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군당 연락부의 레포가 되어
산외면 다원이라는 동네는 남쪽 단장천까지는 넓은 논이 펼쳐져 있고 동네 앞 언양고을로 넘어가는 도로부터 동내까지는 기름진 밭으로, 그야말로 문전옥탑이라 할 부자 동네이다. 이 동네는 안동손씨(安東孫氏)(주1)의 집성촌인데 이가왕조봉건국가시대에 주로 무반 출신이 많은 양반 동네이다. 동네의 서쪽에는 예부터 다원(茶園)이 있어, 그래서 동네 이름까지 다원이라 하는 것이다. 또 북쪽에 있는 동네 뒷산과 동쪽의 산에는 대나무 밭이 무성해서 족동(竹洞)이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행정지명으로 이를 합쳐 다죽리(茶竹里)이다. 이 동네는 동쪽에는 밀성(密城)손씨도 집성촌으로 이루고 있어 이곳을 특히 죽동(竹東)이라 부르고 이와 맞추어 서쪽을 죽서(竹西)라고도 부른다. 남자들이 이 동리의 안동손씨 집으로 장가를 가면 택호를 다원 또는 죽서로 부르게 되고 밀성손씨 집으로 장가를 가면 죽동 또는 죽남(竹南)으로 받는다. 그런데 이 동네로, 그때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는 전국이 동행금지라 대로로 그냥 활보해서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 동네 한가운데는 면사무소가 있고 또 경찰관지서도 있어서 당직경찰이 있고 도로 가의 경비초소에는 면민들의 청년들을 동원해서 번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런 정황을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은 단장천 건너편 농로를 따라 오다가 죽남 동네 맞은편에서 작전을 짰다. 죽남 동네에는 나의 할아버지 사촌누이가 밀성손씨집에 시집가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강을 건너기 위해 선발을 내가 맡았다. 만일 순찰에 걸리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 동네에서 방앗간을 하고 면유지인 할아버지의 사촌매부 손진설(孫振卨) 씨의 이름을 대면 무사통과할 것이고, 그래서 순찰이 지나가고 나면 나의 신호에 따라 강을 건너오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작전을 짜고 내가 제일 앞장에 서고 그 뒤에 조금 거리를 두고 강을 건너게 되었다. 겨울철이라 물은 얼마 안 되지만, 좁은 물길에 돌로 쌓은 다릿발에다 띠다리(주2)가 놓여있었다. 먼저 내가 재빨리 건너 허리를 숙이고 주변을 살폈더니 온 세상이 고요했다. 나는 돌을 ‘따따딱 딱’ 하고 뚜드렸더니 두 분이 한 분 씩 건너왔다. 두 분은 허리를 낮추어 강둑의 낮은 곳에 은신하시도록 하고 나는 죽남 동네 서편 쪽에 난 골목길로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 도로 밑 언덕에 바짝 낮추어 도로 상하 양방향을 살폈다. 그야말로 온 세상이 조용했다. 나는 날창이 든 막대기로 도로가 포플러 허리통을 툭툭 두 번 쳤다. 이 신호로 두 분은 허리를 낮추어 내 있는 도로가로 오셨다. 우리들은 잇달아 도로를 건넜다. 그리고 건너편 산언덕 밑에 난 산그늘에 들어가 소로를 따라 오른편으로 약 5, 6백 미터를 재빠른 걸음으로 나아가 산허리 끝에 다다랐다. 여기서부터는 다원 동네 안이고 동네 골목길은 서 동지가 환하다. 그래서 앞에는 서 동지, 다음은 박 선생님, 내가 후방을 경계했다. 나는 앞서가는 두 분의 그림자만 보고 따라갔다. 산허리 끝 동네에 들어와서부터 약 10분쯤 지나자 담 안에 여러 채의 기와집이, 보름이 좀 지난 듯한, 서천에 약간 기운 달빛에 그 용마루를 환하게 드러내고 있다. 마침내 우리들은 한기와 집의 대문 앞에 섰다. 서 동지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선 언덕진 곳으로 담장 따라 약간 올라가더니 쿵하는 소리가 담 너머에서 들렸다. 