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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운동 II: 파이드로스, 245c-246a.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1: 박홍규전집 2, 민음사, 2007(1995) pp. 130-162(P. 524) .
박홍규(1919-1994), 1986년 6월 21일 강의(녹음),
「자기 운동 I」에서 ‘이것은 무엇이냐?’에 대한 것을 보면, 이것은 영혼을 지칭할 수 있다. 이것이 자기에 의한 자기 안에서(par soi en soi) 운동일 때, 움직이는 자기(un soi, des sois)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생명체와 연관 없는 자기는 아마도 천체이며 온자기(le Soi)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자기가 신체(생명체)에서 움직일 때는 온자아(le Moi)이고, 개별체로서 개체일 경우에 개체 자신(un moi, des moi)일 것이다.
온자아의 움직임과 자기의 움직임을 유사 또는 동일시하는 경우와 서로 다른 실체로서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전자의 것은 자연(본성)에서 온자아는 온자기와 같은 양태로서 움직일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체이며 단위인 일자의 유출설이 나올 수 있고, 스피노자의 자연의 자기 생성으로 볼 수 있다. 후자의 것은 (논리적) 온자기가 먼저이고 온자아는 이에 따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온자기와 온자아를 분리할 경우이다. 온자기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으로 성립하며, 온자아 떨어져 또는 없이도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실체로 보는 경우이다. 온자기가 먼저라는 논리로 온자아는 온자기의 부분으로 또는 종속변수로 움직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온자기를 부동의 운동자처럼, 크리스트교는 창조주로서 영원불변의 일자로 정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온자기(le Soi)의 경우에 영혼은 동질적이고 영원성이며, 따라서 부동성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온자아(le Moi)의 경우 영혼은 이질적이고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측면에서 통일성이며, 운동성으로부터 출발 할 수 밖에 없다(필연적으로). 두 가지 경우에서 둘다 물체를 설명할 경우에 물체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외부의 힘이 들어갈 경우라고 한다. 전자의 경우에 외적으로 조작, 조절하는 주제자(기술자, 데미우르고스)가 있어서 물체를 움직이고 변하게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물체가 아닌 신체의 경우에 시초에서 타협안(modus vivendi)이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 함께 나아간다. 여기서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물체를 움직이는 양태에서 상상의 양태가 생기는 것인지, 영혼의 상상이 물체를 조절하는 것인지에 대한 견해이다.
온자기에서는 대리자(표상자)가 있어서 물체를 조작, 조절하듯이, 영혼이 신체에 작용(l’operation, la fonction)한다고 하면, 해석은 매우 편하고 제반 물리과학(천문학, 물리학, 화학)이 성립하는 토대가 된다. 그런데 온자아에서는 연혼이 신체와 관계맺음(공감, 공명)을 통해서 양태가 이루어진다고 할 때, 신체(물체)의 특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체는 영혼과 더불어 함께 작동(l’acte)한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이런 의미 연관의 생명과학(생물학, 심리학)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 물리과학들과 생명과학들 사이에서 질적 차이가 있어 보인다. 전자의 경우는 수학적 함수로서 설명하려고 하는 반면에, 후자의 경우에는 내재적 작동의 능동성 또는 가능성(dynamique)이 문제거리이다. 이로서 전자가 수학(산술학과 기하학)을 토대로 삼았다면, 후자는 생물학과 의학을 토대로 삼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과학이라 불리는 사회학, 인류학(인종학), 정치경제학 등은 전자의 합리적(분자그램적) 절편들을 자료로 삼는지, 후자의 총체적(분자적) 실재성을 실증으로 삼으려는 학문의 절차방식(방법론)에 따라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도 문제거리가 있다. 개인의 특수한 경우에 발생하는 양심에 관한 것으로, 개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이 개체의 특이성이 온자기와 온자아 연관지을 경우에 따라서 도덕 또는 종교에 관한 문제로 제기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온자기와 관계에 더 많이 치중할 경우에는 파라노이아(편집증)이라, 온자아와 연관에서 지속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경우에는 스키조프레니(분열증)이라 한다. 편집증은 상식과 기존의 질서에 합류 또는 포획된 것의 정도의 차이를 보는 것이라면, 분열증은 기존 사회의 고착성이 변화에 저항하는 것을, 그 저항을 뚫고 저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체성을 넘어서 종교의 문제로 향하지 않을까? 개체의 정체성의 불안(상실)을 야기하는 가난과 질병에서부터, 자신(un moi)을 아는 듯하지만 그 정체성의 극한에 대해 알 수 없는데서(아이러니) 닥치는 죽음(삶을 마감하는)과 ‘다음’에 이르기, 제기되는 것이 종교성의 문제가 아닐까?
‘이것이 무엇이냐?’는 문제는 결국 철학적으로 도덕과 종교에 관하여 성찰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 같다. (51S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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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운동 II: 파이드로스, 245c-246a. 130-162.
