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7:1-10
찬송가 39장 ‘주 은혜를 받으려’
욥기를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욥기 서두에 욥에게 닥친 사건에 긴장감과 동정심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욥을 위로하기 위해 욥을 찾아온 친구들을 보며, 내 주변의 친구나 친척이나 이웃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어야 함을 결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마음은 욥기를 자주 대하는 사람도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욥기를 처음 읽는 사람이 욥의 친구들의 말을 읽을수록 그 말이 위로의 말인지, 모호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와 달리 욥기를 자주 접한 사람이라면 욥의 고난 후의 결말을 알고 있기에 전개 부분에서 지루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욥기에는 욥과 친구의 논쟁이 세 번 있습니다. 그들의 발언 내용은 간결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욥에게 입을 열었던 친구 엘리바스의 말이 4장과 5장 두 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고 이에 대한 욥의 대답 역시 6장과 7장 두 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37장까지 욥과 친구들의 세 차례 논쟁뿐만 아니라 욥의 독백, 그리고 논쟁 막바지에 끼어든 중재자(엘리후)의 발언도 있습니다. 이렇게 장황한 논쟁 가운데, 그들이 말한 한 절 한 절이 진리를 담은 감동적인 메시지로 독자에게 전달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욥기를 자주 접하는 사람들이 욥기를 묵상할 때 전개 내용의 부분보다 전체의 주제를 더 생각하는 듯합니다. 가장 많이 생각하는 주제 중 하나는 고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고난에는 죄를 짓지 않고도 받는 고난, 의인의 고난, 고난 중 인내, 고난 후 받는 복, 고난의 유익 등이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이 욥기의 중요한 주제임은 분명하나 욥기를 통해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주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욥기를 묵상하면서 해야 할 일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의 한계와 세상만사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받아들이며, 신앙의 성숙을 이루는 일입니다. 특히 욥기의 ‘전개’에 해당하는 3장에서 37장을 묵상할 때는 정답을 모른 채 갑론을박하는 욥과 친구들을 보면서 나 역시 사람들과의 논쟁, 토론, 대화에서 정답에 벗어난 말을 ‘할 수 있구나’ 그리고 ‘하였구나’를 깨닫는 일입니다.
나의 인생에서 지금까지 했던 많은 논쟁, 토론, 대화에서 나의 의견이나 주장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들이 많았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을 인용해서 말하더라도 틀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구절을 잘못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계를 지닌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식과 지혜가 많을지라도 어떤 사안에 완벽한 답을 할 수 없다는 것과 대부분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것조차도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나의 갈 길을 밝혀 비춰주시고 나의 생각이 바르게 형성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심을 명심하여, 성령님께서 감동 주시는 생각을 말과 행동으로 표출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에 대한 욥의 답변 중 일부입니다. 욥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욥 자신도 자신이 받는 고난의 원인을 모르며 말하는 답변을 묵상하실 때 전체의 주제를 생각하시면서 성찰의 은혜가 있으시길 원합니다.
욥이 모든 인생의 괴로움을 말하다(1-2)
1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욥은 먼저 모든 사람이 겪는 인생의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자신이 겪는 괴로움은 엘리바스의 논리처럼 상선벌악(賞善罰惡)의 결과가 아님을 주장하기 위한 답변입니다. 여기서 품꾼은 오늘날의 육체노동자에 비해 훨씬 더 힘든 노역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노동’으로 번역한 원어 ‘차바’는 구약 성경에서 대부분 ‘전쟁 또는 군대’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문자적 의미는 성인 남성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성인 남자는 군대에서 힘든 복무를 하지 않느냐’ 또는 ‘모든 남자는 성인이 되면 힘든 군복무를 위해 징집되지 않느냐’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군대에 갑니다. 군대에 가기 전에 힘든 마음과 군에 가서 힘든 복무를 경험한 사람은 공감이 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는 개역개정 한글성경에서 의역을 한 이유는 2절과 연결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2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종은 1절의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으로도 볼 수 있고, 품꾼의 다른 표현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종의 의미가 군인을 포함하든 포함하지 않든 종과 품꾼은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속박된 삶을 살아갑니다. 종과 품꾼은 고된 노동을 합니다. 품꾼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루의 품삯을 받지 않으면 삶의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에, 하루의 품이 생존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하루의 품팔이 이후 저녁의 쉼은 하루의 고단함을 잊게 하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욥이 인용하여 인생의 괴로움을 토로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욥은 자신의 고달픔을 토로합니다.
욥이 자신의 고통과 고달픔의 날, 그리고 희망이 없는 날을 말하다(3-5)
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모든 인생에게 고달픔이 있듯이 욥 자신에게도 고달픔이 있음을 토로합니다. 욥은 하루의 낮 동안 힘든 노동과 괴로움을, 그날 저녁과 밤의 쉼으로 회복하는 사람과는 달리, 자신은 회복의 시간 없이 여러 달째 고통을 받고 있음을 한탄합니다. 고달픈 밤이 작정되었다고 말한 것은 당장 회복될 기미가 없으며 앞으로도 회복될 가망이 없음을 한탄한 것입니다.
