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않는다는 뜻이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다보면, 난초화분 하나 때문에 쉽게 길을 나서지 못하는 스님의 마음이 그려져있는 글을 대하게 된다. 난분을 지인에게 주고나니 자신을 붙잡는 것이 없어져서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다는 글을 읽으며, 내 주위를 돌아본 적이 있다. 사는 데 필요한 것보다 불필요한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우리네 삶이 아니겠는가마는, 한번씩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법정스님의 글들은 그나마 마음을 가다듬게 하는 듯 싶다.
작산해에서 두 번째로 찾은 곳은 길상사.
법정스님과의 연으로 잘 알려진 길상사는 3공화국 밀실정치의 산실이었던 고급 요정인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씨가 법정스님에게 시주해 절로 창건되었다.
천재시인 백석이 사랑한 여자 김영한. 그녀는 16세에 사라져가는 한국 전통음악과 가무의 전습을 위하여 조선권법을 세워 불우한 인재들에게 고전궁중아악과 가무일체를 가르친 '하규일'의 문하에서 '진향'이라는 이름을 받아 기생으로 입문한다.
한때 시인 백석으로부터 "子夜'라는 아명으로 불리웠던 그녀는 1953년 중앙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내 사랑 백석' 등의 저술을 내기도 했다. 노년에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깊이 감명받아 스님을 친견한 뒤에, 당시 싯가 천억원이 넘는 대원각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주기를 청하였다. 그 후 십여 년에 걸쳐 사양하는 법정에게 거듭 청하여 결국 1995년 그 뜻을 이루게 된다.
1997년 12월 14일 대원각이 길상사가 되던 날, 그녀는 염주 하나와 '길상화'라는 법명만을 받았다.
그 날 , 그녀는 수천의 대중 앞에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만….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그녀의 음성에는 위대한 비원이 담겨 있었다.
1999년 11월 14일 그녀는 육신의 옷을 벗었다. 하루 전날 길상헌에서 마지막 밤을 묵었으며, 다비 후 그녀의 유골은 49재 후 그녀의 유언대로 첫눈이 도량을 순백으로 덮힌 때 언덕바지에 뿌려졌다.
강원도 평창의 산골 오두막에서 기거하던 법정스님은 일 년에 몇 번씩 길상사에 들려 법문을 설파하였고, 2010년 3월 11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고 유언을 남긴 법정스님은 마지막까지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였고, 입적 후에도 남은 이들에게 맑고 향기로운 가르침을 전해준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다.
작산해 회원들이 스님께서 주신 달마도를 받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제주도 김녕이 고향이라는 스님. 환히 웃으시며 반겨주시던 얼굴, 다음에도 뵐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길상사 경내를 걷다보니 법정스님이 생전에 애송하던 글귀나 시구가 소박한 나무액자에 담겨져 지나는 발길을 붙잡는다. 잠시 서서 읊으며 법정스님의 글이나 법문에서 자주 쓰던 맑음과 향기로움을 느껴보는 우리들…. 한 여인이 남기고 간 공덕의 향기와 천재시인 백석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또한 애잔하게 가슴을 물들인다.
눈이 부시게 하늘이 푸르른 날,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접으며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첫댓글 우리들은 화장실(해우소)을 찾는데
경내에선 그걸 정랑으로 표기하여
한참 헤매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문옆 바로 오른쪽에 있었는데......
같은 배경도 작가의 손을 거치니 전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네요
옆모습의 관음보살상(관음보살+마리아상)이 너무 아름답네요
참 좋은 시간들이었습니다 ~
이번 길에서 돌아와 '길상사 상사화'란 시를 썼습니다 ~~
벼르고 별러도 못 가본 길상사를ᆢ덕분에 소원풀이 햇어요ᆢ^^가을비가 촉촉히ᆢ
정말 모두 멋지십니다. ^^
와송이 고고하게 하늘로 치닫네요
무는 유를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그 가치가 크다는 아들의 말이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