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을 씻기신 예수, 그白眉 '먼--'
스마트폰으로 듣고 있다. 신상옥이 부른 '내 발을 씻기신 예수' 가사를 옮겨 적어 보자.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 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기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랑/ 그 보람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나를 보내 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갔을 때/ 나를 안아 주소서
10년 년 전만 해도 나는 생사를 매일 넘나드는 환자였다. 숨도 제대로 못쉬고, 바로 앉을 수도 없었다. 누워 있기조차 힘들었다면, 누가 믿겠는가? 삶과 죽음의 무게를 다는 천칭이 있다 치자. 아마 죽음의 쟁반 쪽으로 확연히 기울어 있었으리라. 대여섯 해 그랬으니 아뜩하기만 하다. 70명 의사가 달려들어도 속수무책.(이건 짐짓 거짓을 꾸며대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잘하지도 못하는 노래로 시작했다. 생존의 프로그램을. 천주교 주교좌 중앙성당 노인학교에서 '살아 계신 주'를 부르는 것으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치유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이윽고 병석을 떨치고 일어났으니, 또 경망스럽게 부르짖는다. 그건 기적이었다고!
복음성가 하나만 치면 신상옥이 최고라 여긴다. 정확한 기억이 없지만, 투병 당시 아니 치유 과정에서 나는 그의 노래를 많이 들었다. 학교에서 폐기 처분한 오르간을 작은방에 갖다 놓고 단음으로 멜로디만 짚으면서 흉내를 냈다. 미친 듯이. 그것도 부족해서 녹음기를 옆에 놓고 내 흐트러진 목소리를 주워 담기도 했다. 가끔 눈물인들 왜 아니 흘렸으랴. 아니 매번 그렇게 울었다.
나는 무지해서 흑인 영가와 복음 성가의 구분을 잘 못 한다. 다만 하나, 흑인 영가는 아메리카에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고향을 그리워 하면서 舊約을 소재롤 만든 민요 풍의 노래? 이 정도의 정의를 기억하고 있을 따름이다. 어쨌거나 '살아 계신 주'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방황하는 나그네' 등을 입에 올리면서 죽지 못해 살았다고 하자.
도중에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여자 주인공이 밀양역에서 전도(전교) 활동을 하는 모습이 나오더라. '살아 계신 주'를 부르는 게 아닌가. 왜 그렇게 경쾌하게, 아니 경망하게 부르는지--.대중가요처럼 여겨졌다(물론 대중가요가 나쁘다는 건 아니고.) 적이 화가 나는 게 아닌가? 신상옥을 비롯한 가톨릭 신자들은 같은 노래라도 장중한 분위기에 휩싸이는데. 여담이다.내 고향이 밀양이라서 역에 내리면, 영화 촬영 어쩌고저쩌고 하는 표지판을 본다.
신앙 체험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함부로 표현해서 될까 싶기도 하다만, 나는 그러구러 살아났다.
물론 오늘 이 낯선 땅 용인으로 올라오기 전까지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다. 병 외에 사람으로서의 한계. 그 뼈저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잃었다. 그래도 나는 숨을 쉬고 있으니, 주님께서 꾸짖으실지 모르지만, 나라는 사람은 간사스럽다.
그러나저러나 '내 발을 씻기신 예수'를 흥얼거린다. 연말 어느 문학 단체의 송년회 무대에 서서, 주님께 봉헌한다는 각오로. 한데 여간 어렵지 않으니 어찌 걱정 아니랴. 먼 훗날 당신 앞에 갔을 때는 상당한 고음으로 처리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가성을 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더 큰 난관은 경상도 할아버지가 되어서 발음(발성)이 갈팡질팡이라는 데에 있다. 오죽하면 암수술 받고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간호사와의 대화가 이랬을까?
"*&%$#@)ㅏㅊ!"
"뭐라 카노? 못 알아 듣겠다 아니가."
차라리 통역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간호사의 말을 해석(?)하면 이렇다나?
"할아버지, 복식호흡하세요."
그래야만 마취 가스가 쉬 빠져 나간다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경상도 할아버지의 유명세를 톡톡히 누린다.
'으' 와 '어'의 구분이 알송하다. 위 성가에서 '영원히'가 '영워니'로 탈바꿈하여 튀어나온다. 그러니 '곳으로'가 '고쓰로'로 둔갑하기 일쑤. 혼자서 실소를 바람결에 날린다. '바람결'이라는 전제는 입 열기가 시도때도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나를 살려 준 게 복음성가였으니 그게 은총이라 생각되어 흥(?)을 낸다. 하물며 신상옥의 '내 발을 씻기신 예수이겠는가? 행인들이 웃는 줄도 모른 체 그러노라면, 내 배짱도 어지간하다는 착각에 빠지고말고,
나는 이 '내 발을 씻기신 예수'의 백미(白眉)는 '먼 훗날'에 있다고 진단한다. '당장'이 아니고, '훗날' 그것도 '먼 훗날'이라니, 부르거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여유가 있어서다. 설사 내일 죽더라도 먼 훗날이라면 한결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먼훗날'이 아니고 '먼 훗날'로 띄어서 발음하는 게 맞단다. '곧이어'는 '곧 이어'가 아니고-)
그에 비해 '성모송'의 뜻을 헤아리는 데는 정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이승인지 저승인지 모를 때 나는 기계적으로 이 성모송을 입에 올렸었는데, 절망이었다. -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돌이켜보면 지금도 나락으로 빠지는 느낌이다. '이제와'라니, '지금 당장'과 무엇이 다른가? 국어학자라면 '와'가 접속사라는 걸 쉬 파악한다. 그러나 우리 같은 촌늙은이는 '와' 를 동사로 여기기 십상이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으랴마는--'을 예로 들면서 여기저기 쫓아다녔지만, 외면만 받았다. '낭만에 대하여' 가사를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로 적으면 안 되는 이유다.
지금도 원망을 한다. 사제나 수녀 혹은 교리 교육 교사가 이랬었다면 좌절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에서 '이제'/ '와' 사이에 영어로 and가 들어가는 겁니다. 영어로 풀이해 볼게요."
Holly Mary, Mother of God, Pray for us now and at the hour of our death.(-고딕체는 '지금 이순간에도 저희가 적을 때까지도'로 해석되리라.)
그래 아직 죽지 말자. 구태여 신상옥이 아니라도 '배 발을 씻기신 예수'라는 성가가 말한다. 먼 훗날 당신 앞에 갔을 때 안아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