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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은 '배고픈 선비 한사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어봤습니다.
한 가난한 시나리오 작가가 굶어 죽었습니다.
글쓴이도 그와 같은 글쟁이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상급식으로 싸우고, 선심복지로 아웅다웅하는 사이
한 재주있는 작가가 굶어 죽었습니다. 그래서 금요일 그날은 참
아침부터 속으로 울며 글을 써야 했는데, 제가 아직도 사람이 덜 돼서인지
아침에 마늘과 사과를 먹는지 꽤 오래됐습니다. 덕분에 뺨이 푹푹 빠지는데
이제는 떡 먹을 때도 싱겁다고 마늘 한쪽 이랑 같이 먹는 말 못할 괴벽이
생겼습니다. 필시 사람이 덜 됀 곰탱이라 부지런히 먹는가 봅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남은 음식 좀 있으면 갖다 주세요' 써 붙이고서
이 차가운 동천에 하늘로 갔는지 땅으로 갔는지 모를 외로운 작가의 혼을
부르다 못해 속으로 우는 사람을 마늘이 그냥 눈물보 터뜨려 주더군요.
하필 컴 앞에서 줄줄 거리는 모습을 또 안 봐야 할 사람이 봤답니다.
그냥 흘리는 채로 멀건히 보는데, 평소 그 사람은 제가 가끔 울컥 울컥 하는지
뻔히 아는데 이번엔 마늘 때문이겠거니 그러고 서로 마주보다 그냥 그대로
글을 썼습니다. 그 사람도 꽃다운 신혼초에 여름날 밤이면 문을 열어 놓고
자야했던 단칸 셋방살이 하며 발가락 사이로 뛰어가는 쥐새끼 땜에 울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잘 사냐구요. 서울에서 제일 촌스런
동네랍니다. 왜 이런 궁상맞은 소리를 오래 해야 할까요.
나 같은 인간도 아직까지 살아 있는데. 그 재주있고 젊은 작가 한 사람이
'남은 밥 좀 있으면 갖다 주세요!' 그런 유언을 남기고 떴더란 겁니다.
그래서 그날은 참 궁상맞은 심정으로 글을 쓸 수 밖에 없더란 고백입니다.
그러니 자연 예전에 굶어 죽은 선비, 병들었다가 굶어 죽은 선비.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면서 울다 울다 피로 쓴 글을 남긴 선비들, 일명 寒士라고 했던
뼈골병들게 고생고생하다 따뜻한 양지에서 햇살 한번 못 받고 간 선비들을
이리 저리 떠올려 봤습니다. 우리쪽 찬밥선비. 중국쪽 원통한 선비 대중없이
널뛰기 할 겁니다. 편의상 제 논평을 먼저 쓰고 주석이라 할 조금 더 세밀한
내용은 맨 뒤에 따로 번호표 주어서 해설해 놓겠습니다.
원전과 해석과 논평이 얼크러지니 제가 봐도 난삽하더군요. 그럼 먼저
방송에서 다룬 한사 이야기 부터 잠시 보실까요.
♣ 고전코너 ‘신 명심보감 ---배고픈 선비 한사寒士 이야기 ’
놀보 이 시간은 마음을 밝혀줄 보배로운 거울같은 ‘명심보감’을
새롭게 풀어보는 ‘신 명심보감’ 자리입니다.
초란 고전 속에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며 마음에 양식을 쌓아보는
‘신 명심보감!’ 오늘은 고전 속에 어떤 구절인가요?
놀보 우리에게 오성과 한음으로 친숙한 백사 이항복을
기억하실겁니다.
초란 그의 친구였던 이덕형과 함께 어릴 땐 참 개구쟁이
장난꾸러기로 소문난 사이였다면서요?
놀보 그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당시 국난에 처한 나라를
구해 보고자 말을 타고 나가면 장수가 돼야 했고
조정으로 돌아오면 재상 벼슬을 했다는 출장입상으로
이름난 인물이기도 했거든요. 우선 그가 여덟살에 지은
시 한구절 음미해 볼까요? 그 평생을 암시하는 시이기도 하거든요.
초란 이 작품 말인가요? (성독조) ♬검유 장부기요 금장 천고음이라
(劍有丈夫氣 琴藏千古音)
놀보 칼에는 장부의 기개가 서려있고, 거문고에는 천고의 소리가
깃들어 있더라. 이게 이항복이 여덟살 때 그 부친이 내준
칼검자와 거문고 금자를 가지고 지은 시이거든요.
초란 과연 일찍부터 그 자질이 얼마나 뛰어난 인물이었는지
알만한 구절이군요. 검은 곧 무사를 뜻하고, 거문고는 선비를
뜻하는 거 아닌가요?
놀보 그래서 이항복이 말을 타고 나가면 장수가 됐고
조정에 돌아오면 재상이 됐다는 기개를 엿 볼 수 있는데요.
광해군 당시 인목대비를 폐비로 만들자는 논의에 목숨을 걸고서
반대했던 그 죄를 받아 유배지 생활을 해야 했던 인물이기도
했었죠.
초란 그의 일생을 정리한 행장의 기록에 보면 지금의 노원구쪽에
살다가 망우리 쪽에서 살았다는 기록도 보이던데요?
놀보 그때가 벼슬을 버리고 임금이 패륜을 저질러서는 안된다는
목숨을 건 상소문을 올리고서 밥 해주는 종 한사람만 데리고서
노원과 망우리를 옮겨가며 겨우 겨우 연명을 했을 정도였다고합니다.
초란 그렇다면 만년에 보여준 이항복 모습은 정의를 위해
패륜을 바로 잡기 위해 몸소 가장 낮은 곳인 가난과 추위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한사의 모범을 보인 셈 아닌가요?
놀보 바로 그 부분이 우리가 아는 백사 이항복의 또 다른
가난과 굶주림 속에 뜻을 고고하게 실천한 한사의 면모이죠.
이항복이 한사와 무슨 상관 있느냐 생각하실테지만
그가 한양 외곽 노원과 망우리에서 보여 준 모습은
그야말로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도 뜻을 꺾지 않은 선비
한사의 모습이었거든요. 그 고생 때문에 결국 중풍을 앓게
됐구요. 유배지에서도 그 모진 중풍을 감내하며 지내다 끝내
귀양지에서 숨지게 된 이항복의 삶.
초란 오늘 ‘신 명심보감’에서 돌아 본 이항복의 여덟살 때 시 한구절과
만년에 보여준 가난과 질병 속에서도 뜻을 꺾지 않았던 포의 한사
모습 속에 기개있는 한 지식인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놀보 과연 이 시대에 한사는 어떤 분들일까요?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도 말을 하고 글을 써야 하는 한사들을 보며
새삼 두보가 노래했던 한사에 대한 시 한구절 다시 되새겨 봅니다.
초란(낭송) 어이하면 천만 칸 너른 집을 구하여,
천하의 궁한 선비 모두 다 가려주어 기쁜 얼굴 짓게 할까.
[安得廣廈千萬間 大庇天下寒士俱歡顔]
놀보 며칠전 가난과 질병 속에 밥 한끼 먹지 못하고 굶주려 죽은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을 돌아보며, 이 시대 추위와 굶주림 속에
말하고 쓰고 노래하고자 하는 그들의 꿈이 더 이상 이 한파 속에
얼어붙은 눈물로 가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초란 오늘 ‘신 명심보감’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다음 카페’ ‘우사모’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놀보 좋은 자료나 담론은 ‘우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슬프고도 불쌍하고 억울하고 황당하고 재수도 없고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살았던 뼈골 시린 寒士선비들 이야기 몇개 간추려 올려볼까 한다.
그 가운데는 도통한 한사도 있고 운수대통한 달인 한사도 있어서 더욱 흥미로울 듯 싶다
작가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우선 근대 김유정부터 생각난다. 그는'동백꽃' '봄봄'을 남기고
스물 아홉, 그 대동아 전쟁통에 아비규환인 일제치하 이 강산을 떠나야했다.
그가 죽기전에 남긴 이 한장의 편지는 작가 김유정의 솔직하고도 눈물나는 돈타령이 들어있어
다시 또 가슴에서 목으로 울컥한게 넘어온다.
“필승아, 나는 돈 백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삼십 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살아날 것 같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하지만 김유정은 끝내 닭국물을 입 속에 흘려넣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지금 돈으로 따지면 아무리 비싸도 한3백 정도면 될 일 같은데,
징그럽다며 눈길도 주려 안했던 살모사가 그리웠다는 작가 김유정, 전에 박녹주 명창과
김유정의 사랑 이야기 들으면서 사랑마저 한손길 잡아 보지도 못하고 간 서글픈 생각에
몇 번인가 김유정과 박녹주 명창 로맨스를 다시 쓰고 다시 방송에 내보낸 기억이 난다.
