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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강해(50)
이것까지 참으라
본문 : 눅 22: 47-53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밤을 보내시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인생의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고
그들의 발을 닦아 주신 후....
감람산(겟세마네)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온 제자들(베드로, 요한과 야고보)에게
기도를 부탁하신 후 정말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기도 중에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눅22: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께 입을 맞추는 유다>
이렇게 기도하는 중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몰려왔습니다.
47절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여기서 “한 무리”는 칼과 몽치로 무장한
대제사장의 군대였습니다.
그런데 맨 앞 쪽에는 낯익은 얼굴도 보였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함께 지냈던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은30에 판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뻔뻔스럽게도 예수님께 나아와
입을 맞추려고 나왔습니다(48절).
마태복음에 의하면 유다는 예수님께 입을 맞추며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마26:49)하고 인사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반가움의 인사도,
정말 ‘샬롬’을 바라는 인사도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유다는 대제사장의 군대와
군호를 짰습니다.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예수님은 이미 그의 심중을 꿰둟고 있었습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48절).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배신과 탐욕의
입맞춤이었습니다.
성지 순례하다보면 이집트에서
예수님 피난교회를 방문할수 있다고 하죠
그런데 그 교회의 기둥이 12개인데
예수님의 제자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기둥만 다른 재질의 돌로
되어있었고 아름답게 조각되지도 않았습니다.
모두들 후대 사람들이 보수하는 과정에서
임시로 받쳐놓은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원래 그렇게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기둥이 바로 예수님의 배신한
가룟 유대의 기둥이라는 것입니다.
다들 가룟 유다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다를 앞에 대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예수님이 유다에게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돌이킬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돌이키지 않고....
배신의 길을 가는 것이 안타까우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칼을 뽑은 베드로>
그때 위급한 상황을 감지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49-50절>
49절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절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묻고는
대답도 듣기 전에.....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본문에는 익명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마는
요한복음에 보면 칼로 친 사람과
칼에 맞아 한쪽 귀가 잘린 사람이
누군지가 밝혀져 있습니다.
칼을 휘두른 사람은 베드로였고
그가 휘두른 칼에 맞아서 한 쪽 귀가 잘린 사람은
대제사장의 종 말고였습니다.
언뜻 보면 베드로의 행동은
매우 용감하고 의리 있는
행동처럼 보입니다.
누가 자기 선생을 잡아가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잇습니까?.....
보고만 있다면 오히려 이상한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다면 비겁한 짓입니다.
마땅히 누군가 나서서 막아야 할 일입니다.
성격 급한 베드로가 재빠르게 칼을 빼 휘둘렀습니다.
베드로가 아주 용맹스럽게 행동한 것입니다.
평소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수제자답게 행동한 것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그러나 그의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51절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베드로야, 그래도 너밖에 없다.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칭찬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것까지 참으라.”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이유가 있음에도 참으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행위가 비록 이유있는 것이었을지라도
“이것까지 참으라”하신 것입니다.
비록 주님을 위한다고 한 것일지라도 주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칼을 뽑을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만약 예수님의 제자였더라면,
우리도 그 곳에 있었더라면
가만히 있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칼을 뽑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할 때에는
미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모든 테러와 살상과 공격적인 행위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우리가 다 인정한다고 하면,
이 땅에 살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온통 칼부림 천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할 때는
미워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유가 주관적이지만
객관적인 이유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다른 사람이 다 인정한다고
해도 참으라는 것입니다.
6. 25 한국 전쟁 때 황해도 봉산이라고
곳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일곱 명의 장로님들이 계셨는데
네 분이 순교를 하셨습니다.
그 네 분 가운데 강덕기 장로란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체포를 당하셨습니다.
나무에 묶여서 두 눈이 뽑혔습니다.
눈이 뽑힐 때 장로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두 눈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했더니..
이제 눈이 뽑히는 이 시간에
천국문이 열리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는 폭도들에 의해 개머리판에
턱이 부서지고 이마가 깨지며
장렬한 순교를 당했습니다.
얼마 뒤에 국군이 북진을 했는데
마침 장로님을 죽인 폭도 가운데
우두머리가 잡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사람을
강 장로님이 순교하신 나무에 다시 묶었습니다.
죽이기 전에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을 죽일 가장 합당한 사람이
강 장로의 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강 장로님의 아들을
불러 왔습니다.
장로님의 아들이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더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순교를
헛되이 하지 마십시오.
이 사람은 나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 말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도 정말 어떤 사람을 향하여,
베드로처럼 미움의 칼을 들 충분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 대하여
결코 화해하지 않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만은 내가 용서할 수 없어.
나에게 어떻게 했는데.
절대로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없어.”
이런 생각을 우리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주님은 마치 송사를
기각하는 판사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마저 참으라.”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바로 이유가 있음에도 참으신
하나님의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흘리신 보혈은,
바로 이유가 있음에 흘려주신
보배피인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 했는데,
우리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자를 용서하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선명하게 각인된 곳이,....
바로 주님이 달리신 피 묻은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 이 시간이, 모든 용서할 수 없는 이유,
미워할 수밖에 없는 모든 이유들이......
십자가 앞에서 여지없이 부서지는
거룩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이곳이 분명히 미워해야 할 이유,....
칼을 뽑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
그것을 내려놓은 귀한 자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이유가 있음에도 참으라는 말입니다.