박홍규: ‥…그러니까 맨 끝에, <sôma(물체)>가 나오는데, <왜냐하면 운동을 밖에서부터 받는 모든 물체는 영혼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Pan gar sôma, ô men exôthen to kineisthai)>이고‥… 여기서 <sôma(물체)>[신체]가 무엇이냐 부터 이야기를 해야 돼. 그것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논할 때 이야기하기로 하고. 그 다음에 <반면에 내부로부터 자기 자신에 의해 움직이는 것 그 자체는 영혼을 가지는 것이다(ho de endothen autô ex hautou, empsychon)>(파이드로스, 245e5-7)라고 되어 있지. (130)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영혼(psychê)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사물, 즉 신체(sôma)지. 영혼자체의 불멸성(aei athanaton) 증명은 영혼의 운동이 <스스로 움직인다(autokinêton)> - <autokinêton> 대신에 <aeikinêton(항상 움직이는 것)>이라고 한 판도 있는데 – 는 것에 기반하여 스스로 움직이는 것(autokinêton)이 불사적(athanaton)이라고 나왔었지? (130-131)
요전에 내가 자체적인 것(kath’hauto)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공간에서 여러 사물이 이렇게 물체(sôma)로서 딱딱 구별돼. ... 제논은 다가 있으면 동시에 유한하면서 무한하다고 하지. ..(131)
요컨대 다와 운동이 있는 이 세계에는 일자란 없다는 얘기야. ..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같은 것은 쪼개질 수 없는 것이야. 그러니까 다와 운동속에 있는 것은 모조리 무한정자(apeion)를 그 근본에서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아무리 하나라 해도 계속 초개질 수 있다는 것이야. 그러니까 이 다와 운동의 세계에 진짜 일자가 있느냐? 없다는 것이지. 플라톤도 그것을 받아들여.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일자는 없고, 또 무도 없고, 그러니까 다와 운동만 있어.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다와 운동의 체계지. (131)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와 운동을 인정하고 체계를 세웠지만, 그래도 선의 이데아, 부동의 원동자를 말하는 것은 사변적으로 하나(통일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가정이 있고, 그 하나는 불변이며 영원하다는 것을 선가정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런데 플라톤에서는 하나, 둘, - 둘부터 수라고 하지, - .. 가령 둘이 하나의 존재인 한, 하나라는 단위[(l’unité)]가 들어가야 돼. 그 단위는 쪼갤 수 없는 것이니까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될 것이야. 그것이 자체적인 것(kath’hauto)이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대한 로스(David Ross, 1877–1971)의 주석 처음을 읽어보면, 플라톤 학파에서 수를 형상(idea)으로서의 수(number), 수학적인 수(mathematical number), 감각적인 수(sensible number), 세 가지로 나누어 놓았다고 그랬어. (132) [첫째 수는 – 벩송이 DI 2장에서 논 한다: 첫째 따로 성립하는(이데아 같은) 수 1, 2, 33, 둘째 셈할 수 있는 수는 3+5=8 셋째 이어지며 포함하는 수(기억), 특히 나이 65(예순다섯)는 따로 떨어진 수도 아니고, 셈하는 수를 넘어서 이전의 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감각적?)수가 있다. 벩송은 이 셋째 수는 수라기보다 지속이며 기억이다. 예순다섯은 숫자도 아니고 수도 아니며 삶이다. (51TMD)]
수학적인 수에서는 달라. 거기에서는 둘이 있기 위해서 하나에 하나를 보태야 돼, 또 둘에다 하나를 보태야 셋이 나오고, 그러면 수학적 수에서 셋이 있기 위해서는 하나에다 하나를 보태고 또 하나를 보탠다는 그 전 과정이 동시에 성립해야 돼. 베르그송은 그것을 기억이라고 해. (132)
그러면 플라톤에서 자체적인 것(kath’hauto)이란 무엇이냐? .. 나는 그 자체적인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접촉(contact)한다고 생각해. .. 그러면 접촉이란 무엇이냐? A와 B가 접촉한다는 말은 하나의 한계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B에서 A자체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을 모르고, 또 A자체가 없어져도 B는 존재한다는 그런 성격이지. (132) [플라톤의 이데아의 자체적인 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같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자족적이기 위해서는 일자와 접촉해야 한다. 여기서 접촉이란 성질(변할 수 있는 것)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자의 힘을 빌어야 한다. 1, 2, 3이라는 병치가 아니라 ...2, 5, 7, 33처럼 다른 것이 포함되어 있지만 각자가 동일성의 단위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 33은 서른셋째의 것이 아니다. 단위 33(삼십삼)이다. 그런데 이것은 공간적이다. 기억에서 서른세 살은 이질적연속의 단위라는 점이다. 왜 다를까? 시간 즉 흐름의 이질적 확장이니깐.]
그러면 .. 즉 자체적인 것이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자기동일성[identité]으로 변해. 그러니까 플라톤을 읽으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체적인 것을 인정하면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도 인정해야 하고, 또 무도 인정해야 할 것 아니냐는 점이야. 둘 자체와 셋 자체 사이는 아무런 연결이 없이 끊어졌다. 무한정자(apeiron)가 빠졌다는 얘기니까. 그래서 또 무도 인정해야 돼. 그런데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존재나 무를 인정하지 않거든. 그러나 사실 형상(eidos)이 영원한 이유는 무는 없기 때문이야. 무는 없으니까 있는 것만 있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있는 것은 변하거나 변하지 않거나 두 가지뿐이야. (133)
그러니까 형상이 이렇게 죽 여러 개 있다는 것 자체가 벌써 무한정자와 떨어져서는 성립할 수 없다는 말이야.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무한정자와 파르메니데스적 일자 사이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을 우리가 곧 알 수 있지. (133) [존재와 무에서 무가 없으면, 동일성을 유지해 주는 효과의 역할을 무한정자가 한다. 그러니 이데아계와 무한정자(플라노메네 아이티가), 에피스테메와 독사의 구별이 성립한다. 플라톤에서 지식은 무(無)위에서가 아니라 무한정자 위에서 질들의 절단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이란 이미 절단된 단위들의 정도들 사이에 비교에서 성립한다. 그래서 동물은 소를 포함하는 것이다. 논리학이 나온다. / 그러면 무라는 개념이 언제 성립할 것 같은가? 나로서는 종교에서 감성을 통해서 생길 것 같다. 즉 달리(차이)가 아니라 새로이(nouvel, 창조)에서 나올 것 같다. (51TMD)]
그런데 이제 운동은 따로따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요전에도 누누이 말한 것처럼 서로 연결이 돼야만 성립하는 것이야.(133) [따로 와 연결도 차이에서 주어질 것이다.]