뼈골병 들게 폐병으로 고생하다 스물아홉 그 시퍼런 나이에 간 김유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가난골병 병골병 사랑골병 골병寒士 아닌가 싶다.
다시 중국 후한때 원안(袁安)에게 돌아가 보자. 낙양천지가 다 사람이 안보이게 눈 쌓였을 때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책이나 보면서 다른 사람 먹을 거 축내지 않겠노란 눈속에 뭍혀
누워 있었던 그 초연한 모습은 한사 중에서도 훗날 크게 출세했으니 군자한사 아닌가 싶다.
(1)원안에 대한 간략한 해설과 참고문은 아래 끝단 참고 바람)
잠시 당나라 때 두보를 돌아보자. 시 한편 지으려면 없는 살림에 쓰고 또 쓰고 해서
종이가 수북하게 쌓일 정도로 한글자 마다를 조각하듯 경건하게 시를 지었던
두보는 참 일생이 가난하고 병치레도 많고 운도 그닥 없었던 가난 불운형 寒士라 하겠다.
두보(杜甫)의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爲秋風所破歌)〉에
“어이하면 천만 칸 너른 집을 구하여, 천하의 궁한 선비 모두 다 가려주어
기쁜 얼굴 짓게 할까.[安得廣廈千萬間 大庇天下寒士俱歡顔]”라고 피를 토하듯 노래했을까?
가진거 없고 찬밥 신세로 뼈골병 들게 하는 가난뱅이 선비가 백설 한파 피할 수 있도록
가려 주는 그 아늑한 집 안에서 백설에 글을 비춰 읽고, 따뜻한 화롯불에 몸을 녹이는 즐거움을
천하의 궁한 선비들과 함께 누리고 싶다는 뜻이고 보니,
두보는 아무리 봐도 시운을 만나지 못한 가난 불운형 한사가 분명한듯 싶다.
이왕 당나라로 갔으니 맹호연을 돌아보자. 맹호연은 평생을 벼슬 한자리 못하고
산수유람하며 자연과 천지간에 나그네 팔자로 산 재수없는 떠돌이 한사라 하겠다.
동시대 왕유와 친분이 있어서 황제의 궁전에 들어갔다가 왕유 집무실에서 만났다는데
하필 그때 당현종이 행차해서 다급한 나머지 책상 밑에 숨었는데, 왕유가 이실직고 해서
현종이 맹호연 이름을 들었노라며 시 한수 내놔 봐라. 하니 그때 맹호연이 읊었던
그 시 한수 한구절이 황제의 심기를 건드려 두번 다시 벼슬할 생각 말라는 악담을
들었다고 한다. 대체 어떤 구절이었기에 천하에 맹호연이 시 한구절로 일생을 망치게 된걸까?
不才明主棄 (부재명주기)..재주가 없으니 임금님이 버리시고
당현종이 듣고 한마디 하시기를 '내가 언제 너 재주없다 내쳤더냐. 너 평생 벼슬할 생각 말거라!'
자신을 낮추고 황제를 높인다는 게 그만 황제의 심기를 건든 것이다. 그 이후 맹호연은
산수유람길에 나서서 그저 평생을 떠도는 나그네로 살았으니, 재주는 넘쳤는데 재수가 없는
나그네 길손寒士라 해야 할 것이다. 그 한구절이 늘상 걸렸던지 맹호연은 훗날에도
한 맺힌 그 구절을 인용해 글을 짓기도 했다. (주석2) 문제가 된 맹호연시 해설)
우리 근대로 가보자. 지난해 12월 8일날 쓴 周道以哀辭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담헌 홍대용이 애도사를 지어 그야말로 없이 살고 골병들고 석굴에서 생쌀을 먹으며
용맹정진했던 주도이가 요절한 사연은 한마디로 시대도 버렸고 주변에서도 버렸고
그 자신마저도 깡그리 버림받은 寒士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참고12월 8일 신명심보감)
광해군 때 원통 절통한 한사가 어렸있었는데 한사(寒士) 권필(權韠)이
먼저 떠오른다. 광해군 때 외척들이 권세잡고 노는 꼴이 하도 같잖아서
무명인 시로 궁유시 한편 지어 당시 팔도에 베스트 셀러가 됐는데
그걸 이리 파고 저리 파서 광해군이 끄잡아 내 귀양 보내자 그 권필의 기개와 재주를
아꼈던 수많은 사람들이 한양성 밖에서 기다렸다 술을 주고 또 퍼주고 퍼마시고
피를 토하며 죽었으니 드럽게 가난하게 산 평생도 억울한데 꼴깞 떠는 외척들
한마디 꼬집어 줬다고 귀양살이니, 사약 내려 올 것은 뻔한 이치다 싶어
술잔 오는대로 마시고 큰대자로 바로 승천하셨더란다. 권필(權韠)은 한사중에서
원통절통 승천寒士 아닌가 한다.
(주석3) 상촌 신흠이 쓴 권필에 대한 글 참조
이제 노루발 당나귀발 걸음으로 고려 때 딴따라? 한사 한사람을 만나보자.
이 양반 후손 되는 분이 울컥 할 듯 싶으니, 건달 한사를 만나보도록 하자.
아무래도 뒤끝이 안좋을 듯 싶으니 고려말 목은과 동시대에 살았던
<쾌남한사 崔霖> 이라고 해두자. 공민왕 초기까지 이 최림이란 사람
절간에 가서 술 달라고 소란 피우고, 절간 주변에서 고기냄새 피우며
놀기 좋아했던 풍류랑이었다. 부친이 낭장이라지만 딱히 욕심 내는 것도
없이 여기 저기 쏘다니면서 놀았는데 그 최림이랑 죽밥맞은 스님 법명도 가관이다
寒士 옆에 寒溪라고 얼음골 스님네랑 그렇게 쏘다니다 언제 공부를 했는지
공민왕 2년에 이색과 함께 장원에 오른 인물이었다. 고려 땐 원나라 과거길이
출세의 필수코스요, 원나라 세력 등에 업기 제일 강력한 세도코스 였기에
나라에서 두명씩 인재를 선발해 보냈는데, 그때 이색과 같이 선발됐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무슨 미국 허벌라대 박사코스 나와 보좌관 정도 노리는 정도였을거다.
고려의 두 인재 최림과 이색이 원나라로 나서기 전에 공부를 얼마나 했던지
최림은 눈이 아파 시력을 잃고 사퇴하게 된다. 겸손히 물러나 있다 천거와 추대로 벼슬길에 나선 최림이
원나라 사신 갔다 오는 길에 그만 젊은 나이에 요동에서 마적단 만나 살해되고 만다.
참으로 쾌남처럼 살다 이슬처럼 사라진 아침 이슬형 快男寒士 아닌가 싶다.
(참고 목은문고 제20권 최씨전(崔氏傳)
물길 흘러가는 대로, 이번엔 중국 한나라 때 찬밥 신세 될 뻔 했다 출세한
<馮唐> 풍당이란 사람을 만나보자. 이사람은 한나라 文帝 앞에서 그야말로 황천행 티켓받고서
바로 요직에 등용되는 보기드문 대박 寒士라 할 것이다. 한사가 대박 나려면
풍당 처럼은 나야 한단 소리다. 그가 한문제를 만난 자리에서 '과인에겐 염파와 이목같은
명장이 있어야 하는데.....' 짐짓 풍당이 어떤 소리를 할려나 기대하고 했던 말이었다.
풍당은 그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폐하께선 그런 인물 있어도 못 쓸 것입니다!'
이건 능지처참을 당해도 말 못할 독한 소리다. 그런데 문제란 문자를 유심히 보자.
천자 황제 타이틀에 글월文자.들어가면 그만한 사연이 있는거다. 다른 황제 같았으면
현장에서 칼을 뽑아 풍당의 목을 쳤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어서서 궁궐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난 다음 이번엔 풍당이 또 황제를 찾아간다. 죽을 짓을 두 번해보겠다는 것이냐?
사람들이 숨을 죽일 때, 한문제는 물었다고 한다. '그대는 내가 왜 염파나 이목 같은 명장을
쓸 줄 모른다 하였는가?' 자, 황천길 찬밥이냐 왕대박 비룡재천飛龍在天이냐가 여기서 엇갈린다.
청산 유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풍당의 말은 여기 밑에 주석으로 올린 글로 보고
나는 그의 말을 간단히 줄인다면 '당신은 권력을 놓칠까 무서워 대장군에게 전권을 아니준다.
