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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룡(房仕龍, 팡 스룽) |
극심한 가난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요리사와 가정부로 해외 취업을 해야 했기에
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우점원(于占元)경극학원'에 맡겨져 10년 간의 수련 생활이 시작된다.
경극학원 생활은 하루도 빠짐없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무술과 연기를 배워야 했기 때문에 늘 고단했지만,
그는 훗날 홍콩 영화계에서 함께 맹활약할 선후배인
홍금보(洪金寶), 원표(元彪), 원규(元奎), 원화(元華) 등을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이들은 모두 사부 우점원에게 최고의 실력을 인정 받은 생도들이었다.
학원을 졸업한 뒤 단역배우와 스턴트맨, 무술감독 등을 거쳐
결국 주연배우까지 맡게 된다.
하지만 그 시기가 절대적 인기를 누리던 이소룡(李小龍)이
1973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직후여서
그의 스타일을 표절하여 만든 저급한 아류작들이 넘쳐났기에
관객들이 액션영화를 외면했던,
그야말로 홍콩 영화의 침체기였다.
성룡 역시 주연 초기에는
이소룡 스타일의 심각하고 어두운 연기를 강요받았기에
자신만의 재능을 보여주지 못했다.
또다른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1978년 무술감독 출신의 연출가 원화평(袁和平)과 뜻을 같이 하여 만든
범아시아적으로 큰 붐을 일으키며
약관의 나이에 스타덤에 올라선다.
특히 《취권》은 성룡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영화 용쟁호투에서
이소룡은 많은 적들을 차례로 때려눕히게 되어 있었다.
이 영화에서 성룡은
그는 이소룡에게 마지막으로 얻어맞고 쓰러지는 역할이었는데,
이소룡의 실수로 성룡이 크게 다친다.
미안한 마음의 이소룡은
성룡에게 여러 차례 사과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소룡은
크고 작은 스턴트 일거리가 생길 때마다 성룡에게 맡겼다는 후문이다.
훗날 성룡은 이런 일련의 일화를 두고
이소룡에게 큰 은혜를 입었노라고 회고했다.
성룡은 병역 파동으로
재미동포 가수 유승준을
자신이 제작-주연한 영화 대병소장에 조연으로 출연시키는 등,
유승준에게 중화권에서 입지를 마련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