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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에게 가뭄의 재앙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몸을 피신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이 말씀을 받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신앙적인 자세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맺어가야 할지를 본 글에서는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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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3)
-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생명을 보호하심 -
열왕기상 17장 1-7절 / 1길르앗에 우거하는 자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3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4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5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 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7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아합이 베니게의 왕이며 바알 우상의 제사장인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면서 주도적으로 행해진 우상 숭배는 이스라엘 전체를 꾀임에 빠지게 하여 극도로 타락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의 첫째 계명부터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악을 행하여 참 신이신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는 것을 포기하고 자연의 세계를 지배하는 태양의 신으로 부르며 풍요를 기원하는 바알 우상을 섬기는 가나안의 종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알 우상 숭배에는 달의 신으로 부르며 다산을 기원하는 아세라 우상도 함께 숭배하기 마련인데 이 두 우상의 숭배는 육체적인 방법으로 행해졌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좇아서 향락과 쾌락을 즐기며 섬기는 타락의 극치의 장소였습니다. 사단은 이스라엘이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가나안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을 통해서 그 배후의 실세요 조종자인 사단의 종이 되어 섬기게 하였습니다. 사단은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미움과 저주를 받아 다윗의 언약에 약속되어 있는 메시야와 그의 나라로부터 영원히 배척되게 하고 메시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씨를 끊어 놓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아합 왕에 의한 이스라엘의 배교와 우상 숭배의 타락은 사단의 이러한 무서운 간계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앞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어 그들이 섬겨야 할 참 신은 하나님이심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나[이스라엘’의 섬기는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란 뜻인 ‘엘리야’란 이름을 지닌 선지자를 이스라엘에게 보낸 것은 그래서입니다. 하나님이신 여호와에게서 떠나 있는 이스라엘이 엘리야의 등장과 그의 활동에서 그들이 배교하여 떠나 있던 하나님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앞으로 수년동안 우로(雨露)가 있지 않게 하시는 재앙을 선포하시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배교와 우상 숭배의 죄를 책망하며 또한 그들의 죄를 심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는 재앙은 3년 6개월이란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는데 이때에 이스라엘은 기근과 기갈로 큰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 재앙은 바알을 심판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엘리야의 이 선포에 대해 사도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아니하였더라”(약 5:17). 엘리야는 이스라엘 땅에 비가 오지 않을 것을 선포하였으며, 그 선포가 신실히 이행될 수 있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비오지 않기를 위해 한 기도는 온 이스라엘 앞에 그들이 지금 숭배하는 바알이 자연의 세계를 지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햇빛과 비를 가져다주어 온 들녘을 기름지게 하고 풍요한 수확이 있게 하여서 자신들을 부요하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 바알은 비는 커녕 단 한바울의 이슬조차 맺히게 하지 못하는 무능하고 생명 없는 거짓 신인 우상임을 드러내는 심판을 행하실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엘리야의 기도를 굳이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였더니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지금 그 기도의 응답이, 그래서 3년 6개월 동안 비 한방울 내리지 않은 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섬기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이스라엘 땅에 앞으로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을 것을 선포한 즉시 이스라엘 땅에 재앙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재앙은 자연 발생적인 현상에 의해서 있은 것이 아닌 진노의 언약에 의한 저주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을 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한 모든 명령과 규례를 준행할 것이며 만일 이를 지키지 않으면 모든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고 미칠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땅에 내려서 반드시 멸망시킬 것이라는 진노를 언약하셨습니다. 지금 엘리야가 비오지 않기를 선포하고 그 기도를 한 것은 이 진노의 언약에 의한 심판이 지금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않아서 언약을 깨뜨리고 있는 자들에게 성취되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가 응답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깨닫고 죄에서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하기에 엘리야의 이 사역은 부모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자녀들을 대하게 하고 복종하지 않는 자식의 마음을 변화시켜 부모에게로 향하게 하여서 부모와 자녀들이 화목하게 하는 증인의 사명으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말 3:5-6; 눅 1:17)