전략거점지역, 작전지역에 군사 행정 사법권 전권을 맡겨라. 당신은 그렇게 해본 적 있었던가?
염파와 이목은 그 전권을 위임밭아 바람 처럼 군사를 몰았고 대승리 했던거 아니냐?'
한나라 문제가 '당신! 그럼 그렇지 아무렴 그렇고 말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그를 요직에
앉히고 그의 소원대로 전권을 맡긴다. 참으로 저승길 이승길 오락가락하면서 대박난 한사는,
한나라때 <馮唐> 아닌가 싶다. 그를 <魏尙>이라고도 한다. (주석4 사마천 사기원전과 번역문)
스스로 좋아서 하는 짓이기도 하지만 꼬빡 두시간째 쓰고 있다. 그리고 새벽이 오려나보다. 2시다.
시간이 좀 있거나. 내 입에서 말만하면 글이 되는 기계가 나오면 조금 낫겠다 싶다.
오만 궁상 떠는 뼈골병 한사 이야기 들쑤셔 봐야 괜시리 눈에다 힘주게 할 작정이냐 할듯 싶다.
자료는 꽤나 많이 모아 뒀다. 하지만 내일을 생각해서
여기 신선한사 타이틀을 줘야 할 그 나름 가난해도 멋지게 살고, 없이 살아도 품위있게 노닐고
시대가 알아 주지 않아도 허허껄껄 웃고 술 한잔에 이슬내린 입술 적실 줄 알았던
소강절 이야기로 막을 내리자.
글이란 재주껏 지으면 되는 줄 아는 사람들 많다. 그래서 재주껏 문인 시인 소리 듣는 분도
많고도 많다. 그런데 소강절이 남긴 글 중에 짧지만 그 속에 함축된 깊은 속삭임을
과연 내 필치로 어느정도 그려낼까. 다음 소강절을 엿 볼 두어구절 돌아보자
세간에 다른 낙 없고 무사한 낙 가진 사람은 / 世間無事樂
다만 이 한가한 나뿐인가 하여라 / 都恐屬閒人
할일 없어 한가했겠는가? 하고 말 것도 없어서 한가했을까?
일 없는 즐거움이란 어떤 경지겠는가?
바람 지나간 다음에 흔들렸던 머리카락에 뭘 물어보자고
연못 위로 스쳐간 기러기 그림자 잡아서 무슨 상덕을 보자고
한개의 달이 천개의 강물에 뜬 것을 한손으로 건져내 어찌하자고
일을, 일을 만드냐는 것이다. 마음에 일이 없다는 사람이니
먹어도 살고 안먹어도 사는 절로절로 달인한사가 소강절 아닌가 싶다.
다시 다음 한구절 또 돌아보자.
생각건대 이 속의 낙은 / 料得閒中樂
나처럼 독차지한 사람 없을거여 / 無如我得全
어떤가 소강절 웃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작가가 임의로 사투리 톤에 실어 던진 그 구절
멀리도 아니고 가까이도 아니고 세상에
이렇게 좋은 님을 아 잠자면 자면서 같이하고
깨어나면 일어나 같이하는 이 일없는 즐거움
비우니깐 일이 없더란 소리 아니겠는가?
그런데 비우자 비우자 외치기만 하는데
소강절 처럼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허당스럽지 않은가?
반지하 어둠을 가르고 들어 온 빛살에도 소강절 웃음이 들린다.
뺨을 후리듯 스쳐간 막내겨울 기침소리에도 소강절 귓속말이 들린다.
비우지 않았으면 바람이 어디서 살았을까? 그래 가득 채워보자
<남은 밥 있으면 좀 주세요!> 울 힘도 없이 간 그 작가에게도 채워보자.
그래서 겨울 밤 어느집 寒士는 이 밤을 지새고 있나보다.
1) 원안은 후한 장제(後漢章帝) 때 사공(司空)과 사도(司徒)를 역임한 인물로, 그가 벼슬하기 전 낙양(洛陽)에 큰 눈이 내려 굶주린 많은 사람이 밖에 나가 밥을 빌어먹었으나 그는 방 안에 태연히 누워 있었다는 데서 인용한 것이다. 《汝南先賢傳》 곧 많은 눈이 내린 가운데 방 안에 들어앉아 있다는 뜻이다
2) 孟浩然(맹호연) 歲暮歸南山(세모귀남산)
北闕休上書 (북궐휴상서)..북쪽 궁궐 임금님께 상서 그만 올리고
南山歸敝廬 (남산귀폐려)..남산 기슭 허물어진 오두막에 돌아왔네
不才明主棄 (부재명주기)..재주가 없으니 임금님이 버리시고
多病故人疏 (다병고인소)..병치레 잦으니 친구들도 멀리하네.
白髮催年老 (백발최연로)..백발은 세월이 재촉해서 늘려 놓고
靑陽逼歲除 (청양핍세제)..봄볕은 세월에 밀려 사라져 버렸네
永懷愁不寐 (영회수불매)..가슴 속 시름 안고 잠못 이루노라니
松月夜窗虛 (송월야창허)..송월은 쓸쓸히 창을 비추네.
3) 상촌집(象村集) 청창연담 하(晴窓軟談 下) 신흠(申欽)
한사(寒士) 권필(權韠)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자는 여장(汝章)으로 참의 권벽(權擘)의 아들이다. 권벽은 문장을 잘했는데 권필이 어려서부터 가정의 훈도를 받은 결과 약관(弱冠)에 문예(文藝)가 이루어졌다. 소릉(少陵 두보(杜甫))의 시풍을 배우려고 노력하였으며 작품을 보면 매우 맑고 아름다운데 뒤에 와서 시를 짓는 사람들이 그를 으뜸으로 쳤다. 그런데 그의 시가 시휘(時諱)에 저촉되는 바람에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정형(廷刑)을 받고 북쪽 변경으로 유배당하게 되었는데 도성 문을 나가다가 죽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43세였는데, 원근에서 이를 듣고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람됨 역시 소탈하고 무슨 일이든 겁없이 해치우는 성미였으며 사소한 의절(儀節)에 구애받지 않았는데 과거 공부도 포기한 채 세상을 도외시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임진왜란을 당해 강화(江華)로 흘러 들어가 우거(寓居)하고 있을 때는 그를 존경하여 추종하는 자가 날로 문에 나아왔는데 심지어는 식량을 싸들고 천 리 먼 곳에서 미투리를 삼아 신고 와서 따르는 자도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죽자 문인들이 죄없이 그가 죽게 된 것을 가슴 아파한 나머지 과거를 포기하고 세상과 관계를 끊어버리는 자들도 많이 나왔다. 그의 저술 《석주집(石洲集)》이 세상에 전해진다. 아들 하나가 있었으며 그 문인은 심척(沈惕)이라고 한다
4)史記卷一百二 張釋之馮唐列傳第四十二
풍당(馮唐)의 조부는 조(趙)나라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대(代)나라로 옮겨와 살았다. 한(漢)나라가 건립된 후 안릉(安陵)으로 거처를 옮겨 살았다. 풍당은 효행으로 널리 이름이 났으며, 중랑서(中郎署)의 장(長)으로 천거되어 문제(文帝)를 섬겼다. 문제가 수레를 타고 중랑 관서(官署)를 지나갈 때 풍당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그 나이에 아직까지 낭관(郎官) 자리에 있는가? 사는 곳은 어디인가?" 풍당은 모두 사실과 같이 대답하였다. 문제가 말하였다. "내가 대(代)나라에 머무를 때 나의 상식감(尙食監) 고거(高袪)는 여러 차례 나에게 조나라 장수 이제(李齊)의 현능함을 칭송하였으며, 거록(鉅鹿) 아래에서 악전고투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소. 지금 나는 매번 식사를 할 때마다 항상 이제가 거록에서 악전고투하던 일을 생각하오. 그대는 이제라는 이 사람을 아는가?" 풍당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이 장수(將帥)로서 병사들을 이끌던 것만 못합니다." 황상이 물었다. "어떤 근거로 그와 같이 말하는가?" 풍당이 말하였다. "저의 조부가 조나라에 있을 때 장수를 역임하였는데 이목과 아주 절친하였습니다. 또 저의 부친이 이전에 대왕(代王)의 승상을 지낼 때 조나라 장수 이제와 관계가 매우 친밀하였으므로 그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황상은 풍당이 염파와 이목의 사람됨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자 매우 기뻐하였으며 이리하여 대퇴(大腿)를 치면서 말하였다. "아! 애석하게도 나는 공교롭게 염파나 이목과 같은 사람을 얻어서 나의 장수로 삼을 수 없구나. 그렇지 않으면 내가 또 흉노(匈奴)를 두려워하겠는가?" 풍당이 말하였다. "황공하옵고 부끄럽습니다! 폐하께서 설령 염파나 이목을 얻는다고 하실지라도 또한 임용하실 수 없사옵니다." 황상은 대노하여 몸을 일으키더니 궁궐로 돌아갔다. 한참 후에 풍당이 알현하자 원망하여 말하였다. "그대는 어째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욕하였는가?" 풍당은 사죄하며 말하였다. "미천한 사람이 가릴 줄 몰랐습니다."
