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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덩굴손의 고백
조민원
(강진고등학교 3학년)
엄마... 가지마... 엉엉...
아이는 맨발로 동네가 떠내려갈듯 큰소리로 울면서 엄마를 아창아창 뒤 따랐다..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지만 서럽게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 때문에 곧 동구 밖에서 멈춰 서고 만다.
엄마와 아이는 버드나무 아래서 부둥켜안았다.
미안해 아가야...
바람이 차오르고 휘감아 도는 커다란 가을 버드나무가 울었다..
“넌 내 자식이지만.. 참 냉정한 아이야...”
내 유년의 한 귀퉁이에서 엄마는 언젠가 그렇게 말해놓고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것 같다.
엄마의 말에 난 발끈해서 대들지도, 혹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때 내 속에선 ‘그럼 자식한테 그런 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당신은 얼마나 냉랭한 사람인줄 알아요..’
라는 말이 송충이처럼 스멀스멀 꿈틀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랬었다고 한들 나는 그 말을 결코 입 밖에 내지는 않고, 질긴 칡뿌리를 씹듯 질겅질겅 곱씹어서 도로 삼켜버렸을 것이다.
그리곤 그저 메마른 삭정이 같은 표정으로 읽고 있던 책에만 다시 시선을 기울일 뿐. 사람 정이 뭔지도 잘 모르고 자란 아이는 그렇게 유일한 혈육 앞에서도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중학교 마지막 학기가 끝나갈 무렵, 독기서린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한가운데서 하늘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지독한 바람에 입술이 갈라져 피가 나고 손등이 온통 부르트는데도 나는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대신 내가 흘려야 할 눈물까지 엄마가 모두 흘렸다.
난 그때 엄마가 아빠를 그토록 사랑했던가..
의아해하며 엄마가 흘리는 눈물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3일장의 마지막 날 밤 친척들과 엄마는 자고 있는 척 눈을 감고 있던 내 곁에서 이야기했다.
아비의 죽음에 눈물 흘리지 않는 무심한 자식에 대하여.
그러나 그들이 그 뒤로 시간이 흐른 몇 년 동안도 밤마다 아비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길을 가다가 빨간색 오토바이만 보아도 무심코 손을 흔드는(아버지는 늘 먼 학교까지 나를 빨간색 오토바이로 통학을 시켜주셨다. 학교가 끝나면 저만치서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아버지가 나를 알아볼 수 있도록 나는 머리 위로 손을 세차게 흔들어야만 했다.)자식의 뒤늦은 아픔까지는 미리 다 간파하지 못했으리라.
아빠를 떠나보내고 나서 엄마는 내게 말했다.
"점쟁이가 그러는데 너랑 난 같이 살면 안 될 팔자랜다."
그렇게 엄마는 교회에 다니는 아들에게 점쟁이의 말로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유일한 가족의 이별통보였다.
물론 나는 엄마의 바람대로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점쟁이 말이 맞기라도 한건지 엄마는 내가 기숙사에 들어가자마자 나에 대한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집에 오는 나를 엄마는 귀한 손님처럼 대접했고 늘 방안에서 힘없이, 혹은 애물단지처럼 날 바라보던 눈빛마저도 차츰 부드러워졌다.
아마도 엄마에게 무척이나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나는 달라진 엄마에 대해 다만 그렇게 막연히 추측해 볼 뿐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점점 서로의 얼굴을 잊어가는 사이에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다 나는 1학년이 끝날 무렵 자유롭지 못한 기숙사 생활 속에서 심한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집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나는 부족한 나를 엄마가 꾸중할 거라 생각했지만 엄마는 의외로 무척이나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리고 그런 엄마 곁엔 낯선 누군가가 서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어느 날부터 집안에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던 호박들..
그리고 그것이 엄마가 행복해진 이유였다.
엄마는 그 사람을 다만 새로 사귄 친구라고 소개했지만 난 엄마가 말하지 않은 그 이상의 것을 염두 해두어야 했다.
그것이 엄마와의 다시 시작된 동거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것이었다.
엄마는 나의 기분을 무척이나 염려하고 있었지만 난 엄마 생각처럼 엄마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때 당시의 나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자면, 끈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내게 있어서 엄마는 이미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가고 있었다.
엄마는 깜박깜박 빛바랜 백열등 전구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엄만 니 의사를 존중해. 네가 싫다고 하면 그만둘게.."
라고 엄마는 나를 충분히 배려해주었다.
난 엄마에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해한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기가 찰 정도로 너무도 젊은 나이, 더군다나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금슬이라는 것도 없이 한 평생을 눈물만으로 간신히 살아오다 기어이 홀로 남겨진 사람.
누가 바라본들 이 젊은 과부의 신세가 처량하지 않을 수 없을까.
나도 그러한 발로로서 차라리 엄마를 독려해주고도 싶기까지 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난 그때 그저 멀리 떨어져서 타인의 눈으로 엄마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들의 심정에서 엄마를 생각한다면 섭섭해 하거나 심지어는 분노했어야 했다.
나는 나 스스로도 너무 이상스러울 만치 무던히 엄마를 대했다.
엄마는 처음, 그런 내 모습에 안도하기는커녕 도리어 불안해했다.
하지만 그것도 여러 날이 지나니 내 마음이 거짓이 아닐 것이라 완전히 믿게 된 듯한 기색이었다.
"저 아인 어렸을 때부터 터무니없이 조숙한 아이였으니.."
하고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혹은 포기해버렸거나...
그 사람은 장사꾼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호박을 사서 도매시장에 넘기는 일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우연히 이 사람 차를 얻어 탔다가 "바깥 분은..." 라는 소리에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고 했다.
그리고 그건 아빠의 49제가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날이었다.
엄마가 따로 누군가를 만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실은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터였으므로 난 엄마의 말을 충분히 믿을 수 있었다.
아저씨는 생각보다도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엄마를, 나보다 더 이해해주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액체 몇 봉지를 몸속에 억지로 집어넣어가며 간신히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아니 내가 보기에 그건 살아간다기보다는 점점 죽어간다 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지독한 일이다.
처음 엄마의 마취도 하지 않고 생살의 찢어 배에 구멍을 뚫는 수술이 시작이었다.
수술실 밖에서 초조하기 기다리는 동안 차라리 죽여 달라는 엄마의 비명은 수술실 문을 날카로운 메스로 좍좍 찢어버리고 내 귓가에 가시로 돋아났고 수술침대에 실려 나오는 고통에 질린 엄마의 눈은 꼭 나를 노려보는 것만 같아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복막투석이란 그 끔찍한 일을 하루에도 네 차례씩이나 반복하게 되었을 때, 난 한동안 너무도 무서워서 입도 꼼짝 않고 지냈다.
말기 신부전증이라는 엄마의 병이 무서웠던 것이 아니라 엄마가 무서웠다.
날이 갈수록 시들어가는 엄마의 표정과 온 종일 아무기척도 없이 정적만 흐르는 공동묘지 같기 만한 집안이 너무도 견딜 수 없었다.
그 후로 내내 어린 나는 나를 돌보아주지 않는 엄마에 대해 분노했다.
엄마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 터무니없는 조숙도 그맘때쯤 길러지기 시작했다.
난 내게 사랑한다고 속삭여주지 않는 엄마를 향해 고함치다가 점점 실망했고, 그리곤 스스로 지쳐 마침내 단념해갔다. 엄마는..
또 엄마 나름대로 나로 인해서 뜰 안 가득 쌓이는 낙엽 같은 쓸쓸함만이 더해 갔으리라.
그때 엄마는 거식증으로 먹은 밥을 늘 토해내기 일쑤였고, 또 약간의 우울증마저 앓고 있었다.
그때 엄마는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그런데 그런 엄마에게 내가 해줄 수 없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나는 오래전에 알아 버렸다.
마음까지 아픈 엄마가 악에 받쳐서 고함치던, 내 눈앞에서 엄마와 나의 소중한 공간들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던 과거의 그 어느 날.
나라는 존재는 그때 너무도 엄마가 무서워 방안에서 아픈 엄마를 외면한 채 읍읍읍, 베개에 입을 틀어막고 우는 것이 전부였었다.
너무도 힘없는 엄마가 내게 그랬듯, 엄마에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저씨는 달랐다.
그는 징그러울 만큼 신경질적으로 변한, 그 너무도 뜻밖의 모습에 나는 넋이 나가버린, 엄마를 어르고 달래고 그리고 보듬어 주었다.
때로는 엄마의 오기어린 두 손에 맞아도 가면서. 그런 아저씨는 엄마에게는 분명 메시아 같은 존재였다.
그렇다고 그가 나를 엄마 몰래 구박하는 동화 속 흔히 나오는 이중 인격적 의부는 결코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엄마에게 하는 만큼 내게도 부단히 친절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내 곁에서 아빠의 빈자리를 곧잘 채워주고 있기까지 했다.
아저씨는 엄마에게 사랑이 되 주었고 심지어는 내 역할까지도 대신 해주었다.
엄마에게 내가 부리지 않는 어리광을 부린다거나...
그런 그 사람이 나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래서 그 사람이 늘 불편하지 않도록 그가 집에 올 때면 나는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더라도 늘 웃기위해 애썼다.
그런데 나는 왜 언제나 두 사람과 함께 먹는 저녁이 어색했는지 모르겠다.
밥을 입 안에서 한 알 한 알 세어가며 아무리 잘근잘근 씹어 먹어도 체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막막해지는 기분을, 밥을 먹는 동안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늘 내게 찌거나, 혹은 구워놓은 호박을 권했다. 내가 혹여 먹지 않으면 엄만 옆에서 몸에 좋으니 좀 들어보라고 한다.
그럼 난 할 수 없이 그걸 묵묵히 다 받아먹어야만 했다. 말이 없는 나는,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를 하나도 남김없이 귀로 들었다.
그리고 밥을 한번씩 숟가락으로 떠넘길 때마다 대화 하나 하나를 마음속으로 다시 슬그머니 반추했다.
가끔씩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또 즐거워할 때면, 나는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주체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그것은, 분명 질투였다.
나는 그렇게 내게 있어서 유일하고 감사한 사람들을 질투하는 내 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다른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식사를 마치고 나서만큼은 엄마를 향한 애증에 나는 감기처럼 퍽 오래 앓았다...
나는 얼마가지 않아 집을 나와 자취를 시작했다.
나는 어릴 적 아빠가 가대기를 해가며 지은 집안의 아빠의 부재를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이제 나 혼자 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말에 집으로 향하는데 그날은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마을 앞 능청능청 흔들리는 버드나무 이파리가 몹시 눈에 밟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어쩐지 피 비린내가 일었다.
퍼뜩 무서운 생각이 일었다.
그러나 집 안을 둘러봐도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해 보였다.
마음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병원이라고 했다..
엄마는 다행히 혼절했을 뿐 갑작스런 하혈로 온 몸의 피를 다 소진해 버려서 대량의 수혈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복막염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정신을 차린 엄마는 갑자기 어린아이가 되어있었다.
자신의 몇 몇 기억의 자락을 더듬지 못하는 가하면 또 사소한 일에도 불안해하고 내내 걱정스러워 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대량의 수혈로 인해 올수 있는 증상 중 하나이니 곧 회복 될 거라고 했다.
아저씨는 엄마를 내게 부탁했고 친척들은 오지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학교를 가지 않고 병원에서 간호를 위해 밤을 지새웠다.
그러던 이틀째 되던 날 밤이던가..
보조 침대에서 눈을 붙이고 있는데 엄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가야, 라고.
한 침대에서 같이 자고 싶다고 조르는 엄마는 참 낯설었지만 또 어쩐지 익숙한 구석이 있었다.
오랜만에 내 품에 안긴 엄마는 잠결처럼 말했다.
엄마를 조금만 더 사랑해주면 안되겠느냐고. 그 말을 들은 난 엄마에게 대들었다.
"엄마, 나 호박 싫어해. 나 호박이 정말 싫단 말야. 근데 왜 맨날 나한테 호박 먹으라고 그래? 난 그거 먹으라고 할 때마다 숨도 안 쉬고 돼지처럼 다 먹었어. 그러고 나면, 얼마나 배가 부르는지 알아?. 근데 왜 배가 아픈 게 아니라 자꾸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건지 모르겠어..."
엄마는 처음으로 그렇게 대드는 내게 흐느끼면서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했다.
난 그런 엄마 품에서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엄마.. 방아깨비 알지?..
어릴 때 엄마가 들에서 잡아다주던 녹색 방아깨비 말야. 쉴 새 없이 쿵덕쿵덕 방아를 찍는 방아깨비가 난 사실은 무서웠어.
방아깨비는 방아를 찧는 건, 실은 도망가기 위해서잖아.
그래서 방아깨비라는 이름은 당장 내던져버려야 한다는 걸. 그러다 꼭 방아깨비는 다리가 끊어져서, 아니 어쩌면 방아깨비 스스로 자기의 다리를 끊어버리는 건지도 몰라. 그렇게 내 손을 벗어나 버린다는 걸. 저 다리가 뚝 끊어지면 방아깨비는 죽는 거고 나는 혼자가 되는 게 난 무서웠어. 그래서 난 방아깨비에게 부탁했어. 방아깨비야 방아를 찍지 말아줘.. 쿵덕 쿵덕.. 제발 그 냉정함으로 나를 내려찍지 말아줘..
라고...
엄만 몰랐겠지만. 난 엄마 곁에서 그런 기분으로 살아왔어.
자취방에서 잠을 자면 종종 전쟁터에 서 있는 꿈을 꿔.
하나둘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사람들은 다시는 못 일어나는데...
사람들 맨 뒤에 숨어서 겁쟁이처럼 혼자 살아남은 날 보곤 해..
가장 먼저 떠나간 형, 이름도 부를 수 없는 인큐베이터 속 내 동생, 사랑한다고 한번도 말해보지 못한 아빠를, 엄마는 벌써 잊은 거야?
그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야. 엄마와 내가 함께 살지 못해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 듯이..
난 밤마다 과거를 살아. 한번 떠난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모두의 떠나감으로 인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지만 난 그래도 밤마다 우리 가족들하고 다시 밥을 먹고, 함께 놀고, 같은 잠을 자.
그래서 아침이 너무 무서워...
엄마도 그렇지?
엄만 늘 악몽을 꾼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현실보다 더 무서운 게 있어. 그건 불안한 미래야,..
어느 날은 소나기가 내리고 벼락이 치는데 방안으로 빛이 번쩍할 땐 내가 드디어 벼락을 맞는가 보다 생각 했어.
난 늘 마음속에 죄가 있으니까. 난 벼락을 맞지 않았는데도 몸서리치며 벌벌 떨었어.
엄마가 걱정스러워졌으니까.
내 죄 때문에 엄마가 대신 벼락을 맞을까봐 두려웠으니까. 난 비가와도 무섭고, 차를 봐도 무서워.
나 엄마 죽으면 어떻게 살지?
사람들이 그래도 다 살아진다고 해도 난 못 그럴 거 같아. 어릴 때 말야..
엄마가 날 두고 떠나려고 하던 그 날부터 난 그렇게 살았어.
엄마가 늘 내 곁에 있어준다고, 그 말 한마디만 해줬으면 난 괜찮았을 텐데..
내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하루를 엄마걱정 때문에 숨 쉴 수 없을 만큼 불안해하며 살아가는데.
엄마가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랬었는데. 우리..
서로 사랑하는 마음 표현하면서 살았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엄마, 우리 이제라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정말로...
이 커다란 세상 천지에, 셋도 아니고 우리 둘뿐이잖아..
돌아올 수 없는 사람보다는 이제 곁에 있는 엄마를 사랑하고 싶어...
그날 밤 꿈속에선 떠나간 가족들이 아닌 엄마가 나왔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예뻐." 라고 말하던 시절 그대로 아주 고운 모습이었다.
엄마는 따스한 미소로 나를 꼬옥 보둠아 주었다.
엄마한테서 꼭 산모에게서나 나는 비릿하지만 훈훈한 냄새가 났다.
무뚝뚝하기만 하던 아들은 그렇게 꿈속에서나마 처음으로, 엄마에게 가슴 속 깊이 감춰두었던 유채꽃 같은 고백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유일한 가족에게. 영원토록 사랑하고자.
부둥켜안아 보자.
호박 덩굴들처럼.
흔하다는 이유로 짓밟히고 짓밟혀도 죽지 않고 강인한 맺음 결로 잇대어가며 빛있는 곳으로 향하고, 물 있는 곳을 찾아내어 마침내 토지의 별을 일궈내는 호박 덩굴을 닮아보자.
말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호박 덩굴들은 입이 없다.
끌어안은 가슴에서 터져 오는 심장의 고백도 사랑이다.