엘리야의 선포와 그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인 엘리야를 이스라엘 앞에 등장시키고 그가 언약을 깨뜨린 자를 징벌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대변하는 기도를 하게 하였습니다. 이를 야고보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이라는 말로 하였습니다. 의인의 간구는 엘리야가 한 기도의 응답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큰 능력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사실상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서 오늘날 교회를 이루고 있는 자가 어떤 의 속에 있어야 할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 자이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서 있는 것에서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축복의 언약으로 이끌어가셔서 복있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는 진노의 언약을 이행하셔서 저주하시고 징벌하십니다. 의인의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많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엘리야의 기도는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의 전형이 됩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선지자로서 의인의 간구의 예표의 성격을 띱니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계시록 11장 4-6절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두 증인의 기도에서도 그대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역사 속에서 모세와 엘리야 이 두 증인이 보여준 기도의 능력은 오늘날 교회가 어떤 기도 속에 있어야 할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분은 악의 세력이 아닌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악의 세력을 좇는 자들을 징벌하시고 자신을 의존하는 자들의 생명을 보호하며 복 있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여서 그 하나님 편에 서게 하는 것이 의인이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엘리야의 선포가 있은 후 이스라엘 전역은 기근과 기갈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기근과 기갈의 재앙이 시작되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떠나게 하여 몸을 그릿 시냇가로 피신하게 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에게서 떠나 바알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에게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는 재앙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의 입을 통해서 주어졌으나 이제 엘리야를 그가 있던 장소에서 떠나 사람들이 그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피신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 주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들려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떠났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더 이상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떠나 더 이상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떠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적 관계성이 완전히 단절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어기고 우상숭배를 하여 언약을 깨뜨림으로써 그들을 떠나 더 이상 교제를 하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언약을 깨뜨린 자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요 따라서 멸망을 받을 것이라는 언약적 심판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재앙의 완결판의 성격을 띱니다. 따라서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는 것보다 더 무서운 심판이요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단지 말씀을 하시지 않고 침묵하고 계신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아예 하나님이 떠나심으로 해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 주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지 않아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 한에는 그들의 생명이 안전히 보호받는 것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살아 계시며 그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에서 자기들의 생명이 살아 있는 것을 느끼며 살아갔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곁에서 떠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생명이 숨쉬는 호흡에 의미를 둘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물이 없어 기근과 기갈을 당하여 고통을 겪으며 생명의 위협을 받아도 하나님의 보살핌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이스라엘의 고통은 물과 양식이 없어서가 기근과 기갈을 당해서가 아니라 아모스 선지자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까닭에 있습니다(암 8:11).
둘째,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떠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찾을 수 없는 그릿 시냇가로 몸을 피신하게 하여 숨긴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심판의 기간이 지나갈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리야를 붙들고 구원을 청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의 피신은 아합의 박해를 피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한 간절한 청원을 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간섭으로 있은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고 말하였으며, 이러한 사실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리야를 붙들고 자기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빌기를 간청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아예 그들의 청원의 길을 차단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여도 듣고자 하지를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철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떠나 있음으로 해서 지금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를 받고 있는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와 함께 하시면서 그의 생명을 보살펴 나가셨습니다.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의 일부 지역이 아닌 전 지역이었으며, 그 재앙을 당하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여기에는 엘리야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릿 시냇가 피신하게 하셔서 그에게 물을 제공하여 목마름을 겪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서 생명의 주이시니 ‘생명의 물’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엘리야에게 ‘생명의 양식’도 제공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물은 시냇가에서 얻게 하셨지만 양식은 어떻게 얻게 하셨을까요? 