당시에 흉노는 대거 조나(朝那)를 침입하여 북지(北地)의 도위(都尉) 손앙(孫卬)을 살해하였다. 황상은 마침 흉노의 침입을 우려하고 있었으므로 이리하여 마침내 또 풍당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내가 염파와 이목을 임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가?" 풍당이 대답하였다."저는 상고시대 때 군왕이 장수를 출정시키는 데에는, 떠날 때에 군왕이 몸소 꿇어앉아 수레를 밀면서 '국문(國門) 이내의 일은 군왕이 결정하고 국문 이외의 일은 장군이 결정하라'고 말하였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군공, 작위와 상을 주는 것은 모두 장군이 결정하여 돌아와서 다시 조정에 주청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헛된 말이 아닙니다. 저의 조부는 이목은 조나라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변경을 지킬 때 군시(軍市)에서 징수하는 조세를 모두 병사들에게 상을 주는 데 사용하였는데, 상을 주는 것은 장군이 결정하였으며, 조정은 간여하지 않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에게 중임을 맡겨 그가 책임지고 성공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이목은 비로소 그의 지혜와 재능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선거(選車)된 1,300량(輛)과 승원(乘員), 활을 잘 쏘는 기병(騎兵) 만 3,000명, 정예병사 10만 명을 파견하였는데, 이러한 부대에 의거하여 북쪽으로는 흉노 선우(單于)를 물러쳐 쫓아냈으며, 동호(東胡)를 물리쳤고, 담림(澹林)을 멸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강한 진(秦)나라를 억눌렀고 남쪽으로는 한(韓), 위(魏) 나라에 대항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조나라는 거의 패주(覇主)가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공교롭게 조왕(趙王) 천(遷)이 즉위하였는데 그의 모친은 원래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돈을 벌던 예인(藝人)이었습니다. 조왕 천은 즉위하여 총신(寵臣)인 곽개(郭開)의 참언(讒言)을 듣고 마침내 이목을 주살하였으며 안취(顔聚)가 그를 대신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군대는 패하여 도주하였으며 진나라의 포로가 되었고 나라는 멸망하였습니다. 지금 저는 개인적으로 위상(魏尙)이 운중(雲中) 태수(太守)를 맡고 있을 때 군시(軍市)의 교역의 세금을 모두 가져와서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또 개인의 봉록으로 5일마다 한 차례씩 소를 잡아 빈객, 군리(軍吏)와 친근한 속관들을 청해서 연회를 베푼다고 들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흉노는 먼 곳에 숨어 있고 감히 운중요새에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흉노가 한 차례 침입하였는데, 위상이 병마를 이끌고 공격하였으며 이때 살해된 적군이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그 병사들은 모두 평민 백성의 자제들로서 밭에서 일을 하다가 종군하였는데 어떻게 '척적(尺籍)', '오부(伍符)' 등의 군법 조령(條令)을 알겠습니까? 하루 종일 노력하여 작전을 펴서 적의 머리를 베었고 포로들을 체포하였으나, 관가에 전공(戰功)을 보고할 때 다만 한마디 말이라도 부합하지 않으면 문리(文吏)들은 법령을 인용하여서 그들을 제재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상을 주는 것은 아직 실행하지 못하였지만 그러나 사법관이 법령을 행하는 것은 오히려 반드시 집행하였습니다. 저는 어리석게도 폐하의 법령은 너무나 억지로 남의 결점을 찾아내고자 하며, 상을 주는 데에는 몹시 인색하지만 벌을 주는 데에는 매우 엄격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운중 군수 위상이 위에 보고한 적군을 참살한 숫자가 다만 수급(首級) 여섯만이 차이가 났을 뿐인데 폐하께서는 바로 그를 사법관에게 넘겨 죄를 다스리게 하셨으며, 그의 작위를 삭탈하였고 1년간의 도형(徒刑)에 처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것으로 말하건대 폐하께서는 설령 염파나 이목을 얻으신다고 할지라도 또한 중용하실 수 없으실 것입니다. 저는 확실히 어리석고 우둔하여 기위(忌諱)를 범하였으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문제는 이를 듣고 기뻐하였다. 그리고는 그날로 풍당을 칙사로 임명하여 위상을 사면하도록 하였고 그를 다시 운중 군수에 임명하였다. 아울러 풍당을 거기도위(車騎都尉)에 기용하여 중위(中尉)와 각 군(郡)과 국(國)의 전거부대의 병사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한 문제 후원(後元) 7년, 효경제(孝景帝)가 즉위하여 풍당을 초(楚)나라의 승상에 임명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면직되었다. 한 무제(漢武帝)가 즉위한 후에는 널리 현량(賢良)을 불러들였는데 이때 풍당이 추천되었다. 풍당은 당시에 이미 90여 세가 되어 더 이상 관직을 맡을 수 없었으므로 그의 아들 풍수(馮遂)에게 낭관(郎官)을 맡도록 하였다. 풍수는 자(字)가 왕손(王孫)이고 또한 걸출한 인재였는데, 나와 친한 사이였다.
태사공은 말하였다.
"장계(張季)가 덕망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 논한 것은 엄격하게 법도를 지켜서 황상의 뜻에 아부하지 않은 것이었다. 풍공(馮公)이 장수(將帥)에 대해서 논한 것은 그 말에 깊은 뜻이 있도다. 매우 일리가 있도다! 옛말에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의 친구를 보라'고 하는 말이 있다. 두 사람이 칭송한 바의 말은 낭묘(廊廟)에 기록하여 남겨둘 만하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한쪽에 치우치지도 않고 파당도 만들지 않으니 성왕(聖王)의 도는 평탄하고 창달(暢達)하도다. 파당도 없고 한쪽에 치우치지도 않으니 성왕의 도는 끝없이 넓고 크도다'라고 하였다. 장계와 풍공은 모두 이러한 뜻에 가깝다."
<馮唐>者, 其大父<趙>人. 父徙<代>. <漢>興徙<安陵>. <唐>以孝著, 爲中郞署長, 事<文帝>. <文帝>輦過, 問<唐>曰:⌌父老何自爲郞? 家安在?⌏ <唐>具以實對. <文帝>曰:⌌吾居<代>時, 吾尙食監<高袪>數爲我言<趙>將<李齊>之賢, 戰於<鉅鹿>下. 今吾每飯, 意未嘗不在<鉅鹿>也. 父知之乎?⌏<唐>對曰:⌌尙不如<廉頗>=<李牧>之爲將也.⌏上曰:⌌何以?⌏<唐>曰:⌌臣大父在<趙>時, 爲官(卒)[率]將, 善<李牧>. 臣父故爲<代>相, 善<趙>將<李齊>, 知其爲人也.⌏ 上旣聞<廉頗>=<李牧>爲人, 良說, 而搏髀曰:⌌嗟乎! 吾獨不得<廉頗>=<李牧>時爲吾將, 吾豈憂<匈奴>哉!⌏<唐>曰:⌌主臣! 陛下雖得<廉頗>=<李牧>, 弗能用也.⌏ 上怒, 起入禁中. 良久, 召<唐>讓曰:⌌公柰何衆辱我, 獨無閒處乎?⌏<唐>謝曰:⌌鄙人不知忌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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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是之時, <匈奴>新大入<朝那>, 殺<北地>都尉<卬>. 上以<胡>寇爲意, 乃卒復問<唐>曰:⌌公何以知吾不能用<廉頗>=<李牧>也?⌏ <唐>對曰:⌌臣聞上古王者之遣將也, 跪而推轂, 曰閫以內者, 寡人制之;閫以外者, 將軍制之. 軍功爵賞皆決於外, 歸而奏之. 此非虛言也. 臣大父言, <李牧>爲<趙>將居邊, 軍市之租皆自用饗士, 賞賜決於外, 不從中擾也. 委任而責成功, 故<李牧>乃得盡其智能, 遣選車千三百乘, 彀騎萬三千, 百金之士十萬, 是以北逐單于, 破<東胡>, 滅<澹林>, 西抑彊<秦>, 南支<韓>=<魏>. 當是之時, <趙>幾霸. 其後會<趙王遷>立, 其母倡也. <王遷>立, 乃用<郭開>讒, 卒誅<李牧>, 令<顔聚>代之. 是以兵破士北, 爲<秦>所禽滅. 今臣竊聞<魏尙>爲<雲中>守, 其軍市租盡以饗士卒, [出]私養錢, 五日一椎牛, 饗賓客軍吏舍人, 是以<匈奴>遠避, 不近<雲中>之塞. 虜曾一入, <尙>率車騎擊之, 所殺甚衆. 夫士卒盡家人子, 起田中從軍, 安知尺籍伍符. 終日力戰, 斬首捕虜, 上功莫府, 一言不相應, 文吏以法繩之. 其賞不行而吏奉法必用. 臣愚, 以爲陛下法太明, 賞太輕, 罰太重. 且<雲中>守<魏尙>坐上功首虜差六級, 陛下下之吏, 削其爵, 罰作之. 由此言之, 陛下雖得<廉頗>=<李牧>, 弗能用也. 臣誠愚, 觸忌諱, 死罪死罪!⌏ <文帝>說. 是日令<馮唐>持節赦<魏尙>, 復以爲<雲中>守, 而拜<唐>爲車騎都尉, 主中尉及郡國車士.