운동이 주어지면 그것은 자꾸 다른 사물로 퍼져. 그래서 베르그송은 그것을 엔트로피라고 하지. .. 그래서 베르그송은 자꾸 <se faire(이루어지고 있다)> <se défait(소멸되고 있다)> 같은 말을 써. 퍼진다는 것은 무엇이냐? 필연성이란 것은, 내가 티마이오스편 얘기할 때 말했던 것처럼, 연속성을 의미해. (134) [벩송에서는 기억의 자기 생성이 연속성이고 필연이게 된다. 물질은 해체로 가는 길이다. 엔트로피는 물질에서 그 역행은 영혼에서 이다.(51TME)]
그래서 베르그송은 엔트로피가 물리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철학적[형이상학적] 원리(philosophical principe)[법칙]라고 말해. 그런데 그것은 자기 동일성을 자꾸 타자화되는 것이 거든. 그런데 여기(파이드로스, 245e5-7)의 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autokinêton)>[영혼]은 자기 동일성을 얘기하려는 것이야. 베르그송의 입장에서는 운동은 그렇게 퍼지는 것이 [플라톤의] 필연적인데, 그 필연적인 것을 극복하여 거꾸로 올라가는 것이 운동의 자기 동일성이라는 거야. (134) [플라톤은 파이드로스편은 영혼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인데 비해, 티마이오스편은 아페이론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왜 그럴까? 전자에서는 영혼이 주제인데, 후자에서는 영혼(정신, 누스)은 이미 성립(정립)하고, 물질(아페이론)에 대한 조작을 설명하려고 하니 이런 상반된 견해가 생긴 것이 아닐까? 이에 비해 벩송은 운동에서 출발하니 올라가는 운동은 자기동일성, 거꾸로(내려)가는 운동을 타자화하며, 두 방향의 운동들은 양쪽 다 실재성이라 한다.]
[베르그송에서] 필연적인 것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퍼지는 것을 안퍼지게 하려는 것이니까 긴장(tension)이고, 그 긴장이 이완(détente)되면 퍼짐(extension)이 나온다는 것이지. 창조적 진화에서 그렇게 나오지.(134) [최초의 생명은 이완과 긴장 사이에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능동성(권능)이 RNA의 등장일 것이다. 그리고 긴 생명역사에서 생명현상은 항상 계속되는 긴장과 이완이라는 운동 속에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DNA를 유지 확장을 통해서 진화한다. 불연속적인 생명체 종은 자기 연속성(정체성)을 이완과 긴장 속에서 만들어(창조해) 간다. 즉 종은 변화한다. (51TME)]
[다시 바뀌어 플라톤으로] 그러면 이 우주에 있는 운동이 모조리 퍼져 있는데, .. 연장성[etendue]이 빠지면, 베르그송은 그것을 비물질적(immaterial)이라고 해. 한 점, 하나로 가면 그것은 비물질적이야. 왜냐? 물질적(material)이라는 것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야. 무한정자(apeiron)를 가지고 있다는 거지. ..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에서 형상은 여럿이 있지만, 운동의 원인은 제작자(dêmiougos)는 하나 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 이론상으로, 능동자(poinoûn) - 능동자라 했다가 이성(noûs)이라 했다가 제작자(dêmiougos)라 했다가 그러는 데 – 가 둘이 있거나 제작자가 둘이나 셋이 될 수가 없어. (134-135) [이 능동자를 하나로 만든 것은 플라톤이 상층에 대한 신뢰이며, 즉 그가 귀족이라는 점이다. 들뢰즈가 이를 다양체로 본 것은 인민의 성립과 전개가 20세기라는 것이며, 심층의 리좀은 구석기에도 신석기에도 철기시대에도 흐르고 있었고, 더욱 활발히 흐르는 시대는 1953년이래로 규소의 시대라 한다.]
그러면 그 하나, 형상(eidos)에 있어서 자체적인 것(kath’hauto)에 해당하는 그 하나의 양상(modality)은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나와. (135) [설명은 이렇다. 양상론적으로 하나(형상)은 (운동 상으로) 수동적이고 동시에 능동적일 수 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수동적이고 어느 정도 능동적이냐를 따질 수 있다. 그런데 그 하나(한점, 단위)이 부동이면 수동도 능동도 없고, 또는 영원히 운동하려면 능동일 수밖에 없다. .. 부동이면서 영원한 운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올 것이다.] / [플라톤의 전환은 이데아(형상)의 부동을 고정하고 나니, 능동성의 설명으로 데미우르고스을 설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 능동자를 인간의 지성에 부여 하고 싶은 것일 것이다.]