내일은, 보이지 않게 덩굴 끝에서 덩굴을 빛과 물로 이끌어주고 거센 바람에도 덩굴을 지탱시켜주는 호박 덩굴손과 같이, 가족의 덩굴손이 되어보자.
2.
천사 엄마와 춤을
이현진
(서울맹학교 2학년)
세상은 공평하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행복만 주신 것이 아니라 불행도 함께 주신다. 하지만 불행을 불행으로 받아들이고 구렁텅이에서 헤매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삶이요, 불행을 이겨내면 행복한 삶이라고 자신한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그냥 지나가면 좋으련만 꼭 한 마디를 한다.
"저런, 시각장애인인가 봐. 아유 어린 것이 불쌍하기도 하지."
하시며 걱정과 동정의 한 마디를 건네시는 분은 그래도 다행이다.
"야, 저 애 좀 봐. 봉사야, 봉사. 앞도 못 보는 것이 집에나 있지. 왜 밖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 불편하게 해. 쯧쯧."
하고 웅성대며 지나가는 사람들. 이 말들을 들을 때마다 모두가 혹시나 내가 걷다가 다치는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해주시는 소리로 듣는다. 왜냐하면 이런 말쯤은 내가 살아가는데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소한 지금 이 시간만큼은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 새엄마를 천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 새엄마 아니 엄마가 천사가 되기까지는 최소한 6년이 걸렸다. "천사는 아무나 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엄마는 분명 천사다. 그것도 하늘에서 내려왔는지 땅에서 솟아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천사다.
우리 천사 엄마가 나의 수호천사가 되기까지는 중간에 휴전선보다 더 무서운 장벽들이 많았다.
시각장애인. 남들이 말하는 맹인, 또는 봉사라고 한다. 나 또한 시각장애라는 무거운 짐을 안고 세상에 태어났다. 후천성이 아닌 선천성 시각장애인.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도 시각장애인이니 유전인 셈이다.
1988년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에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나를 축복해 주기보다는 저주와 걱정으로 보았다고 한다. 태어난 지 한 돌이 지나도 사람들과 눈을 맞추지 못했다고 하니, 천덕꾸러기가 분명했다. 엄마 아빠 두 분다 시각장애인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자란 나로서는 사랑보다는 미움을 더 많이 받은 기억밖에 없다. 여천에는 맹학교가 없었고 그 당시만 해도 "약시"라고 해서 물체를 희미하게는 볼 수 있어 일반학교에 입학을 했다.
우리 가족, 엄마 아빠와 나들이라도 하려면 손잡고 걷는 다정한 모습이 아니라 손에 지팡이가 들려있으니 친구들의 놀림감으로 충분했다.
그런 친구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물질적이었다. 날마다 엄마를 졸라 돈을 타고 그 돈을 친구들에게 주면 나와 놀아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던 어린 시절.
어쩌다 엄마가 돈을 주지 않으면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 간들 친구들이 돈이 없는 나와 놀아주기는커녕 가까이 가기라도 하면 밀쳐서 나동댕이 쳐지고 했으니까 점점 학교에 가는 회수보다 안가는 날이 늘어났다.
이처럼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송아치처럼 천방지축 말썽꾸러기인 나를 특히나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인 나를 예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은 불행의 시작일 뿐이었다.
엄마 아빠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혼을 했고 나는 엄마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 엄마의 손에 자란 나는 말 그대로 보이는 것이 없으니 무서운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였고, 손에 돈이 쥐어져야 학교에 가는 말썽쟁이도 최상의 말썽쟁이였다.
이처럼 내 마음대로 생활을 하는 동안 아빠는 재혼을 하셨다. 그것도 우리와 같은 시각장애인이 아닌 정상적인 사람과 재혼을 하셨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 때 당시는 아줌마라고 불렀지만 재혼한 새엄마는 아빠로부터 나의 물란한 생활을 듣고 엄마에게서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혼자 살아가야하는 엄마를 두고 나는 아빠의 집으로 왔고, 그 때부터 나의 악동은 더해갔다.
"아줌마, 아줌마는 정상이라면서 왜 우리 아빠랑 결혼했어요? 곧 떠날 것이면 지금 가세요. 그리고 돈 좀 주세요."
이와 같은 말이 매일매일 반복되어도 새엄마는 화를 내기는커녕 내가 처음 아빠에게로 갔을 때나 시간이 지나도 친절함은 변함이 없었다.
이런 나의 나쁜 행동은 계속되었고,
"시각장애인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차라리 극복을 해라."
는 새엄마의 화난 목소리. 2년여 동안 살면서 새엄마의 화난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새엄마와 아빠는 고민 끝에 나를 서울에 있는 맹학교로 보내셨다.
나에게 화를 낸 새엄마가 밉기도 해서 나 또한 서울에 가면 나 혼자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설레임도 가졌다.
드디어 서울 맹학교. 친척도 없고, 모두가 시각장애인만 모이는 곳이라 말 그대로 단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제멋대로였던 나의 생활을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았고, 오히려 친구들의 따돌림뿐이었다.
엄마, 나를 낳아주신 엄마가 옆에 계신다면 엄마를 붙잡고 엉엉 울고 싶었다.
나는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고 아무도 없었다. 혼자 사막에 버려진 고아였다.
이처럼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하니 생각만 하는 날들은 계속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학교 성적은 반에서 꼴등. 창피한 것도 없도 재미도 없고 모든 것이 싫었다.
그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현진아, 엄마야."
"누구, 엄마? 진짜 엄마 맞아?"
새엄마라는 생각도 잊고 있었다.
너무도 외로워 아줌마가 아닌 "엄마"를 부르며 더듬더듬 엄마의 품 속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많이 힘드니? 힘들었구나."
"……."
아무 말도 못하고 엄마의 품속에서 한참을 울었다.
엄마의 품이 그렇게 따뜻한 줄 몰랐다.
나의 등을 토닥거리는 손에 작은 떨림이 있음을 느꼈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한참을 계시더니
"현진아, 이제 됐다. 이제 네 스스로 극복할 수 있겠구나. 엄마는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단다. 엄마는 절대로 도망가지 않아. 이렇게 예쁜 딸이 곁에 있는데 엄마가 어디를 도망가니? 그런데 엄마 아빠는 영원히 눈이 될 수 없어. 이제부터 네가 너의 눈을 찾는 연습을 하는 거야."
떨리면서, 울먹이면서 하시는 엄마의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이처럼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내 곁을 찾아 나의 친구가 되어준 엄마와 나는 이제 정말 엄마와 딸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엄마는 마음을 열었지만 내가 그 문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나는 엄마 마음의 문이 열려있는지도 몰랐고, 그 문이 어디인지도 몰랐던 것이다.
이렇게 엄마의 마음을 열고 들어가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내 마음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으로 바뀌어 세상이 즐거웠다.
지난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다른 시각장애인이 물놀이를 간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었지만 엄마의 성화에 우리 가족은 전남 광양 계곡으로 물놀이를 갔다.
엄마를 만나 처음 가보는 나들이었다.
물론 그 전에 수십, 수백 번도 더 엄마는 나와 외출을 원했지만 언제나 내가 "흥"하는 비웃음으로 나들이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처음인 셈이다.
엄마는 운전을 하고 아빠와 나는 뒷자리에 앉아 두 손을 꼭 잡았다.
철들고 나서 아빠가 처음 잡아준 손이다.
따스함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아빠 손을 힘있게 잡았다.
아빠는 아무 말씀도 없이 내 등을 두드려 주셨다.
계곡에 도착하니 웅성대는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얼씬도 하지 않고 이상한 소리만 들려왔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시원한 계곡 물에 발을 담궈주셨다.
그러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 딸 예쁘죠?"
하시며 자랑을 하셨다.
양손에 아빠와 내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계곡에서 물놀이도 하고 준비한 도시락도 먹으면서 아직 어린 나이이지만 "이것이 행복이구나, 이것이 가족이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나는 가족의 소중함을 알았다.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이 창피하지도 않다.
차라리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실제로 볼 수는 없지만 내 마음 속에 내가 보고 싶은 대로 그림을 그려 아름답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삐뚤어진 마음을 고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새엄마, 천사 엄마 덕분이다.
가족의 소중함이 내가 앞으로 살아갈 시각장애라는 언덕을 넘는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
이제 나에게도 꿈이 있다.
엄마의 말씀처럼 나와 같이 소외받고 자라는 장애인, 특히 시작장애인을 위한 맹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공부를 못하여 성적이 뒷자리에 있을지라도 사랑하는 천사 엄마와 함께라면, 아니 나의 노력과 사랑이 있다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
내가 가끔 엄마에게 하는 말이 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말을 사용한 것 같지만
"엄마, 내 엄마여서 너무 좋다. 영원히 천사 엄마로 내 곁을 지켜주세요."
오늘도 엄마의 따스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몸은 비록 여천과 서울로 떨어져 지내고 있지만 마음은 항상 엄마, 아빠와 같이 한다. 바로 가족이라는 귀중한 재산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 감사해요. 이 은혜 영원히 잊지 않고, 내 꿈을 이루는 것이 엄마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아요. 언젠가 엄마와 춤을 추는 그 날을 위해."
3 다시, 칫솔살균기에는 여섯 식구의 자리
박성준
(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어머니, 아들입니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몇 자를 적습니다.
오늘도 알람소리에 제가 먼저 깨어버렸네요.
화장도 지우지 않으시고 잠드신 걸 보니 어제도 야간작업까지 다
하다가 오셨나 봐요.
어제 밤도 혼자 가로등빛 없는 언덕길을 올라온 것을 차가운 현관 바닥에 저 뒤축이 구겨진 낡은 구두는 기억하고 있을까요.
어머니 보다 일찍 울고 있는 알람시계를 끕니다.
전기요에 혼자 누우신 어머니 옆에 아버지처럼 누워 봐요.
아버지의 빈자리가 이리도 커 보인 건 오늘만이 아닌데 괜히 각질이 일어난 어머니 손을 더 꼭 잡아 봅니다.
전기요의 눈금은 5하고 6사이에 있어도 왜 이리도 어머니 손발은 차기만 한 건지. 코까지 골며 주무시는 어머니를 함부로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이 수능시험 날인데……. 일어나지 않는 어머니를 보니, 서운하기보다 가슴이 아파요.
서둘러 세수를 하다가 틀니를 플라스틱 컵 안에서 꺼냈어요.
오늘도 어머니 틀니를 닦습니다. 어제 밤참으로는 숙주나물 무침을 드셨는지 틀니 사이에 끼인 나물이 자꾸만 자꾸만, 무슨 말인가 하려고 틈이 되는 곳마다 깊게 뿌리를 박고 있네요.
이렇게 가끔 몰래 틀니를 닦아 놓는다는 걸 어머니가 아시는 모르시는 지. 이제 쉰이 겨우 넘은 나이인데 세월보다 치아가 먼저 늙어 버린 어머니."단것 좋아하지 마라, 단것 좋아하면 가난한 티내는 거다."
하시며 사탕을 뺏던 유년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먼저 이를 못 쓰게 되셨으니 입가에 쓴웃음만 짓게 하네요.
치약이 칫솔결 위에서, 틀니에 촘촘히 박힌 금테와 금니 위에서 부글부글 부풀어 오를수록, 우리 어머니 입속에 있던 것인데 우리 어머니 밥을 먹게 하는 녀석인데 하며 깨끗이 닦았어요.
어머니의 모진 세월도 제가 이렇게 금새 닦아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칫솔을 꽂아 두려고 타일 벽에 붙은 칫솔살균기를 열었는데 어머니와 저, 단 둘 뿐인 칫솔이 나머지 넷의 빈자리를 더 실감하게 하네요.
기억하세요?
우리 여섯 식구가 처음으로 제 손으로 핏 땀 흘려 산 우리 집에 처음으로 한 일이 화장실에 칫솔살균기를 걸어둔 거라는 걸요.
큰 마트에 가야지만 여섯 개짜리 칫솔살균기를 구할 수 있다고 어머니가 버스 타고 다리 건너 서울까지 가서 사 오신 거잖아요.
그때는 어려서 컵 위에 꽂아 두면 그만인 칫솔을 뭐 하러 사서 고생하면서까지 살균기에 넣어야 할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때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때 저 살균기 속에 오른쪽부터 아버지, 어머니, 누나들 셋 그리고 나. 이렇게 순서대로 색깔 별로 칫솔을 꽂아 두고 알콩달콩 모여 살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 단 둘 뿐이 칫솔을 보고 나니 어머니와 저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어서, 서로서로 추위를 타고 있는 것만 같아서 맨 왼쪽 자리에 있는 제 칫솔을 아버지 자리에 옮겨 놓아 봅니다.
이건 무슨 마음에서부터 나온 행동인지 뭐라 정의할 수 없지만 그냥 그렇게 해두고 싶네요.
우리 이제 미워하지 말고 살아요. 우리 가족 떨어져서 산지도 이제 일 년 가까이인데 그 간 어머니가 흩어진 식구들 이야기는 말 한 마디 한번 꺼내시지 않으셨지만 그게 정말 그립지 않고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아요.
혹시나 둘이 사는데 어머니가 먼저 약한 모습 보이면 나까지 약해질까, 그게 걱정이 돼서 그러시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어머니 지갑에 식구들 사진을 한 장, 한 장씩 감춰두고 계시다가 생각나실 때 몰래 꺼내 보시는 것도 알고요.
발신자 주소를 그 지역 우체국 주소를 써 놔서 정확한 주소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충청남도 어느 절에서 계신다고 편지가 왔어요.
나무도 해다 나르고 청소도 하고 절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절밥을 드시고 계시데요.
미안하다고 다 자기 잘못이라고 그렇게 힘들게 마련한 우리 집인데 잘못 선 보증 한번으로, 한 순간 폭삭 쓰러지게 해서 안 되는 집이었는데…….
가족들에게 떳떳할 수 있는 날이 오면 돌아온다는 마지막 한 마디가 아버지에 축 내려 앉은 어깻죽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요. 그래도 저는 아버지가 밉지 않아요.
어머니도 마치 남이 된 것처럼 욕 하시면서도 정작 제가 욕하려고 거들면 저를 나무라시잖아요.
그래서 아버지라면서. 아버지 딴에는 잘해보려고 했던 일이라고 우리 그저 그렇게 생각해요.
마지막, 집을 나가시던 날. 식탁 의자에 화풀이를 해서 칼집을 내 놓았던 바로 그 날.
저는 새벽에 집에 있는 부엌칼을 모아다가 쇠톱으로 칼을 끝을 자르며 마음속으로 다짐 했어요
"이제 어머니는 내가 지킨다. 나에게 이제 아버지는 없다."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정말 아버지는 아버지인가 봐요.
어느 새 저도 모르게 아버지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닮아가고 있는 저를 보면 알아요.
그런데 아버지를 닮아가는 제 자신이 싫은 것이 아니라 그런 닮음에서 조차 아버지를 추억해야만, 그래야만 아프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이 벌써 흘러버렸어요.
어머니, 우리 아버지 용서해요.
큰 누나는 핸드폰 연락을 해보니 고객의 요청에 의해 핸드폰이 정지 됐다고 차가운 기계음성이 누나 대신 전화를 받네요.
아직도 청량리 근처 그 집에서 살고 있는지 밥을 잘 챙겨 먹고 다니는지 걱정이 태산 같지만 열두 살 띠 동갑짜리 동생이 하는 걱정이 어쩌면 우스워 보여서, 또 아버지 저지래를 뻔히 보고도 생각 없이 카드빚을 돌려 막아 정작 여기까지 온 큰 누나가 밉다면 아버지 보다 더 미워서……
더는 찾지도 묻지도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았어요.
그래도 하루 종일 마음은 무겁습니다.
그리고 둘째누나랑 막내 누나는 수능 시험 끝나면 얼굴이나 보자고 어제 연락이 왔었습니다.
둘이 같이 조금씩 벌어서 안산 어디에 사글세방을 얻었다는 데, 집에서 나오면서 조금씩 나눠 가지고 나온 빚들도 이제 반 정도 갚아 놨데네요.
빨리 돈을 모아서 시집가야 되는데, 시집가야 되는데 수화기 너머로 하던 말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그 말이 얼른 빚 다 갚고 우리 가족 같이 살자고 하는 말이었을 텐데 자기들은 시집만 가면 그만이라고 딱 잘라 말 한 것은 어떤 미움에서 나온 말일까요.
아니면 자존심이었을까요. 서로 분명 너무 너무 사랑하고 있는데 정말 그게 자존심이라면 조금만 서로 말을 곱게 해도 따뜻해질 수 있는 우리 가족인데 말입니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거 말썽만 부리다가 벌써 스무 살이 됩니다.
이제 저도 내년이면 대학생이 돼요.