史記卷一百二 張釋之馮唐列傳第四十二
주5) 소강절 시 한수 흔히 들었지만 오늘도 새롭다.
월도천심처月到天心處하고
달은 하늘 한가운데 이르고,
풍래수면시風來水面時)라
바람은 수면에 불어오는구나.
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를
이러한 맑고 상쾌한 맛을,
요득소인지料得少人知라
세상에 아는 사람 적으리라.
.
주6) 다산이 논박한 과거제도 병폐와 부정과거에 대한 글향시 요언(鄕試堯言)
경시(京試)에서 생기는 폐단은 지금은 우선 생략하고(科制에 대해서는 별도 저술이 있음), 향시에서 생기는 폐단을 시험삼아 말하겠다. 향시란 바로 하나의 전장이다. 무릇 응시(應試)하고자 하는 자가 글을 사고 글씨를 사는 것을 지금에는 큰 문제로 삼지 않는다.
장사(壯士)를 모집하고 무뢰한(無賴漢)을 모아서 선접군(先接軍)이라 부르는데, 나무를 베어서 창을 만들고 대[竹]를 깎아서 긴 창을 만들며, 우산대 끝에 쇠를 씌우고, 발사(茇舍)의 서까래 끝을 칼처럼 뾰족하게 하고서, 거적자리를 지고 새끼를 허리에 동이며, 등을 들고, 깃발을 드는데, 부릅뜬 눈이 방울처럼 불거지고 거친 주먹은 돌이 날 듯한다. 머리에는 검은 종이로 만든 건(巾)을 쓰고, 몸에는 붉은 천으로 기운 저고리를 입어, 형용은 강도와 다름없는데 칭호는 문서 없는 노유(奴儒)라 한다. 나는 듯 장옥에 달려들면 형세가 풍우 같아 경관(京官)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겁을 먹고, 금관(禁官)은 머리를 감싸고 숨을 곳을 찾는다. 당당한 예의지국에서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것이 바로 나라에서 어진이를 조정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이르니 또한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다.
수십 년 이래로 부역이 번거로워서 백성의 재물이 날로 줄어들어 고가유족(古家遺族)과 전야 한사(田野寒士)가 십중 팔구는 굶주려 죽었고, 죽다 남은 인생도 쓸쓸하고 외롭게 지내고 있으니 비록 몸에는 서(書)를 통달하고 입은 6체(體)의 글을 토해낸다 할지라도 노자를 마련하여 시장(試場)에 나올 수 없어서 홀몸으로 걸어서 가며, 겨우 붓과 종이를 사서 자신이 짓고 자신이 써서 어지러운 시축(試軸) 속에 던져넣으니, 오직 서리(胥吏)의 족속과 장사치의 자식과 재물 많은 큰 부자로서 한 도에 지목되는 자라야 바야흐로 과거에 마음을 두게 된다.
매양 6월 보름이면 송도 상인과 의논하여 환전(換錢) 100~200냥을 얻어서 큰 말에 높은 안장으로 우쭐대면서 서울에 올라간다. 이웃 마을 사람이 와서 물으면 “근래 과거는 동(銅)이 아니면 안 된다(銅은 돈을 이르는 것이 아니고 방언에 절(節 : 뇌물)을 동이라 이르는 것임). 내가 지금 상경하면 시관을 묶을 터이다. 내 돈 100냥으로 당자(當者 : 시관)에게 미끼로 주고 또 반백(半百 : 50냥)으로 지금 재상에게 뇌물하겠다. 이렇게 되면 시관은 겉으로는 재상의 부탁에 순응하면서 내심으로는 뇌물 생각에 끌리게 될 것이니 대저 이런 다음이라야 나의 일이 염려 없게 된다.”라고 한다. 이에 좌석이 시끄럽게 웃으며 당연한 말이라 한다.
10년 전에 시호(詩豪)ㆍ부객(賦客)의 글값은 그래도 비싸서 선금으로 반백을 주고 해액(解額)에 참여하게 되면 또 반백을 주었었는데, 수년 이래로는 시가 비록 강백(姜柏) 같고 부가 남국(南國) 같아도 두 장 값이 닷냥을 넘지 않는다. 이와 같음은 어째서인가? 글을 사는 자의 말은 “내가 응시하는 데에 특히 네 글을 믿는 것이 아니다. 글은 겨우 모양과 틀만 갖추면 문득 방(榜)에 참여하게 되어 있으니, 잘하고 잘못함은 본래 물을 것도 없다. 네가 만약 좋아하지 않는다면 우리 집에서 먹여주는 훈장 이(李) 아무도 한편쯤은 지을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너만 찾겠는가?”라고 한다.
그러면 사방에서는 서로 찬성하며 통달한 언론이라 한다. 대저 시골 유사가 글 공부를 하는 것은 혹 과거를 해서 제 몸을 일으키거나, 혹 글을 팔아서 제 집을 넉넉하게 하기 위함인데, 지금은 두 가지 희망이 모두 끊어져서 구족이 다 비웃는다. 비록 향시하는 해를 당하나 과거를 위해 공부한 사람이 아주 없으니 이것으로써 세상 변해가는 꼴을 볼 수 있다. 놀랍고 부끄럽고 걱정스런 말을 한입으로는 말하기 어렵겠기에 지금은 아울러 생략한다.
대략 과장에 들어오는 사람이 적으면 과장 비용이 가벼워진다. 지금에 첫째 요무(要務)는 거원(擧員 : 과거에 응시하는 인원)을 깨끗하게 도태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 조흘강(照訖講)이 본래 좋은 법은 아닌데, 더구나 지금 기강이 해이해졌으니 어떻게 시행하겠는가? 우리나라에 과거가 시작되기는 고려 광종(光宗) 때부터였다. 시주(柴周) 사람 쌍기(雙冀)가 사신을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가 병이 나서 돌아가지 못하고, 드디어 과거하는 법을 우리나라에 전했다. 중국에서 시행하는 과거 규정은 당나라 초기부터 벌써 향거(鄕擧)하도록 했고, 천거가 있은 다음이라야 과거에 응시했으므로 응거(應擧)라고 이른 것인데, 지금 우리나라 사람은 천거도 없이 응시하면서도 외람되게 응거라 하니 명실이 서로 맞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다. 옛적에는 공적을 아뢴 다음이라야 공적을 고찰했는데 지금은 아뢰지 않아도 고찰하니 이것도 한 가지 잘못이다(수령이 공적을 아뢴 다음 조정에서 공적을 고찰함은, 거자가 試券을 바친 다음이라야 시관이 시권을 고찰하는 것과 같음).
중국에는 천거를 받은 다음이라야 응거(應擧)하는데, 지금은 천거하지 않아도 응시하니 또 하나의 잘못이다. 그러나 지금 향거하는 제도를 창설하고자 한다면, 온 나라가 눈이 둥그래져서 옛말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말로써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지금 경시관(京試官)이 내려오는 날이면, 군현에서는 으레 응시하는 사람의 명단을 꾸미고 별도로 책을 만들어서 경시관에게 보고하는데, 다만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조금은 증거 할 수 있다.
비국(備局)에서 논계하고 대신이 연주(筵奏)해서 이에 8도에 행회(行會 : 공문을 보내서 알림)하기를, “향거하는 법을 비록 갑자기 논의하기는 어려우나, 응시하는 자의 기록은 마땅히 확실하게 하라. 거자(擧子)는 본래 정원이 있으니 절제(節制)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제 본도(本道)의 세 차례 식년방(式年榜)을 가지고 여러 고을에서 발해(發解)한 총수를 조사한 다음, 그 배수를 더해서 응시하는 정원으로 한다.”라고 한다.
