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험칠 때 가족들이 반대했다.
그럴만한게 군대제대를 한 26세에 대학을 간다고 하니 당연히 말릴만 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늦게 핀 꽃은 아름답다는 말에 무작정 공부를 했다.
돈이 없어서 엄마에게 눈치를 보며 공부를 했다.
제주사범대학교 미술교육과를 갈 생각을 했지만 미술학원갈 엄두를 못냈다.
학원갈 돈이 없어서 수능이 끝나고 나서야 미술학원을 갔는데 원장이
'혹시 미술학원을 다녀보셨냐'고 하길래 처음이라고했다.
'그럼 한달보름밖에 안남았는데 떨어질것은 당연하다. 합격할 생각으로 다닌다면
다니지 마시라'고 했다. 나는 알았습니다. 하고 다녔다.
제주대사범대학교 미술교육과를 다니기 위해 준비생들이 보통 1년에서 2~3년 미술학원을 다니며
준비해야 한다는것을 그때 알았다.
나는 정말 떨어지고 재수할 생각을 하니 아득했다.
일요일 삼성혈 주변을 걷다가 제주시에서 제일 높은 다리옆을 걷게 되었다.
내가 대학떨어진다면 이 자리에서 죽는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가치없는 인생은 살아봤자 별볼일 없을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는 무작정 소묘를 하기 시작했다.
난생처음해보는 석고데생이지만 방법을 익히니 어렵지 않았다.
1주일 그리니 한달 그린 애들만큼 됐다.
2주일 그리니 6개월 그린 애들만큼 됐다.
한달을 그리니 2년 그린 학생들과 다를 바 없게 됐다.
문제는 수채화였다.
원장은 소묘위주로 가르쳤고 난 소묘에 자신감도 갖게 됐지만 1주일에 한번 하는 수채화수업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한달이 넘었지만 겨우 4번밖에 못 그린 수채화는 처음과 다를바 없었다.
초조와 긴장때문에 더 안되는 것 같았다.
이제 모레면 실기시험을 치루는 날이었다.
3일전부터는 소묘와 수채화실기를 병행해서 실전처럼 준비를 했지만
원장은'경팔씨는 소묘는 합격인데 수채화때문에 안되겠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마지막날이 됐다.
내일이면 시험날인데 수채화연습실기를 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만약 그가 마지막날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난 낙방했을게 틀림없었다.
그는 이미 그 학원에서 최우등으로 전년에 합격한 학생이었는데 같이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고
내 앞자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스케치를 마쳤을 때 앞자리에 있는 그의 그림과 같은 구도임을 단박에 알았다.
'아! 쟤 그림과 같다면 꼭같이 그려보면 되겠다'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가 노란 물감을 바르면 나도 노란 물감을 발랐다.
그가 파란 물감을 바르니 나도 파란 물감을 발랐다.
점점 그의 그림과 나의 그림은 같은 그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림은 2시간이 지나가며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는 어두운 톤으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마침내 원장이 '그만'하는 소리에 그가 붓을 놓았고 나도 붓을 놓았다.
이제 평가시간이다. 원장이'모두 자신의 그림을 앞에 도열해보시오'라고 했다.
그림을 앞에 놓은 순간 사람들이 나의 그림을 주목했다.
'아니. 이 그림은 누구의 작품이지? 그리고 강경팔씨 작품은 안보이는것 같은데?'
대 성공이었던 것이다.
하룻만에 놀랄 변신을 한것이다.
원생들 전부가 나의 변신에 축하의 박수를 쳐주었다.
원장은 '경팔씨. 이렇게만 그린다면 물론 합격입니다. 대신 한번 더 그려보세요. 믿을수가 없으니'
나는 다시 붓을 가다듬고 모두가 가고 난 학원에서 홀로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다.
밤 11시가 되고 있을 때 아직 완성이 안되었는데 원장은'됐어요. 내일도 이렇게만 그리면 되겠네요'
하면서 집으로 가라면서 내일 준비물을 잘 챙겨서 실전에 임하라고 했다.
다음날 난 전날 그려본 마음가짐으로 실전에 임했다.
첫시간은 소묘였는데 모두가 경악했다.
학원생들이 전혀 그려보지 않은 '대만여인상'이 나온것이었다.
대만여인상은 주로 곡선적이며 단순하기 때문에 형태감이 가장 중요했다.
전년도까지는 매년 줄리앙이나 아그리파상이 나왔기에 학원생들은 그런 작품위주로 연습했고 이번에는
아리아스상이 나올거라는 예측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어찌된일인지 학생들이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석고상이 나온것이었다.
당황하는 학원생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형태감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에겐 그조차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배운 방법대로 그리니 어떤 형태도 같은 형태중 하나였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소묘경력이 짧은 내겐 행운이었던 것이다. 무려 2년 이상 학원을 다녔던 수험생들이
떨어진것이다. 그 아이들은 처음 내가 목표로 삼았던 높은 실력에 있는 수험생들이었다.
그 다음 수채화시간이 됐다. 전혀 다른 소품들이 나왔지만 전날 늦게까지 그렸던 수채화의 느낌을 생각하면서
그냥 당당하게 자신감있게 그렸다.
다른 수험생들 그림을 보니 최소한 합격권에 들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다음날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난 동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연히 합격일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제주대학교 가는 버스를 타고 입구에서 내리자 마자 '원구'라는 학원생이 '경팔이형! 합격했수다'라고
기쁜듯 알렸다. 학원생들중 절반이 합격하고 절반이 떨어졌다.
떨어진 학생들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더구나 자신들은 준비를 최소 1년에서 2년이상 준비한 학생들이었는데
겨우 한달보름한 내가 붙었다는 것에 더 충격을 받은것 같았다.
그 중 한 여학생은 한국화 교수님하고 친척이라고 했는데도 떨어져서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것 같았다.
원장은 합격한 학생들에게 축하를 해주면서도 떨어진 학생들에게 내년을 기약하자고 달래주었다.
그러나 내년은 없었다.
왜냐하면 제주대학교 사범대 미술교육과는 내가 마지막 학생으로 폐지가 되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나를 위해 기다려준 것처럼 되었고 내가 입학하니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후배들에게는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는 예고없이 등용의 길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나는 90년 졸업하자 마자 마지막 국립사범대학교 우선 임용자격으로 경상북도 교육청 미술교사로 배정발령받았다.
내가 임용되고 얼마 후 국립사범대 우선임용도 폐지가 되었고 임용고사로 바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