예술고등학교로 편입하려고 중간에 학교를 그만 두려고 했던 것 그리고 밤낮으로 친구들만 따라 다녔던 것도 어머니가 있었기에, 그렇게 방황하다가도 돌아갈 수 있는 가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시간들 같아요.
그래요. 이제 제가 그 든든한 돌아갈 수 있는 버팀목이 가족들에게 되고 싶네요.
딸 셋 낳고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고 남들은 예쁨 받으며 온실에 화초처럼 자랐다고들 하지만, 제가 누가 뭐래도 우리 집에서 장남이에요.
더 이상 막내 노릇만 할 수도 없잖아요.
우리 가족 모두 떨어져 있지만 아버지 곁에도 어머니 곁에도 그리고 누나들 곁에도 늘 함께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따뜻한 아들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대학에 가서는 제 용돈 정도는 제가 벌어 보도록 할게요.
야윈 어머니께 현관문을 나설 때마다 용돈을 달라는 말도 이젠 편치가 않네요.
그래, 장년 이맘때였던가?
그 언젠가 어머니와 약속한 게 있지요.
그때도 쑥스러워서 편지로 썼던 말인데……
어머니, 제가 어머니 입 속에서 밝게 빛나는 금니가 되어 드릴게요.
아무리 칫솔질을 열심히 해도 닦아도, 닦아도 빛을 낼 수 없는 틀니 속에 금니라는 걸 알지만 저는 빛내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 흩어진 식구들도 다시 함께 사는 날이 곧 왔으면 좋겠습니다.
타일벽에 붙은 칫솔살균기에는 여섯 식구의 칫솔이 꽂이고, 우리 여섯 식구가 차례로 아침마다 분주하게 어둠을 밀어 내는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서로 미워하고 미안해하는 감정, 살균기 안에서 모두 씻어버리고 사랑하다는 말만 우물우물 칫솔질 하는 그런 날. 푸른 살균등처럼 빛나는 우리 가족의 희망을 다시 한 번 써 보고 싶습니다.
몇 자만 적고 마려고 했는데…….
어머니 오늘 시험 잘 볼게요.
주무시기 전에 싸두 신 도시락 잘 챙겨갑니다.
항상 쑥스럽지만 어머니. 사랑해요, 미안해요.
4. 아빠, 힘내세요!
홍순지
(성사초등학교 6학년)
아빠! 화단에 과꽃이 활짝 피었어요.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꽃 위에 노란 벌들이 꿀을 따느라 춤을 췄는데요, 아빠가 건강하셨으면 아빠와 함께 과꽃 노래를 불렀을텐데 오늘은 저 혼자서 불렀어요. 그리고 다음 가을에는 꼭 아빠와 함께 부르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아빠! 찰밥 맛있으셨어요? 아빠를 깜짝 놀라게 해 드리자며 언니가 먼저 아빠 좋아하시는 찰밥을 짓자고 해놓고, 알람시계가 울려도 쿨, 쿨 잠만 자서요. 제가 혼자서 만든거에요.
아빠는 기운이 없으시니까 쌀을 부드럽게 하려고 물을 많이 부었더니 질게 됐어요. 찰밥맛이 안나더라도 꼭 꼭 씹어서 다 드셔야 해요.
공부시간에 지각을 할 만큼 아빠 얼굴을 많이 보고 왔는데도 자꾸 아빠 생각이 나서 울었는데요. 짝꿍은 내 마음도 모르고 운다고 선생님께 일렀지만, 선생님은 제 마음을 아시는지 모른 척 해 주셨어요.
아빠 말씀대로 씩씩한 사람이 되려면 울지 말아야 하는데, 마비된 신경을 살리기 위해 물리치료를 받으시면서 온몸을 뒤트시며 눈물과 땀을 흘리시는 아빠를 생각하면 자꾸 울게 돼요.
아빠!
아빠는 아프시면서도 저희들 걱정뿐이시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언니하고 제가 얼마나 씩씩하게 잘하고 있는지 말씀해 드릴까요?
깜짝 놀라실거에요. 이건 언니의 일급 비밀인데요, 언니가요 영어학원도 그만두고요. 아빠가 병원에 계시니까 우리들에게 필요한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면서요. 새벽에 신물 돌려요. 그래도요. 신문 돌리면서 영어공부 했는데 영어경시대회에서 언니가 일등했어요. 아빠, 기쁘시지요. 저도 기쁘고 언니를 친구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어요. 다음에도 또 일등을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제가 언니 신문 돌리는 일을 도와준다고 했더니요. 언니는 공부나 열심히 하라면서 무시했어요. 찰밥도 지을 수 있고, 빨래도 하는 제가 언니 눈에는 어린애로 보이나 봐요. 제 생각에는 언니가 공부를 더 잘하고 저는 언니보다 달리기를 잘 하니까 언니가 공부하고 제가 신문을 돌렸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언니는 제 마음하고 달라요.
아빠 같으면 제 마음을 금방 아시고, 허락 하셨을텐데 말이에요.
아빠!
지난번 공개수업 때 못 오셨다고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선생님께서 부모님을 꼭 모시고 오라고 해서 아빠가 못 오실 것 알면서도 말씀드린건데요. 아빠한테 슬픈 마음만 들게 해 드린 것 같아서 죄송해요.
저는 선생님께서 공개수업을 한다고 하시면 도망치고 싶은데 친구들은 정말 좋아해요.
“우리 아빠는 사장님이야.” “우리 엄마는 은행원.” 자랑들을 하지만 저는 아빠가 병원에 계시다는 말도 하기 싫고, 엄마도 안 계시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아서, 친구들을 피해 화장실에 가요.
엄마, 아빠 자랑하며 뽐내는 친구들 앞에서 아빠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에요. 아빠가 변호사인 친구가 있는데요. 그 친구에게 제가
“우리 아빠는 병원에 계신다.” 했더니요. 아빠가 의사인 줄 알고 부러워 했어요. 참 재밌는 친구에요.
저는 변호사인 아빠도, 사장님인 아빠도 부럽지 않아요. 아빠가 건강하시기만 하면 돼요. 그래서 저도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다. 우리 아빠야.” 며 자랑하고 싶어요.
아빠! 그러니까 꼭 건강하셔야 돼요.
아빠! 급식에요 닭강정이 나왔는데요. 아빠 생각이 많이 났어요.
닭강정이 나오는 날이면 교실은 온통 기침소리로 가득해요.
급식당번이 딱 두 개씩만 주는데요. 남으면 빨리 먹는 사람이 또 먹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한입에 넣고 먹다가 사래가 들어서 기침을 하는 거에요. 사실은 제가 가장 많이 그랬어요.
아빠가 건강하실 때는 닭강정을 세 개씩이나 먹어도 아빠 생각이 안났는데요. 오늘은 아빠하고 같이 먹고 싶어서 한 개도 못 먹었어요.
그래서 아빠 갖다 드리려고 짝꿍 몰래 휴지에 쌓는데요. 집에 와서 보니까 휴지가 다 붙어서요. 못 먹게 됐어요.
아빠! 선생님께서 그러시는데요. 슬픈 생각을 많이 하면 몸이 더 아파진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아프고 고통스러우시더라도 꼭 건강해지실거라는 믿음으로 좋은 생각만 하셔야 돼요.
그리고, 저하고 달리기 시합 하시기로 한 것 잊지 않으셨죠?
아빠한테 지지 안으려고 매일매일 학교운동장을 세바퀴씩 돌고 있어요.
아빠! 아빠는 꼭 건강해지실거에요. 아빠가 건강하게 빨리 저희들 곁으로 돌아오실 날을 기다리며, 씩씩하게 울지 않고 생활할꺼에요.
아빠! 힘내세요. 사랑해요.
2005년 10월 15일
딸 홍순지 올림.
5.김영명
(문정중학교 2학년)
며칠 전에 산 새 책상에 앉았지만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 저기 누워서 내가 자기를 쳐다보기를 바라는 것 마냥 날 빤히 쳐다보고 있는 아정이 때문에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시험기간이라고, 공부해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듣질 않는다. 시험공부란 말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아정이는 내 동생이다. 하나뿐인 동생.
작년 가을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볼일이 있다며 외출하셨던 엄마는 급히 뛰어 왔는지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들어오셨다. 잘 웃지 않는 엄마에게서 잔뜩 들떠 있는 모습을 보자 나도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져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벅차오르는 기쁨에 그 말을 꺼내기도 힘드신지 아니면 내게 어떻게 그 첫마디를 해야 할지 망설이시는 건지 뜸을 들이시다가 말씀하셨다.-지금 생각해 보니 전자 쪽이었던 것 같다.
“오늘 산부인과에 다녀왔는데 드디어 네가 그렇게 바라던 동생이 생겼단다.”
난 그때 정말이지 너무 기뻐서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아정이가 태어날 때까지 나는 아니 우리 가족은 모두 새 가족의 기대감에 행복했었다.
열달 쯤 지났을까, 교복을 입던 나와 회사에 가려고 준비하시던 아빠는 엄마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으시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엄마를 모시고 서둘러 산부인과로 갔다. 예정보다 빨리 엄마의 진통이 시작된 것이었다. 무서웠다. 건강한 편이 아니었던 우리엄마가 이러다 TV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이를 낳다 돌아가시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별의별 생각을 하며 그렇게 산부인과에 도착해서 서둘러 엄마와 의사선생님이 분만실로 가셨다.
어제까지만 해도 난 내게도 동생이 생긴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지만, 현실에서의 출산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외에도 많은 힘든 것 들이 있었다.
초조히 2시간 쯤 기다렸다. 엄마의 괴로운 비명소리가 들릴 때마다 무섭고 슬펐다. 눈물이 났다.
그렇게 엄마와 아기에 대한 걱정에 벌벌 떨며 한참을 더 기다리고 있는데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방금전까지의 걱정과 무서움은 다 잊고 ‘드디어 내 동생이 생겼구나’라는 생각에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이 나오셨다.
난 급한 마음에 질문을 퍼부었다. “어떻게 됐어요? 엄마는요? 제 동생은요? 모두 건강한가요?”
의사선생님은 이런 성급한 질문들에 익숙하신 듯 당황하지 않고 편안한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래 다들 건강하단다. 산모 몸이 좀 약해서 걱정됐지만 무사히 출산 하셨지. 그런데...”
마음이 놓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던 나는 그런데 라며 말끝을 흐리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다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요? 뭐 문제 있나요?”
의사선생님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 날 보시곤 내 떨리는 손을 잡고 말했다.
“아기에게 문제가 좀 있는것 같아. 건강상의 문제는 아니란다. 아주 건강해. 그런데.. 휴, 나도 잘 모르겠구나. 정밀검진을 좀 해봐야 할 것 같단다. 심각한 것은 아닐 테니 너무 염려 말고 진정해라.”
라고 하곤 가 버리셨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대체 무슨 문제라는 거지? 의사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며 이것저것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빠도 그런 것 같았다. 멍한 표정으로 서 계신 걸 보면...
한달 쯤 지난 후 병원에서 퇴원하신 엄마는 동생을 안고 집으로 오셨다.
아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내 하나뿐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동생은 태어나면서 뇌의 한부분이 손상되어 또래 아이들보다 언어, 학습 능력등이 떨어진다는 한마디로 ‘정신장애’라는 검진 결과를 받았다. 정신장애를 안고 태어난 동생이 너무 불쌍하기만 했다.
‘거짓말쟁이. 뭐가 심각한 게 아닐 거라는 거야.’라며 괜한 의사선생님을 탓하기도 했다.
꽃무늬 포대기에 싸여 엄마에게 안겨 자고 있는 아정이는 정신장애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귀엽고
정상적으로 보였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정신장애’와는 많이 달랐다.
난 ‘그래, 의사선생님이 뭔가 실수한 걸 거야. 아정이는 멀쩡해. 설사 정말 정신장애라고 해도 내가 지켜줄테야.’라는 굳은 다짐을 하며 아정이를 정성껏 돌봤다.
그런데 2년, 3년 지나다보니 아정이는 확실히 또래와 다른 점을 보였다. 글을 읽기는커녕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옹알이만 하곤 했다. 그래도 엄마, 아빠, 그리고 나는 아정이를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
하지만 나는 점점 그런 바보같은 아정이에게 질렸고 그렇게 6년이 지난 지금까지 동생이란 존재를 잊어버리고 살았다. 잊어버렸다기보다 그런 비정상적인 동생이 싫었고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한 내 동생을 숨기곤 했다.
어제도 놀러온 친구들에게 그렇게 아정이를 숨겼는데 오늘도 놀러온다고 하니 걱정부터 든다.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1시간째 멍하니 누워 있는 아정이에게 갔다. “아정아! 아정아!”
그제서야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정아 언니 말 들리지?”
아정이는 말을 듣고 이해하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천천히 말을 끊어서 해야 한다.
“조금 있다가 언니 친구들이 올거야.”
“언니.. 친구. 들?”
“그래, 언니 친구들. 언니 친구들이 오면 엄마 방에 들어가서 조용히 있어야 해. 울거나 소리 내면 안돼. 알았지??”
“엄마. 바앙.. 으응.”
난 마음을 놓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그렇게 1시간 쯤 지났을까. 깜빡 졸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초인종을 눌러댔다.
“아경아, 우리 왔어~”
서둘러 동생을 안방으로 밀어 넣고 나오지 말라는 다짐을 다시 한번 받은 후에야 안심하고 친구들을 맞을 수 있었다.
“아, 빨리 왔네. 어서 와.”
친구들은 들어오자 마자 밖에서 놀자고 했다. 오늘의 원래 계획인 듯 했다.
“아경아, 우리 오늘은 나가서 놀자.”
“그래 나가서 놀자. 집에만 있으면 좀 답답하잖아.”
당황스러웠다. 아정이를 혼자 두면 안될텐데..
“... 나가서?”
“왜? 너 오늘도 못 나가? 집에 있어야 해?”
“너는 밖에선 안 놀더라. 우리 오늘은 바깥공기 좀 마시면서 놀자, 얘.”
보통때처럼 아무래도 못나가겠다고 미안하다고 하려다 마음이 바뀌었다.
친구들과 노는 것에 매번 빠지기는 싫다. 아정이는 어떻게든 되겠지.
“아냐, 괜찮아. 나가서 놀자. 오늘 시간도 많은데 뭐. 금방 준비하고 나갈 테니까 천천히 가고 있어.”
“그래, 빨리 와~”
친구들이 나가고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따라올까 싶어 조용히 나가려는데 아정이가 방에서 나왔다.
“언니.. 나가? 바깥? 나아도.. 같이..”
곤란했다. 같이 나갈 수는 없는데, 어쩌지?
“저기.. 아정아. 언니는 지금 친구들하고 가야 해. 너 나가면 감기 들고.. 그리고....”
또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친구들이 밖에서 기다릴 텐데..
“언니.. 나 언니드을.. 볼래애.”
사람을 좋아하는 아정이는 내게 졸랐다.
아정이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혼자 두는게 찝찝해서 고민 끝에 할 수 없이 같이 나가기로 했다.
“휴, 그래. 같이 가자. 대신에 빨리 준비해야 해.”
아정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헤헤. 응.”
아정이 옷을 다 입히고 혹시나 추울까 잠바를 껴입히고 있는데 밖에서 친구들의 소리가 들렸다.
“아경아! 너무 오래 걸리길래 다시 와봤어. 아직 멀었어?”
“우리 들어가도 돼?”
다급해진 나는 친구들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외치며 아정이를 재촉했다.
6살이나 됐는데 이렇게 느린 아정이가 답답했다.
“아정아! 좀 빨리 와. 안 갈꺼야?”
아정이가 내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나는 아정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친구들이 저기 보였다.
그새 또 저기까지 갔나 하면서 아정이를 끌다시피 하며 걸었다. 걸으면서 아정이에게
“아정아. 언니 친구들이니까 네가 대답하거나 할 필요 없어. 그냥 아무 말 말고 조용히 해.”
라는 조금 억지스러운 말을 했다.
아정이가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내 동생이 정신장애아 라는 것을 친구들에게
알리기는 정말 싫었다.
느릿느릿 걷는 아정이를 끌고 겨우 친구들이 있는 곳까지 갔다. 기다리던 친구들은 동생이 없다던 내가 데려온 아정이를 보고 한 마디씩 했다.
“어? 얘는 누구야?”
“너 동생 없다며. 아까 집에서도 못 본 것 같은데.”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다른 친구가 말했다.
“에이. 사촌동생이겠지, 옆집에 친한 애거나. 그렇지? 아경아!”
당황스럽다. 내게 동생이 있다는 것까지 속일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 와서 내 친동생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내겐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아정이보단 내 친구들이 내가 동생이 없다고
친구를 속인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하는 게 더 중요했다.