가령 전주부(全州府)에, 기사년(己巳年) 가을 양장(兩場)에 발해한 자가 30명, 임신년 가을 양장에 발해한 자가 24명, 을해년(乙亥年) 가을 양장에 발해한 자가 26명이었다면 그 총수는 80명이다. 그 배수를 더하면 160명인데, 이 160명을 전주에 응시하는 정원으로 정한다.
가령 순창군(淳昌郡)이 기사년 가을 양장에 발해한 자가 7명, 임신년 가을 양장에 발해한 자가 3명, 을해년 가을 양장에 발해한 자가 4명이라면 그 총수는 14명이다. 그 배수를 더하면 28명인데 이 28명을 순창에서 응시하는 정원으로 정하는 것이다.
가령 강진현(康津縣)에 세 차례 식년 양장에 발해한 자를 도합해도 3명에 불과하고 배수를 더해도 6명이니, 이 6명을 드디어 강진에서 응시하는 정원으로 하는 것이다.
가령 광양현(光陽縣)에 세 차례 식년 양장에 발해한 자를 도합해도 2명에 불과하니 그 배수를 더해도 4명뿐이다. 특히 1명을 보태서 5명을 광양현에서 응시하는 정원으로 하는 것이다.
가령 진도군(珍島郡)에 세 차례 식년 양장에 발해한 자를 도합해도 1명에 불과하고 그 배수를 더해도 2명뿐인데, 특히 2명 보태어서 4명을 진도군에서 응시하는 정원으로 정하는 것이다.
만약 한두 고을이 세 차례 식년에 발해한 자가 도통 없으면 특히 3명을 허해서, 이 3명을 그 현에서 응시하는 정원으로 정한다.
무릇 세 차례 식년, 발해한 방에 비록 1명이 세 번 합격했더라도 3명으로 계산하고 1명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이와 같으면, 전라도 한 방 두 장(場)에 각 90명이고, 세 차례 식년을 통계하면 그 발해한 자가 540명(6×9=54)인데 그 배수를 더하면 1천 80명이다. 또 영쇄하게 증가되는 수를 보태더라도 전라도에서 응시하는 인원은 도합 1천 100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 곱하는 외에는 정원을 증가할 필요가 없다. 전주ㆍ남원(南原)ㆍ광주(光州)ㆍ나주(羅州) 등 정원이 많은 고을에서 각각 4~5명을 삭감하여, 진도(珍島) 등 구석지고 작은 고을에 약간 증가해주어 전라도의 응시하는 인원이 끝내 1천 80명을 넘지 않도록 한다.
7도 유생으로서 비록 경시(京試)에 발해한 자가 있더라도 통계해서 증원하는 것을 허하지 않으며 서울 유생으로서 향시에 와서 해액(解額)을 차지한 자가 있는 것은 조사해서 제외하지 말고 그대로 본도 해액으로써 계산한다.
다른 도도 모두 이와 같다.
《대전(大典)》에 향시 정원이 초장(初場)과 종장(終場)에, 충청도와 전라도는 각 90명이고 경상도는 100명이며, 강원도와 평안도는 각 45명이고, 황해도와 영안도(永安道)는 각 35명이었다.
외방 7도는 양장에 초시 정원이 도합 880명인데, 세 차례 식년을 통계하면 2천 640명이고 그 배수를 더하면 5천 280명이다.
이 5천 280명을 외방 7도의 향시에 응시하는 정원으로 한다.
《대전》에, 경시(京試) 정원이 초장과 종장에, 한성시(漢城試)는 각 200명이고 경기는 각 60명이어서 도합 520명이다. 세 차례 식년을 통계하면, 1천 560명이고 그 배수를 더하면 3천 120명이다.
이 3천 120명을 경시에 응시하는 정원으로 한다.
경기 4도(都)와 여러 고을에 한 방(榜) 두 장 정원이 모두 120명이니 세 식년을 통계하면 360명인데 그 배수를 더하면 720명이다. 이 720명을 경기에서 응시하는 정원으로 한다.
경기에 응시하는 정원은, 발해(發解)의 많고 적음으로써 그 문풍(文風)을 분별할 수는 없으니 묘당에서 회의하여 그 정원을 정한다. 송도(松都)는 몇 사람, 심도(沁都)는 몇 사람, 화성(華城)은 몇 사람, 광주(廣州)는 몇 사람 여주목(驪州牧)은 몇 사람, 인천부(仁川府)는 몇 사람, 양근군(楊根郡)은 몇 사람, 과천현(果川縣)은 몇 사람으로 하느냐 하는 것은 세 차례 식년 방목(榜目)을 가지고 대략 근거로 하고 참작해서 논의한 다음 결정한다.
송도와 심도 같은 데에는 한결같이 세 차례 식년 방목에 준해서 응시하는 정원을 정한다.
한성부는 한 방 양장(兩場)에 정원이 공 400명이니 세 차례 식년을 통계하면 1천 200명이다. 그 배수를 더하면 2천 400명이니 이 2천 400명을 한성의 정원으로 한다.
한성에 응시할 정원 2천 400명을 묘당에서 회의하고 48방에 나누어 배정한다.
이에 48방에 그 인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천주(薦主)의 원수를 정하는데 거자 5명마다 천주 1명을 둔다.
가령 명례방(明禮坊)에 거자 정원이 50명이면 천주 10명을 두고, 반석방(盤石坊)에 거자 정원이 45명이면 천주 9명을 둔다.
천주는 본방에 현재 거주하는 사람으로 초계(抄啓)하는데, 먼저 승지(承旨)ㆍ옥당(玉堂)ㆍ춘방(春坊)을 뽑고, 다음은 양사(兩司)와 한림ㆍ주서(注書)를 뽑으며 다음 낭서(郞署 : 낭관)를 뽑는다. 만약 문신만으로 부족하면 음관(蔭官) 중에 생원ㆍ진사로서 벼슬길에 들어서서 문명(文名)이 있는 자를 천주로 삼는다.
가선(嘉善) 이상의 품계는 천주가 될 수 없다.
천주 한 사람이 다섯 사람씩을 천거하는데 중복 천거된 자가 있으면 물리치고 다시 추천해서 그 수효에 보충한다.
경기에는 모두 그곳 수령에게 기록해서 천거하게 하는 것이 외방 7도의 예와 같다.
무릇 천거하는 법은 먼저 경기 천장(薦狀)을 받으며, 다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이에 48방에 천거 단자를 바치도록 한다.
무릇 경기에서 올린 천거 단자에 기록된 자는 다시 서울 천거 단자에 들지 못한다.
경기에서 올린 천거 단자는 세 차례 식년 호적을 고찰하고 서울에서 올리는 천거 단자는 호적을 관계하지 않는다.
먼 곳 수령 중에 혹 선거를 공정하게 하지 않아서, 문장에 능숙한 선비가 천거 단자에 누락되었으나 고소할 곳이 없다면 또한 생각할 바이다. 매양 초시할 시기를 당하면 세 달 전에 비천당(丕闡堂)에다 시장을 개설하고, 7도에서 빠진 선비로서 스스로 와서 시험해보기를 청하는 자와 원통함이 있는 자를 시험하여, 본도에 행회(行會)해서 녹취(錄取)하게 한다.
재사를 시험해서 혹 굉장한 문사(文詞)와 박흡(博洽)한 학식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가 있으면, 그 고을 수령을 파직시킨다. 만약 그 사람의 문사가 졸렬해서 원통하다 이를 만하지 못한 자가 이 시험에 함부로 왔으면 매양 10여 명을 뽑아, 먼 변지(邊地)에 충군(充軍)시켜 글 못하는 자가 함부로 응시해서 요행으로 합격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혹자는 빠진 재사를 시험하는 데에도 제 마음대로 응시하도록 함은 불가하고 원통함을 일컫는 자도 먼저 토정사에 가서 호소하도록 함이 마땅하며, 관찰사가 면시(面試)하여 몇 사람을 뽑아서 원안을 고침이 가하다 한다.
또 여러 도에 유시하기를, “이번에 이 향시 정원을 임시로 이와 같이 정한다. 그러나 이번 식년 방이 나온 다음에는 다시 계유년 방과 병자년 방을 통계해서 세 식년(式年)으로 하고 그 동안에 발해한 인원의 많고 적음으로써 거액을 개정할 것이다. 그리고 오는 임오(壬午) 식년에 향시 방이 나온 다음에 또 개정해서 영구한 정원으로 할 것이다. 이후에는 혹 30년에 한번 고쳐서 그 문풍의 성쇠를 징험할 것이니 모름지기 각자 힘써서, 오늘날 정원의 많음을 믿지 말고 오늘날 정원의 적음을 염려하지 말라” 한다.