그러면 비물질적인 그 한 점[하나]의 존재(existence)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나와. [즉] 형상이 자체적인 것인 한에서의 존재방식은 무엇이냐는 말이지. (135) [플라톤은 부동이며 영원한 존재로 규정할 것이다.]
플라톤에서는 무는 없으니까, 형상은 원래 주어진 것이다. 형상은 원래 주어진 것이다. 있는 것 아니냐, 있는 것은 변화하거나 변화하지 않거나 인데, 형상은 변하지 않으니까 있다. 그렇게 돼. (135) [이 형상불변의 설명은 사변, 즉 추상논리이지, 경험적 근거를 갖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플라톤 난점 하나를 물으면, 존재와 무, 모순을 인정해야 된다는 거야. 플라톤은 모순을 회피하라는 데에 그 요점이 있는 것이지. (136)
그러면 그 비물질적인(immaterial) 일자의 성격은 무엇이냐? 능동(poiein)이 타자화되는 것에 거꾸로 가는 것이라면, 타자화한다는 것은 플라톤 식으로 하면 비존재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능동은 결국 비존재로 가는 것에 대해 거꾸로 가는 것이야.
베르그송은 그것[능동]을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것(heauton kinoûn)이나 스스로 움직이는 것(autokinoûn)이라 하지 않고, <se créer(스스로 창조하다)>라는 말을 써. 비약(élan)도 무[아페이론]에서 존재로 가는 것, 존재가 무[아페이론]로 가는 것을 끌어올려서 무를 지배하는 능력이야. (136) [벩송의 의식(영혼)의 자기에 의한 자기 움직임(par soi en soi)는 스피노자의 자연과 같다. 생명체에서 <스스로 창조한다>는 것은 동일반복이 아니라 이질반복 즉 중첩(확장)반복이라는 점이다. 확장이 도약(élan)이다. 플라톤의 능동(poiein)이 논리적 추론의 결과라면, 벩송의 “EC”에서 능동(poiein)은 진화의 실증적 증거위에 있다.]
즉 거꾸로 올라가는 긴장(tension), 수동(paschein)에 대해 거꾸로 올라가는 [능동(poiein)], 엔트로피를 거꾸로 올라가는 능력도 일종의 비약이라고 봐야 돼.(136)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physics)이나 티마이오스의 물리학은 고대에서 별 성과를 못 얻었어. 어느 정도가서 막혔어. 가령 신플라톤 학파에서는 티마이오스편의 물리학을 일자로부터 내려어는 것으로 다루었어. 그것은 기독교의 신비주의에는 영향을 주었지만 실증과학으로서는 발달을 못했단 말이야. 그런데 갈릴레오에 와서 왜 실증과학이 그렇게 발달했느냐는 것부터 우리가 생각해야만 돼. (136-137) [갈릴레이의 장점은 운동의 상대성을 인정한 것이다. 갈릴레이는 물체가 본질적으로 운동을 유지한다고 바라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정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과 천체의 자기운동으로서 원운동과는 다른 운동이 있다. 즉 관성이 있다 점을 밝혔다.]
비물질적인 영혼(psychê)의 능력은 베르그송에 따르면 자기 창조하지(se créer). 자기 창조하는 것은 플라톤에 나온 것처럼 타자화되는 데도 불구하고 포기하지(apoleipô) 않아. 자기 자신을 포기하면 타자화되는 데, 타자화되지 않고서 포기하지 않는 그 능력이 바로 기억이다. [타자화하지 않고 자기를 유지하는 능력은 기억이다. 그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 주체이다. 주체화란 물질화의 길을 거슬러 상승하는 운동(권능)에 있다. 기 권능은 자연(분성)의 것이다.]
또 그 기억이란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생명체의 생존(existence)과 관련된 문제야.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서 자기의 능력 속에 그것을 타자인 한에서 가지고 있어야 돼. 그러니까 여기서 소유라는 개념이 나와. 기억을 가지고 있어. (137)
그러면 요전에도 말함 바와 같이, 그런 빗물적인 것이 필연적인 법칙에서 본다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어. 그런데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나타나거든. (137) [생명은 힘(운동)은 물질의 힘(운동)과는 다는 방향이다.]
그 기능(dynamis)은 현실(energeia)에 대해서, 어떤 일정한 형상(form)에 대해서 기능이야. 그런데 베르그송이 비물질적인 것을 인정하는 가능성은 질료의 성격을 넘어서는 가능성이란 말이야. 그래서 베르그송은 「가능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Le possible et le réel, 1920)」이라는 논문에서 실재하는 불가능한 것이 나타나나기는 것이 때문에, 그것의 가능성은 현실화되어 보아야만 안다고 말해. 그러니까 현실화된 것만이 가능한 것이라 말이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 가능하다는 것은 .. 어느 정도 될 수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이야. (138) [박선생님에서는, 벩송의 가능성이 잠재성에 가깝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은 실현(현실)의 정도의 차이로 보았다.)
