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렇게 함께 예배 드릴 수 있어 참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오늘은 제게 특별한 날입니다. 발목을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지난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며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읽게 된 책이 있었습니다. 바로 단테의 『신곡』, 그중에서도 ‘지옥’ 편이었습니다.
책의 첫 문장은 이렇습니다.
“우리 인생길의 중간쯤 왔을 때, 나는 어두운 숲속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동안 똑바로 보였던 길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단테가 이 문장을 쓴 나이가 35세였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커리어의 정점을 찍고, 이제는 내리막을 타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참 공감되었습니다. 어릴 때는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했고,
대학에 들어가고, 사람을 만나고, 직장을 얻고, 자녀를 낳고,
삶을 꾸려나가는 데만 온 신경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문득 길을 잃은 것 같은 막막함이 찾아옵니다.
"나는 왜 이 길을 가고 있지?"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걸까?"
불안한 마음이 들고,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듯한 감정이 드는 때가 있습니다.
단테는 그 어두운 숲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생각만 해도 숨막힐 만큼 두렵다.”
신학자 로완 윌리엄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신학자와 성도는 언제나 ‘무언가의 중간’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 (in the middle of something)
우리 삶은 늘 분명하지 않습니다. 선명한 답이 없는 중간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중간’에서, 우리는 영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명확하게 어느 쪽을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비틀거리며 나아가야 하는 현실. 그러나 그 비틀거림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두 사람입니다. 나봇과 아합. 그리고 한 장소, ‘포도원’이 등장합니다.
본문의 첫 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포도원이 있어…”
성경 기자는 ‘포도원’이라는 단어를 문장의 맨 앞에 배치하며 이 상징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나봇은 1절, 4절, 6절, 7절 등 반복적으로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라고 불립니다.
보통은 이런 반복을 피하는 것이 문학적 관습인데, 왜 이토록 강조할까요?
‘이스르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이 친히 씨를 뿌리신다”는 뜻입니다.
즉, 이 본문은 인물의 생사 여부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어떤 땅에, 어떤 사람에게, 어떤 열매를 기대하고 계신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봇’이라는 이름도 ‘열매’라는 뜻과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씨를 뿌리신 땅에서, 그 열매를 믿음으로 기다리는 사람.
그것이 바로 나봇입니다.
그런 나봇에게 어느 날 왕 아합이 찾아와 말합니다.
“당신의 포도원을 내게 팔라. 내가 더 좋은 밭으로 바꿔 주든지, 값을 쳐서 주겠다.”
겉으로 보기엔 참 젠틀한 제안입니다.
왕이 평민에게 정중하게 말하는 모습.
게다가 나봇 입장에서는 일확천금의 기회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봇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학자들은 이 말을 매우 강력한 부정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그딴 소리는 두 번 다시 꺼내지 마시오’라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단호했을까요?
단순히 조상의 유산을 지키려는 마음이었을까요?
본문을 다시 보면, 아합이 이 포도원을 사려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 포도원을 얻어서 채소밭을 삼고자 하노라.”
채소밭이요?
성경 전체에서 ‘포도원’은 100번 가까이 등장하지만 ‘채소밭’은 매우 희귀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포도밭을 채소밭으로 바꾸겠다는 것일까요?
해답은 신명기 11장에 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백성에게 말합니다.
“애굽 땅은 채소밭처럼, 사람이 발로 물을 대야 하는 땅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받아야 한다.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즉, 애굽은 ‘노력의 땅’, ‘자기 방식의 땅’입니다.
하늘이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 유지되는 땅입니다.
반면, 가나안은 ‘은혜의 땅’, ‘하늘의 시선이 머무는 땅’입니다.
아합은 지금 포도원을 채소밭으로 바꾸려는 겁니다.
하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논리와 자기 팽창의 욕망으로 채우려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부동산 거래가 아니라, 신학적 전복입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세속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늘날의 인간은 '닫힌 자아(Buffered self)'입니다.
은혜가 쏟아지고 있는데, 그것을 막아내고 차단해 버립니다.
영적인 상상력은 닫히고, 하늘을 향한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반면, ‘열린 존재(Porous self)’는 다릅니다.
내 자아와 삶에 구멍을 냅니다.
은혜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늘을 향해 자신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물론 구멍이 많아지면 상처도 많아집니다.
그래서 더 아픕니다.
하지만, 그 구멍으로 은혜가 들어오고,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닫힌 경계를 뚫어버리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제자인 우리는 뚫린 그 경계를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봇은 그 길을 걸었고, 결국 순교했습니다.
이 세상은 늘 포도원과 채소밭 사이에서 우리를 유혹합니다.
더 쉬운 길, 더 합리적인 길, 더 빠른 길.
하지만 우리는 묻습니다.
“내가 지금 채소밭을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포도원을 지키고 있는가?”
말씀을 마치며 시편의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비틀거리며 주님을 따라가는 그 모습에서 위로를 받으신답니다.
가끔 누군가 이렇게 말해줄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됩니다.”
그 말 한마디가 저를 살릴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비틀거립니다.
포도원과 채소밭 사이에서.
은혜와 계산 사이에서.
상처받고, 또 자주 주저앉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함께 계신 주님,
우리로 인해 위로받으시는 하나님,
그분이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러니 다시 길을 걸읍시다.
닫힌 자아를 열고, 은혜를 통과시키는 삶으로.
나봇처럼, 뚫린 존재로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씨앗을 기다리는 그 포도원의 사람으로 말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