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욥이 고달픈 밤이 작정되었다고 말한 것은 단지 하룻밤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미래가 어두운 밤과 같고 고달픈 밤과 같을 것이라는 한탄입니다. 욥은 낮보다 밤이 더 싫었습니다. 욥에게는 낮이나 밤이나 별 차이 없이 괴롭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특히 밤이 찾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이유는, 누워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어두운 밤에 이리저리 뒤척이며 괴로움을 홀로 이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잠이 든 밤에는 자신을 간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호출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음은 욥이 이리저리 뒤척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한탄합니다.
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이러한 욥의 상태는 사람들이 상상하기 싫은 대목입니다. 구더기가 그의 몸에 입혀졌습니다. 2장 7절이 증거하듯이 욥의 몸에는 머리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종기가 났습니다. 그래서 가려움과 통증으로 인해 재 가운데 있었고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었으니 상처가 잠시 아물었더라도 이내 터져 진물이 났을 것입니다. 이런 날이 수개월째 지속되었으니 욥이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베틀의 북’은 베틀에서 천을 직조할 때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베틀에 세로로 길게 있는 줄, 날줄에 가로 방향으로 들어가는 줄, 씨줄을, 북을 이용하여 넣습니다. 이때 베틀의 북은 빨리 좌우로 움직이게 되는데, 욥은 이 베틀의 북처럼 자신의 날이 빨리 지나가니 희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욥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인생의 날은 빨리 사라집니다. 시편 90편을 보면, 사람의 연수는 신속히 가니 날아간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7절부터 10절은 기도의 앞부분입니다.
변론 중 욥의 탄식 기도_못하리이다(7-10)
7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이란 욥의 날이 베틀의 북과 같이 빨리 지나감과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바람은 호흡할 때 한 번 내쉬는 한숨처럼 순식간에 생명이 끝남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고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욥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지만, 원망과 절망이 섞여 있습니다. 곧 죽을 사람들이 하는 호소를 이어갑니다.
8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나를 본 자’에는 욥의 아내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욥의 친구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의 비참한 상태를 눈으로 보았는데 다시는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표현은 곧 죽을 사람이 하는 절망적인 말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의 눈 역시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무소부재(無所不在)를 부인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죽어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욥은 자신이 죽어서 갈 곳이 어디인지를 말하며 절망적 표현을 이어갑니다.
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10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는 앞선 표현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그리고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 땅에서 자신의 날이 다 되면 갈 곳은 바로 스올임을 욥은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올은 죽은 사람이 가는 곳이고, 스올에 간 사람은 살아서 예전과 같은 상태로 다시 이 세상으로 올 수 없다는 것을 욥은 알았습니다. 욥은 당시 고대 사람들이 믿었던 죽은 사람의 영혼이 언젠가 그의 육체로 돌아온다는 내세관을 부정한 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를 만들었던 이유가 이러한 내세관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욥은 이러한 내세관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죽은 사람은 다시 이 땅에 돌아올 수 없다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더 절망적으로 느낀 것입니다.
7절부터 10절에 ‘다시’라는 말이 5번 나옵니다. 원문을 보면 그중 4번은 히브리어에서 강한 부정을 뜻하는 ‘로’가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못본다’, ‘다시 못본다’,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 이러한 표현은 자신의 인생을 마치 자신이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표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말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하는 말 가운데 ‘다시는’이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하십니까? ‘다시는’ 말 뒤에는 대개 부정적인 말이 오지 않습니까? 내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한다면, ‘내 인생에 다시는 무엇을 못본다’, ‘내가 다시는 무엇을 못한다’라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욥처럼 우리는 친구나 가까운 사람들 또는 업무상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부정하는 말, ‘다시는’이라는 강한 부정의 말을 하지 마십시다.
오직 ‘다시’라는 말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 또는 ‘내가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등 신앙적 말을 할 때 사용하도록 힘쓰십시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신앙을 점검하시고 다시는 시험에 빠지거나 다시는 죄악에 빠져 살아가지 않도록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심을 인지하고 아버지께 창문을 열고 자녀로서 아버지와 소통하며 살아가십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자녀로 삼아주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피조물이자 자녀인 저희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하시옵소서. 한계를 지닌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있다는 교만을 버리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를 인정하며 만사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힘든 노동(정신노동 포함)을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나와 그 사람을 비교해 봅시다.
2. ‘욥과 친구들의 논쟁’과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하는 대화 또는 논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봅시다.
3. 아브라함처럼 족장시대에 살았던 욥은 의인과 악인 부활을 알았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4. ‘다시는’이라는 말을 주로 언제 사용합니까?
5. 하나님을 향한 창문을 여는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작성: 김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