그런데 플라톤에서는 자연적으로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물체가 자기실현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작자(dêmiourgos)가 설득을 시켜야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그러한 목적론적인 가능성이 나와. 그래서 베르그송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을 삶의 방식(modus vivendi)라고 해. 물질과 화해한다는 뜻이야. (138)
그래서 베르그송은 형태(form)가 있다면 물질적인 것에만 있다. 생명체에 무슨 형태가 있을 수 있느냐, 생명체에 대해서 형태란 절대로 원리(principe)가 될 수 없다는 거야. 생명에서 나타나는 가능성은 그러니까 되어봐야 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물질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생명체, 또는 영혼(psychê)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두어야 돼. (138-139) [물질은 형태를 지닌 물체를 형성하는 데 비해, 생명체는 인격성을 형성한다. 신체와 영혼은 같은 작업을 하면서 하편으로 신체(이미지-운동)로, 다른 한편으로 영혼(이미지-꿈)으로 표출한다. 영혼은 신체와 다른 기호체계를 계속해서 만들고 있다. 탈영토화는 언제까지 일지 모르지만 계속되며, 그 동안 영혼은 존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 탈영토화가 타자화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타자화로 들어나는 것이 외장기억(빅데이터)일 수 있지 않겠나? 그래도 타자화의 길을 이탈하는 탈주선은 계속될 것인데, 토지 위에서 그리고 더불어 타생명체들과도 연결접속을 증가시킬 것이다. (51UKC)]
그 다음에, .. 그러니까 모순을 통해서 나타나는 가능성, 되 봐야 아는 가능성, 척도로서 잴 수 있는 가능성, 이 세 개를 구별해야 돼. (139) [첫째 가능성은 모순을 가정하기보다 정지를 가능한 것에서 나온 가능성, 창조자의 창조의 가능성인데, 이것은 논리적 허구이고 추론의 착각이다. 둘째 가능성은 생명체의 가능성이고 신체가 저항한다. 셋째 가능성은 물체를 만드는 가능성이다. 재료가 저항을 한다. 예술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셋째 가능성에서 중요하다. (51UKC)]
박: ... 무한정자는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니고 제3자야. 그러나 존재와 무가 없으면 무한정자(aperiron)가 안나와. 왜냐하면 존재도 아니고 동시에 무도 아니니까 제3자야. <neutrum> <médeteron>(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란 말이야. 그러나 변화란 것은 어새인지 모르게 시작해서 어디서인지 모르게 끝나는 것이야.. .. 그러면 그 중간을 빼버려라. 그 때 모순이 딱 나와 버려. 시간이 바로 그런 거야. 시간을 딱 잘라서 보면 언제든지 모순적 것이 나와. 과거는 없잖아 미래도 없고. (139-140) [매개 항으로 중간 항이 빠지면 둘 사이의 연결이다. 그러면 A와B의 연결은 존재론적으로 하나의 현존이지. 모순이 나온다는 것은 연결이 아니라 분리 즉 -1과 1 사이의 0과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정하면 0은 존재의 모순이다. 그런데 과거와 미래 사이의 0과 같은 현존을 따로 설정하는 것도 존재와 모순이다. 왜냐하면 그 현존은 존재와 다른 이질적 별종이며, 생성이다. 이 별종이 생명체이기도 하고 추론상 물질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영혼이다. 이 영혼은 존재와 달리 과거의 기억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선택을 실행한다. (51UKC)]
현재의 집합이 아니야. 그런 것은 시간이 될 수 없어. 연속적인 과정을 통해서 일어날 때에 시간이라고 하지. 알아들었지? 그런데 기억은 타자화 된 것을 버리지(apoleipô) 않고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거든. 그것은 사실 필연적인 법칙[플라노메네 아이티아]에서는 불가능해. 그래서 자기의 존재[현존](existence) 속에 기억 내용을 가지고, 자기의 기능[권능, 노력] 속에서만 그것이 성립해. 그럴 때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 (140)
그러면 이제 가진다, 소유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 생물에 대해서만 원칙적으로 소유가 있어. 우리는 이 물질이 얼마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 그러나 그것은 생물과는 경우가 달라. (140)
나의 생존(exsitence)[le vivant]을 위해서는 나의 재산이 꼭 필요하다. 그 말이야. 유물론은 사유재산을 부정하잖아. 그것은 철학적으로 물질은 소유, 재산이 없기 때문이야. 물질에 재산이 어디 있어? 생물에서만 비로소 소유, 재산이라는 것이 나타나지. 특히 인간에게서 나타나. .. 생물에 대해서만 재산이 성립해. 유물론에서는 절대로 재산 문재가 설명이 안 돼. (140)
그래서 베르그송은 생명체가 비결정성(l'indétermination)의 증가라고 해. 물질로부터 미생물, 인간에 이르기까지 비결정성이 점점 증가해서, 특히 인간에게만 선택이 가능해. 선택한다[choisir]는 것은 무엇인 될지 모른다는 거야. 즉 비결정성의 증가야. 필연에서부터 자동적인(automatic)인 생리현상, 그리고 자유(la liberté)에 이르기까지 비결정성이 증가해. (140) [다윈의 자연선택(selection naturelle)은 수동성이며, 나아가 외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한 결과론이다. 이에 비해 벩송은 선택을 하며 새로운 만듬(창조)로 나가는 것인데, 그 미래를 결정할 수 없다는 점이 다윈과 다르다. 개체(인격성)의 주체화는 자유의 증가, 비결정성의 증가이다. - 전쟁기계라는 의미는 자유의 증가이며, 탈주선은 형상의 방향이 아닌 편위의 선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접선(탄젠트)의 운동과 같다. (51UKC) ]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주 일정한 형상에 대한 가능성이고, 베르그송의 이 생명체에 있어서의 가능성은 일정한 어떤 방향으로 정해질 수 없는 비결정성. (142)
그것을 딱 잘라내어 이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형상(eidos)이다 하는데, 그래도 어려운 것이 무엇을 인간의 형상이라 할 것이냐 문제야. (143) [개체 말그대로 불가분적인 것, 어디까지 어떤 내용까지를 불가분이라고 하느냐가 문제다. 한 인간(소크라테스)의 형상은 50살의 소크라테스일까? 다비드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한 손을 하늘로 가리키는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의 에이도스 일까? 불가분의 개체성은 자르기 나름이다. 누가 자르는가? 화가가, 신이? 아니 그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순간까지의 자신의 모습(내용+표현)일 것이다.]
