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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사람은 배우기를 원한다.의심하라 [김형철 교수의 `서양 인문 오딧세이`]
ysoo 추천 0 조회 19 13.01.31 23: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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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철 교수의 '서양 인문 오딧세이']

 

사람은 배우기를 원한다. 고통없는 배움은 없다. 깨우치려면 모든 걸 의심하라

 

 

▲ 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

 

 

"사람은 배우기를 원한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 제1권 1장 첫 문장에서 한 말이다. 인간 본성을 한마디로 줄이면 '끊임없이 배우려는 존재'라는 말이다.

권력, 명예, 부(富)를 모두 가진 사람이 허무감을 느낀 끝에 현자(賢者)에게 물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의 답은 이랬다.

"한평생 배우러 왔다가 갑니다."

철학자 몽테뉴는 "철학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했다.

죽음은 모든 이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왜 있는 게 없어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가?

반대로 세상에 태어나기 전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공허함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가? 죽고 난 뒤 무존재(無存在)가 됐을 때, 우리는 내가 무존재한 것에 대해 아무 감정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둘 다 모두 내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현재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현재를 즐기라"고 말한다. 이것이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통 없는 배움은 없다"고 했다.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태 알고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새로 배울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이 경험으로 전해지는 '암묵지(暗默知)'든, 지식으로 전달되는 '형식지(形式知)'든 마찬가지다.

이미 알고 있는 것만 계속 반복하는 존재는 이미 죽은 존재다. 사람은 자신을 부정해나가면서 학습하며 성장한다. 마치 내 몸 안의 세포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죽어야 새로워지는 것처럼. 자아실현을 하려면 부단히 자기를 부인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2500년 전 아테네 델포이 신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배우려 한다. 배우는 방법은 '질문'이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모르면서도 질문하지 않는 것은 죄다.

"크게 깨우치려면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데카르트는 설파했다.

그는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명백한 사실마저 의심했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 글 쓰고 있는 컴퓨터, 밖에 보이는 나무,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악마가 나로 하여금 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라고 가정해 본 것이다. 그랬더니 그것을 반박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

'1+1=2'라는 수학적 진리도 마찬가지로 근거가 불확실하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내가 현재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가 없다. 여기서 그가 터득한 명제가 서양철학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라는 깨달음이다.

공자는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중에 내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고 했다. 참학습은 책뿐만 아니라 사람과 만나는 일, 교류에서 이뤄진다는 얘기이다.

리더는 부하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부하가 배우도록 도와주는 멘토이다. 부하가 배우도록 돕는 방법은 학습 분위기와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자극하는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이다.

그들이 질문하도록 도우려면 먼저 질문하는 자세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부하들과 진정 소통하는 리더는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부하들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한다. 가장 창의적인 리더가 되는 것 역시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문을 품을 때 가능하다.

리더 가운데 최악의 리더는 부하와 경쟁하는 리더이다.

반대로 최고의 리더는 부하를 리더로 키워주는 리더이다. 그 최상의 방법은 배울 기회를 주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더 큰 임무와 역할을 맡기는 것이다.

 

"사람은 배우기를 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이 말의 유효기간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다.

 

 

 

 

아첨꾼에 둘러싸이는 건 군주의 책임이 80% 쓴소리 즐기는 리더 되라

 

군주는 아첨꾼에 둘러싸여서는 안 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Il Principe) 에서 강조한 말이다. 하지만 리더가 아첨꾼에 둘러싸이는 책임의 80% 정도는 본인에게 있다. 군주가 화를 버럭 내는 순간, 모두 '아첨 모드'가 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불변의 진리다. 그래서 리더는 무엇보다 잘 질문하고 잘 경청해야 한다.

부하의 말이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쓴소리로 들리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상사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사람만 모여 아무리 궁리해도 무익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에게 보이는 대로만 세상을 보고 판단한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주장한 '관점주의'(perspectivism)이다. 각자 다른 의견은 매우 당연하지만, 리더는 다르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지지자와 반대자를 모두 끌고 가야 하는 진짜 리더라면 상대방과의 몰이해·반목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먼저 끊어야 한다. 자신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재단하는 상대주의적 한계를 뛰어넘는 첫 단추는 자신이 눈으로 확인한 것만을 믿는다는 오랜 천성을 버리는 것이다.

"마음의 문은 안에서만 밖으로 열리게 되어 있다"는 헤겔의 경구는 리더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99명의 찬성과 1명의 반대가 있을 때, 한 명의 목소리를 반드시 들어라."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 한 명의 의견이 진리로 판명나면, 우리는 진리를 들을 기회를 영원히 놓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오류로 판명나면, 우리 의견이 옳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좋은 기회를 갖는 것이다. 회의 결과가 만장일치로 확인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고 밀은 말했다. 다른 식으로 생각할 여지가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보트 안에서 모두 한편에 몰려 있는 것 같은 아찔한 상황이다. 동일한 신념을 갖는 것은 팀워크 측면에서 매우 긴요하지만 의견이 도출되는 과정만큼은 자유롭고 다양해야 한다. 여러 의견에 대한 전방위 검토를 거쳐야 편향성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떤 조직이나 학교 수업 등에서 의견이 계속 대립할 때는 상대방의 입장을 옹호하는 방식을 사용해 보라. 예를 들어 불황기 가격 인하를 주장하는 사원에게 인상 쪽 입장을 설명하게 하고, 반대편에게는 또 다른 주장을 펴게 하는 식이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고통스럽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한층 성숙한 입장을 갖게 된다. 자기의 원래 입장을 내세우는 분명한 이유도 깨닫게 된다.

임금님은 길거리에 나가 벌거벗는 존재여서는 안 된다. 현명한 리더라면 그러기 위해 먼저 궁궐 안에서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토론할 기회를 많이 마련하는 게 중요한 책무일 것이다. 새해 2013년에는 리더들이 조직 바깥은 물론 내부에서 아래위로 폭넓고 활발하게 소통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오명을 떨치면서 뜨거운 용기와 지혜로 무장했으면 한다.

 

 

/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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