혹자는 “수령이 사람을 천거하면서, 혹 권문(權門)의 청탁을 받고, 혹은 사사 뇌물의 다소를 보아서, 고기 눈깔을 취하고 구슬은 버리며, 무부(珷玞 : 옥과 비슷한 돌)를 품고 옥을 버린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라고 한다. 나는 답하기를 “진실로 이런 폐단이 있다. 그러나 수령된 자가 비록 방자해서 꺼림이 없으나 또한 백성의 기림을 기뻐하고 백성의 원망을 괴롭게 여기지 않는 자는 없다.형 되기도 어렵고 아우 되기도 어려우며 노(魯) 같고 위(衛) 같은 자는 혹 청탁과 뇌물로써 뽑기도 버리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한 고을의 큰 재주로서 무리 속에 빼어나서, 거벽ㆍ교초(翹楚)인 자를 수령이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매양 보면 수령은 비록 글 못하는 사람이라도, 사사로 읍자(邑子 : 白日場)를 시험하는 데에도 반드시 물색하고 염방(廉訪)해서 명사를 뽑고자 하는데, 하물며 이제 새 영(令)이 나온 처음, 그 거인을 천거하는 데에 어찌 사정에만 따를 이치가 있겠는가? 혹 손을 쓰는 것은 이 사람을 뽑아도 되고 저 사람을 뽑아도 될 경우에 불과할 뿐이니 설령 요행으로 방(榜)에 참여되는 것이 있더라도 오늘날 어지럽게 응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낫지 않겠는가?” 했다.
혹자는 “수령이 선발하는 날에 그 기예를 사사로 시험하면(백일장) 어떻겠나?” 하고 묻기에 답하기를 “한 장의 잘잘못으로서 문품(文品)을 정하기에는 부족하니, 사시(私試)가 공천만 못하다. 고을 수령이 고을 안 문사 중 60세 이상으로 과업(科業)을 그만두고 퇴로(退老)한 열 사람을 뽑아 향교에 모으는데 수령이 주벽(主壁)이 되고 열 사람은 동서로 벌여앉은 다음 권점해서 뽑는다.” 했다.
가령 창평현(昌平縣)에 거액이 12명이면 먼저 노유(老儒) 열 사람에게 각각 세 사람씩을 천거하도록 하는데, 그 중에도 나이가 많은 여섯 사람은 한 사람씩을 더 천거하여 36명의 성명(姓名)을 열기(列記)하고 그 사람의 이름 밑에 공론에 따라 권점한다.
한 사람마다 각각 열두 사람을 권점하여 권점이 끝나면 고을 수령에게 올린다. 수령은 또 스스로 열두 사람을 권점하는데, 노유가 권점한 것은 한 권을 1분으로 셈하고 수령이 권점한 것은 한 권을 3분으로 셈해서 수령의 권한이 중하도록 한다. 이에 36명을 모두 조사하여 권점이 많은 열두 사람을 뽑아서 시장(試場)에 나가도록 한다.
가령, 남원부에 거액이 60명이면, 먼저 노유 열 사람에게 각자 18명씩을 천거하도록 해서, 통계 180명의 성명을 열기하고 180명의 이름 밑에다 공론에 따라 권점하기를 위에 말한 법대로 하면 노유 한 사람이 각 60명을 권점하게 된다.
경성 48방(坊)에서 권점해서 완천(完薦)하는 것도 군현에서 하는 법과 같다.
혹자는 “경성에는 거자의 정원이 너무 적으니 조금 넓혀야 다툼이 없을 것이다. 시골 선비는 비록 다투더라도 수령이 진정시킬 수 있으나, 경성 귀족의 아들은 문벌과 덕망이 비슷하여 상하를 따질 수가 없는데 하나라도 빠진다면 누가 진정할 수 있겠는가? 시골에는 당론(黨論)이 심하지 않으나 경성 사환하는 집은 당하는 풍습이 이미 고질이 되었다. 그 뽑고 버림이 반드시 공평하지 못한데 거액이 너무 적음은 다투게 되는 단서이니 그 정원을 조금 넓힘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한다.
혹자는 “경성 거액만을 특히 조금 넓혀준다면 시골 선비들의 원망이 어찌 없겠는가?” 하기에 답하기를 “시액(試額)을 조금 넓히는 것이라면 시골 선비들이 원망하는 것도 가하나 거액을 조금 넓히는 것이 시골 사람에게 무슨 해가 되겠는가? 필경에 뽑는 것은 경시 정원에 넘지 않으니, 시골 선비에게 있어서는 털끝만큼도 원망할 것이 없다.” 했다.
대저, 거액을 배정하는 데에 위의 법을 쓰면 큰 폐단이 없을 듯하다. 설령 작은 폐단이 있더라도 반드시 오늘날의 난잡한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다만 초장(初場)과 종장(終場)에 네 가지 체로 시험하고 대과ㆍ소과로 나누어 두 가지 시험으로 하는 것은 모두 중국 법이 아니다. 중국 법은 예부터 그렇지 않았는데 우리나라 법은 어디에 의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과장에서 마땅히 시험할 것은 첫째 책(策), 둘째 논(論), 셋째 표ㆍ전, 넷째 경의(經義), 다섯째 시율(詩律), 여섯째 잠ㆍ명(箴銘)이고, 이외에는 모두 무익한 글이다. 여섯 체 글을 3장으로 나누어 첫날에는 시율 세 수, 잠ㆍ명 한 수를 시험하고, 둘째 날에는 경의 삼도(三道), 표ㆍ전 일도를 시험하며, 마지막 날에는 사론(史論) 삼도, 대책 일도를 시험하는데, 대ㆍ소과를 합쳐서 하나로 만들고 매양 300명을 뽑아서, 60명은 문과로, 240명은 진사로 하고, 3년 만에 대비하는 외에는 비록 나라에 경사가 있더라도 경과(慶科)를 설시하지 않는다. 모든 증광(增廣)ㆍ별시(別試)ㆍ정시(庭試)ㆍ알성(謁聖)ㆍ절일제(節日製)ㆍ춘추도기(春秋到記)ㆍ황감시(黃柑試)ㆍ승보(陞補)ㆍ학제(學製)ㆍ사서(四書)ㆍ소학(小學) 시험도 공도회(公都會)ㆍ도과(道科) 따위는 하나같이 모두 정파한 뒤라야 과규(科規)가 크게 바로잡아 질 것이나, 이것은 쉽지 않으므로 지금은 우선 생략한다.
경성의 경상 집 자제로서 능히 과문 공부를 못한 자를 위하여 음사(蔭仕)하는 법을 조금 변경한다. 음사 중에 세마(洗馬)ㆍ교관(敎官) 두 자리와 성균관 학정(成均館學正) 한 자리를 음사의 자리로 한다. 무릇 음관으로 이 세 자리를 거쳐서 벼슬길에 들어선 자는 헌부(憲府)와 이조와 경연과 동궁(東宮)의 관직도 얻지만, 또 산림(山林)이라 지목하지 않으면 인재가 막히지 않고 선거도 깨끗해져서, 차작 진사(借作進士)ㆍ차작 급제의 폐단이 지금같이 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혹자가 “과문 여섯 가지 체(體)를 한 사람에게 두루 익히도록 한다면 어찌 응시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라고 하기에 답하기를 “국가에서 과거를 설시하는 것은 본래 사람을 얻고자 함이니 반드시 학식이 넓고 문장이 굉장해서 무리에서 뛰어난 뒤라야 바야흐로 등용하는 것이니 능하지 못한 사람을 어디에 쓰겠는가? 지금 시골 어리석은 아이가 겨우 《소미통감(少微通鑑)》 서너 권과 당시(唐詩) 수십 수(首)를 읽고는 항우(項羽)와 패공(沛公)을 제목으로 한 시 50~60수를 짓는데 미친 말과 망령된 이야기로 마음을 놀라게 하고 눈을 참담하게 한다. 이런 한 가지 재주를 가지고 망령되게 과거에 붙은 자가 대부분이니 반드시 여섯 가지 체를 두루 시험하고 또 하루 안에 각각 삼도ㆍ사도를 시험한 다음이라야 능하지 못한 자는 그만두게 되고 뛰어나게 총명한 한 사람이 그 사이에 나오면 구족이 힘을 합하여 거인이 되도록 해야 바야흐로 중국 풍속과 같이 문풍이 성해질 것이다.” 했다.