박: ... 최초에 부딪힌 물질이 생물로서의 출발점이야.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물질적 형태로 가는 것이 가능성(dynamis)이야. 그러나 베르그송의 입장에서는 ... 여러 가지 형태를 물질에다 집어넣어서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영혼(psychê)의 기능이야. (143) [물질이 자기 놀이(jouer)에서 이미쥬의 성립 또는 창조되고, 이 움직이는 이미지를 기억과 더불어 보존하고 또 새로운 이미지를 반복으로 만드는 능력(노력)이 영혼이다.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반복으로 간다.]
베르그송에 있어서 최초의 물질이 능동(poiein)과 수동(paschein)을 한정했어. 딱 정해졌어. 그러나 영혼은 그것[물질]에 의해서 결정되어(determinate) 잇기는 하지만, 그 결정된 한계를 넘어서기도 해. 넘어선다는 것은 그 한계 속에서만은 살 수가 없다는 말이야. .. 신체의 구조(organ)를 만들어내는 것이 영혼의 기능이야. 무엇이 나올지 몰라, 비결정적이야. 생명현상에 선험적(a priori)[선천적] 형태(eidos)는 없어. (143-144) [들뢰즈의 되기(devenir)는 가능성이라기보다 현실에서 실현의 여러 갈래로서 새로운 형상 또는 새로운 양태를 만든다.]
박: .. 플라톤의 형상은 전부 정지체야. 그래서 베르그송은 생명체 대해서 형상을 논한다는 것은 의미 없다는 거야. 그건 옳은 말이야. (144) [아펙투스의 자기 변용태, 그것의 실현을 노력이 되기이다. 인민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덩이이다.]
박: .. 우선 근대 학문은 물질을 마음대로 잘랐어[데카르트부터]. .. 그러니까 생명체가 성립하려면 유동이론(flux theory)[파동이론]이 나와야 된다는 얘기야. 그래서 베르그송은 시간의 독립변수라고 했어[자를 수 없거든]. ...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형상에서 출발하지 않아. 법칙은 두 개의 사물을 연결 짓는데서 성립하는 것이지. (145) [마음대로 잘라진 두 사물 사이의 관계에서 법칙 또는 규칙을 찾는 것이 근대철학(데카르트에서 흄과 칸트까지)이다. 그래서 근대철학을 인식론 또는 지식이론이라 한다.]
베르그송은 제2성질을 빼는 것은 잘 못이라는 거야, 형이상학자니까. 제2성질이 있다는 것이지 .. 유동[파동이론]에서는 질[質]이 생성과 독립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에 따라가는 것이지(145) [이마쥬이론에서 질과 함께 하기 때문에 스피노자의 변용태의 설명을 실증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감정, 감화(감응)은 내용과 표현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우은주: 개체의 자발성(spontanéité) 같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 / 박: 그것은 각 개체, 신체(sôma)가 어디서 나왔냐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어. 가령 내가 이 사물에 대해서 운동을 한다거나 더 일반적으로 영혼(psychê)이 작용(poiein)한다고 할 때, 그것은 사물의 변화될 수 있는 측면에 대해서이지. (145) [개체의 자발성이란 영혼이 개입할 수 있는 정도이라는 의미이다. 영혼이 모든 측면에서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맺을 수 있는 측면에만 한정하는데, 그만큼의 자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인 자연의 자발성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능동의 힘(poiein)이 물질 속에 있어야 한다는 추론이 나온다. 그렇지 않고 물질이 수동성으로만 있을 경우에는 영혼의 자발성이 작동을 해도 물질은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방황하는 원인처럼) 운동하기 때문이다. (51UKC)]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는 측면에서 작용(poiein)은 수동(paschein)하고는 정반대로 가. 그래서 베르그송은 내려가는(descente) 길과 거슬러 올라가는(ascente) 길이라고 하지. (146) [이 하강과 상승의 방향에 대한 형이상학적 견해는 플로티노스에서 왔다. 벩송은 실증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또 생물학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니까 유한한, 상대적인 운동은 나가서 자신을 버리지(apoleipô) 않고, 사물의 내용과 더불어 자기에게로 돌아와. 돌아올 때 자기 자신의 생존(existence)에 유리한 것, 자기의 동일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만을 가지고 돌아와. 그래서 거기서 기술(techenique)이 나와 (146) [유리한 것에 대해: 생의 주의(l'attension de la vie)이다. 여기서 기술은 도구를 만드는 기술이라기보다 자기 변용을 만드는 기술(art)에 가깝다. 물론 고대 테크네(technê)라는 의미는 자기 변용태를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생의 기술이다.]
