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났다고 뉴스를 들은 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오늘도 비가 흩뿌리고 있다. 3-4평의 방안으로 아이들이 왁자지껄 몰려든다. 비에 젖은 양말이 찍어내는 자국을 여기 저기 남기면서 아이들은 신이 나서 들어온다. 그렇지 않아도 더운 공간이 순식간에 찜질방으로 바뀐다. 점심을 만든다고 밀폐된 1평의 부엌에서 운신을 겨우 하며 아내는 연신 땀을 흘린다.
부엌이 좁은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부엌이 열기로 데워지는 것뿐만 아니라 열기가 고스란히 방으로 들어온다. 데워진 방안에서 견디기란 고통이다. 열기는 밤에 까지 이어진다.
점심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먹인지도 21이 지났다. 나는 방학이 빨리 끝나기를 고대한다. 내가 가져야 하는 독서의 시간이나 논문 작성의 시간은 그냥 사라지고 내 작은 공간도 아이들에게 밀려, 지하에 조그만 예배처소로 쫓겨 가야한다.
나는 목사다. 뿐만 아니라 나는 또 세 아이들의 아버지이고, 학생이다. 아직도 학생인 나는 아이들과 아내에게 늘 빚진 심정이라 미안하다. 1995년 신대원 졸업반 시절 아내와 결혼하고 12년 동안 살면서 여전히 학생이니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신학학부를 마치고 신대원을 졸업하자마자 공부를 더 하고 싶어 다시 국어국문으로 학부를 마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철학으로 바꾸어 대학원을 다시하고, 또 다시 학부를 법학으로 공부했다. 그리고 이제 철학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다.
처음 공부의 시작은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 신학공부를 했고, 나 스스로 자신을 더욱 알고 싶어 국문학, 동양철학을 전전했다. 또 다시 철학에서 법학으로, 그리고 철학으로 이렇게 하나님과 나, 그리고 우리를 둘러 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학교 주변을 전전하다보니 결혼하고 신대원을 졸업한지가 어제 같은데 12년이 훌쩍 흘렀다. 원래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난 나는 주위의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나 스스로 헤쳐 온 길이었다. 결혼해서 아이들이 태어났다. 가족과 생활해야 했으므로 공부하며 입시학원에서 강사로 일을 했다. 학교로, 학원으로 그리고 집에 오면 거의 항상 12시가 넘는다. 그렇게 12년을 쉴 틈 없이 일하고 공부해서 남은 것은 아이들과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과 학자금으로 빌린 빚만 남아 있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몇 년 동안 교회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했다. 나는 부교역자 생활을 하며, 내가 배운 신학과 교회 현장에서의 괴리에 고통스러워해야 했다. 나는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목회자가 되지 말아야 갰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집에서 아내와 함께 성경을 읽으며, 생활하기 시작했다. 목사에게 덧세워진 거짓의 권위에 나는 넌덜머리가 났던 것이다. 부교역자를 그만 두고 학원 강사 생활과 학생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을 즈음에 어느 두 부부와 어울리게 되었다. 그 두 부부 중, 한 쌍의 부부는 막 결혼을 하여 기존의 출석교회와 너무나 먼 곳에 보금자리를 잡았고, 그리고 또 한 부부는 신앙에서 여러 고민 때문에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과 대화를 하다가 이 부부들이 우리와 함께 예배하기를 원했다. 나는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내가 격은 고통을 이들도 느낀다면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우리 집에서의 예배는 6년째 계속 되고 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인식한다. 그래서 설교 외에는 대부분 함께 일한다. 예를 들면 식사준비도 설거지도 목사와 성도가 함께한다. 헌금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헌금봉투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 하나님 앞에서만 헌금을 자발적으로 한다. 헌금의 쓰임을 100% 공개한다. 헌금은 주일 식사를 위한 반찬 값 7000원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액 봉사와 구제에 사용한다.
방학이 되기 몇 주 전에 아내가 기도하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우리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 주변에 힘든 가정이 몇 가정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엄마 아빠가 모두 일을 하거나 또는 다른 사정 때문에 어린 아이들이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학기 중에는 점심 걱정이 없지만 방학 중이라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고민했다. 나는 학원을 옮기려고 지금 쉬고 있어 수입이 없다. 아내 또한 초등학교에서 장애아 보조원으로 일하는데 방학이라 수입이 없다. 돈 문제뿐만 아니라 조그마한 공간이라 10여명 이상의 아이들이 와서 시간을 보내면, 우리 아이들과 나는 완전히 공부고 논문이고 끝이다. 또 이 더운 날 그 비좁은 곳에서 아내는 어떻게 매일 점심을 하려고 하는지, 걱정이 되어 일단은 거절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늦은 밤 기도하는 나의 머릿속으로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한 자”를 기억하겠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스쳐가는 생각을 부정했다.