“으응. 그럼. 내 사촌동생이야. 동생 없다고 했잖아. 잠깐 놀러왔는데 같이 나가자고 조르는 바람에.”
“아아.”
“그렇구나. 난 또 누구라구.”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얘는 암말도 안해??”
“몇살이야?”
“이름은? ..어우, 왜 이렇게 껴입었어? 얼굴 좀 보자.”
친구들이 아정이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아정이는 그 말뜻을 생각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
“아, 낯을 좀 가려서 그래. 6살이고 이름은 김아.. 아니 김지민 이야.”
“아, 그래?”
친구들은 ‘지민이’를 한참 살피더니 움직이지도 않고 뭔가 말하려는 듯 입만 뻥긋거리다 마는 걸 계속 보고 있는게 시간낭비라 생각했던지 놀이터로 가자고 했다.
“그래, 놀이터나 가자. 아정, 아니 지민아, 가자.”
아정이를 끌며 놀이터로 걸었다. 갑자기 아정이가 멈췄다. 난 아정이 손을 잡아끌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왜 그래?”
“그, 글쎄, 갑자기 왜 그래. 지민아, 빨리 가자.”
난 더 세게 아정이 손을 끌었지만 아정이는 더욱 꿋꿋히 버텼다
할수 없이 친구들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하고 아정이에게 화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손을 잡아끌었다.
더 움직이질 않는다. 화가 났다.
“김아정! 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 너 아주 언니랑 친구들을 갈라놓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정말 미워죽겠어! 차라리..”
‘태어나지 말지 그랬어?’ 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정이가 울먹거리가 아차 싶었지만 난 분을 식히지 못하고 아정이 손을 놓고 뛰었다. 횡단보도가 보였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에 아정이가 쫓아올까 싶어서 차를 대충 살피며 뛰었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고 조금 걷다가 아무래도 마음이 좋지 않아 뒤를 돌아봤다. 저기 아정이가 힘들게 뛰어오는 게 보였다. 더 이상 모른체 하고 갈 수 없었다. 아정이 좀 앞에 빨간불이 켜져 있는 횡단보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정이가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에 내가 빨리 가서 막아야겠다.’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뛰어가는데 아정이가 나를 보고 더 빨리 뛰었다. 아정이가 저렇게 빨랐나 싶을 만큼 아정이는 힘들어보였지만 빨랐다. 아정이는 횡단보도에 다다랐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뛰어왔다. 저기서 차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아정이는 여전히 헉헉거리며 나를 향해 뛰고 있었다. 차가 아정이 바로 앞으로 온 순간, 나는 소리를 지르며 눈을 감고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눈물이 났다. 아정이가 태어났을때부터 지금까지 일들이 빠르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끼-익 하곤 급히 밟은 듯한 브레이크 소리가 났다. 난 눈물범벅이 되어 눈을 떴다.
아정이는 놀라 넘어져 있고 바로 앞에 큰 차가 하나 서 있었다. 난 다행이란 생각에 울며 아정이에게 뛰어갔다. 그 순간 새삼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잊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래, 누가 뭐래도 아정인 내 동생이야. 아정이가 정신지체아건 뭐건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일년 전에도, 어제도, 오늘 이 순간까지도 아정이는 내 하나뿐인 동생이야.’
나는 뛰어가서 엉엉 울며 아정이를 안았다. 무사해 준 아정이가 고맙기만 했다.
난 친구들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러 놀이터로 갔다. 마음이 편했고 이제껏 가슴에
뭉쳐 있던 큰 뭔가가 없어진 것 같았다. 내게 안겨 그 새 피곤했는지 잠들어 있는 아정이가 예쁘기만
했다.
6.휴게소
정희경
포항중앙여자고등학교 3학년
“다녀왔습니다.”
“누고?”
“딸.”
일주일 만에 가는 집. 어딘지 모르게 텅 빈 집.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씩 집에 간다. 불과 한 달 전 만해도 내가 우렁차게 인사하며 집으로 뛰어 들어가면 세상 누구보다 상냥한 목소리로 엄마가 날 반겨 주셨다. 하지만 지금은 텅 빈 집에 아빠 혼자서 부스스 날 반기신다. 그렇다 보니 인사가 짧아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아빠는 얼마 전 그렇게 아끼시던 배를 팔기 위해 내 놓으셨다. 아빠의 욕심으로 너무 큰 배를 만든 탓에 기름 값이며, 배 유지비가 들어오는 돈 보다 더 많이 들어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엄마는 얼마 전부터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휴게소에서 일 하신다.
‘휴게소’, 여행의 설레는 마음과 재미를 두 배로 해 주는 곳, 누구나가 다 쉬어갈 수 있는 곳, 하지만 우리 엄마는 쉴 수 없는 곳에서 말이다. 엄마는 주말 자습까지 다 하고 집에 가는 나보다 훨씬 더 늦게 퇴근 하신다. 나와 아버지가 한창 텔레비전에 넋 놓고 있을 때 쯤 너털걸음을 걸으시며 피곤한 모습으로 집에 오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엄마의 피곤은 무시한 채 한껏 짜증을 늘어놓는다.
“우리 집은 고3 딸 둔 집이 아니라니까! 내가 꼭 밥 하고, 설거지 하고, 해야겠나? 일주일 동안 학교에 있기도 힘든데.”
나는 철없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엄마의 피곤을 두 배로 늘려놓는다.
솔직히 나는 엄마가 휴게소에서 일 하는 게 못마땅했다. 그 어느 때보다 엄마의 따뜻한 사랑과 정성이 필요한 시기였던 나는 엄마가 집을 비우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집에 가면, 혼자서 내가 갈 때까지도 밥을 안 드시고 계시는 아빠를 보면서 엄마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와 엄마는 여태껏 한 번도 떨어져 지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엄마는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아홉 살이나 많은 아빠에게 시집와서 줄곧 아빠의 일을 도우셨다. 심지어는 아빠와 함께 배를 타기까지 하셨다. 보통 배는 여자가 타기엔 너무 힘들기 때문에 여자는 집에서 집안일이나 다른 보조 일을 도와서 하는데, 우리 엄마는 모든 집안일을 혼자서 하셨고, 배가 큰 탓에 아빠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어 배를 타는 일까지 하셨다. 그랬던 엄마가 없으니 아빠가 혼자서 밥을 못 챙겨 드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을 마치고 피곤이 머리끝까지 차서 돌아오시는 엄마에게 항상 짜증을 내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내 방으로 들어오셨다.
“경아, 엄마가 휴게소에서 일 하는 게 싫나? 창피하고 글라?”
“내가 어린애가! 그런 거 가지고 창피해하게.”
나는 곱게 말해도 될 것을 공연히 톡 쏘아붙이며 말했다.
“엄마가 니 고3인데 전보다 더 못 챙겨 주고 해서 항상 미안하다. 그래도 우야겠노? 우리 빚도 갚아야 되고, 내년에 니 대학 들어가고, 오빠야 제대 하면 복학도 할껀데, 이제 엄마도 벌어야지. 니가 좀 이해…….”
“나도 안다! 안다고!”
나는 특유의 경상도 억양으로 내 지르고는 집에서 뛰쳐나왔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하지만 눈물이 흐르지 못하게 내 마음을 다잡았다.
‘치, 누가 그런 말이 듣고 싶다나. 내가 그런 걸 모르나. 우리 집 힘든 거 안다. 그게 더 화가 나는 거다.’
나는 속으로 엄마를 한없이 원망했다. 솔직히 엄마가 힘든 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엄마가 일을 안 하면 당장 우리 집이 힘든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이 가시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아무도 없는 방에 아빠 혼자서 있는 모습이 너무 쓸쓸해 보였고, 엄마의 정성으로 가득 차길 원했던 내 마음도 너무나 공허했다.
오빠가 휴가를 나온 날, 나는 처음으로 엄마의 일터에 가 보았다. 휴게소는 많이 북적거렸다. 수학여행 온 듯한 남학생들이 떼 지어 버스에서 내리더니 휴게소로 들어가 이것저것 음식들을 사먹고 있었다. 나와 오빠는 엄마를 찾아 그 학생들을 비집고 들어갔다. 식당 같은 곳에 가 보니 엄마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바빠 보여 선뜻 엄마를 부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와 오빠는 손님들이 없어질 때 쯤 엄마에게 가기로 하고 휴게소 한 구석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데 눈에 띄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또래에 비해 키가 많이 작았고, 몸도 비쩍 말라 있었다. 그리고 치렁치렁 꾸민 다른 아이들 틈에서 그 아이의 차림새는 너무 초라해 보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계속 그 아이를 지켜보았다.
그 아이는 친구들과 같이 휴게소 안으로 들어오는 듯 하더니 친구들이 다 같이 돈가스를 시켜 먹자 혼자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잠시 후 다시 안으로 들어와 친구들이 먹고 있는 걸 옆에서 지켜만 보다 이내 또 다시 나갔다. 그 아이는 계속 그렇게 반복하고 있었다.
“돈이 없나보다. 혼자서 안 먹으면 나중에 배고플 텐데.”
“그러게. 우리가 뭐라도 사줄까?”
놀랍게도 오빠는 나와 같은 아이를 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는데 오빠가 대답을 한 것이다. 오빠와 나는 가지고 있는 돈이 별로 없어 매점 코너로 가 빵과 우유를 샀다. 그리고는 빨리 뭐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에 급하게 그 아이를 찾았다. 그런데 아이는 아까 그 자리에 없었다. 또 혼자서 밖에 나가있나 싶어 밖을 찾아봐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그 아이를 찾다가 우리는 체념한 듯 다시 휴게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휴게소 한쪽 구석 테이블에 그 아이가 허겁지겁 돈가스를 먹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혹시라도 아이가 체할까 물 한 잔을 들고 애틋한 눈빛으로 아이를 쳐다보고 있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엄마였다. 오빠와 나는 엄마와 아이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엄마!”
“어, 느그 왔나? 여기 까지 와 왔노?”
엄마는 갑자기 나타난 우리 때문인지 조금 놀란 듯 했지만 금세 활짝 웃으시며 우리를 반겼다. 그러면서도 그 아이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계셨다.
“천천히 먹어라. 물도 마시고. 알았제?”
그 아이는 아직도 먹는 데에만 열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아이가 먹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아이는 돈가스를 다 먹은 뒤 수줍은 듯 ‘감사합니다.’ 하며 꾸벅 인사를 했다. 우리는 아까 샀던 빵과 우유를 쥐어 주면서 잘 가라고 인사했다. 그리고 동생 같아서, 너무 착해 보여서 주는 거라며 덧붙였다.
“엄마, 저 애 누군지 아나?”
“모른다. 아가 계속 혼자 나갔다, 들어왔다 하 길래 보다 못해가 하나 사 먹였다아이가.”
하며 엄마는 빙긋이 웃으셨다. 그리고 뒤 돌아 뛰어가는 그 아이를 보며 오빠가 말했다.
“요즘도 저래 못 먹는 애들이 있네. 나는 우리가 제일 못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
“다 글타. 다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줄 안다. 근데 쪼매만 둘러보면 내보다 힘든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줄 아나? 내가 얘기 해 보니까, 저 아는 부모님이 안 계신단다. 지 동생하고 둘이 사는데, 얼마나 힘들겠노? 한창 꾸미고, 뛰어 놀고 할 나인데 지 동생 뒷바라지만 하고 있으니...너희들 저 나이 때 생각해봐라. 저만큼 힘들었나? 다들 서로서로 도와가면서 그래그래 사는 거다.”
엄마는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셨다. 순간 그 동안 내 앞에 닥친 모든 일을 힘들게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화풀이를 했던 것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서 항상 날 지켜주는 엄마, 아빠, 오빠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요즘 나는 주말 마다 교회에서 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 날 휴게소에 만난 그 아이를 더 많이 못 도와 준 것이 너무 미안해 시작한 일이다. 봉사활동은 주로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 목욕을 시켜주거나, 밥을 먹여주는 것을 하는데 아이들 모두 나를 너무 잘 따른다. 마치 자신의 친 언니, 누나를 따르듯이 나를 좋아해줘서 더욱 마음이 아프다. 봉사활동이 끝나고 집으로 갈 시간이 되면 내 품에서 떨어지기 싫어 우는 아이까지 있다. 나는 이런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고, 내가 이 아이들의 잃어버린 가족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도록 최대한으로 노력한다. 그 날 휴게소에서 내가 느낀 마음을 이 아이들도 느낄 수 있도록.
‘휴게소’ 여행의 설레는 마음과 재미를 두 배로 해 주는 곳, 누구나가 다 쉬어갈 수 있는 곳, 이름 모를 그 아이도 쉬어간 곳. 우리 엄마가 있어 텅 비었던 내 마음도 쉬어갈 수 있게, 가득 찰 수 있게 하는 곳. 그 곳에서 나는 그동안 잊었던, 그래서 부족하다 느꼈던 엄마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겼다.
7.12살에 만난 아빠
김서현
(문산초등학교 6학년)
엄마와 저는 너무나 아픈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 아픈 시련은 제가 3살 때 시작되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결혼하고 내가 3살이 되던 해 아빠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아빠의 얼굴도 모릅니다. 그나마 아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기억은 결혼사진 뿐이였습니다. 지금은 그 기억조차 희미합니다.
아빠와 엄마는 쌍둥이 빌딩에서 같이 일을 하시다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낳은 아이가 바로 저입니다. 그런데 아빠는 저의 재롱도 채 못 보시고 스트레스로 인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늘 아빠에 대한 그리움과 보고픔으로 엄마 몰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엄마는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투정만 부렸습니다.
하지만 남몰래 흘리는 엄마의 눈물도 자주 보았습니다. 강하게 보이려고 일부러 씩씩하게 행동하는 엄마가 더욱 외로워 보였습니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아픔과 외로움의 전쟁을 치르며 살았습니다.
그런 엄마에게 아니 우리에게 행복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12살이 되던 해 오직 엄마만을 바라보던 지금의 아빠의 청혼을 엄마는 오랜 고민 끝에(그 고민은 바로 나) 받아들였습니다.
친구들은 ‘너는 김서현인데 아빠가 윤승현 이라서 슬프겠다’ 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씩씩하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친아빠는 돌아가셨어. 그리고 지금 아빠는 행복을 가져다 주신 소중한 분이야.”라고 말해 줍니다.
아빠, 아빠 너무도 부르고 싶었던 이름입니다. 12살이 되어서야 아빠라는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엄마의 결혼식장에서 엄마가 가르치는 제자들이 엄마를 위해 불러준 노래입니다. 정말 엄마는 이제야 그 노래처럼 사랑받으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씩씩하던 엄마는 그날은 울보쟁이 같았습니다. 아마도 기쁨의 눈물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날 나는 조용히 눈물을 닦았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빠를 푸른 하늘로 보내드리며 12살에 만난 아빠를 진심으로 따르고 사랑하며 살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말입니다.
며칠 전 아빠와 나는 마라톤 경기에 참가하였습니다. 힘들어하던 나를 끝까지 격려하며 주어진 코스를 완주하며 우리 가족도 끝까지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얼마 전에는 내 동생이 태어났습니다. 귀여운 남동생입니다. 제 동생의 탄생은 우리 가족의 새로운 출발이 될 것이며 새로운 희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새로운 희망으로 살아가며 서로를 격려하게 될 것입니다.
12살에 만난 나의 아빠께 그동안 가슴에 묻어두고 하지 못했던 “나의 아빠가 되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이 가을이 가기전에 용기내어 하려 합니다.
8.사라진 엄마의 답장
최창우
(장성초등학교 3학년)
“창우야~ 우리 엄마한테 편지 왔다. 너도 왔어? ”
수미가 신나는 목소리로 나에게 와서 자랑했다.
“그래? 그럼 우리 반도 예사님이 나누어 주시겠다. 빨리 가봐야지 수미야 이따가 보자”
그렇게 대답하고 나는 우리 장군방으로 뛰어갔다.
“선생님 부모님한테 답장이 왔어요? 빨리 나누어 주세요 네~”
나는 우리 반 예사님께 졸랐다.
“자 모두들 방에 앉거라 부모님께서 써주신 답장을 나누어 줄거다 ”하시면서 우리를 자리에 앉히셨다.
“남도엽” “네”, “김수철” “네”, “이종규” “네”, “김우식” “네”, “이가을” “네” “정동욱” “네” “야호 나도왔다“
아이들은 편지를 들고 방에 앉아서 큰 소리로 읽고 누워서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나와 현철이는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다.
나는 “선생님 제거는 왜 안 주세요 ”하고 여쭈어 보았다.
“글쎄 엄마께서 답장을 안 보내주셨나? 없네 ” 그러시고 방을 나가셨다.
현철이는 울고 있었다. “야 너는 왜 안 물어보지도 않고 울기만 해 ”내가 말하자
현철이는 “엄마가 바빠서 안 쓰셨을 거야” 했다.