둘째, 거기에서 멈추라는 말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를 NIV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No more of this.”
직역하면 ‘더 이상 가지 말라’
‘거기에서 멈추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말고의 한쪽 귀를 잘랐을 때
가만히 내버려두면 틀림없이
왼쪽 귀까지 잘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를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이 황급히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멈춰라.”
“더 이상 가지 마라.”
어린 남매가 있었습니다.
둘이 어느 날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고함을 질러가면서 상대방을 욕합니다.
오빠는 동생을, 동생은 오빠를 욕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아버지가 오셨습니다.
"애들아, 왜 그러냐?"
"아빠, 오빠가 먼저 나한테 싸움을 걸었어.
오빠가 미워죽겠어.
오빠가 분명히 잘못했어."
이번엔 오빠가 말합니다.
"아버지, 얘가 말예요.
먼저 나한테 시비를 걸었어요.
난 친하게 지내려고 했는데
얘가 먼저 그랬어요."
아버지가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얘들아, 나는 누가 먼저 싸움을 시작했는지
알기를 원치 않아.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누가 먼저 싸움을 멈추고 누가 먼저 화해하고
누가 먼저 용서하느냐 그것을 내가 알기를 원해."
이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아닐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질그릇 같은
존재인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미워할 수도 있고 성급하게 칼을 뽑아
휘두를 수도 있음을 아십니다.
그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멈추라.” “더 이상은 가지 말라.”
귀를 하나 떨어뜨렸으면 됐습니다.
거기서 멈춰야 합니다.
더 이상 가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금산교회 성도님들 !
어디까지 왔든지 거기서 멈추시기 바랍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이유가 있음에도 참으라는 말입니다.
둘째, 거기에서 멈추라는 말입니다.
셋째, 그들을 그냥 버려두라는 말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의 헬라어
‘에아테 헤오스 투투(!Ea'te e{w" touvtou)’는
‘이들을 내버려 두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비록 악하게 굴지만
그들 마음대로 하게 버려두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초연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습니다.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걸 잘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체포하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자신의 뺨을 치는 자를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를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으론 나를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사람만 있으면 좋겠지만 ....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픔을 주는
사람을 붙여주시곤 합니다.
우리 생각으론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 생각이 있어서
우리에게 그들을 붙여주시는 겁니다.
그들을 용납하시기 바랍니다.
기분 나쁜 얼굴보다는 그들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있기에 내가 더 겸손해지는 겁니다.
그들 때문에 내가 더 기도하게 됩니다.
더 기도의 자리에 자주 나가게 되고
더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더 감사할 일은 내가 그런 악역을
맡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그들이 하는 대로 버려두시기 바랍니다.
<회복된 말고의 귀>
주님은 떨어진 말고의 귀를 붙여주시며
낫게 하셨습니다.
51절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예수님은 떨어진 귀를 집어
원래의 자리에 붙여주시며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지만 말고의 귀를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 아들의
권세를 사용하셨습니다.
힘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능력을
어떤 곳에 써야하는지를
잘 보여주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성도님들에게 있는 힘을
남을 살리는데 쓰시기 바랍니다.
성도님들에게 주어진 은사를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쓰시기 바랍니다.
성도님들에게 주신 능력을
타인을 회복시키는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씀>
사람은 살면서 보통 세 가지 것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좀 더 즐겁게 살 것을
하는 후회입니다.
웃고 살아도 될 것을 괜히 짜증을 부리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둘째는 좀 더 베풀며 살지 못한 것을
하는 후회입니다.
어차피 없어질 물질이고 젊음이고 세월인데
다 사라진 후에야 나누지 못하고
산 것에 대해 후회를 합니다.
그리고 세 번 째로 가장 큰 후회는
좀 더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순간을 참지 못해서 평생을 후회할 일을 만들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바울은 고전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여자의 인내는 여자를 아름답게 하고,
남자의 인내는 남자를 가치 있게 만듭니다.
소년의 인내는 사랑을 받고,
청년의 인내는 칭찬을 받고,
노년의 인내는 존경을 받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링컨의 이야기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링컨에게 정적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
에드윈 스텐톤같이 험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링컨 무슨 정책을 내 놓기만 하면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을 뿐만 아니라
'저질광대'라고 공격했다고 합니다.
스텐톤은 어느 날 탐험가 차일루에게 말하기를
“고릴라를 잡으러 아프리카로 가는 것은 ....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진짜 고릴라는 바로 여기 스프링골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털이 많은 링컨의 얼굴을 보고
‘고릴라’란 별명을 붙였던 것입니다.
링컨은 이런 저런 중상을 당하면서도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링컨이 대통령이 되고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 링컨은 이 골치 아픈 정적을
국방장관으로 기용하였습니다.
주변에서는 링컨에게 취소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링컨은.....
“내 판단으로는 이 시대에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사람은
그 사람이라고 확신한다”며
그를 임명했고 결국은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워싱톤에 있는
워너극장에서 링컨이 괴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을 때
모두가 총성에 겁을 먹고 피하는데도
스텐톤은 맨 먼저 쓰러진 링컨에게로 뛰어 갔고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가가 여기 누워있다.”
참된 승리자는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대로 산
링컨입니다.
참된 승리자가 되길 원하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이것까지 참으라”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