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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 삼현파 농은 김대아 후손 칠곡지역 세거지 소개(두번째) 【◆(2) ‘칠곡군 기산면 노석1리’ <김해김씨 삼현파 후손 세거지> ◆】
※ [2017년 현재 ‘노석1리’ 이장 : 백문기(011-804-1848)]
노석리(老石里)는 岐山面(기산면)에서 南(남)으로 약 3km 지점에 위치하며 西便(서편)에는 道高山(도고산)(348.7m)이 솟아 있고 그 산줄기가 마을을 병풍처럼 아늑하게 둘러싸고 있다. 원래 星州郡(성주군) 船南面 地域(선남면 지역)인데 1941년 행정구역 개편때 老谷(노곡)과 白石洞(백석동)의 이름을 따서 老石洞(노석동)이라하여 星州郡 船南面(성주군 선남면)에 편입됐다가 1983년 2월 15일 漆谷郡 若木面(칠곡군 약목면)으로 편입되었으며, 다시 1986년 4월 1일 칠곡군 岐山面 管轄(기산면 관할)이 됐다 노석마을에 김수로왕의 후손이요, 농암 김대아(8世)의 손자요, 김선(9세)의 아들인 김치원(金致元)·김상순(金尙淳) 두 형제가 400여년 전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후 손들은 칠곡군 기산면 노석 1리[옛 성주군 선남면 노곡리]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 왔다. 현재 노석1리 전체 가구수는 66호이고, 인구는 120여명이디. 그 중에서 김해김씨 성을 가진 사람은 약25%정도이다. ◇ 문중 인물, 행적
○ 김치원(金致元) 1544(중종39)∼1603(선조36) 농은 대아(8세世)의 손자로서 초휘는 덕운(得運)이고, 자는 우득(佑得)이다. 중종39년 갑진(甲辰) 1544년에 태어나 무과에 등과하여 위원(渭源)군수를 지내고, 가덕(加德)첨사를 거쳐 하동부사(河東府使)를 지냈다. 선조39년 계묘(癸卯) 1603년 5월10일 졸하였다. 묘는 해남 산일면 선영(先塋)하에 있다. 숙부인 파평윤씨는 임인(壬寅)생이고, 그의 부(父)는 도사(都事) 이고, 선조32년 임인(壬寅) 1602년2월5일 졸하였다 묘는 합봉이다. ○ 김상순(金尙淳) 김상순은 김수로왕의 후손으로 농은 대아(8세世)의 손자이다. 김치운과는 형제간을 알려져 있으며, 벼슬은 통훈대부 행 장흥부사를 지냈다. 생몰 및 묘 등 미상(未詳)이다.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 역시 미상이다. ※ 근거 : 김해김씨삼현파대동보, 가첩기록 참고 ◇ 기산면 “노석리” 마을전설
※ [2017년 ‘노석2리’ 이장 : 김종호(010-9378-5334)]
김천계가 입향조로서 그의 가르침은 흰돌마을 일족들에게 큰 교훈으로 남아 후손들이 추모하기 위해 성천재(醒川齋)를 건립하였고 계암(溪菴) 김 약(鑰) 어른과 성천(醒川) 김천계(天啓) 선생을 봉향하고 있다. 참고 [별표 7]성천재
노석마을을 일명 흰돌마을 또는 백석마을이라 불리고 있는 것은 마을 뒷산의 흙이 백토라는 것에서 유래되었고 한다.