박: ... 인식문제는 베르그송에서는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면 행동이 잘 안 되니까 대상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해. (146)
영혼(psychê)의 기능은 물질의 필연적인 법칙에 대해 반대되는(opposite) 것이야. 반대되기 때문에 연속성[물질의 계속성]을 뺀다. 뛰어 넘는다는 것이야. 그것이 기능이라는 거야. (147) [영혼이 필연성의 연속성을 잘라야 한다. 그래야 영혼에 맞는 생명체 즉 개체성이 나온다. 이는 물질의 성질을 넘어서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스피노자에서는 권능 또는 노력이다. 벩송에서는 역동성이다. 우리가 보기에 들뢰즈 식으로 보면 기능이란 물체의 표현이며, 생명체는 물체의 내용이다. 영혼의 내용은 기억이며 표현은 노력이다.]
형상만 들어온다는 것은 그 속에서 운동을 빼는 것을 의미해 물질성(materialité)을 뺀다는 것은 운동을 뺀다는 얘기야. (147) [운동을 빼면, 물체(조각상, 형상)이 나온다. 개체성립에서 운동자체는 영혼이며, 영혼이 질(質)의 운동과 같이 운동하는 측면에서 성질(감각, 감정)을 부분으로 (관계방식으로)잘라내는 것이다.]
그 다음에 물질성이 어떻게 점차적으로 빠지느냐? ... 나가지 않는 것이 있다. 안 나간 것은 사진 건판에 가서 부착되듯이 이렇게 표상화[인상]된다는 거야.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뇌수는 스스로를 창조하는(se créer) 자발성에 접촉(contact)한다는 것을 뜻해. 다시 말해서 아까 그 능동(poiein)과 수동(paschein)의 대립이 끝남으로써 연속성이 빠지는 그 극한치, 존재와 무가 만나는 그 극한치와 접촉한다는 거야. (147) [접촉: 신체와 영혼의 연관을 설명하는 용어인데, 영혼의 운동이 신체에서 고정성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 때 이마쥬는 유동성이 줄어들어 고정(fixer)으로 이루어진다. 이마쥬가 추억으로 잘라진 부분으로 안착한다. 글고 신체(두뇌)는 감각행동으로 전향한다. ]
물질성[필연성]이 완전히 빠지면, 추상적[형태적]인 것이고, 그 중간에 이마쥬(image)가 있어. 그러니까 이마쥬가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 행동, 감각 기능, 신체와 가깝다는 얘기야. (147)
그러면 완전히 비물질적인 것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느냐? 이마쥬가 빠지니까 무의식으로 들어가. 순수 기억은 그러니까 무의식 속에서 주어져. 자발서은 내 자신 속에 들어있는 것이니까 내가 필요할 때 무의식 속에 저장했다가 내 마음대로 꺼내고 표상할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기억이 설명이 안 돼. (148)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을 내가 구체적인 어떤 대상을 놓고 표상할 때에는, 즉 행동화할 때에는, 그것이 상(image)의 형태를 띠어. 완전히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비물질적(immatériel )이 돼. 비물질적이라는 것, 이것이 중요해. 비물질적인 것은 연장성이 빠지고, 자기 보존돼. (148) [설명은 되는데, 실증적이냐는 것이다. 이마쥬가 에땅뒤(etendue)가 빠진다고 하기보다, 움직임이 공간적으로 너비가 있고 동시에 시간적으로 지속이 있다. 너비와 지속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실재성은 운동 파장(진동)일 것이다. 이중집게이론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은 물질과 기억 속에 나와 있어. 나의 본능, 나의 기억상은 전부 무의식이야. 인간의 생존(existence)의 근본으로 들어가면 무의식이 돼. 나의 선택은 대상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사실은 항상 무의식이 뒤에서 작용하고[agir, acte] 있어. (148) [창조적 진화에서 생명체에 내재하는 인식이 본능이라 한다. 본능의 토대는 무의식이며, 지속은 무의식이다. (51UKF)]
그러면 이제 플라톤의 형상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 문제야. 베르그송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아. ...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이론으로 인식론은 설명이 안 되고, 플라톤도 .. 테아이테토스와 같은 인식론이 나오느냐 그 말이야, 나올 수 없어. (148-149) [형상이든 형상질료이든 그런 인식론은 표상위에 인식론이지, 내재적 인지론은 아닌 것이다. 상층은 형상이 먼저, 심층은 실재성이 먼저이다. ]
그런데 지금 무의식이 무엇이냐, 무의식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가 문제거든. 그것은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니까 해석학이 나와. 감정적(affective)[감화, 감응]인 측면에서부터 발생론적으로 인간의 능력[권능]이 무엇이냐를 보는 거야.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얘기하지만, 사실은 불란서 심리학자들이 먼저 무의식을 얘기했어. (149) [벩송도 물질과 기억(1896)에서 무의식이 현존함을 말한다.]