그릿 시냇가에 몸을 숨기고 있는 그로서는 양식을 얻을 수 있는 어떤 환경에 처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황막한 사막인 광야에 있을 때 40년을 아침에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떡을 굽게 하여 양식을 먹게 하시고 해질 무렵에는 메추라기를 날아오게 하여서 이스라엘이 진을 친 곳을 뒤덮게 하여 고기를 먹이신 것처럼 이번에는 까마귀가 아침 저녁으로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게 하여서 엘리야의 생명을 보살펴 보호해 나가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날짐승을 이용하여서 엘리야의 생명을 지키는 구원의 섭리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엘리야 보살핌은 그릿 시냇가의 물이 다 마를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도움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기근과 기갈의 고난에서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얻게 하여서 바알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 앞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명을 온전히 수행해 나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3년 6개월 동안 지속될 이 재앙 앞에서 자기들이 지은 죄를 깨닫고 이를 부끄러워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어야 했습니다. 비와 이슬이 그친 재앙은 하나님이 괜히 심술로 가져다 준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의도적으로 초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의 자녀로 백성으로 삼아 호의를 베풀어 죄의 형벌로 오는 온갖 저주스런 재앙으로부터 보살펴 나가시지만 그들이 이를 거절하여서 하나님의 보살핌을 마다하고 스스로 재앙 속에 자신들을 두었습니다. 엘리야의 선포로 시작된 3년 6개월의 재앙은 그러한 그들에게 주어진 시작과 경고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엘리야의 선포로 시작된 재앙이 갖는 의미와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생명을 보살펴 보호해 나가신 것을 우리의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율법의 요구]을 받고 있으며 그러한 정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러한 우리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보살핌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적용을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서 잘못 적용해 나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엘리야가 까마귀를 통해서 양식을 제공받아 보살핌을 받은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도 보호를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엘리야가 까마귀를 통해서 양식을 제공받아 보살핌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하실 사역이 있기 때문에 그의 생명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 것으로서 였습니다. 그러니 엘리야에게 이적으로 베풀어진 하나님의 능력을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나타나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엘리야 시대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무리인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수는 적지 않은 무려 7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가 본문 다음으로 가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은 이방 지역에서도 보게 됩니다. 시돈의 사르밧에서 사는 한 과부를 보게 되는데 그녀는 살아 계신 참 신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에 있은 극심한 가뭄으로 기근과 기갈을 당하여 곤핍을 면치 못하다가 마침내는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겨우 그것을 구울 수 있는 정도의 기름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는 자신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죽음을 맞이할 각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과 그 아들이 겪은 가뭄이 가져다 준 고통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시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참으로 참기 힘든 고난을 그들은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하나님이 나타내신 이적을 통해서 받은 특별한 능력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여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그렇게 특별한 능력을 입어서 보호를 받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분명 우리는 참 신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어 생명의 주로 모시고 섬기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고 생명의 보호를 받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자가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래서 죽을 자가 죽음에 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오히려 생명을 바칠 것을 요구받고 있을 때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을 갖고 순종하여 나가는 것입니다(마 6:25, 31, 33).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믿음은 자신의 생명이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며 또한 하나님에게로 가는데서 영원히 사는데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할 수 밖에 없는 그 현실과 환경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말한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 11:25)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극심한 가뭄으로 곤핍을 겪으며 굶주려 생명을 바칠 것이 요구되고 있을 때 이를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고 그것으로 족한 줄 알고 기꺼이 순종으로 자신을 드려가야 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할 수 밖에 없는 그 현실과 환경에서도 ”나의 생명의 주는 하나님이신 여호와이십니다“를 말하는 믿음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대에서 자기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어떤 자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하는 일과 관련하여서 그 생명이 특별히 보호를 받는 능력을 입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입는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자기들에게 처해진 환경의 현실에서 겪는 고난을 참음으로 이겨나가게 하는 것에 있으며 이는 자신들의 생명까지도 드려 가는 것에서 있습니다. 