“아니야 우리 엄마는 아무리 바쁘셔도 나한테 답장은 꼭 쓰실거야” 하고 나는 예사님을 찾으러 갔다.
“예사님 제 편지 왔나 다시 봐 주세요 네?”
“감자 찐거 먹고 ” 그러시곤 감자만 그릇에 담으셨다.
아이 참 예사님은 나는 빨리 엄마 아빠 편지가 읽고 싶은데 감자만 챙기시다니
배도 고프지 않고 아빠 엄마 얼굴도 며칠동안 못보았는데 왜 감자만 담으실까
우리 엄만 내가 해달라는 것부터 해주시고 일을 하셨는데 예사님은 그렇지가 않다.
나같으면 편지부터 찾아보고 감자를 챙길 텐데 예사님은 엄마 아빠가 보고 싶지 않나보다. 우리 엄마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엄청 좋아하는데 ...
나는 감자를 접시에 받아 놓았지만 먹고 싶지 않았다. 내 머리 속에선 계속 편지 생각만 했다. 왜 엄마가 답장을 안 써주셨을까? 분명 써주셨을 텐데 말이다.
예사님이 내가 어떡하나 보시려고 말 잘 들으라고 장난치시나 그랬다.
감자를 보니 우리 가족이 주말 농장에서 캐온 것이 생각났다. 아이 또 가족이 보고 싶네.
뚱뚱한 아빠 감자 동그랗고 예쁜 엄마감자 달걀같은 누나감자 조금 못생겼지만 귀여운 내감자 그때 감자 캘 때도 잘못해서 감자를 찍어 다치게 한일도 생갔났고 아빠, 엄마 누나 얼굴이 계속해서 감자위로 보였다.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청학동은 산속에 있고 자동차도 없어서 나 혼자는 집에 도저히 갈수가 없다.
경찰 아저씨에게 전화해서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할까? 엄마에게 전화해서 데릴러 오라고 할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면 아빠 엄마가 속상하실 것 같았다.
“예절학교에 가서 우리창우 더 의젓하고 멋져서 오겠네“ 하신 엄마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빠 엄마는 창우를 우주만큼 사랑하는 거 알지? ” 그런말씀도 하셨는데 답장을 안 써주시다니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전화 했을때 엄마도 내가 우주만큼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건 분명히 마술사가 시험하는 거야 내가 헤리포터면 마법을 부려 새가되서 얼른 집에 가서 아빠 엄마 얼굴만 보고 올텐데 그러면 편지가 없어져도 괜찮은데.
예사님은 내머리 속에는 그것이 다 저장되어 있는데 예사님은 그것도 모르시나보다.
그래서 나는 찐 감자를 도엽이 주고 예사님께 엄마 편지 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예사님은 없다고 주지도 않으시고 다른 일만 또 하셨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컴퓨터에 가서 내가 직접 확인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으니 울음이 나왔다. 아빠 엄마가 진짜로 답장을 안하시진 안았을 건데 확인 할 수도 없으니 나도 모르게 심장이 쾅쾅 뛰고 머리까지 아팠다. 엉엉 울음이 나왔다. 그런데 예사님은 운다고 나만 혼내셨다. 나는 수미 엄마께서 써주신 편지를 같이 읽고 엄마 만날 날을 기다렸다.
한문 시험을 100점 못맞으면 집에 못간다고 예사님이 하셔서 사자소학을 다 외웠다.
한문에서도 아빠 엄마가 예기가 나오니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집에오는날 난 혹시라도 엄마가 날 찾지 못하실까봐 청학동 올때 입었던 옷을 다시 입었다.
땀냄새 나서 그 옷을 입기는 싫었는데 만약에 엄마 답장처럼 내가 없어진 줄 알고 엄마가 걱정하면 안되니까 말이다. 이정도 땀 냄새는 참을 수가 있었다.
수미가 옆에 앉아서 엄마 보고 싶다고 울어서 내가 달래 주었다. 나는 남자니까 울지 말고 여자를 보호해야 하니까
드디어 세종문화회관이 보였다. 창밖으로 엄마가 오셨나 자꾸 쳐다봤다. 시험 볼때처럼 가슴이 떨리고 설레였다. 아 ~ 엄마가 저기 수미 엄마랑 같이 서 계셨다.
나는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래서 씩씩하게 내려서 “엄마~” 하고 뛰어갔다.
“우리 아들 창우 더 많이 컸네 ”하시며 안아 주셨다. 며칠동안 내가 정말 많이 컸을까?
“엄마 근데 왜 답장 안보냈어?” “어 답장 그날 보냈는데 아빠랑 엄마랑 서로 창우에게 먼져 편지쓴다고 해서 하나에 둘이 같이 써서 보냈는데 ” 엄마가 말씀하셨다.
그럼 그렇지 엄마가 답장을 안보내실리는 분명 없었다. 예사님이 잘 못 한 것이다.
나는 집에 와서 내 컴퓨터로 답장을 확인했다.
내가 쓴 부모님 전상서랑 엄마 답장이랑 두개 다 있었다. 그리고 프린트해서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내겐 소중한 답장이니까 아빠 엄마도 부모님 전상서를 처음 받아보셨다고 기뻐 하셨다. 그것도 효도라고 하셨다.
나는 가끔 식탁에 수저도 놓고 책상정리 방청소도 한다. 침대의 이불도 내가 정리하고
여름방학에 청학동에 갔다와서 아빠 엄마 누나 우리 가족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를 알았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걸 보면 너무 슬프고 어떡게 살았을까 나는 못살 것 같은데 그리고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9.쉽고 어렵고 따질 것 없이 특별해
임하나
(성남중학교 2학년)
9월의 어느날이었다. 왜 하필 그 날이었는지, 늘 후회만 하고 있다. 그 날따라 아무것도 아닌데 다투웠다. 별로 화낼것도 아닌데..., 그냥 화가 났다. 그래서 매일 같이 잤는데, 그 날은 같이 자지 않았다.
그 날 새벽은 평소와는 다른 일이 일어났었다. 매일 새벽6시에 아빠가 회사에 출근 하시고, 나랑 동생은 좀더 자다가, 8시가 되면 같이 학교갈 준비를 했는데.. 그 날은 아직 새벽2시 였는데...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엄마 아빠가 일어나 있었다.
눈을 비비고 일어난 나는 거실 장면을 보고 순간 멍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일어나 있었다.
단 한사람만 빼고.., 일어나지 않은 한 사람은 동생이었다. 아무리 깨워도,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손이 떨리고 다리가 떨리고…. 눈물이 흘렀다. 119를 불렀지만, 오는 시간은 너무나도 길게만 느껴졌다.
‘우리가 한 전화를 장난전화로 착각하고 오지 않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에 계속해 전화를 했다. 장난전화를 많이 한다는 내용을 tv에서 많이 봤기 때문에 걱정이 더더욱 컸다. 정말 우리집에 119 출동이라니.. 정말 생각도 못해본 일이었다.
아빠와 엄마가 동생을 데리고 함께 병원에 갔다.
“하나야, 걱정하지마 괜찮을 꺼야. 집 잘 지키고 있어야 해.”
걱정하지 말라고, 괜찮다고 말하는 엄마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에 내가 울었을 때는 무서워서 였을 지 모르지만, 내가 또 다시 울었을 때는 너무 슬퍼서였다. 엄마가 우는 걸 지금까지 별로 본적이 없어서, 그래서 너무 슬퍼서 울었다.
텅 빈 집에서 11살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단지 기도를 하는 것 뿐.
“제발 동생을 살여주세요. 이제 싸우지도 않고, 잘 지낼게요.”
내 나이 11살. 어려서.. 약해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슬피 울었다.
한 달이 지나도록 준태를 볼 수 없었다. 나는 한 달 동안 고모 댁에 있었다. 난 처음에는 그냥 병원에 가서 수술하고 나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긴 시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죽는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죽는 건 할아버지나 할머니, 연세가 많으신 분들만 하는 건 줄 알았다. 내가 아는 ‘아프다’에 대한 생각은 ‘약을 먹고 수술을 하면 낫는것.’ 이 다였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내 일기는 거의 동생이야기 밖에 없었다.
“왜 안오는걸까.?”
기다림은 그리움을 더욱 크게만 만들었다.
그리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아빠가 동생을 보러가자고 했다.
“아빠! 준태 장난감 갖고 갈까?! 응?"
"장난감은 안돼."
‘준태 많이 심심할 텐데.’라는 생각에 주머니 속에 작은 공 하나를 갖고 갔다.
오랫동안 차를 탔다. 멀미가 심한 나였지만, 동생을 만난다는 기쁨에 멀미도 잊은체 계속해서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아직 멀었어?”
“조금만 가면돼.”
손가락 수 모자를 만큼 물어본 후 마침내 도착했다. 병원은 엄청 컸다. 시간이 지나고 부모님, 그리고 뉴스를 통해 보아 알게 되었지만, 그 병원은 우리나라에서 큰 수술은 대부분 담당하고 있는 병원이었다.
“우와! 우와!”
태어나서 그렇게 큰 병원은 처음이었다. 가 본 병원이라고 해도 집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소아과나 치과가 다였다.
“조용히 해야지. 여긴 장난하러 온 게 아냐.”
‘조용히.’ 하라는 말에 입을 삐죽거리긴 했지만, 너무나도 신기했다.
병원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 처음 보았기 때문에 너무 신기했다.
“엄마!!”
멀리서 보이는 엄마에게 달려 갔다. 통화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본 엄마는 예전과는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나랑 동생이 서로 껴안으려고 다투었던, 정말 너무 포근하던 품이었는데…. 살이 많이 쪘다는 둥 하는 이야기 따위 상관없이 너무 좋아하던 포근한 품이었는데…. 예전과 달리 살이 빠진 듯 보였다. 아니 확실히 빠져 있었다.
“배고프지 밥먹을래?”
“으응!!”
평소 외식을 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 밖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에 대해 좋아했다.
“엄마! 준태는? 준태는 왜 안 보여?”
엄마에 손을 꼭 잡은 채 물어보았다. 엄마의 손만큼은 아직 따뜻했다.
“.....준태는 말야, 아직 너무 아파서 하나는 못봐.”
‘왜?’라면서 묻고 싶었지만, 분위기를 봐서는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나중에 병원에 온 고모나 고모부, 아빠와에 대화로 알게 된 것이지만, 준태는 의식이 없어, 중환자실에 있었다. 그리고 엄마마저도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준비해 온 공으로 같이 놀지 못했다. 그리고 전에 싸웠던 것에 대해 사과도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밖에서 먹는 식사’가 나쁘게 보였다. 엄마가 그동안 혼자 먹는 식사 모습을 생각해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갖고 온 작은공 하나만을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렸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일기에는 계속해 동생 이야기 밖에 없었다. 조원끼리 돌아가면서 쓰는 ‘모둠일기’가 있었는데, 그 ‘모둠일기’는 정말 화나게 만들었다. 아니 너무 슬프게 만들었다.
가끔 조원 중 한명이 ‘누군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식으로 조원에게 바라는 점을 일기에 쓰곤 했는데, ‘하나, 너는 애랑 ○○하지마’ 라든가, ‘이랬으면 좋겠어.’라는 말은 정말 듣기 싫었다. 평소에는 싫기만 하던 엄마 꾸중을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은 엄마 외에 사람에게 듣고 싶지 않았다. 아빠 외에 사람에게 듣고 싶지 않았다.
점점 엄마 아빠가 그리워졌다. 준태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엄마 아빠랑 지내지 못하게 한
장본인같아서 준태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준태가 점점 미워지기 시작했을 때 준태를
만나러 가게 됐다. 그건 4달 정도 지난 후였다.
준태는 누워 있었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었다. 일어나질 않았다. 그때 내가 발견 한건 보통 약이 들어있는 링겔과는 또 다른 것이었는데, 그건 두유랑 비슷한 것이 담아있는 링겔 이었다. 의식이 없는 사람은 밥을 못먹기 때문에 두유 비슷한 걸 주사를 이용해 넣어주는 것이었다.
순간 나라는 바보에 대해 화가 났다.
‘동생은 밥도 못먹는데, 바보같이 질투나 하다니!’
그리고 좀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날은 엄마랑 함께 잘 수 있었다. 엄마랑 자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예전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4살이(만3세) 되던 해에 동생이 생겼다. 3살 차이가 나던 준태랑은 거의 매일 싸웠다.
특히 내가 7살, 준태가 4살이었을때는 절정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은 준태는 매번 뺏으려고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준태에게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을 주곤 했다. 동생을 가졌다면 한번씩 겪는 질투심을 얻게 된 것이다.
“누나니까 동생에게 양보해야 하는거야.”라는 말은 심술로 이어졌다.
그러던 하루는 엄마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준태는 말야. 아직 아는 사람이 엄마 아빠 그리고 하나 밖에 없어. 그래서 준태는 우리 세 사람한테 모든 걸 배우고 있는 거야. 물건이 얼마나 소중하고, 장난감을 갖고 노는 방법을 하나한테 배우고 있는 거야.”
그 말은 나의 심술이나 질투를 가라앉히는 데 충분했다. 유치원 선생님을 정말 멋있게 여겼던 나에게는 더더욱 효과가 컸었다. 그렇게 엄마 품에서 하루를 보냈다.
5학년 여름방학 때 병원에 갔을 때는 준태가 일어나 있었다. 그리고 일반입원실에 있었다.
하지만 말은 아직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살짝 안아주고, 이야기도 해주곤 했었다. 이야기를 해주면 알고 웃는지 그냥 웃는지 모르지만 그 작은 미소가 너무 좋았다. 혼자 앉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준태의 그 작다면 작은 변화에도 우리가족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5학년 1학기가 지나고 한 친구가 전학왔다. 그 친구와는 금방 친하게 지내게 됐다. 근데 그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왜 아무도 없냐고 물어보면, 부모님 모두 일하러 가셨다고 말해주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었지만, 친구가족은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그래서 친구 오빠는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다. 준태와 똑같이 뇌쪽을 다쳤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오빠이야기 하는 걸 꽤나 싫어했었다. 나는 나랑 비슷한 처지의 친구가 생겼다는 것에 대해 너무 기뻤는데, 친구는 자기 오빠가 아프다는 걸 다른 사람이 아는 것도
이야기하는 것도 싫다고 했다. 그래서 자세히 묻지 않았지만 늘 궁금했다. 조금이라도 오빠 상태가 괜찮아지면 친구가 이야기 해줬기 때문에 그때는 같이 기뻐해줬다.
그리고 6학년이 되고서야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 친구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장애인’이라는 몸이 불편한 사람을 보는 사람들에 눈이 매우 차갑다는 걸 친구는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눈길을 받기 싫어서 오빠 이야기 하는 걸 싫어했다는 걸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장애인’을 보는 시선은 매우 차갑고 시리다.
5학년 겨울방학 때는 이모 댁에서 보냈다. 중 2인 언니와 초 1인 여동생, 그리고 3살짜리
남동생이 있었다. 중 2인 언니는 언니라기 보다는 민지라는 초 1의 내 친척 동생의 사촌언니가 맞는 표현이었다. 그 중 2인 언니는 공부하기 위해서 이모댁에 왔다고 했었다. 이모부는 예전에 과외를 할 정도로 학생을 잘 가르쳤다고 한다.
이모댁은 서울에 있어 병원에 가기 편했다. 그래서 2주에 한번정도는 병원에 갔다. 5학년 겨울방학 때는 준태는 더 나아져서 말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금이지만 우릴 기억해주었다. 그건 정말 나에게 있어 감동이었다.
그리고 아주 어릴 때부터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같은 곳에서 살았던 ‘인호’라는 내 동갑 친구와 준태보다 한살 어린 ‘보라’가 준태 병문안을 왔었다. 그때 이런 질문을 했다.
“준태야, 보라 생각나지? 민지도? 응?! 준태는 보라가 좋아? 민지가 좋아?”
그건 준태에게 있어 최고로 곤란한 질문이었다.
아프기 전이나 아픈 그때도 골란해했었다. 그건 아직도 계속되는 삼각관계에 대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5학년 겨울방학 때는 이모에게 준태를 맡기고 집에 가서 엄마와 아빠랑 같이 잔 적이 있었다. 그때 정말 방은 춥고 또 추웠다. 난방을 하긴 했지만 추웠다. 사람의 온기가 별로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또한 난 엄마 품에서 잤다. 질투심 많은 아빠도 그때만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자기도 했다. 그 병원 휴게소는 밤에 의자에서 사람들이 자곤 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또 준태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다.’든가 그런 건 없었다.
6학년 여름방학 때는 준태가 집에 돌아와서 같이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지능이 많이 떨어져 예전같지는 않았다.