이윽고 대문 열리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집은 엄청나게 넓고 컸지만 너무나 고요했고 그래서 사람 기척이 전혀 없는 듯 했다. 서 동지가 아래채의 한 방에 가서 문에 기척소리로 알리자 문이 열리고 나이 마흔 넘어 보이는 상머슴처럼 차림의 어른이 나왔다. 그리고 서공생 동지를 보고 인사를 했다. “어지간히 시간 맞추어 오셨네요. 서 동지.” “예, 모두 잘 계시지요. 우선 우리들 요기꺼리가 있으면 하는데.” “알겠습니다. 안에 기별해서 차리도록 하지요. 일단 방부터 좌정하셔야지요.” 달빛은 집과 그 그림자 안의 물건까지 분별할 만큼 환했다. 넓은 대청이 있는 안채는 북쪽에 자리 잡아 있고 가운데 마당을 두고 동과 서에 서로 마주보는 큼직한 기와집이 두 채있다. 마당 건너 아래 사랑채도 크고 높은 팔작지붕은 환한 달빛을 안고 하늘을 나는 듯 했다. 동쪽 아래채 앞, 좁은 마당에 동쪽으로 난 곁문이 있는데 그 문은 언제나 열어두고 있는지 열린 그 문으로 안내했다. 거기에도 고운 마당이 있고 동향의 집이 있는데 가운데 청이 있고 아래위로 두 개의 방이 따로 나있다. 나는 그 남녘의 방으로 안내되었고 두 분은 북쪽 안방으로 안내되었다. 나는 짊어지고 온 키슬링과 작대기를 거기에 두고 두 분이 계신 안방으로 갔다. 내가 들어가자 서 동지는 박철환 선생의 눈치를 보면서 나에게 말을 했다. “나는 덕생이 동무를 이곳까지 데리고 오는 일만 맡았소. 동무가 앞으로 할 일은 내일 아침에 동무의 직접 상부조직의 분을 만나 과업을 받게 될 것이오. 좀 있으면 밤참을 가지고 올 것인데, 우리 함께 밤참을 하고 각자 잠자리로 들어가 내일 아침까지 푹 쉬로 합시다.” “예 알았습니다.” 좀 시간이 지나자 안채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건넌방에서 서 동지가 나를 불렀다. “덕생이 동무, 이쪽으로 건너오시오. 밤참을 차려왔소. 김치 국밥에 떡국 떡을 넣어 끓였는데 냄새부터 그냥 죽이네. 빨리 오소.” “예,”하고 나는 건너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들어가자 왼편에 작은 문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부엌이 붙어있고 그 부엌문은 바로 안채의 안마당으로 문이 나있었다. 그래서 안채에서 차린 국밥이 바로 이 바깥채의 안방으로 바로 들어온 것이다. 작은 양푼에 담은 김치국밥이 흰 떡국 떡이 제법 맛을 돋우고 있다. 상 가운데는 지난 김장 때 담은 것인데 백김치가 있고 동치미 무가 담긴 동치미가 푹 익은 녹갈색풋고추를 담고 있었다. 침이 저절로 나온다. 나도 시장했고, 두 선배동지도 시장했는가보다. 말소리 하나 없이 먹는 일에만 푹 빠졌다. 훌훌 마시듯이 먹다가 떡 쪼가리가 씹힐 때 그 쫄깃함이 맛을 더욱 돋구었다. 우리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양푼의 것을 해치웠고 커다란 양푼에 담아가지고 온 남은 국물마저 몽땅 먹어치웠다. 그렇게 먹고 나자 세 사람은 이마에 땀까지 번진다. 그러자 배가 그득하게 먹고 나자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잠이다. 두 분의 눈은 좀 풀리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일어나면서, “이제 우리는 잠자는 것만 남았습니다. 건넌방으로 가겠습니다. 두 분 동지께서 편히 주무십시오.” 라고 인사하고 나왔다. 건넌방으로 돌아온 나는 윗목에 개어놓은 요와 이불을 폈다. 그리고 허리춤에 찔러 넣은 권총을 빼다가 키슬링 안에 있는 총갑에 넣어 키슬링에 다시 넣고 바로 오른손 곁에 두었다. 많이 고단했고 또 따뜻한 밤참 탓인지 자리에 눕자 내 스스로가 마치 어떤 늪에 빠지고 있는 것 같아 보였고, 스르르 나의 의식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새벽에 잤기에 이튿날은 아니지만 잠이 깼다. 일곱 시이다. 