이 믿음이 어디서, 어떻게 해서 있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 참 신이심을 아는 데서 가지고 있는 것이요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보장받고 있는 것을 믿는 데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상은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핍박을 받는 시대에 참으로 많은 성도들이 세상의 잔혹한 방법으로 무참히 죽음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그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을 합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그의 부인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이스라엘 백성들, 기생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 이들 모두에서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리는 믿음을 인하여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에녹은 65세에 이르렀을 때에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이 관영하던 시대에 의인이란 어떤 사람인지를 믿음으로 보이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순종하여 자기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면서도 고향을 떠났으며, 훗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는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일로 이삭을 제물로 바칠 것을 명령받았을 때 아무런 의심없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삼아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한 것도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이삭은 자신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야곱에게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나이가 들어 죽을 때 아브라함과 이삭이 받은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였으며,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것을 믿음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이 오면 자기의 유골을 취하여 함께 가지고 나갈 것을 유언하였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를 소유하는 것보다는 장차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큰 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 왕 바로 앞에 담대히 서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요구하였으며 애굽 병사들의 추격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마치 마른 땅을 밟고 가듯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갖 무기를 사용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대로 7일 동안 여리고 성을 돈 것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기생 라합이 생명이 위태한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자기 집에 숨겨 준거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 믿음으로 여리고 성이 멸망당할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사 시대의 사사들, 곧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 왕과 선지자 사무엘은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아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왕국의 실현으로서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기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믿음은 한결같았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에게서 보는 대로 사자굴에 던져져서도,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져서도 사시는 참되신 하나님을 말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죽음의 칼날이 주어져도 병들고 약해져도 말입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에게서 보는 것처럼 어떤 여자들은 사랑하는 이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쁨을 맛보기도 하였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조소당하고 매맞고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혔으며 장차 더 나은 생명의 부활을 얻으려고 감옥에서 풀려나는 대신에 혹독한 고초를 겪고 처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배반하고서 풀려나오는 것보다는 죽음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돌에 맞아 죽는 사람, 톱에 몸이 두 동강으로 잘려서 죽는 사람 등 갖가지 방법이 동원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양이나 염소의 가죽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핍박의 손길을 피해 광야와 산으로 도망하고 동굴이나 토굴에서 숨어 지내면서 굶주림과 병에 시다리며 고생하여야 했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까지 하여야 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현실을 오래 참음으로 지냈으며, 그로 인해서 고통을 겪고 심지어는 죽기까지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러한 고난을 기꺼이 당하였습니다만 이 고난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서 하나님 안에서 얻는 영원한 생명이 빼앗기지 않도록 하나님은 그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도우셔서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극심한 기근과 기갈을 당하는 가뭄의 재앙 속에서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로 몸을 피신하게 하여서 그곳에서 바닥이 말라 드러날 때까지 물을 마실 수 있게 하시고 까마귀를 동원하여서 아침과 저녁으로 양식을 물어다 주어서 먹게 하여서 그를 보살펴 생명을 보호하신 것에서 우리는 그가 수행해야 할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과 관련하여서 입히신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봅니다만 우리는 또한 이것에서 모든 성도들이 겪을 수 있는 “오늘은 어디서 물과 양식을 구해서 굶주림을 면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만 하고 이를 염려할 수밖에 없는 극한 곤핍한 처지 속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하나님과 그 나라를 구하는 의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 12-13절에서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한 데서 동일한 원리를 배웁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많든 적든지 간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며 자신의 능력을 힘입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난을 이겨낼 줄도 알고 부유를 누릴 줄도 알게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능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당신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해 주시는 것을 어디 가난과 부유에 한해서만 경험하는 것이겠습니까? 앞서 히브리서 11장의 인물에서 보듯이 극한 모든 처지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힘은 하나님에게서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떤 현실에서도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부귀와 권세와 명예를 얻을 수 있을까“를 염려하는 생각 속에서 살고 그럴 수만 있다면 우상 숭배하며 의존해서 살면서 생명을 지탱해 가려는 세상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참된 신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은 그 믿음으로서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떡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마 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