준태는 나와 달리 매번 받아쓰기 시험을 보거나, 수학 시험을 보면 100점을 많이 맞아 왔다.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어렸을 때 담임선생님은 일주일에 4번은 꼭 받아쓰기 시험을 했기 때문에 의욕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부족했었다.
아무튼 준태는 공부뿐만 아니라 운동도 잘했다. 달리기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왠지 다시 찾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생겨 기쁘기만 했다. 그러나 그 울타리에서는 어려운 일들이 잔뜩 생겼다.
준태는 걷지 못하기도 했고, 말도 많이 못했기 때문에 화장실에 가질 못해 기저귀를 이용했다. 가끔 엄마가 외출하면 그 기저귀를 가는 담당은 나였는데, 준태는 키도 크고 나랑 몸무게가 맞먹었기 때문에, 정말 힘들었다. 밥을 먹일 때, 그리고 아침 점심 저녁 약 먹이는 일도 힘들었다.
그래도 아마 이게 가족에 사랑이었던것 같다. 점점 준태는 변하기 시작했다. 평소 손을 잡아줘야 걸을 수 있던 준태는 병원에서 운동치료도 있지만, 집에서 하는 걷기연습으로 인해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난 그냥 설마 하는 생각에 손을 안잡아 주고 지켜봤는데, 혼자 걸었다. 그때는 정말 가족 모두가 기뻐서 밤에 잠도 자지 못했다.
자랑은 얼마나 끝없이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말도 많아졌다. 그래서 기저귀를 안 하게 됬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기저귀를 안 해서 기저귀 값을 줄일 수 있게 되었지만, 혼자서 화장실에 가는 건 아직까지 무리였다. 그래서 쉬 통을 만들어서 쉬가 마렵다고 하면 쉬 통을 들고 왔는데, 장난은 아닌 것 같은데 쉬가 마렵다고 하고는 오줌을 싸지 않았다. 거의 쉬통을 갖고 오는 건 나였기 때문에. 정말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다. 정말 동생이 원수같이 느껴질 때는 그때 이후 없었던 것 같다.
근데 그렇게 한 7달 정도 하고 나니까. 준태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화장실에 혼자 가고 싶지 않을까? 얼마나 준태는 속상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준태를 이해하려고 했다. 아니 솔직히 이건 우리가족이 만든 ‘준태이 해하기 방법’이었다.
내가 중1이 되자 준태는 혼자서 화장실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혼자 일어나기는 안 됐다. 그래서 가르쳐 주어야만 했다. 그래서 쇼파를 사게 되었는데, 쇼파에 앉혀 놓으니까 그게 정말 편했다. 그리고 말이 많아진 준태는 아빠께 딸보다 더한 애교를 부려서 용돈을 타기 시작했다. 그때는 꼭 내 것까지 타주곤 했다. 녀석은 늘 그랬다고, 아빠 엄마께서 말씀해 주셨다.
‘이 녀석은 예전에도 가게에 가서 네 것도 고르곤 했지.’
그땐 이말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오줌을 가릴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난 정말 기뻤다. ‘이해’가 아니라 ‘해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1학기를 다 보내고 6학년 2학기가 될 때 준태도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준태는 특급반이라는 곳과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가끔 특급반에 가서 준태를 아는 척도 하고 엄마가 늦게 오는날에는 급식을 먹여주러 내려오곤 했다.
중1이 되고서는 준태를 보러 가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섭섭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중1이 되어 ‘좀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힘을 내곤 했다. 그리고 점점 나아지는 준태를 보면서 나는 왠지 모를 기쁨을 느꼈다.
중2가 된 현재 나는 내 동생에 대해 친구들에게 말을 못한다. 가끔 장애인이라는 말에 대해 쉽게 쉽게 생각하고 말하는 친구들을 보면, 내 동생에 대해서도 쉽게 쉽게 생각하고 말할 것 같아서이다.
겪지 않으면 모르는 걸까? 확실히 이런 건 겪지 못하면 모르는 것 같긴 하다. 나도 초등학교 때 장애인인 동갑인 친구들을 보아도 별생각 없었으니까. 그냥 조금 도와주는 것 뿐, 원래 사람이 다 그런 존재라는 것에 대해 조금 슬프기도 해서 말을 못하고 있다. 내 동생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고 말하는 친구들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고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이것에 대해 얼마나 많이 공감할 수 있을지 이미 겪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 동생이 장애인이라는 걸 아직 기억하는 아이들은 별로 없다. 참 그럴 때는 내 동생이 단순한 존재인가 하는 슬픈 마음 마저 들게 된다. 아무튼 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냥 마냥 슬퍼진다.
준태는 이제는 혼자 일어날 수도 있고 걸을 수도 있다. 이제는 혼자서 tv시청도 한다. 하지만 너무 많이 만화를 보기 때문에 옆에 있는 가족들은 벌써 그 내용에 세뇌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준태는 본 것도 기억못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아마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건 우리 가족의 혜택일 것 같다.
내게 요즘 제일 즐거운 기쁨은 무엇이냐면, 밤10시에나 오는 날 기다리고 있는 준태다. 그래서 이제 오냐고 물어보는 그 얼굴은 너무나도 날 감동시킨다. 그러면서 내차가운 얼굴이며 손을 꼭 껴안아 줄때, 이 세상 모든 걸 얻은 기쁨을 느낀다.
어쩌면 장애인이라는 가족을 얻게 되어서 어렵고 힘들지도 모르지만 쉽고 어렵고 따질 것 없이 이 특별한 동생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어디 있겠는가?
아마 이제는 준태를 중심으로 우리 가족은 돌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야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난 늘 엄마와 아빠를 향해 말한다.
“엄마 그리고 아빠, 제가 세상에서 제일 잊지 못하는 날이 있어요. 그 날이 어느 날이냐면요. 준태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에요. 그 작은 손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난생 처음 본 나보다 어린 생명이었거든요. 그래서 어린나이였는데, 그땔 잊을 수 없나 봐요. 엄마, 아빠…. 나중에 또다시 우리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면, 나쁠지도 모르고 슬플지도 모르지만, 우리 가족 이렇게 다시 만나요. 엄마.. 아빠... 동생을 낳아줘서 감사해요. ”
가족은 어려운 관계도, 쉬운 관계도 아니다. 가족은 따질 것 없이… 그냥 마냥 특별한 것이다.
10.가족이라는 이름
김아람
(고색중학교 2학년)
“으아.. 으아..”
조금만.. 조금만 더 움직여 줘..!! 역시 장애라는 몸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건 무리일까.. 내 명령대로 움직여 주지도 않는 이 저주받은 손과 발. 이런 것들로는 상을 닦는다는 하찮을 일조차 할 수 없다. 마치 오른쪽에 무거운 추를 달아놓은 듯 자꾸만 옆으로 몸이 기울어진다. 몸을 고정하려 애쓰지만 이미 이것들은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으으으아.. 아.. ” ‘쨍그랑’하는 차가운 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 퍼진다. 바닥에는 날카로운 유리들이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다. 그래,. 이 빌어먹을 손이 또 사고를 쳐버린 것이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내가 한게 아니라 이것이 그런 거야.. 난.. 내 잘못이 아닌데.. 단지 이것이 내 몸에 달려있다는 이유로...
어쨌든 어떻게든 엄마가 오시기 전에 치워야 해.. 하지만 어떻게 치워야 하지? 고개를 내릴 수도 몸을 쭈그릴 수도 없다. 내 말을 듣지 않는 이것들로는 그저 전동휠체어로 앞뒤를 왔다갔다 거리며 깨진 접시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다. ‘철컹철컹’/ 문열리 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흐른 걸까 열리는 문틈을 지나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재빨리 휠체어로 깨진 접시를 가렸것만, 엄마의 눈은 피할 수 없었다. “ 성진이 접시 깼구나, 위험하니까 비켜있어 엄마가 치울게” 혼내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해온 엄마의 얼굴에는 피곤의 기색이 열렬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따뜻하게 반겨줄 수 없고 힘내시라고 안마조차 할 수가 없다. 난 엄마를 더 피곤하시게 할 뿐이다. “어..어..아..제..제에..” 마음 속으로는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것만, 같이 접시를 치워드리고 싶것만 지금의 나는 입 옆으로 침을 흘리며 죄송하다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 “ 다녀왔습니다.”
또 한번의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이제 고1의 동생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마루로 들어선 성인 이는 깨진 접시를 발견하더니 바로 엄마 옆에 다가가 같이 접시를 치우며 말했다.“ 엄마 여긴 제가 치울 테니까 들어가서 쉬세요”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부탁좀 할게 성인아” 엄마는 안방으로 돌아가시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불이 껴졌다. 성인 이는 마지막 조각을 치우고서 피곤한지 일어서서 쭉 기지개를 폈다. 그리곤 나의 휠체어를 밀어주며 말했다. “ 자, 늦었는데 우리도 그만 자자 형” 방에 들어가나를 이불에 눕혀주고는 성인 이는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그런 성인 이를 멀뚱멀뚱 바라보며 내 이 몸뚱이들이 정상적이라면. 하는 상상을 하다가 곧 잠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도 아니고, 따뜻한 햇빛도 아닌 이 둘 사이의 어중간한 빛이 창문 틈으로 들어올 때, 나는 깊은 잠속에서 벗어나 미세한 정신이 들었다. 옆에서 동생이 숨을 씩씩대며 자는 소리도 들렸고, 창밖에서 고요히 차가 지나다니는 소리도 들렸다. 언제나 이 시간쯤에는 미세한 정신으로 많은 소리들을 듣는다. 이제 곧 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들겠거니 하는데 다시 새로운 소리가 들린다. ‘뚜벅뚜벅‘/ 사람의 발소리. 혹이나 잠이 깰라 조심조심 시끄럽지 않도록 소리를 죽이는 발걸음. 이 발소리의 주인은 분명히 엄마일 것이다. 끼이익- 문열리 는 소리가 들린다. 방에 들어오신 걸까.? 얼굴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진다. 푸근하고 부드러운 손길. 이런 부드러운 손길은 엄마밖에 가지지 않았다. 역시 방에 들어선 건 엄마였다.
“ 어떡하면 좋을까..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옳은 걸까..?”
엄마가 중얼거리시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말이 없으시더니 이번엔 깊은 한숨을 내쉬신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 건가?
“ 여보 난 어떻게 해야해요?.. 도와줘요.. 여보.. 여보 대답해줘요.. 여..ㅂ .”
엄마의 목이 점점 메여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을 아직채 끝내시기 전에 엄마의 흐느끼시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잠시동안 우리가 깨지 않게 숨죽이며 흐느끼시더니 이내, 방밖으로 나가셨다. 나가신 후에도 문 너머에 조그마한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마음이 아프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싫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젠 내가 이 집의 가장인데 난 힘들어하시는 엄마를 위해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 난 장애인이니까.. 빌어먹을 몸뚱이를 가졌으니까 저주받은 손과 발을 가졌으니까..! 늘 짐만될 수밖에 없는 내가 정말 싫다. 순간 볼 위에 다스한 물이 흘러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난 상당히 슬프게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동생은 학교로 가고, 엄마는 일하러 나가 나 혼자 있는 시간.. 이번엔 내가 공책과 연필을 들었다. 저번에는 접시를 깨고 일을 더 벌여놨으니 이제 부엌은 포기다. 그래서 이번엔 글씨 쓰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글씨 쓰는 일은 일을 더 벌여놓지도 않고 금방 치울 수 있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은 편지로 써서 보내드리면 되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당장 어젯밤 곱게 깎아 놓은 연필을 쥐었다.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연필을 쥐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큰 관문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손에 연필을 쥐었다. 이제 글씨를 쓰는 일만 남았다. 나는 큰 꿈에 부풀어올랐다. ‘글을 쓰게 되면 먼저 엄마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 후로도 계속 글을 써나가면서 책을 내는 거야 그 책이 유명해지면 나도 엄마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 연필하나에 나의 모든 희망을 걸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조금 진정시킨 뒤 글을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사실, 말이 써 내려가는 것이지 한 문장, 아니 몇 단어 쓰는 걸로 난 이 빌어먹을 손과 몇 십 분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마치 넌 내주인 이 아니라는 듯 자꾸만 나를 부정하는 탓에 내 글씨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장작 30분을 투자하여 쓴 글은 ‘안녕하세요’ 몇 십 분을 고생하여 쓴 것이건만 나조차도 알아보기 힘든 글씨였다. 갑자기 내 가슴속에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라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공책과 연필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19살이 되어서도 아직까지 글씨하나 제대로 못쓰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 감정이 조금 사그러들자, 나는 다시 한번 써볼까 하는 마음에 다시 연필을 쥐었다. 하지만 아까 내동댕이 쳐버린 탓에 나의 연필심은 반으로 뚝 부러져 있었다. 내가 글을 쓰는 건 역시 무리였나 생각하며 다시 손에서 연필을 놓았다. 그리곤 공책과 연필은 아무도 못 보는 곳에 꼭꼭 숨겨 놓았다.
어느 일요일, 학교를 쉬는 성인이가 오랜만에 밀린 집안일 을 시작했다. 모처럼의 쉬는 날인데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성인 이에게 미안했다. 이런 일을 내가 해줘야 하는데.. 학생으로서 가장으로서, 동생이나 마찬가지인 나를 돌보는 형으로서,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들을 지금 어린 성인 이가 모두 짊어지고 있다. 나 때문에 동생까지 힘들어야 하는 거다.
방청소 를 끝낸 성인 이가 내옆으로 다가왔다. 내가 기운이 없어 보였는지 나에게 말을 건넸다. “ 이야~ 날씨가 꽤 쌀쌀해 졌어, 그치 형?”
“으..으..응..”
“하아~ 큰일났네 오늘 엄마가 옷을 얇게 입고 나가신 거 같았는데 ”
아무 말도 없는 나를 힐끗 보더니 뭔가 생각난 듯 나에게 소리쳤다.
“ 아, 형! 우리 엄마 마중 나갈까?”
“ 마..아..주...?”
성인 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오늘은 주말이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엄마가 오실 꺼야 그러니까 우리 밖에서 엄마 기다리자! 알았지 형? ”
“으.. 어...” 대답하기에 조금 망설여졌다. 무론, 엄마를 마중 나가고 싶긴 하지만 괜히 성인 이가 나 때문에 불편하지 않을지.. 성인 이는 내 얼굴을 힐끗 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내 휠체어를 잡아끌었다.
“에이~ 뭘 빼고 그러시나 그렇지 말고 나랑 같이 나가는 거다 알았지?”
바보같이.. 아직 할 일도 많으면서 괜히 나 같은 것 기운이나 북돋아 주려고 애쓰는 성인 이를 보면 계속 미안하고 또 미안하고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아직 겨울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바람이 꽤나 쌀쌀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두 목을 거북이처럼 움츠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성인 이와 나도 엄마가 오시는 골목에 서서 엄마가 오시기를 기다렸다. 내 무릎 위에는 엄마의 두툼한 외투가 올려져 있었다. 엄마가 많이 추우시겠다. 빨리 이 외투를 입혀드리고 싶은데…. 성인 이는 추운지 코끝이 빨개져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 으~ 추워라 아, 형! 나 붕어빵 한 봉지만 사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
성인이의 모습이 골목을 지나 모습이 완전히 보이 않게 되자 나 혼자 밖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됐다. 이런 적은 처음인터라 가슴이 두근거리긴 했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날 보고 수군거리는 것 같이 모기 더욱 움츠러들었다. 엄마의 외투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갈 무렵 높은 계단 밑으로 엄마의 모습이 조그마하게 보였다. 그런데.. 엄마의 모습 옆에 한남자의 모습도 같이 있었다. 엄마가 오르는 계단의 양이 점점 줄기 시작하자 난 재빨리 내 모습을 숨겼다. 그리고 점점 엄마와 그 남자의 말소리가 커져갔다.
“ 인혜씨 이제 대답을 해주시죠 ”
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 도대체 뭘 대답해 달라는 거지?
“.. 저.. 그럼.. 성진 이는 ”
순간 내 이름이 나오자 흠칫 하고 몸이 움찔거렸다. 도대체 무슨일이길레 내 이름까지 나오는 걸지.?
“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장애인이다 보니까 성진 이는 좀.. 하지만 성인이라면 괜찮아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씩씩하고요! 그냥 이렇게 성인 이와 인혜씨 그리고 저와 셋이서.. 이렇게 셋이서 가족이 되는 건 안되나요? ”
.. 셋이서 가족.. 그래. 나는 장애인이니까 방해만 되니까…. 나는.. 나는..!!..
