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한국수필》, 2015년 《수필세계》 신인상 등단
•수필집 『희나리』, 『분이』
•매일신문 시니어문학대상, 청송객주문학대전(3회) 수상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수필세계작가회 회원
시름시름 아픈 허리를 파스만 붙이고 미련스럽게 버티었더니 다리까지 저리다. 참다못해 병원에 갔더니 척추 협착증이라고 한다.
오래 사용해서 고물이 되었으니 아프면 진통제 먹고 물리치료나 하면서 살라 한다. 아파 죽겠는데 병을 친구 하라니! 같이 웃었지만 섭섭한 생각이 든다. 바지를 올려 보여주는 의사의 무릎에도 파스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로 이해해도 될까.
처방전을 받아 들고 물리치료실로 갔다. 좁은 침대에 누워서 전기 치료를 받고 있는데 다닥다닥 붙은 커튼 한 장 사이로 옆 사람 숨소리까지 들린다. 여기저기서 내는 신음이 한결같다. 모두 낯설지 않은 소리이다. 아마 남녀노소 불문 세계 공통어이리라.
읍내 노인들이 치료실에 꽉 차 있으니 마치 반상회에 온 것 같다. 집집이 사는 이야기가 다 나온다. 누구네 집 딸이 어떻고 아들은 명
절에 오지 않았느니 사설을 늘어놓는다. 자식들 장성하여 대처로 떠나고 허허로운 마음을 나누려 모여든 사랑방 같은 풍경이 물리치료실이다.
치료를 받으면서 노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사는 재미가 이런 것이라고 자기네들끼리 주고받는 말이다. 일주일에 한 번 물리치료는 기본이며 요일마다 가요 교실, 체조 교실, 웃음 치료 등으로 하루도 집에 있을 시간이 없다고 한다.
청송댁 할매가 복지관에서 배운 ‘백 세 인생’을 나름 구성지게 한 소절 부른다. 음정 박자 무시하려면 노래는 뭐하러 배우냐고 옆의 할매가 한마디 하니 저쪽 건너 할매가 듣고서 “그럼 당신은 체조는 와 배우노” 하면서 쏘아붙인다. 투박한 사투리로 싸울 듯 소리를 지르다가 치료실이 떠나가도록 다 함께 웃기도 한다.
삶의 정의는 행복이라고 했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지 살다 보니 행복한지 모르겠지만, 노인들은 행복해 보인다. 행복의 조건은 주관적이라는 말이 가슴에 젖어 든다. 다가오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 행복한 척하는지 모르겠다. 이 좋은 세상 건강하게 살아야 요양원에 가지 않는다고 서로에게 당부하며 큰 소리로 다짐까지 하는 노인들의 말이 짠하게 들린다.
내가 사는 이곳은 시골이라 농사를 짓는 분들이 많다. 연세가 드신 노인들은 온몸이 퇴행성 관절로 성한 곳이 없다. 호밋자루 벗삼아 살다 보니 손가락 마디마다 굽어 휘어지고 지게 짐에 척추가 닳아 바로 눕지도 못한다. 병든 몸과 친구하고 하루하루를 견디며 사는 모습이 안쓰럽다.
통증 치료실에 손님이 많은 까닭은 연골 주사를 놔주고 진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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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처방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통제는 노인들에게 만사형통이다. 마땅하게 갈 곳이 없다 보니 잘 낫는다는 병원이 있으면 몰려다니며 시간을 땜질하며 사는 어른들이다.
저주파 치료가 끝나고 척추를 당기는 견인 치료를 하기 위해 자리를 옮긴다. 이쪽 방은 복지관에도 못 가실 형편의 어른들이 쓰고 있다. 침대마다 쭈그러지고 구부러진 노인들이 차지하고 누워 있다. 노인의 모습이 나하고는 상관없을 줄 알았는데 가장자리에서부터 가운데를 향해 야금야금 다가가고 있다. 허리가 펴지지 않고 다리도 구부러져 저런 모습으로 살게 되면 어쩔까 생각하니 가슴이 조인다. 콱 막힌 숨을 내쉬며 미리 보는 영상에 좌불안석이다.
오래 사용해서 낡았다는 의사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서인지 우울하다. 다가올 미래가 두려워지고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비애감이 든다. 예전에도 허리가 아파 물리치료를 자주 받은 적이 있다. 그때는 치료실에서 어르신들을 만나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노인이니까 당연히 병원을 찾는 줄 알았는데 오늘 내가 마주친 노년의 풍경은 서글픔이다.
바쁘게 사느라 준비 없이 나이만 먹어 어느새 코앞에 닥친 상황이 이물스럽다. 무심히 흘러간 세월은 아득한데 닥쳐올 시간의 속도는 가쁘게 다가온다. 자주 보아 온 풍경이 왜 새삼 낯설게 느껴질까. 모래시계처럼 거꾸로 뒤집어 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 뒤죽박죽 생각에 잠긴 나를 향해 구순을 넘긴 어르신이 “새댁 여기 자리 있소.” 옆에 빈자리 있다고 누우라 한다.
한 대 쥐어박힌 듯 정신이 번쩍 든다. 괜한 엄살떨다가 혼쭐이 난 것 같다. 나는 새댁이고 치료실 안에서 제일 젊다. 어린것이 잔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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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게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으려다가 들켰다. 민망하고 죄송스러워 혓바닥 날름 내밀며 침대 위로 냉큼 올라간다. 아픈 허리도, 저리고 땅기던 다리도 날아갈 듯 가볍다. 객쩍은 조바심을 잠재우고 매일 최면을 걸면서 살리라.
‘나는 아직 새댁이고 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