布大袂,袍、褲및 殺人......라고 하는 내용이 있다. 먼저 은나라 정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지낸다(以殷正月祭天)고 하는 기사중에서 以殷正月이라고 함은 은대 역법에 따른 정월을 뜻하는 것으로 춘추 은공 원년조 공영달 소에 보면, ......................이라하여 건축 즉, 은의 달력은 태양년을 십이지로 나누어 십이단의 월을 만든 천문월 중에서 축월, 오늘날의 음력 2월을 정월로 정하여 태음월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부여에서는 은대역법을 따른 정월인 축월에 제천한다는 뜻이다. 백호동 삼정조에 .....................이라 한것을 보면 은의 정월은 계동월 즉, 주력 2월 오늘날의 음력 2월을 세수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표참조: 작은 호수 하,은,주 세수 비교표
이와 같이 은대의 역법은 하나라나 주나라의 역법과는 다르게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이 나라의 옷은 흰색을 숭상하고, 희 천으로 소매가 크고 바지가 넓은 도포를 만들어 입었다"라고 하는 기사에서 은나라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데 <예기>단궁상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하대(夏代)에는 흑색을 숭상하여 상사(喪事)가 있을 때에는 황혼(黃昏)에 임렴(入斂)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에는 흑마를 타며, 제사시에는 흑색희생물을 바친다. 은대에는 백색을 숭상하여 상사가 있을 때에는 정오에 입렴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에는 백마를 타며, 희생물 역시 백색을 바친다. 주대에는 적색을 숭상하여 상사가 있을 때에는 일출시에 임렴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에는 적마를 타며, 희생물 역시 적색을 바친다.[한자원문 생략]
이는 하나라에서는 흑색을 숭상하고, 은나라에서는 백색을 숭상하며, 주나라에서는 적색을 숭상한다고 하는 내용이다. 한편, 殺人尙白에 대한 한(漢)나라 정현이 붙인 주에 보면 ....한자원문 있음 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앞서 언급한 은정월인 축월에 비친달이 곧, 아백색이라고 한 것이다. 은나라에서 백색을 숭상한 것과 같이 부여 또한 상백(尙白)사상[崇白숭백사상]을 갖고 있는데, 바로 위의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의 기사에서 이와 같은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부여의 순장(殉장)제도를 보면,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에 사람을 죽여 순장하였는데 많을 때는 백여 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부여에서는 많을 경우 백수십 명을 살순(殺殉)하여 매장한다고 하였다. 물론 이와 같이 백여 명을 순장한다고 할 때는 반드시 확고한 전제적인 지위와 통치권을 갖춘 절대적인 통치자 즉, 군왕(君王) 라야만 가능할 것이다.은대의 수도인 은허에서 다수의 순인(殉人)을 묻은 고분이 흔히 발굴되고 있는데, 특히 제 1001호 대묘에서는 무려 360명의 순인이 발견되었다.
이 대묘는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며, 이 외에 이와 같은 규모를 갖춘 고분이 8기가 더 있는데 모두 이와 비슷한 수의 순인을 매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밖에 중소형의 고분에서도 순인이 발견되고 있는데, 모두 은대의 귀족이나 상당한 지위를 가진 인물의 고분으로 추정되고 있다.이같은 동양 고대사회의 순장 제도는 주로 동북아시아의 동이족에게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데, 중국의 황전악은 습속으로 이와 같은 습속은 은왕국의 통치력권에서 성행했을 뿐만 아니라 은의 동방의 회이와 동이 지역에서 널리 유행하였다.[한자원문 생략]고 하였다.
황씨에 의하면 동이문화권에서는 은나라와 마찬가지로 순장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였다. 부여와 혈족관계를 맺고 있는 고구려에서도 초기에는 순장이 실시되었는데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천왕 22년조에 왕이 죽으므로 근신중에 순사하는 자가 많아 사왕인 중천왕이 이를 금지하도록 하였으며 그래도 장사일에 임해서는 순사하는 자가 많았다고 하는 기사[한자원문 생략]로 보아 고구려에서도 순장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3년조에 순장을 금하도록 했다[한자원문 생략]는 기사를 보면, 신라에서도 지증왕 이전까지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순장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 가야 지역에서도 순장했던 사실이 경상북도 고령읍 지산동 가야 순장묘의 발굴을 통하여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부여의 점복신앙이나 은력을 사용하는 풍습 그리고 흰색을 숭상하는 풍속, 순장 습관 등 여러가지 관습이 은나라의 관습과 매우 비슷할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그것과도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점을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출처: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中, 이형구교수 지음
4) 은나라와 기자조선 관련 기사
이 외에도 8조의 법[8조법금], 홍범구주도 箕子기자대왕으로 부터 시작되었으며 고려시대와 李조선시대에는 기자대왕을 우리역사이자 조상으로 보았는데 현 강단사학에서는 기자조선은 모순이 많다는 이유로 허구로 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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