옷을 뭐로 입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귀미 ‘트’에서 얻어 입은 바지저고리를 꺼내어 입었다. 그리고 마당에 나갔다. 건넌방에는 아직 기척이 없다. 나는 방밖으로 나왔다. 마당 오른편에, 둘레에다 매주덩어리 같은 돌멩이를 시멘트로 붙여서 한 두자높이의 테두리를 두른 샘이 있고, 그 곁에는 놋대야가 놓여있다. 나는 방으로 도로 들어가 수근을 가지고 나와 샘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 대야에 담아 세수를 했다. 수근으로 얼굴을 닦고 두레박으로 물을 퍼 두레박 한쪽 귀퉁이로 샘물을 마셨다. 처음은 물맛을 보려고 조금마시고 물을 뱉어내면서 물맛을 보았더니 물맛이 그만이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여자 말소리가 들렸다. “다원 물맛은 그저 그만이지. 그래서 다원의 차 맛이 좋답니다.” 나는 뒤돌아보았다. 나는 깜작 놀랐다. “아니, 니가 여기 웬일이고?” “아니, 니 재구 아이가?” 그래서 나는 급히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고 입으로 소리 안 나게 ‘이름, 이름’ 하고서 손을 가로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응, 알았다.” “너는?” 라고 하자 그녀는, “나는 괘않다. 우리 큰집 아이가. 종가집이다.” 라고 했다. 그녀는 바로 나와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이름이 손소출이다.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처녀이다. 그동안 못 보았더니 처녀 태가 완연했다. 밀양읍의 내이동 ‘동가리신작로’ 끝에서 왼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미나리 논이 나오는데 그 논 쪽으로 대문이 나있는 제법 큰 기와집이 있다. 소출이는 이 집에 살았다. 학교 다닐 때는 좀 키가 큰 계집아이였는데, 이때는 내가 이름 부르기가 망실 그려지는 다 큰 처녀아이였다. 아무튼 반가웠다. 그래서 이래저래 이야기꽃이 피게 되었는데, 그때 두 동지가 나오셨다. 두 동지는 나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하고 눈으로 물었다. “예, 저와 소학교 동기동창입니다. 이 집이 저 동무의 큰집이랍니다.” 라고 하면서 소출이에게 말했다. “출이 동무, 이 두 분은 나의 선생님이시다. 인사해라.” 라고 하자 소출이는 얼굴을 빨갛게 하고서 인사를 했다. 박 선생님은 대답인사를 하셨다. 그리고 말씀도 했다. “출이 동무, 동무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까?” “예, 다는 몰라도 대강은 압니다. 저 동무도 압니다.” “그러면 저 동무에 대한 말은 조심해야지요?” “예, 걱정하시지 마이소. 저도 ‘여맹원’(「조선민주여성동맹」 회원)입니다.” “아, 그렇소. 그럼 마음 놓겠소.” 그러자 두 분 선배 동지는 안심하셨는지, 얼굴이 환히 펴지시었다. 이때 안에서 이쪽으로 오는 쪽문이 열리더니 오늘 새벽 때의 아저씨가 나오셨다. 그리고는 우리들에게 말했다. “모두 아침상을 차렸는데 큰방에 갖다놓았답니다. 모두 진지 많이 잡수시이소.” “예, 고맙습니다.” 우리는 모두 대청으로 올랐다. 나는 출이 동무에게 말했다. “출이 동무, 그럼 나중에 또.” “응, 나중에 또 보자.” 이 말은 서로 지키지 못했고 이것이 우리들의 영별이었다. 6.25전쟁이 휴전되고 고향에 가서 출이 동무의 집으로 가보았더니 그 집은 딴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집주인에게 물었더니 자기가 이 집을 샀는데 그런 처자는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동기동창의 여자 동창을 만날 때마다 소문을 물어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좀 더 알차게 알아보려고 한다면 다죽리의 손씨 집안에다 알아보면 되겠으나, 그때는 내가 용기가 나지 않고 내 과거를 들킬까 걱정되어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이제는 마음으로만 그가 같은 하늘에서 한 세상에서 살다가 천수나 다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정오가 거의 다 되어 나의 새로운 지도원 동지가 오셨다. 