과거법만으로는 천하 인재를 다 취할 수 없다. 산림에서 글을 읽고 비상한 재능을 품었으나 거인이 되기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천진(薦進)하는 길을 열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사람들에게 세마(洗馬)ㆍ교관(敎官)ㆍ학정(學正)이 될 수 있도록 한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어진이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나 지금은 우선 생략한다.
만약 과규(科規)가 크게 바로잡아지면 응시하는 연령을 40세로 한정함이 마땅하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55세로 제한함이 마땅하며, 56세 이상은 응시하는 것을 허하지 말 것이다.
혹자는 “평생토록 공부해서 늙은 것도 불쌍한데 갑자기 나이를 제한해서 응시하지 못하게 한다면 또한 비참하지 않은가?” 하기에 답하기를 “나라에서 중하게 여기는 바는 사유(四維)뿐이니 예ㆍ의ㆍ염ㆍ치(禮義廉耻)를 기르지 않을 수 없다.” 했다(쌍기가 과거법을 세운 것이 현덕(顯德 : 後周 世宗의 연호, 954~958) 5년 무오(戊午)였으니, 가경(嘉慶 : 淸 仁宗의 연호, 1796~1820) 22년 정축(丁丑)까지는 8백 50년이 됨).
[주D-001]유목지(劉穆之) : 남송(南宋) 사람.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에 있으면서 안으로 조정을 총괄하고 밖으로 군수(軍需)를 공급했는데, 결단하는 것이 물 흐르듯 해서 일에 막힘이 없었음.
[주D-002]순(荀)ㆍ범(范) : 순숙(荀淑)과 범방(范滂)을 이름. 순숙은 후한 사람인데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었고, 일에 임해서는 명쾌하게 처결했다. 그의 아들 8형제도 모두 덕업을 성취해서 세상에서 순씨 8룡(龍)이라 했음. 범방은 후한 사람. 효렴광록(孝廉光祿) 4행(行)으로써 천거되어 청조사(淸詔使)로써 기주(冀州)에 나갔는데 수레를 타고 고삐를 잡자 개연히 천하를 맑게 할 뜻이 있었다 함.
[주D-003]왕(王)ㆍ사(謝) : 진(晋)의 왕도(王導)와 사안(謝安). 두 집이 모두 명가(名家)였음.
[주D-004]벌레가 잎사귀를 새기듯, 범을 수놓듯 : 이 말은 기려(綺麗)한 시문을 민첩하게 지어내는 자를 일컫는 말.
[주D-005]발사(茇舍) : 군사들이 야영하는 막사. 《주례》하관 대사마(夏官大司馬)에 “中夏敎茇舍注茇舍草止之也 軍有草止之法”이라 보임.
[주D-006]형 되기도 …… 위(衛) 같은 자 : 이 말은 노(魯)는 주공(周公)의 후손이고 위(衛)는 강숙(康淑)의 후손이어서 본래 형제(兄弟)의 나라였음. 후세에 형제간을 노위라 일컫게 되었음.
[주D-007]거벽(巨擘)ㆍ교초(翹楚) : 무리에서 뛰어난 자를 말함.
[주D-008]주벽(主壁) : 좌우로 벌여 앉은 자리의 가운데에 위치한 주되는 자리, 또는 그 자리에 앉은 사람
주7) 정조대왕이 어느 눈 쌓인 겨울에 가난과 불행 병고 속에 죽어간 한사들을 생각하면서 남긴 홍재전서의 한구절
홍재전서(弘齋全書) 홍재전서 제163권 일득록(日得錄) 3 문학(文學) 3 정조(正祖)
하교하기를, “나는 경사(經史)에 대해서 ‘이것을 좋아하여 피로한 줄도 모른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또 간혹 문장에까지 미치기도 한다. 서늘한 기운이 대지에 스며들어 기무(機務)에 조금 여가가 생길 때면 한 질의 책을 읽는 것을 연례적인 일로 삼았는데, 올겨울에는 《팔자백선(八子百選)》을 일과(日課)로 삼고자 한다. 눈 덮인 밤 글을 읽거나 맑은 새벽 책을 펼치는 때에 조금이라도 싫증이 나면 문득 달빛 아래에서 입김을 불어 꽁꽁 언 붓을 녹이는 한사(寒士)와 궁유(窮儒)를 생각하고는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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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생각나는 한시 하나 올리죠
이항복이 여덟살에 지었다는 시를보니 율곡이 여덟살에 지었다는 한시를 올려 보겠습니다
화석정
임정추이만
소객의무궁
원수연천벽
상풍향일홍
산토고윤월
강함만리풍
새홍하처거
성단모운중
동양화 한폭 같은데 우리 선조들은 놀라워라
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왕기철의 돈타령이 참으로 처연하게 들리네여........
참으로 옮은 말입니다 다시한번 가슴에 담아야 할 글귀인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의 복지 종류는 약 300여가지라고 합니다..담당 공무원 조차 무순 복지정책이 있는지 모른다, 합니다.
초등학교 전면 무상급식...저는 소인배이니 정치하시는 봉황에 뜻은 모릅니다만은 ..아니 왜..부유층 자식에게 까지 무상 급식입니까?..그 천문학적인 각종 무상에 재원은 어디서 충당 할 것입니까?..16억 땅을 매입 한 사람이 빈곤 수당을 타간 사실이 밝혀지고 장애인 등록 차량도 대부분 가짜로 수 없이 많은 해택을 누린다 합니다.관할에서 사람이 굶어 죽게한 안양 시장에게도 정식으로 항의 서한을 보낼 것입니다..세상에서 춥고 굶어 죽는 서름이 제일 크다합니다..각종 복지정책에 복지금은 줄줄이 세고 ..
이집트 사태를 보십시요..청년 실업에 굶주림에서 폭발 했다합니다..
우리와 한 핏줄 북한 수 없는 사람이 굶어 죽어도 수천억 상당의 별장을 짓고있다고 합니다..
옛 고문에 굶어 죽는 백성이 있으면 그 나라의 군주는 군주라 할 수 없고..
식솔이 굶주린 가정에 가장을 누가 가장이라 하겠는 가 ..했다 합니다..
절대적 빈곤에다가 상대적 빈곤의 문제까지 겹쳐 생긴 문제입니다.
정말 절대적 빈곤의 문제는 사회구조적으로 꼭 해결해야 합니다.
여기에 과실의 불균형한 배분이라는 뿌리깊은 관행을 갖고 있는
영화업계와 연예계의 뿌리깊은 관행을 어서 빨리 극복해야 할 텐데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냉철하게 문제의 핵심을 찔러 주셨군요.
만우님 시간되시는대로 세부적 논평을 조금 더 해주심이 어떨지요?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옛말이 생각납니다.
정말 그래서 時今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는 걸까요?
寒士는 또한 '閒士'임을 소강절의 시로써 짐작할 수 있는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두 실업으로 인해 경제적 고통을 받는 선비들인 것 같네요.
딱히 글 잘짓는 선비더러 힘쓰는 막일을 하라는 건, 제 능력밖의 일을 하라는 것과 다를바
없으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일로써 소득을 하고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게
마땅한 일인데, 그렇질 못하니 이렇게 슬픈 일이 수천년 동안 계속 반복해 일어나네요.
이제 나랏님이 가난한 생민들을 돌보고 복지국가를 만들어 ...빈부격차를 줄여야 합니다...
숙제이지요 ...
올려주신 글 잘 읽고 갑니다
김기자님 사진 선물에 답하려면 아직 멀었답니다.
저에 집안 실화입니다..내력이지요..그러니까..1850년 무렵 호남에 대 기근이 닥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해서 논 전답이 헐갑에 팔리고 심지어 딸을 첩실로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합니다..소인에 증조께서는 조상에게 물려 받은 논을 팔 수 없다하여..굶주림 끝에 몸이 부은병 부황이 나서 돌아 가셨다합니다..30년전 돌아가신 할머니 증조 제사상에는 밥을 수북히 담아 올려라 유언 하셨지요.즉 고조때 부터 물려온 온 논 2000평을 볼 때면 증조 할아버님 생각이 무척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방송에 소개해 보겠습니다.
기본 자료 이 메일로 전해 주세요.
다시 한번 읽어 보았습니다
다음에 또 읽어 봐야겠어요
하여간 한사종류는 많이도 알았습니다
골병한사 군자한사 불운한사 나그네한사 버림받은한사 원통절통한사 쾌남한사 건달한사 대박한사 달인한사
정곡을 찔러 주시는군요. 추가할 한사 이야기 전해 주세요.
월초님은 절대 한사 주변에 놀지 마시고, 지금처럼 풍류랑으로
즐겁고 다복하게 우리와 함께 하였으면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