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상보시 (無住相布施)>
<금강경>에서는 ‘무주상(無住相)’을 강조한다.
‘무주상(無住相)’을 직역하면 상(相)에 머무름(住) 바 없다는 뜻이다.
일체의 상(相)과 염(念)의 분별을 떠난 상태에서
어디에도 결박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상(相)이란 무엇인가?
‘상(相)’이란 관념과 분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네 가지 상으로 나눠 설명한다.
중생의 마음엔 이러한 네 가지 상(四相)이 항상 함께 하기 때문에
열반에 문 열고 들어가지를 못한다.
만약 상에 주함이 없다면 능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무주상(無住相)’은 그 무엇도 누구에게도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붙들지도 붙들리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탐심이 없는 마음이 무주상이다.
때문에 무주상을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착해야 한다. 마음 비움을 말한다.
무엇을 행하면서 ‘성공해야지, 실패하면 안 되지,
너를 도우려고 하는 것이다, 이 좋은 일을 알아주겠지,
이렇게 해 주면 틀림없이 고맙게 여길 거야,
이런 마음가짐으로 하는 것은 상(相)이 있는 마음이라서 무주상이 아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보시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한다.
그리고 이 무주상보시를 <금강경>에서 강조하고 있다.
보시를 행하면서도 보시라는 행위에 집착하지 않고, -
내가 보시를 한다는 데에 마음이 머물지 않고,
공덕의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것을 무주상보시라 하는데,
무주상보시가 곧 보시바라밀이다.
반대급부를 바라는 보시는 진정한 보시가 아니다.
자기 이름 내기 위해, 남에게 알리고 싶어서 하는 기부는
진정한 기부가 아니다.
특히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베풂을 강조함으로써,
베풂의 공덕을 받을 내가 있다는 망상에서 벗어나라고 깨우친다.
자아라는 관념이 탐욕과 갈등의 씨앗인 탓이다.
이와 같이 무주상보시는 무아를 전제로 한 베풂인 것이다.
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내가 남을 위해 베풀었다’는 생각이 있는 보시는
진정한 보시라고 볼 수 없다.
내가 베풀었다는 의식은 집착만을 남기게 되고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상태에까지 이끌 수 있는 보시가
될 수 없는 것이므로, 허공처럼 맑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금강경> 제4분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 잘 나타나고 있다.
「보살 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 소위(중약) 부주어상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중략) 不住於相)」
‘보살은 마땅히 경계(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라고 했다.
하여 일체의 아견(我見)이나 아상(我相)과 같은 상대적인 생각에
걸림 없는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주를 체득한다면 바로 아래와 같은 경지에 진입하는 것이다.
다음 제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서 보듯이,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재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이러한 경지로 직입(直入)하는 것이다.
결국 무주(無住)란 일체의 유윕법(有爲法)이 실재(實在)한다는
고정관념을 타파함으로써 상대적이거나 대립적인 경계 위에서도
오히려 무애자재(無碍自在)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하여 다시 <금강경> 제4분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 세존.
(須菩堤,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 상하허공 가사량부. 불야 세존.
(須菩堤, 南西北方 四維 上下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 불가사량.
(須菩堤,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수보리야, 보살이 무주상보시를 하는 복덕이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부처님께서 위와 같이 허공의 비유를 들어
무주상보시의 공덕을 말씀하고 계신다.
허공이야말로 툭 트여서 도무지 셀 수도 없고, 생각으로 상상할 수도 없다.
이처럼 무주상보시의 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강조하고 계신다.
베풂에 있어서도 실리적 대가를 바란다면
그건 베풂이 아니라 거래다. 거짓이며 진실이 아니다.
어디 가서 무언가를 전달하면서 사진을 찍어 벽에 걸어 놓거나
기사에 싣는 사람이 많다. 이런 탐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도가 드러나서 거절당하면 기분 나빠하기도 하고 비웃는다.
그래서 조선 중기 서산대사 휴정(休靜)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한 몸이라고
보는 데서부터 무주상보시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 보시를 위해서는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살림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전제했다.
친구 간에나 친척 간에 당신은 내덕을 봤으니
‘이제 갚을 때가 되지 않았어!’ 하고, 덕 베푼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갚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은 고달픈 법이다.
상대를 내 몸이라 생각하고, 베푼 것조차 잊어버리고
살다가 보면 저절로 충만해지는 그 무엇이 거기 있으니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말 일이다.
무주상보시는 에고(ego)의 탐ㆍ진ㆍ치(貪嗔痴)가
소멸된 상태에서만이 가능하다.
불이(不二)를 전제로 할 때에 에고도 없고, 탐진치도 없는 마음이 된다.
불이(不二)란 나와 네가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미 마음은 사랑하는 자식의 마음과 늘 하나이지
어미 마음 따로 있고, 자식 마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어미 마음에 어디 에고가 있으며, 자식이 가진 것에 탐ㆍ진ㆍ치를 발하겠는가.
그런 어미 마음보다 더 순수한 마음이 불ㆍ보살의 마음이라서
나와 너를 가려서 따지지 않는 불이의 마음이다.
그런 마음에서 하는 보시가 무주상보시라는 것이다.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라고 할 때는 남에게 해코지 할 수가 없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니 반대급부를 바라는 보시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일본 백은(白隱, 1685~1768) 선사 이야기이다.
백은 선사는 일본에 임제종을 중흥시킨 고승이다.
백은 선사가 어느 추운 겨울날에 큰 절의 초청을 받아
법문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도중 길가에 헐벗고 남루한 옷차림의
문둥병 환자가 떨고 있었다. 불쌍하고 보기에 딱해
자신이 입고 있던 누더기를 벗어 그에게 주며 입혀 줬다.
그러나 문둥이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래서 백은 선사가 그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남의 신세를 짓고 도움을 받았으면 고맙다는 인사나
무슨 표정이라도 지을 일이지 어찌 그러한가?”라고 했다.
그러자 그 문둥이가 말했다.
“여보시오 대사! 내가 대사가 주는 옷을 입어줬으니,
문둥이님! 보시를 받아주셔서 고맙다는 말이나 아니면
표정이라도 좀 지어야 하지 않겠소.”라고 하며,
도리어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백은 선사는 그만 땅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올리며 말했다.
“아직도 소승의 수행이 모자라 성현을 몰라 뵈었습니다.
거룩한 깨우침에 감사드립니다.” 하고,
고개를 들고 일어나보니 문둥이는 온 데 간 데 없고
아름다운 연꽃 한 송이가 그 자리에 피어 있었다.
그제야 백은 선사는 그 문둥이가 바로 문수보살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 번 무주상보시에 대한 참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