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정 해 경
기억도 가물가물한 옛날, 할머니를 따라서 시장에 갔다. 어느 가게에 들어서는데 통로 양쪽에 둥그런 멍석이 펴져 있고 각기 다른 물건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한쪽은 볶은 땅콩이었고 한쪽은 오징어 다리를 오므라지지 않도록 가느다란 나무 꼬챙이에 꿰어 말린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온전한 마른 오징어 한 마리인 줄 알았다. 외눈이긴 하지만 눈도 하나 달려있고 어찌 보면 가느다란 머리카락 같은 것이 위로 뻗쳐 날리고 있었다. 다른 것은 있는 둥 마는 둥 보잘 것 없는 것이 다리는 왜 그렇게 많은 건지 자그마치 열개나 되었다. 그 때, 내 나이 예닐곱 살쯤, 1부터 10까지 쓰는 연습을 한창 하고 있었는데 오징어 다리가 열 개라는 것이 왠지 흐뭇했다. 지금 같으면 '오징어 참 수학적이네. 십진법도 알고' 했을 것이다.
오징어가 수학적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에 본 것은 오징어의 다리에 불과하고 몸통과 다리를 온전히 갖춘, 오징어란 놈은 모두 세모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오징어 한 마리를 그리려면 작은 세모 밑에 큰 세모, 그리고 큰 세모 밑변에 일자 다리 열 개를 그리면 끝이었다.
기하학의 기본 도형은 모두 가지고 있는 존재. 몸통을 중간쯤에서 가로로 찢으면 사다리꼴이 되고 원구의 눈과 다리의 빨판도 모두 톱니 같은, 뾰족한 무늬가 그려진 원이다. 그러니까 삼각형, 사각형, 원뿔, 구를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기하학의 시조로 유클리드를 꼽지만 이 기하학을 몸소 구현한 것은 오징어였던 것이다.
그 즈음부터 한동안 오징어는 세상 속에 숨어 있는 '숨은 그림 찾기'였다. 세모 지붕에 기둥이 네 개 있는 원두막도 멀리서 보면 숨어있는 오징어였고, 가는 허리에 플레어스커트를 입은 아가씨의 뒷모습에도 오징어는 숨어있었다. 뾰족하게 서 있는 교회 첨탑에도 천연덕스럽게 오징어가 올라앉아 있었다. 둘러봐도 오징어를 찾지 못하면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마주 붙여 오징어 모자라도 만들며 놀았다. 오징어가 숨어있는 세상, 그 세상 속에 내가 헤엄쳐 다니는 것 같았다.
어느 샌가 숨은 그림 찾기는 잊어버리고 오징어가 연체동물 중에서도 두족강(頭足綱)이라는 것을 수업시간을 통하여 알았을 때, 나는 속으로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몸통이 머리보다 위에 있고 다리가 머리에 붙어있다는 말인가. 오징어가 피카소처럼 예술을 알았을까? 아니면 태생적인 반항아일까? 생각보다 행동이 우선이라서? 지금도 알 수가 없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장을 보러 갔다. 어물전을 기웃거리다 상자 속에 위아래로 포개어져 일렬횡대로 누워 있는 오징어를 만났다. 되록되록한 눈으로 시커멓게 나를 흘겨보는 녀석들. 혹시 이들이 그 옛날 페루 어디 나스카 평원에 기하학적 그림을 그려놓고 사라진 수수께끼 문명의 후예들이 아닐까. 한 놈을 덥석 집어 장바구니에 넣었다. 어디 한 번 이 녀석을 호되게 족쳐 볼까.
손아귀에서 미끈거리며 미꾸라지처럼 벗어나려는 녀석을 꽉 쥐고 지퍼를 열듯 배를 가르는 순간, 그러 쥔 아귀 사이로 시커먼 먹물이 면전을 강타하며 튕겨 올랐다.
“턱도 없지. 내 그리 쉽게 누설할 것 같은가?”
오징어의 최후의 일격에 나는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오징어의 비상과 서정성의 포기 (비평문)
이 경 희
백반 정식인데 새로운 맛이다. 오징어 한 마리 가지고 이런 요리를 해내다니 놀라운 솜씨다. 무심한 듯 선 하나로 멋을 낸 청화백자가 이런 맛이던가. 담백하지만 깊은 맛이 느껴진다. 수필의 언어가 지닌 미학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 그만의 비법이 감지된다. 파격적 발상이지만 품격을 지킨다. 평범하지만 독창성이 반짝거린다. '낯설게 하기'의 성실한 실천이 가져온 결과는 오징어의 비상이다. 동해의 차가운 바다를 헤엄쳐야만 했던 오징어가 우주선이 되어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오징어와 삼각형의 만남은 불온한 상상력의 진원지다. 엄숙한 위계질서와 서정성의 권위와 결별하지 않고서는 발현할 수 없는 혁명적 사고다. 유년기에 시장에서 본 오징어, 삼각형 구도, 숨은 그림 찾기, 장바구니에 담긴 현실의 오징어로 이어지는 사유의 전개는 분명 관념적이다. 그럼에도 상상력이 공중을 부유하지 않고 지상에 무사히 안착한다. 기하학의 세계에서 원두막과 교회 첨탑으로, 생물학 교실에서 피카소로, 페루의 나스카 평원으로 종횡무진이다. 마치 공중을 떠다니는 놀이기구를 타는 듯 흥미진진하다. 은근한 파격과 점층법을 도입한 솜씨는 노련한 장인의 손놀림을 보는 듯하다.
이 작품은 유년기의 문으로 들어가 지식의 광장에서 노닐다가 현실의 부엌으로 회귀한다. 문학 작품도 하나의 건축물이라면 이 작품은 치밀한 계산으로 잘 지어진 독창적인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이 순차적이지도 않고 비약이 심하지만 따로 놀지 않은 이유가 이런 치밀함 탓인 듯싶다. 다양한 화소의 배치와 언어의 운용, 구성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자연스럽게 주제로 수렴된다. 마지막에는 유쾌한 반전이 기다린다. 진지하고 엄숙하던 분위기가 일순간 전복된다. 반전의 효과는 웃음과 경쾌함을 넘어서 '숨은 그림 찾기'라는 주제의 여운을 길게 남긴다. 결국 수필의 진실성은 삶의 현실에 있다는 사실을 반전을 통해 보여준다.
서정성이라는 전통의 성채를 과감히 탈출한 신선함은 이 작품이 지닌 최고의 미덕이다. 서정성을 의식한 흔적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서정성의 염결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서정성을 구현하는 방식과 수용하는 태도이다. 낡은 서정성을 고집하는 동안 상투적인 서정은 자기복제를 반복하면서, 그 사이에 수필은 점점 늙어갔다. '서정성'이라는 개념을 '수필'과 동격으로 취급하거나 동일성으로 보는 진부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서정의 권력을 포기하고, 서정성의 순결주의를 버릴 때 수필은 새로운 진경을 펼칠 수 있다.
가볍게 출발했지만, 뒤로 갈수록 사유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지식의 과잉과 계몽적 태도는 독자에게 거부감을 불러올 위험이 있다. 그런데 화자의 태도는 시종일관 겸손하다. 잘 숙성된 지식은 지성의 향기를 머금고 있기에 서정성의 결여에서 오는 건조함이나 경직성을 만회하고도 남는다. 발칙한 발상, 체험과 지식, 깊은 사유가 잘 버무려진 명작이다. (2014. 6월호, <좋은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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