전동휠체어 방향을 바꾸어 앞으로 달려나갔다. 나는 더 이상 가족이 아니야.. 그저 엄마의 행복을 없애버리는 한낱 방해물 일뿐. 나만 없으면 엄마하고 성인 이는 그 아저씨와 함께 셋이서 행복하게.. 행복하게..!!.. “ 으.. 으아 ..! ” 돌부리에 걸렸는지 휠체어가 앞으로 뒤엎어져 버렸다. 다행이 삶이 없는 인적한 곳이었다. “으.. 으으어.. ” 눈물이 났다 흐르고 또 흘러도 아직도 흐를 물이 남았는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난 엄마한테 방해만 되는 거였어.. 난 우리 가족한테 불행만 남길 뿐이었어 “으..으아..아..!" 이미 얼굴은 엉망진창 이 되어 있을 거다. 숨이 고르지가 않아 벌려진 입사이로 자꾸만 침이 떨어지고 눈물인지 콧물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내 얼굴에도 내 마음에도 소나기가 내렸다.
“ 형.. 형!!"
성인이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성인이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형 여기서 뭐하는.. 형..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내 얼굴을 본 성인 이는 나에게 소리쳤다. “으..으윽.으어... ” 내 얼굴을 계속 보던 성인 이는 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형 .. 무슨일 있었어.?” 천천히 물어보는 성인이의 질문에 나는 숨을 고르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나..아.. 어..어마라.. 너..하아에.. 방..바..해만..도...o.. 나.. 나....아..”
성인 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내 말을 들어 주었다. 덕분에 난 계속해서 말할 수 있었다. “나..어..어으며.. 새..아바..랑... 해..해보..하..게.. ” 이 말을 하고 나니 겨우 진정되었던 울음이 다시 폭발했다. 나만 쓸모 없는 존재라 는걸 다시 한번 알아버렸다.
성인 이는 갑자기 일어서더니 넘어져 있는 휠체어를 바로 세우고 나를 휠체어에 앉혀주었다. 그리곤 나와 눈높이를 맞추더니 입을 열었다.
“ 형. 나말이야 어렸을 때부터 형 되게 부러워했다.?”
나는 울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인 이는 다시 내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 왜냐 하면, 옛날부터 엄마는 나보다 형을 더많이 챙겨줬으니까 내가 뭘하는 간에 나보다는 형이 늘 우선순위였지 엄마의 사랑을 나보다는 형이 더 듬뿍받는거 같아서 질투가 나고 시기까지 했었어 ” 성인 이는 날 보며 흰 이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주었다.
“ 이제 알겠어? 엄마는 그 누구보다 도형을 사랑해 아무리 장애인이라고 해도 말이야. 그런 건 형이 더 잘 알잖아?” 성인 이는 굽혔던 무릎을 죽 일으키고 내 휠체어를 밀어 주었다.
“ 물론, 새 가족이 생긴다는 건 좋은 일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난 절대 형을 떠나지 않아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일걸? 그리고 만약에 엄마가 재혼하신다 해도형이 없다면 난 절대 안가. 형이랑 살꺼라고., 형이 없으면 행복한 게 아니라 형이 있어야 행복해.. 형하고 나하고 함께 했던 세월이 얼만데! 안 그래?”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성인아
“그러니까 이제 엄마한테 가자 엄마 외투.. 아 뭐야 형이 들고 있었네 ”
내 손에 꼭 잡혀 있는 엄마의 외투. 그래 놓을 수 없었어 엄마한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으니까. “ ..가..자.. 성..이..아.” 내 말을 들은 성인 이는 점점 걸음이 빨라지더니 힘차게 뛰어 나갔다. “ 좋아 그럼 힘차게 가자!"
집에 도착하니 엄마가 문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인 이와 나의 모습을 발견 하셨는지 엄마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뛰어오셨다. “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날도 추운데!”
엄마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엄마는 무슨 선택을 하셨을까.?
성인 이는 나를 힐끗 보더니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엄마에게 말했고 우리는 엄마와 같이 방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얘기를 꺼낼 때까지 엄마는 아무 말도 않고 묵묵히 기다리셨다. 말하기가 무섭다. 만약. 내가 필요 없다는 대답을 듣게 된다면.. 이런저런 고민으로 말하기를 머뭇거리고 있는데 옆에 앉은 성인 이가 내 손을 꼭 잡아 주며 말했다.“ 괜찮아 ”
그래.. 할 수 있어 나는 아까 들었던 얘기들과 묻고싶던 얘기들을 모두 물어봤다. 말을 하면서 내 눈에는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고 내말을 다 듣고 난 엄마의 눈에도 이미 눈물이 맺혀있었다. 엄마는 나에 게로와 나를 꼭 끌어안아 주셨다.
“ 우리 성진이 한테 그런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엄마는 성진이 안 떠나 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성진이를 싫어한다면 난 그 사람을 떠나지 우리 성진이를 왜 떠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건 우리 성진이 인데”
또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이건 슬픔이 아니라 안심. 기쁨의 눈물이다.
“어..어마.. 고.. 고..마..어요..”
바보같이 정말 바보같이 괜 한일로 나 혼자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내몸이 어떻게 되있든 엄마는 날 떠나지 않는다. 그 이유를 바보같이 이제야 깨달았다. 엄마니까 바로 내 엄마니까 가족이니까.. 이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한데 성인이는 엄마와 날 보며 빙그레 웃더니 작게 속삭였다. “ 거봐 내말이 맞지?”
지금 난 다시 글씨 연습중이다. 여전히 글도 못쓰고 글씨도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서..서이아 내.. 글.. 어때..?”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젠, 혼자서 성을 내거나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 아, 그리고 또 하나 더 절대로 한번 도전하고 포기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엄마가 있으니까 성인 이가 있으니까 가족이 있으니까 내 손으로 내 발로 가족을 기쁘게 해주고 싶은 목표가 생겼으니까, 언제까지 끊임없이 노력할 수 있다.
“ 성진아 잠깐 이리 와볼레? ” / “에..예...!”
엄마의 부름에 나는 휠체어를 끌며 나갔다. 내 책상 위에는 공책한권과 곱게 깎은 연필 한 자루가 가지런히 놓아져 있다.
11,아버지와 게자리
강병국
(포항영신고등학교 3학년)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하신다. 그 때문에 내가 어린아이 이었을 때는 아버지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내앞에서 항상 당당하고 멋있는 분이셨다. 그러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는 처음으로 내게 눈물을 보이셨다. 형제 없이 홀로 자란 아버지 이었기에 할머니를 잃은 상실감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로 아는 아버지의 어깨가 조금 쳐진걸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우리 집의 형편은 점점 나빠져갔다. 아버지가 하시는 사업마다 손해를 보면서 우리 집은 좀 더 좁고 좀 더 낮은 집으로 이사해왔다. 그 동안 아버지는 나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셨지만 나는 태연한 척 애쓰는 아버지의 마을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을 때마다 나는 괜스레 짜증이 나곤 했다. 돌이켜보면 정말 철없는 짓이었지만, 그 무렵 나는 아버지에게 일종의 ‘원망’ 같은 것을 품고 있었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진 데에 대한 원망, 남들이 부모로부터 누리는 것을 받지 못한 데에 대한 원망, 성적이 안나오는 데에 대한 원망...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 왔을 때, 집안 청소를 하고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정말 보기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따르릉”
식사도중 흔히 들을 수 있는 전화 벨소리 이었지만, 수화기를 집어든 어머니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아, 예... 방금 밥먹고 있던 중이라...”
아버지는 TV볼륨을 낮추고 베란다로 나가 바깥을 살피셨다.
“저도 그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있어야죠. 지난 추석 때 전화 한 통 오고 아직 연락 한번 오지 않았는데...”
빚쟁이의 전화였다.
아버지의 숨죽인 모습, 그 아버지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한마디 한마디 조심스레 통화하는 어머니, 어리둥절하게 있는 동생, 소리 없이 입만 뻥긋하고 있는 TV속의 아나운서... 그 순간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이 보기 싫었다. 나는 집을 뛰쳐나와 숨이 차 오를 때 까지 달렸다. 무기력한 아버지의 모습이 미웠고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내가 미웠다. 한참 달리다가 멈추었을 때, 나는 집 앞의 큰길가에 와 있었다. 길 너머에 서 있는 고층아파트들이 죄다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잘사는 집 근처에 가면 비교되는 느낌에 주눅이 들던 나는 평소에 이 길을 지나가는 걸 꺼렸다. 어쩌다 아버지와 함께 지나가게 되면, 일부러 아버지와 몇 발자국 떨어져서 걷곤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진짜 아버지를 미워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미운 게 아니야, 지금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일까봐 부끄러웠던 거야...’
아버지와 함께 이 길을 걸을 때, 일부러 뒤쳐져서 걸어가는 나의 마음을 아버지는 아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앞서서 걸어가면서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어딜 갔다 오니?”
돌아왔을 때, 집안 분위기는 평소 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버지는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바람 좀 쐬고 왔어요.”
대충 얼버무리는 내 말에 어머니는 그냥 넘어가는 눈치였다. 나는 갑자기 무안해져서 내방으로 들어갔다. 방 한쪽 벽에 항상 걸려있던 할머니의 사진이 보이질 않았다. 아버지가 힘들 때면 할머니 사진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는 걸 알고 있던 나는 죄책감이 더 무거워 지는 걸 느꼈다. 아버지가 사진을 다시 걸어두려고 내방에 들어왔을 때 나는 누워서 자는 척을 했다. 아버지가 내 발 밑에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주시고 나가는 동안 눈을 꼭 감고만 있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머릿속을 맴도는 그 말 한마디를 꺼내지 못하였다. 입을 열면 그 보다 울음이 먼저 나올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을 먹으면서 아버지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국아, 오늘 일요일인데 오랜만에 같이 목욕이나 하자.”
“예”
나는 아버지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짧게 대답했다.
밤사이에 눈이 왔었는지 바깥은 온통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었다. 목욕탕으로 가는 내내 나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상하게 아버지에게 말을 하기가 어렵게 느껴졌다. 이른 시간 이었지만 목욕탕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그래, 시험까지 얼마 남았지?”
목욕탕에 들어온 뒤에도 아버지가 먼저 말씀하셨다.
“한 달 정도 남았어요.”
“공부는 잘 되냐?”
“예...그럭저럭...”
대답하며 눈치를 보고있던 나는 용기를 내어 아비지 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아빠, 우리 사우나에서 누가 오래 버티나 내기할래요?”
내심 사과 한마디를 기대하고 계셨던지 아버지는 나의 갑작스런 내기소리에 잠깐 당황하셨지만 피식 웃고는 대답하셨다.
“그래, 좋다.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사우나에서 조용히 사과하려고 했던 내 첫 번째 작전은 일단 성공이었다.
사우나에서 몇 분쯤 기다렸을까? 드디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아버지와 나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막 말을 꺼내려는 순간 아저씨 한 분이 들어왔다.
내가 기회를 놓친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이 그 아저씨는 심심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나를 가리키며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아들인가 봐요?”
“예”
“몇 학년이니?”
이번에는 나에게 물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요.”
타이밍을 놓친 게 아쉬운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저씨는 계속해서 이야기 했다.
“이야, 한창 공부할 때구나, 이 아저씨도 지금 아들이 둘 있는데, 하나는 군대 가 있고 하나는 지금 서울에서 재수하고 있단다.”
그러더니 이제는 다시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들 공부 빡시게 시켜야 돼요. 재수 그거 보통 돈 드는 일이 아닙디다.”
그러면서 그 아저씨는 서울 학원비가 얼마니 자기 연봉이 얼마니 하면서 돈 얘기를 늘어 놓기 시작했다.
“아참, 그런데 무선일 하세요?”
순간, 아버지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지나갔다.
“포스코에서 일하나요?”
그 아저씨는 궁금한 표정으로 계속 다그쳤다.
“아...예... 그 쪽 계열사에...”
“아...그럼 김○○이 알고 계시겠네?”
아버지는 잠시 후에 대답했다.
“모릅니다.”
“그래요?”
그 아저씨는 미심쩍은 얼굴로 아버지를 들여다 보더니 갑작스레 조용해진 분위기가 어색한 지 사우나 밖으로 나갔다. 그 뒤로도 어색한 분위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모르는 사람한테 꼭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지 않겠니?”
아버지는 어렵게 한마디를 꺼내시더니 사우나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사실 아버지가 아저씨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 내 가슴은 조마조마 했다.
‘혹시 저 아저씨가 아버지가 실직자인걸 알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들었던 나 자신이 정말 한심해졌다. 아버지를 부끄러워한 걸 사과하려던 자리에서 또다시 아버지 때문에 나 자신이 초라해질까봐 불안해하는 꼴이라니... 아버지도 물론 내 마음을 짐작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하셨을 것이다.
‘사실은 이게 아닌데...’
지금 아버지의 모습이 약한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의 모습이 부끄러운지 아닌지 따져보려했지 자식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 할 줄 몰랐던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모습을 창피해 할 때마다 아버지는 얼마나 마을이 아팠을까?
사우나에서 나와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는 좀전의 그 아저씨와 함께 있었다. 그 아저씨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옆에서 아버지는 가만히 듣고만 계셨다. 주눅이 들어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 예전 같으면 모른 척 외면했을 그 모습이 더 이상 미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다가서서 말했다.
“아빠, 먼저 나가셨으니, 내가 이긴 거 맞죠?”
“응? 아... 그렇구나.”
갑작스런 내 질문에 당황한 아버지를 손으로 잡아당기며 나는 말을 이었다.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이 시키는 대로하기로 했으니까... 자, 아빠, 여기 앉아봐요.”
“너 지금 뭐하는 거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 등밀어 드리는 게 제 소원이니까, 아빠는 그냥 앉아있기만 하면 돼요.”
어색하게 웅크리고 있는 아버지의 등을 밀어드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아버지의 등이 들썩거렸다. ‘울고 계시는 걸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하하하!”
아버지는 목욕탕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크게 웃으셨다.
“이거, 앞으로는 매번 내기에서 져야겠구나!”
“하하하!”
오랜만에 듣는 아버지의 농담에 나도 크게 웃었다. 주위사람들의 시선은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아저씨를 보니 고소한 느낌마저 들었다.
목욕탕 밖을 나서자마자 아버지는 쑥스러우신 지 먼저 걸음을 재촉하셨다. 제법 쌓인 눈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눈이 동그랗게 세상을 덮으면서 모나있던 내 마음도 동그랗게 만들어 준걸까? 사박사박 거리는 눈 밟히는 소리마저 정겹게 느껴진다.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아버지는 저 만치서 앞서가고 계신다. 아버지가 남기신 발자국을 디뎌가며 문득 이런 생각이 났다.
‘예전에 어릴 땐, 아빠 발자국 안에 내 발자국이 들어갔을 텐데... 이젠 내 발자국이 아빠 발자국을 덮어버리고 있구나...’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 항상 가족을 걱정하면서도 자기마음이 비칠까봐 아버지는 저렇게 뒷모습만을 보여주신 걸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걱정이 되어 뒤돌아보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아버지는 저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발자국만 남기며 걸어오신 걸지도 모른다. 나는 아버지를 향해 힘차게 뛰어갔다. 더 이상 아버지의 발자국만 따라 걸어가진 않을 것이다. 외로운 아버지의 뒷모습에다 직접 소리칠 것이다.
“아버지, 제가 이만큼 자랐어요! 아버지, 사랑해요!”
12지하 방에 피는 사랑
유하라
(중원고등학교 2학년)
3년 전 쯤 인가 나는 지금과 무척 달랐던 것 같다. 웃음도 없고 누군가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느껴본 적 없는 막다른 길에서 허우적대는 그런 아이였다. 그렇지만 이만큼 큰 지금의 나는 여섯 살짜리 꼬마 같은 웃음을 지을 수 있고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런 것 들을 가르쳐 준 사람은 우리 부모다. 나에게는 너무 과분해 태양처럼 눈이 부셔 진 작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랑을 베풀어 준 사람 또한 우리 부모다.
가슴이 탁하고 막히는 기침을 벌써 몇 분째 토해내고 있다. 엄마는 안쓰러워 어쩔 줄 몰라하며 나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한참 동안의 기침 때문에 한껏 예민해진 나는 어깨를 신경질 적으로 들썩이며 토닥이는 엄마의 손에서 묻어 나오는 미안함을 털어 냈다.
“됐으니까 하지마.”
차갑게 내뱉은 말에 내 등을 어루만지던 엄마의 손이 잠시 숨을 죽였다.
지금 나는 엄마의 미안한 듯 안쓰러워하는 눈빛이 반갑지 않다. 왜냐하면 천식이라는 병을 선물해 준 사람들이 바로 나의 부모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섬유공장에서 일을 하며 만난 엄마, 아빠는 방을 구할 돈이 없어서 어린 나를 지하 공장 사무실에서 키워 왔다고 한다. 그 시절부터 나는 천식 때문에 항상 기침을 달고 살아왔다.