자는 방원(方遠)이고, 호는 계암(溪菴)이다. 본관은 김해이며, 조선 중종 25년(1530), 경인(庚寅)2월15일에 태어났다. 농은 김대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계암 김약 선생은 연조(連遭)한 무사지화(戊巳之禍)에 둔세(遯世)에 무한(無限) 을 느껴 하루 일을 정리경영 함[日事經理]에 있어 계산(溪山)을 거닐며 휘파람 1581년(선조14) 신사(辛巳) 1월22일에 세상을 떠났다. 묘는 금북(錦北) 이로면(伊老面) 우대리(牛台里) 자좌(子坐)이다. 표석이 있다. 배위(配位)는 밀양 박씨이고, 부(父)가 사마(士馬) 선(繕)이다. 1582년 임오(壬午) 3월15일 태어나고, 1644년 갑신(甲申) 10월20일에 돌아가시니, 묘는 나주 노안면 우태산 방축(坊築)내 자좌 쌍봉이다. ○ 김영남(金英南) 1645(인조23) ∼ 몰년 미상 초휘는 윤제(允梯) 이고, 자는 영중(英重), 호는 백파(白波)이다. 본관이 김해이며, 삼현파조 문정공 김관 선생의 13세 후손이고, 계암(溪菴) 김 약(金鑰) 선생의 현손이며, 성천 김천계(金天啓)의 아버지이다. 1645년 인조(23) 을유(乙酉) 생(生)으로 소과 사마(司馬)에 등과하고, 스스로 내놓고 숲속의 샘으로 은둔하여 소학을 강론하였다. 기일은 3월 23일이다. ○ 김천개(金天啓) 1677(숙종 3)정사(丁巳)∼1730(영조6)경술 개휘(改諱)는 영회(英晦)이고, 자(字)는 개회(開晦)이며, 호(號)는 성천(醒川)이다, 본관이 김해로서, 농은 대아(大雅) 선생의 五子인 계암 김약의 5세손이다. 1677년 숙종3, 정사년에 아버지 김영남의 三子중 막내로 태어나서 1730년 영조6, 경술 9월9일 돌아가시니 향년 53세이였다. [※ 대아(8世)→ 약(9)→ 치진(10)→ 인경(11)→ 애복(12)→ 영남(13)→ 천계(14)→ 순강(15)→, 김해김씨 대동보 권수 “909쪽 참조] 성천공이 경상북도 칠곡 기산 현재 마을 입향시에 두형 곤수(坤守), 천수(天守)에게 배품(拝禀)하고, 고산, 수려한 칠곡 기산으로 우거(寓居)하여 입향조가 되었다. 성천공은 계암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벼슬을 하지 말라, 종사하는 일에 부지런 하라, 명이(名利)에 욕심내지 말라” 그 뜻을 계승하고 제 문생들과 시경(詩經)을 강론하고, 그 학문과 행의(行誼)로 향중의 추앙을 받았다. 묘(墓)는 성주 학촌후 선좌이고, 상석이 있다. 배위(配位)는 강릉 유씨(劉氏)로 부(父) 언경(彦景)의 따님이다. 병진(丙辰) 생(生)을 기일이 3월8일이며, 묘는 기산(岐山: 옛 소속 성주선남) 동화곡(東花谷)미좌(未坐), 상석이 있다. 자손들이 번성하여 성천공을 숭모하여 ‘성천재’를 세웠으나, 6.25사변때 소실되였다가 1992년에 공의 7대손 용직이 중건하고 종답 수천평을 헌성하여 현재까지 후손들이 선대조 계암 김약, 성천 김천개 두 분의 향화을 올리고 있다.
(1) 무오사화는 청도 삼현문중의 타 지역입향 세거지 출발점 무오사화로 인해 탁영공의 대소가(大小家)는 청도를 떠나 전라도 남원 땅 월곡(月谷)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그 8년 뒤 중종 원년 1506년에 유배가 풀렸다. 유배가 풀리자 큰집의 삼족당 대유공께서는 이미 연로하신 아버지 동창공(駿孫, 2년 뒤에 별세)과 일족(一族)을 거느리고 고향 청도로 회향(回鄕)하였으나 둘쨋집 매헌공(驥孫)공은 이미 38세에 별세하셨고 탁영공의 계자(系子)이신 현감(大壯, 8대)공께서는 고향(淸道)으로 가지 않으시고 그대로 유배지 남원 월곡(月谷, 현 장수군 산서면 사상리)에 남아서 사셨다. 현감(대장)공은 1493년 생으로 무오사화가 일어난 해에 6살이었고 중종(中宗) 원년 유배가 풀린 1506년은 14살 때였다. 평생을 월곡에서 사시다가 월곡에서 별세하셨으니 장지(葬地)는 남원시 보절면 만행산 구라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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