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
조수미의 애절한 노래와 가사로 우리에게 각인된 비극의 여인 명성황후!
이처럼 요즘 명성황후가 영화, 드라마, 뮤지컬등에서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나라를 사랑한 조선의 가장 비극적인 여인으로....
우리 민족이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일본인에 의해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조선의 왕비로....
하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명성황후는 조선의 왕비로서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여인임에는 분명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슬퍼하며 그리워해야만 할 인물은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써 온 글을 읽어보았다면 명성황후가 우리 민족과 조선에 긍정적인 일 보다는 부정적인 일을 훨씬 더 많이 행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명성황후 개인 잘못만은 아니다.
그녀는 한미한 가문 출신의 조선의 왕비로서 당시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와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능력한 남편이자 왕인 고종대신에 괴팍하고 끝없는 권력욕에 사로 잡힌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무력하기 짝이 없는 남편 고종을 대신해서 조선을 움직였기에 그녀의 선택은 조선과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동학농민혁명으로 민씨 정권이 위험에 처하자 명성황후가 세 번째로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한 것은 명성황후 개인에게나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자충수가 되었고 일본에게는 하늘이 준 기회가 되어버렸다.
일본은 동학농민혁명을 완벽하게 진압하고 청일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갑오경장이라는 조선 역사상 최고의 획기적인 개혁도 만들어 냈다.
이제 일본에게 거칠 것이 없었다.
조선을 먹고 동아시아를 일본의 손아귀에 넣겠다는 일본의 원대한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에는 또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있었다.
그동안 동아시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일본의 약진을 예의주시했다.
그리고 간섭을 시작한다.
러시아 혼자 힘으로는 힘들어 독일. 프랑스에 도움을 청한다.
유명한 3국간섭이다.
3국간섭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이 1895년 4월 23일 강화 조약인 시모노세키 조약 서명을 통해 요동 반도를 차지하게 되자,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외교적 개입을 통해 일본 제국의 철수를 요구하여 관철한 사건이다.
이 3국 간섭은 후에 러일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어쨌든 일본은 혼자 세 나라와 대결할 수 없었으므로 그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러자 명성황후와 민씨 정권은 갑오경장 이후 개화파와 일본의 눈치만 살피다 일본 보다 더 강한 러시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 급속하게 러시아쪽으로 붙는다.
명성황후와 민씨정권은 자기들 정권만 유지할 수 있다면 정책이나 이념보다는 언제든지 힘센 나라에 빌 붙으려했다.
명성황후는 일본이 3국간섭으로 힘없는 모습을 보이자 발빠르게 김홍집등 개화파들을 치고 급속하게 친러파들로 조선조정을 채웠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최고의 친일매국노로 알고 있는 이완용이 이때는 친러파였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지도층들은 정책이나 이념보다는 힘센 쪽으로만 빌 붙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왕이나 왕비가 그런 짓을 서슴없이 하는데 신하들이 그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들 같은 사람들이 당시 지도층으로 있었다는 것이 조선과 우리 민족의 불행일 뿐이다.
이에 일본은 조선이 친러로 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명성황후에 엄청난 분노를 한다.
그리고 극단의 계획을 세운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랬을 것이다. 청나라만 조선에서 물리치면 조선은 순순히 일본 것이 된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다 채려논 밥상에 러시아가 나타나 숫가락을 얹은 것만 아니라 밥상을 통째로 가져 가려 했으니 분노 할만 했다.
일본은 일명 ' 여우사냥 '이라는 작전을 짜고 명성황후 제거 작전에 돌입한다.
일본은 이번에도 갑오경장 때 잠시 이용했던 흥선대원군에 접근한다.
권력에 대한 노욕은 무서운 것이다.
그때까지도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흥선대원군은 일본이 내민 미끼를 덥석 물고 만다.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살해까지 알고 가담했는지에는 여러 설이 있다.
나도 그것은 모르겠다.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살해까지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과는 흥선대원군에게 뿐만 아니라 조선과 우리 민족에게 치명적이었다.
우리나라 땅, 그것도 가장 안전하다는 궁궐에서 조선의 왕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처참하게 능욕을 당하고 살해된다.
그리고 그 시체는 불 태워졌다.
세계사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조선의 궁궐에서 일어난 것이다.
참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일에 앞장 선 흥선대원군은 살아있는 기간 동안 땅을 치며 후회했다 한다.
그러나 엎지러진 물 이었다.
그는 후회하다 곧 죽고 만다.
이 일을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아래는 을미사변에 대한 공식기록이다
을미사변 사건 당시 서울 현지에서 이를 지휘한 일본측 최고위 인물은 부임한지 37일 밖에 안되는 일본공사 미우라였으며, 주요 무력은 서울 주둔의 일본군 수비대이고, 행동대는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배 등이었다.
이들은 미우라의 직접 지시하에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기습하여, 고종의 왕후인 중전 민씨(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를 참혹히 살해하였다.
그리고 시신은 근처의 숲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석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
그런데 사건의 배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견이 분분하다.
당초부터 은밀히 진행된 사건인 데다가 사건 직후, 일본측이 철저히 자료를 인멸, 왜곡했기 때문이다.
미우라는 대원군이 사건을 주모하였으며 왕후의 시해는 조선군 훈련대가 자행한 것이라고 위증하였는가 하면,
공정한 재판을 통해 자국의 불명예를 씻겠다던 일본정부는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를 들어 범죄에 관련된 일본군민 모두를 무죄 방면하였다.
나아가 사건 현장에 참여했던 기꾸치 겐죠, 고바야카와 히데오 등 한성신보사(서울의 일본신문사)의 일본인 기자는 후일의 저작(『대원군』,『조선근대사』,『민후조락사건』,『조선잡기』등)을 통해 대원군과 왕후의 갈등구도로 한국근대사를 날조하였고, 이 사건에 대해서도 그렇게 기술하였다.
그 결과 한국인 일반에게는 이 사건이 일본의 국가적 범죄라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는 반면 일본인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일본측 연구자들은 미우라가 단독으로 계획하여 자행한 것으로 그 이상의 배후는 없으며 조선측에서도 대원군이 적극 협조하였다는 입장이다.
즉 왕후 민씨와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대원군과 미우라가 공모한 사건이라는 주장이다.
사건 현장의 지휘구도에 대해서도 일본군 장교 대신 낭인배의 역할이 중심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