엄마, 아빠는 주간 야간 구분 없이 하루종일 공장 일만 했다. 물론 이 좁아터지고 쾌쾌한 곰팡이 냄새와 청소를 해도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뿌연 먼지가 소복이 쌓이는 지하 방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부모를 지켜보면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가질 법도 하지만 아직 내가 다 크지 않은 건지 그런 마음을 느껴본 적이 없다. 아니 어쩌면 손톱이 뭉개질 정도로 일을 해도 아직 이 빛조차 드리우지 못하는 지하 방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모에 대한 원망감이 너무 커서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위해 가정형편이 좀 나아졌을 때에는 4층짜리 빌라로 이사간 적도 있었지만 사람을 너무 잘 믿는 우리 아빠. 초등학교 때부터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에게 보증이라는 것을 잘못 서주는 바람에 우리는 다시 지하 방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숨을 들이마시니 다시 목구멍 안으로 컬컬한 먼지가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동그랗고 작은 밥상에 앉아 있는 아빠는 이쑤시개로 손톱에 기름때를 빼고 있었다.
“밥상 앞에서 그런 것 좀 하지 마! 더럽게.”
손톱에 한참 동안 눈을 박고 있던 아빠가 나를 슬그머니 올려다보고는 손을 엉덩이 밑으로 쏙 집어넣어 버렸다.
“아빠한테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엄마는 조용하지만 톡 쏘아붙이는 듯 한 말투였다.
나는 눈을 허옇게 뜨며 흘겨보고는 신경질적으로 밥숟가락을 들었다. 양말이나 스타킹 같은 것에 들어가는 실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는 엄마와 아빠 덕택에 방구석 구석에 색색깔의 실밥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져 있었다.
“기침 심한 것 같은데 오늘 하루 학교 쉬는 게 낫지 않아?”
아빠는 나에게 무척이나 미안한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걱정하는 척 하지 마. 집에서 쉬면서 먼지 먹느니 학교 책상에 엎어져 있는 게 훨씬 나아!”
가방을 거칠게 낚아채고는 뒤통수만 보인 채 집에서 나왔다. 여기저기 깨진 잿빛 시멘트로 만들어진 계단을 발에 힘을 주어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가슴까지 울리는 기계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교복 주머니에 푹 찔러 넣었던 손으로 귀를 꽉 막고는 재빠르게 공장을 빠져 나왔다.
“아 진짜 저 놈의 기계소리 아직도 귀에서 윙윙거리네.”
나는 귀를 여러 차례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중얼댔다. 얼어붙은 날씨에 벌겋게 된 손을 입김으로 녹이고는 학교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집에 있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나로서는 학교는 피난처와 같은 곳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수다 떨기 좋아하고 예쁜 옷을 입고 싶어 몇 달 동안 용돈 모으기에 바쁜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단지 조금 그 모습이 삐뚤어졌다는 것 빼고는.
그날도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공장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검단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에는 지독한 젓갈 냄새를 풍기며 짐을 잔뜩 가슴에 품고 있는 아줌마에서부터 얼굴이 시커먼 외국인 노동자도 보인다. 주머니 속에서 드르륵 소리를 내며 살결을 간지럽히는 진동이 느껴졌다. 아빠가 다쳤다며 병원으로 오라는 문자 메시지 한 통. 입을 삐죽 내밀며 폴더를 닫아 버렸다.
장밋빛 노을도 한 발짝 물러나고 귀에서 맴돌던 기계 소리마저 어둠에 덮인 듯 풀벌레 소리만 요란했다. 발자국 소리가 소음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 지나갈 정도의 사이를 둔 채 마주보고 있는 기계 앞에 뭉뚝한 실패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계단 한 칸 높이 정도의 턱을 올라가면 그 뒤로는 내 키의 두 배쯤 되는 기계가 세워져 있다. 어른이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손가락 같은 고리에 여러 가지 색의 실패들이 끼워져 있다.
“구질구질해.”
조용한 공장 안에 속삭임이 크게 메아리쳤다.
교복 치마에 묻은 하얀 먼지를 털어 내고는 집으로 통하는 비좁은 계단으로 내려갔다. 계속해서 울려대는 진동 소리에 귀를 베개로 막아 버렸다.
다음 날 친구 두 명과 교문을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학교 앞 빽빽하게 모여 있는 아파트는 약속이라도 한 듯 내 나이 또래의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꽤 오래된 아파트라 그런지 인적도 드물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름처럼 몰려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입으로 길게 빨아 들리면 금세 코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도는 뿌연 담배연기. 담배연기를 코로 뿜어대는 아이들은 마치 성난 코뿔소 같았다. 목에서부터 올라오는 거친 음성을 내며 가래침을 뱉고는 교복을 툭툭 털고 학교로 들어오는 것이 내 하루의 일부를 차지했다. 그날도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대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목구멍에 깊숙이 스며드는 것 같은 담배 연기는 처음에는 목을 컬컬하고 가슴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을 주었지만 나중에는 중독자라도 된 것처럼 여기저기 구하러 다니기에 바빴다. 아이들의 모습은 모두 제 각각이었다. 교복치마 중간 부분을 잡고 부채를 펼친 듯 다리를 벌리고 쪼그려 앉아 있는 여자 아이들과 좋은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모습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남자 아이들. 도끼 눈을 뜨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훑어보며 자신들을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고 낄낄대며 자만심에 차 있는 아이들. 모두 달랐다. 하지만 모두 같았다. 어딜 가야 할지 모르고 막다른 길에 접어들어 고개를 꺾어 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혔다는 것만은.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친구가 앞자리에 앉으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어젯밤에 너네 엄마한테 전화 왔었어. 네가 전화를 계속 안 받는다구. 너네 집 검단 이라며? 그 동네는 대체 어디 있는 데라니? 위험하다고 걱정하시더라. 너네 아빠 다친 건 알고 있어?”
귓볼까지 달아오르는 열에 등의 후끈함이 느껴졌다.
“야 꺼져!”
아무 말 없이 미간만 찌푸리는 날 향해 친구는 분홍빛 혀만 내밀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친구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친구는 둔탁한 중저음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내가 책상에 엎어져 눈물을 흘리게 되면 나에게 맞고 있는 이 아이는 분명 나를 가난한 집 딸이라고 수근거릴 것이다. 가난은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 발로 몇 번을 짓누르듯 밟은 뒤 학교를 빠져 나왔다.
병원을 찾아갔다. 거칠게 병실 문을 열자 아빠에게 밥을 먹여주고 있는 엄마와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하얀 깁스를 한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나의 시선은 바로 엄마에게 향했다.
“그런 말을 친구한테 왜 해! 나 진짜 학교에서 쪽팔려 죽는 꼴보고 싶어서 그래? 겨우 발이나 뻗을 만한 반 지하 방에 사는 게 자랑 인 줄 알아?”
내 뺨 위로 엄마의 굳은살 박힌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눈물이 강을 만들었지만 목구멍으로 몇 번이나 삼켰다. 아랫입술이 떨려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벌겋게 부어오른 볼을 한 쪽 손으로 잡고 엄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엄마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 입술에 고이더니 이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빠 일하시다가 팔 부러진 거 안보여? 다시는 팔 못 쓸 수도 있대. 다 누굴 위해 일하시다 이렇게 된 건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엄마는 처음으로 내게 큰소리를 내며 혼을 냈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이 초라해 보인다. 고개를 숙이고 한 숨만 내쉬는 아빠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화를 표시라도 내는 듯 어깨를 들썩댔다.
“엄마랑 아빠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한 마디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 나는 부모에게 15년 동안 천식이라는 병 밖에는 받은 것이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와 아빠의 마음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고는 병원을 나왔다. 옷소매가 다 젖어 버렸다. 발목에 타이어를 두 개쯤 매달고 가는 기분이다. 눈이 녹은 채 내리는지 머리 위에 떨어진 눈이 물방울 저 머리카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코끝으로 흘러 내렸다.
“유하라 당장 나와!”
선생님의 목소리가 조용한 교실 안을 매웠다. 일제히 고개를 들어 선생님 쪽을 보더니 이내 나를 바라보는 반 아이들. 선생님이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 알 것 같다는 표정이다.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과 전부 눈을 마주쳤다. 하나 둘씩 고개를 숙였다. 교무실에는 눈가에 멍이 든 아이와 알이 커다란 반지를 세 개씩 낀 그 아이의 엄마가 있었다. 아줌마의 손가락은 삐딱하게 서 있는 내 머리를 여러 번 밀었다.
“생긴 거 하고는 딱 애들 때리고 다니게 생겼네.”
그만하라는 선생님의 손짓에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새침하게 돌리는 아줌마는 촌스러울 만큼 반짝이는 검은 투피스를 입고 목걸이, 귀고리, 반지로 눈이 부실 정도였다. 두리번대며 교무실을 들어오는 초라한 모습의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은 아빠의 병간호로 많이 야윈 듯 보였다. 엄마는 마른 입술을 문지르며 말했다.
“우리 딸이 무슨 잘못이라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다시 들려오는 아줌마의 콧소리가 섞인 날카로운 목소리에 허탈한 웃음만 터져 나왔다.
“우리 딸 얼굴 안 보여요? 당신 딸이 이렇게 만든 이상 난 합의도 못해주고 학교에서 저 딴 기집애 당장 내쫓을 거야!”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두 손을 비볐다. 그리고는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엄마 쪽을 바라보지도 않는 아줌마. 계속해서 아줌마의 팔이며 다리에 매달리는 엄마. 나는 그런 엄마를 아줌마에게 떼어놓고 교무실에서 나와버렸다. 반창고를 잔뜩 붙인 손으로 사정하는 엄마를 계속해서 볼 수 없었다. 한참동안 울었다.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다음날 아침 공장에서 아빠와 함께 일하는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사과와 배가 잔뜩 들어있는 과일 바구니와 공장 식구들끼리 조금씩 모은 성의라며 묵직한 하얀 봉투를 전해주며 아저씨는 찾아가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전해 달라하고는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모두들 빡빡하게 살아가기에 약간의 여유도 찾아 볼 수 없는 이곳에서는 친구의 병 문안도 사치임을 나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엄마와 심하게 싸운 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병원. 몇 번 밥은 잘 챙겨 먹냐는 등의 전화가 오긴 했지만 나는 매번 냉기가 흐르는 목소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계속해서 병실 문손잡이를 잡았다 떼었다를 반복했다. 손을 오므렸다 폈다하며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내 귀에 들리는 엄마 아빠의 이야기에 어깨가 땅으로 떨어졌다.
“돈은 다시 모으면 되는 거잖아요. 의사 선생님이 수술 늦어지면 팔 정상으로 쓰기 힘들다고 하는 거 당신도 들었잖아요. 당장 적금 깨서 수술해요.”
아빠를 설득하기 위해 무진 노력을 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우리 하라 그 동안 공장에 딸린 지하 방에 살게 하면서 기침 때문에 고생시킨 것도 죄스러운데 집 마련할 돈으로 수술할 수는 없어. 그 돈은 선화 돈이나 다름없으니…….”
아빠의 단호한 대답에 엄마의 긴 한숨이 이어졌다.
눈꺼풀이 뜨거워졌다. 또 아랫입술이 떨리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가슴을 누군가 주먹으로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결국 난 그날 과일 바구니도 묵직한 돈 봉투도 전해주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무거운 과일 바구니와 주머니 속에 꼬깃하게 접혀 있는 돈 봉투를 든 채로.
다음날 밤 공장은 아빠가 없이도 시끄럽게 돌아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적 내가 본 아빠는 항상 엄지와 검지 손가락이 잘린 목장갑을 끼고 일을 했다. 가느다란 실을 잡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능숙하게 실을 잡아당겼다가 손가락 만한 굵기의 고리에 실을 두 바퀴 정도 돌린 다음에 재 빨리 실을 매듭지었다. 그리고 나서 기계에 달린 손잡이를 아래로 내리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실패에 실을 감아내기 바빴다. 어렸을 적 나는 그런 아빠의 모습이 자랑스럽고 또 멋있다고 느껴졌기에 아빠의 뒷 꽁무니를 쫓아다니기 바빴다. 공장 사람들이 벌건 김치찌개에 열 숟가락을 푹푹 담가 가며 밥을 먹을 때면 난 항상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맛깔스러운 트로트에 맞춰 춤을 추곤 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기계는 아빠의 손을 삼켜 버렸다. 그리고는 놔주지 않았다. 또 아빠를 자랑스럽게 여기던 귀여운 딸의 자리에는 내가 없었다. 변함없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엄마 아빠를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할 때도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부모에게 깨진 유리같이 날카로움을 가슴 깊이 박아도 변함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에도 천식을 심하게 앓아 왔고 지금처럼 가난했지만 부모를 향해 웃을 줄 아는 아이였다. 키가 커갈수록 부모에게 바라는 것이 많아진 모양이다. 마치 세 살짜리 아이가 투정을 부리 듯. 마음이 텅 빈 것 같다. 혈관의 피가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흐르는 듯 어깨와 팔 다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집으로 통하는 시끄러운 공장을 지날 때 귀를 막지 않았다. 기계 소리가 가슴까지 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잿빛 먼지에 기침이 고개를 들었다.
짙은 갈색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빠가 바닥을 걸레질하고 있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팔꿈치 아래부터 가느다란 팔에는 초록빛 힘줄이 볼록 솟아 있었다.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더 많은 것 같다. 한참 동안 아빠의 머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빠는 내가 앞에 있는 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내 키가 아빠의 꼬리뼈에 닿을 때쯤 지어 보였던 웃음 그대로다.
“다쳤으니 일은 못하고 우리 딸 괴롭히는 먼지 닦는 중이었어.”
아빠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나는 아빠의 넓은 등에 안겼다.
“아빠 나는 말이야. 나중에 크면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할래. 그리고 엄마 같은 아내가 될래.”
키와 머리가 이만큼 큰 지금의 나는 엄마와 아빠를 보고 웃을 줄 아는 그 어린 시절의 나로 다시 돌아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 날 나는 창문 없는 지하 방에 스며드는 햇빛을 본 것 같다.
13.아빠의 발은 평발
안혜인
(온양온천초등학교 3학년)
“혜인아, 발 주물러라!”
“에잇, 또야?”
오늘도 어김없이 아빠는 발을 내 무릎 위에 올려 놓으십니다.
아빠께서 그러실 때마다 짜증이 납니다.
한 두번도 아니고 하루에 한 번씩 꼭 그러시니까요. 그럴때면 난 무척 바쁜척 하거나 자는 척 한답니다. 제 동생도 슬슬 피하지요.
엄마는 결혼한 후부터 쭉 아빠의 발을 주물러 드렸데요. 몇 년을 그렇게 하시니까 이제는 힘들다면서 저희에게 떠 맡기십니다.
저희 아빠는 키가 작고 무척 뚱뚱하십니다. 아빠의 큰 체구를 발이 감당 못 하나봐요. 그러니까 맨날 발이 아프죠.
“에구구, 혜인아, 착한 혜인아!”
“ 아빠 발 한 번만 주물러주라, 응?”
아빠의 애원은 정말이지 못말린다니까요. 어쩔 수 없이 전 동생을 끌어들여 한쪽은 내가 한쪽은 동생이 주무르게 하죠. 손으로 주무르기 귀찮을 때는 막대기로 콕콕 찌릅니다. 그래도 아빠는 시원하시다는 거예요.
제 동생과 전 어떻게 하면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을까? 온갖 궁리를 다 한답니다.
그럴 때마다 아빠께서는 “누가 잘 주무르나 아빠가 보고 선물 사줘야 겠는걸?” 동생과 전 언제 그랬냐는 듯 선물에 눈이 멀어 아빠의 발을 열심히 주무릅니다. 아빠의 기분이 어떤가 얼굴도 살피면서 말이예요.
그러던 어느 날 아빠의 발을 왜 항상 주물러드려야 하는지 엄마를 통해 알았답니다. 아빠는 발이 평발이라서 조금만 걸어 다니거나 서 있어도 피곤하시다는 거예요. 그리고 간이 않 좋으셔서 발바닥 어딘가를 지압하면 간이 좋아진다고 해서 엄마가 책을 보며 아빠 발을 주물러 드린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요. 저희 아빠는 군대도 못 갔대요. 그때 당시에 평발은 군대에 갈 수 없었나봐요. 군대 얘기만 나오면 입을 꾹 다문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요.
아빠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자꾸 아빠의 피곤한 발이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
그 피곤한 발로 일터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시는 아빠를 생각하니 그 동안 못되게 굴어서 죄송한 생각이 들어요.
아빠가 들어오시면 동생과 제가 꼬옥 안아드리고 발을 주물러 드릴겁니다.
아빠, 힘 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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