“냉수가 아니라 밥이잖아요, 하나님.”
그리고 “솔직히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서 지금까지 5년 동안 토요일마다 무료과외 지도하는 것으로 충분하잖아요.” 라고 항변했지만, 더 이상 아무 생각이도 스쳐지나가지 않았다. 주일 예배하는데,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고민을 성도들에게 털어 놓고 말았다. 예배하는 성도들이 알았으니 아내의 부탁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아내에게 허락을 하고, 기도하는데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사랑하노라’ 하는 것이 현실의 시험 앞에서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구나 싶어 너무 부끄러웠다.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고 고맙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평등을 말하지만 아내에게는 늘 불평등하다. 함께 예배하면서 단 한 번도 다른 사람보다 먼저 의견을 물은 적이 없고, 다른 사람 앞에서 기도를 시킨 적도 없다. 다만 교인들을 위해 식사준비나 하고, 다른 사람 뒤에 조용히 있으라고 말했다. 어릴 때 교회에서 목사님 부인이 늘 말썽의 가운데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는 늘 배제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아내는 나의 이런 심정을 이해하고, 말없이 자신의 할 일을 했다. 이번에 아이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면서도 너무도 조용히 혼자서 한다.
형우라는 아이와 우미라는 아이는 남매인데, 둘 다 너무나 말랐다, 아이들의 아빠와 엄마는 일한다. 그래서 아마도 밥도 제대로 챙겨 먹이지 못하나 보다. 급할 때마다 빵 같은 인스턴트식품을 먹여서 인지 점심밥을 먹일 때, 밥투정도 심하다. 다른 아이들이 밥을 다 먹고 나가도, 우미는 숟가락을 들고 밥알을 세고 있다. 아내는 아기에게 달래듯이 우미 앞에 앉아서 밥을 한술 두술 먹인다. 며 철전 저녁에는 아내가 들뜬 얼굴로 “형우가 여기서 밥을 먹어서 인지 살이 쪘다고 형우 엄마랑 옆집 집사님이 말해요”라고 나에게 말한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저렇게 좋을까? 저 기뻐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일까,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너무도 부끄러웠다. 나는 왜 저런 기쁨에 참여하지 못할까? 어저께는 누가 복숭아를 좀 주었다. 아이들에게 점심을 먹이고 복숭아를 깎아 줄때, 아내는 아이들이 너무 보채니까 서두르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그리고 벤드를 붙이고 있었다. 손가락이 왜 그러냐고 묻자 슬그머니 감추며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는다. 내가 다그치자 고백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복숭아 한 조각 더 먹이겠다고 그랬냐?”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 혼자 기도를 하는데, 오히려 내 머리 속에서 주님의 호통이 들리는 듯하다.
나는 감사했다. 이런 아내를 나에게 보내준 하나님에게.....
오늘 밤도 아내는 “흑미밥, 김치, 오징어 국, 두부부침”을 쓰며, 아이들에게 고기라도 한번 먹였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첫댓글 이 글을 읽고 나 자신이 부끄럽 습니다 나 자신이 힘드니까 주변에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간것 같습니다 더욱더 노력하며 주께 기도와 하나님을 믿고 따를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 살고쟈 하시는 두분의 모습이 그 어떤 설교보다 더 감격스럽고 감동입니다 너무 오랬동안 알고 보았기때문에 몰랐던것 같아요 저는 단 3일동안 여름성경학교때문에 교회에 있었지만 사모님을뵙고 차마 저의 못난 입술로 말씀드릴 수 없을 정도로 주님을 따르시는 모습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를 다녀 온후 지연아빠도 사랑의 실천을 한다고 갑자기 안하던 일들을 하고 얼마나 달라졌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목사님의 사랑의 실천을 하셨던 말씀을 듣고 난 후에요....목사님이 말씀하셨던 비젼이 저의 비젼이 되고 저의 미래가 되었으면하는 바램이 얼마나 컸던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