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안동, 충주, 공주, 강경.... 근대 이전에 엄청 큰 도시였다가 이런 저런 이유(교통, 공업, 행정... 등등)로 상대적으로 몰락한(사실 몰락이라기보단 발전 미비라고 하는 것이 더 맞겠죠) 도시들이 많습니다. 뭐 그만큼 별볼일없다가 엄청 성장한 도시들도 많구요.
다들 그럭저럭 이유를 따져보면 이해가 되는데 딱 하나 이해가 잘 안되는 도시가 있더라구요. 바로 나주.
일단 일제시대 이전에는 광주보다 나주가 훨씬 큰도시였고 전라도 남쪽 지역의 중심지였더랬죠. 전라도라는 이름자체가 전주와 나주의 합성어인 것을 생각하면. 1895년에 1년간 잠깐 시행되었던 23부의 형태를 봐도 금방알수 있습니다.
전라도 지역이 3등분되면서 "나주부"가 설치되었더랬죠. 그런데 23부 행정개편이 실패하고 13도 체제로 개편되면서 전라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나주가 아닌 광주로 결정된겁니다. 그리고 이후 광주가 전라도에서 지금의 위치로 성장하고 나주가 쇠퇴하게 되었죠.
왜 전라남도 도청소재지를 광주로 했을까? 잘 모르겠더라구요. 교통? 당시 광주는 호남선 기차역도 없던 곳입니다. 호남선은 광주를 안지나고 옆에 송정을 지나가죠. (송정이 광주에 편입된 것은 한참 뒤입니다. 한때는 독립된 송정시가 만들어 지기도 했었죠) 그에 비해 나주는 호남선 기차역도 있었는데. 물론 광주에 전남도청이 들어선 것은 1896년이고 호남선이 개통된것은 1914년이기때문에 기차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지도를 보면 광주와 나주의 차이가 확연하게 보입니다. 나주는 나주평야의 한가운데로써 대규모 곡창의 중심지이죠. 그에 반해 광주는 무등산의 산세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지형이구요. 전북으로 치면 나주가 좀더 익산과 비슷하고, 광주가 좀더 전주와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도리어 전근대에 광주가 중심이고 근대에 들어와 터가 넓고 기차가 지나는 나주가 더 발전할거 같은 모양새인데 어째 거꾸로.
뭐 나주 대신 광주가 발전해서 문제있냐? 라고 하면 그런건 전혀 없구요. 그냥 좀 궁금하더라구요. 이후 나주는 광주에 거의 흡수되다 시피하게 되죠. 영산강 하구둑이 생기면서 해운도 막히면서 지역중심으로서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 지금은 홍어와 곰탕만이 유명한 지방소도시(상주와 같은 처지군요). 전라남도 도청소재지 이전이야기가 나왔을때 저는 지리적으로만 봤을때 나주가 최상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거의 힘도 못쓰더라구요.라고 썼는데 한분이 댓글을 통해 그 이유를 알수 있는 기사를 하나 알려 주셨습니다. "광주일보"의 기사입니다.
◇광주로의 관찰도 이전 과정=조선총독부는 1896년 전남 관찰도의 광주 이전은 초대 전남 관찰사인 윤웅렬의 선택이었다고 적고 있다. 1895년 10월8일 을미사변, 같은 해 11월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 1896년 2월11일 친일세력에 위협을 느낀 고종의 아관파천 등이 이어지면서 이 해 전국 각지에서 일제에 반발하는 의병들이 봉기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조선을 장악한 친일세력들은 쇄신책의 하나로 1896년 8월4일 지방제도를 기존의 23부에서 13도로 개편하는 칙령(제36호)을 반포했고, 초대 관찰사로 윤웅렬이 부임했다. 이 윤웅렬은 한일강제병합 후 남작과 자작의 작위를 받은 관료였다. 문제는 전남에서 가장 의병의 기세가 두드러졌던 곳이 관찰도가 있던 나주였다는 점이다. 나주는 연일 의병들의 항거가 계속됐고 결국 지방관리인 김창균 등 군수와 군사책임자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관찰사 윤웅렬은 나주에서 도망쳐 광주에 도착했고, 이 시기부터 광주를 관찰도 내재지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주의 의병이 진압된 뒤에도 윤웅렬은 나주로 돌아가지 않았다. 또 관찰도 나주 복귀 논의도 없었다. 그 이유를 이 문건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다시 관제 개혁, 전라도를 2개도로 나눈 결과 나주로 복귀하는 논의가 없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나주의 양반과 지방관리들이 다른 군 양민을 무시해 인심이 없고, 또 하나는 이미 윤웅렬 관찰사가 (의병 봉기에 대한) 두려움으로 광주에 있는 관찰도청사에 밀접하게 진위대영을 조영하고 중앙정부에 간청해 광주에 영주하는 방침을 수립한 것이 광주에 도청을 설치하는 이유가 된 것이다.”
첫째 이유는 명분으로 내건 것이고, 사실 윤웅렬 초대 전남 관찰사가 이미 비교적 ‘안전한’ 광주에 눌러앉은 것이 도청 소재지가 된 결정적 배경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광주에 있던 관찰도는 전남도청이 되고, 1909년부터 일본인 관료들이 배치되면서 이후 정착되게 된다. 광주에서 집무를 시작한 윤웅렬 관찰사는 사실상 광주에 일본인으로서는 첫 입성한 일본인 승려 오쿠무라 엔신과 오쿠무라 이오코를 후원하고 남구 불로동 일대에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좀 이유가 당황스럽네요. 광주가 무등산세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형상인지라 방어에 유리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진짜로 관찰사의 안전문제가 가장 컸다니. 우리나라에서 도시성장에 "행정관청"이 차지하는 비중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이 나주, 광주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저 약간의 변수로 행정관청이 광주에 들어서고 지금과 같은 도시격차를 만들어 내게 되었으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