나는 박철환 동지와 서공생 동지로부터 나의 새로운 지도원에게 나의 조직선이 인계되었다. 그리고 서공생 동지는 앞으로 생길 수 있을는지 모르는 비상사태로 선을 잃어버릴 때를 위한 비상선으로서 서공생 동지와의 연락선을 결정했다. 그것은 나를 활성리 살내마을에 있는 나의 어머니 고모인 할머니의 집에서 일하는 작은 머슴으로 상정하고 단장면 미촌리의 귀미 마을에 있는 ‘트’로 가는 비상선으로 정했다. 그래서 접선암호는 다음과 같았다. “여보세요, 살내 마을의 도동댁에서 씨나락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요, 무슨 나락이고, 몇 되를 가지고 왔소?” “예, 찹쌀 2되하고 멥쌀 6된데요.” 로 정했다. 서공생 동지는 이 비상선을 나에게 주고 갔다. 우리들은 서로 껴안고 헤어졌으나 그 후로는 만나지도, 소식도 못 들었다. 박철환 선생은 추측이기는 하지만 태백산맥을 따라 북조선으로 가서 「강동정치학원」에서 유격대 간부 학습을 맡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나 이것은 나의 추측일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남으로 내려올 때 남로당의 종파분자들의 밀고로 월선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남의 기관에 의하여 사살 당했을는지도 모른다. 선생님과 헤어질 때 나는 울었다. 하신 마지막 말씀은, “동무를 훌륭한 빨치산으로 성장시켜주지 못해서 유감이오.” 라는 것이었다. 이제는 눈을 감아도 얼굴모습도 떠오르지 않고 다만 목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시선을 늘 45도 아래로 두고 계시는 그 미간만 떠오른다. 나의 새로운 지도원 동지는 이름이 주승도(朱勝道)라고 했다. 물론 가명이다. 내가 손소출과 만났던 데 대해 늘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그 비밀주의가 좀 심한 편이다. 나에게까지도 불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가 여가 있을 때 수학책을 펴놓고 공부하고 있는 것도 안 좋게 보고 있다. 그 이유는 그런 공부로 당 사업에 열중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 별도의 ‘트’를 만들어주고 평소에도 이유 없이 동네사람들과 만나는 일은 극도로 제약했다. 하기야 내가 하는 일이란 군당에서 산하 조직으로 전달하는 연락선이었다. 그 연락선은 주소 포스트를 통한 연락선이다. 밀양의 지리적 여건에 따라 동북부와 서남부는 조직여건이 다르고 이 두 지역을 연결하는 데는 가운데 밀양읍이라는 연락원의 입장으로는 매우 위험한 지대가 있다. 교통이 편리한 밀양읍 통과는 검문의 지뢰밭이었다. 그래서 이 두 지역 연락선은 산악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인 것이다. 산악지대를 이동하는 데는 산악을 달리는 민첩한 연락원이 필요했고, 그래서 내가 밀양군당 연락부의 레포(연락원)로 발탁된 것이다. ------------------------- <주> (1) 안동손씨는 안동고을의 또 다른 이름인 일직(一直)을 관향으로 해서 일직손씨라고도 한다. (2) 돌로 쌓은 다릿발에 기다란 말뚝나무를 쫀쫀하게 걸쳐놓고 그 위에다 솔가지를 덮고 그 위에 다시 띠를 떠서 두텁게 덮어놓은 다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