내가 프로이트를 배울 때 아돌프 하르트만의 무의식의 철학(Philosophie von Unbewußtsein)이란 책을 보았는데, 연결이 안 되더라고. 나중에 프로이트 전기를 읽고 베르그송을 모두 읽어보니까 아,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은 베르그송을 읽어야 이해되겠다고 알게 되었어. (149-150) ,
또 우리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본질(essentia)적인 지적 기능이 무엇이냐? 처음에는 모르는 것이잖아. 그러니까 자꾸 빼내서 실험해서 보자는 것이 피아제(Piaget, 1896-1980)야. (150) [삐아제도, 뒤르껭도 형상과 유사한 구조를 먼저 설정하는 주지주의이다. 벩송은 생성론으로 구조가 먼저가 아니라 되기가 먼저, 또는 움직이는 이마쥬가 먼저이다. 표상 또는 개념이 되는 것은 다음이다. ]
소쉬르는 .. 무의식으로부터 언어가 나온 것인데, 거기에 일정한 구조가 있더라는 거야. .. 소쉬르는 동시적(synchronique)인 것과 통시적(diachronique)인 것을 나누어서, 통시적인 것을 동시적인 것으로 환원시켜. 왜냐하면 소쉬르는 수학을 중시했고, 사회 실재론자인 뒤르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야. 레비스트로스도 마찬가지야. 그는 인간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알려면, 문화가 발달한 사회가 아니라, 원시[토착]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야. (150)
그래서 사르트르가 구조주의자에게 반[反]문화적이라고 비판했어. 또 피아제도 마찬가지야 .. 난 피아제 이론이 옳다고 생각해. 구조주의는 그러니까 지독히 싸늘한 사상이야. 사르트르가 그것을 죽은 철학, 최후의 철학이라고 하지. 구조주의의 위치가 그것이야. (151) [삐아제도 구조주의자이다.]
... 인식론이 실증과학으로 나온 일 있어? 맨 자기 의견들일 뿐이지. (151) [각 인식론(지식론)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분과과학이다. 측지학이 기하학을, 천문학과 물리학이 근대 물리학을 의학과 심리학이 인간학을, 개체(인간)들 관계의 학이 사회학을, 늦게서야 인간관계의 과정에서 역사학과 국가론이 나온다. 실재로 왕국이 아닌 국가 이론은 정치경제학의 성립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
이러한 양상의 한쪽 극한치로 가면 플라톤의 형상(eidos)같은 것이 나와[홈패인 공간, 국가주의], .. 그런데 다른 한쪽으로 가면, 그런 것이 다 없어져[매끈한 공간, 노마드]. .. 베르그송 철학은 그런 상황적 사고[위상적 사유]의 극한치야. 그러니까 지능이 습득되기도 하지만 <jaillir(솟아난다)>한다, 즉 즉 속에서부터 우러나온다고 하지. (153)
... 내가 고별 강연 때 말했잖아. 희랍 철학이 신화에서 구별되는 특징은 데이터(data)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 그때 비로소 철학이 성립한다고 말했지.
그래서 소피스트편에서는 전부 <auto(자체)>라는 걸 붙였어. 그런데 유클리트 기하학은 전부 정의의 체계야. 유클리드 기하학은 논리적 사고의 극한치이며, 논리에서 양상의 문제도 논하고 그래. .. 그런 점에서 소피스트편은 영원 불멸해. .. 베르그송도 양상(modality)으로 환원시킨다고 하지만, .. 실제로는 온통 생물학과 실증과학만 나와. ..그러면 이 모든 양상의 철학을 동시에 놓고 정의할(define) 수 있는 공간은 무엇이냐?[지도를 그릴 수 있느냐 또는 diagramme를 보여줄 수 있느냐?] 그것은 플라톤이 소피스트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auto(자체)>를 붙인 세계(world)이야. (154) [들뢰즈 표현으로 이것임의 세계, 특이성의 세계만이 있을 것이다.]
... 우리 세계 자체가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좌우간 불가능한 것이 필연성 속에, 공간 속에 드러나야만 된다는 거야. 플라톤도 무가 완전히 없다(médamôs, on)고 하는데, 무는 없다면서 무라는 말을 왜 써? 허허. 그것은 무의미(non-sense)하잖아. .. 존재와 무를 안 놓으면 무한정자(apeiron)도 안 나와. 언제나 존재와 무에 대해서 무한정자(apeiron)야. 그러니까 불가능한 것이 왜 우리에게 주어지느냐? 우리는 몰라. 베르그송 말처럼 생명현상에는 불가능한 것이 주어지는데, 그것인 생명현상인 우리에게만 주어지는 것인지, 어떤지를 우리는 몰라. (155)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이 왜 우리에게 인식되느냐. 그걸 우리가 인식했다고 하느냐, 그 말이야. 감각적 사물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인식은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설명하면 돼. 그러나 시간이니 운동이니 공간이니 하는 것은 형상이 아니거든, 허허. 직관의 대상이 안 돼. ..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지극히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아야 돼. (155)
.. 플라톤의 <스스로 움직이는 것(heauton kinoûn)>가지고 철학한 사람이 누구야? .. (156)
박: . 피히테에서부터 시작해서 헤겔까지 자기 운동자를 가지고 철학하는 것 아냐? 피히테는 자아에서 타자로, 그리고 모두 다시 자아로 돌아온다는 것이지. 헤겔은 거기다 변증법을 넣었어. 거기에는 양상이 없어. 다 필연화 돼. 다시 말하면 가장 우둔한 머리(der dumpf Kopf)의 철학이야. (156)
그런데 헤겔이나 이런 철학은 말이야, 모든 것이 필연이야. 그야말로 플라톤의 저 티마이오스편에서 우주가 자전하듯이 그냥 결정론적으로 자전해. 맑스 이론도 그렇고. 자본주의가 변증법적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우둔한 머리의 철학이야.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같은 사회가 되면 기술이 발달하거든, 기술이 발달하면 양상이 나와. (156)
그러니까 공산주의는 미개 사회에만 침투해. 필연적이다 해서, 그 사람들에게는 신앙이 돼. 필연적으로 인류 역사는 그렇게 된다고 하니까 골몰해. 자기에게 어떤 안심(安心)을 줘. 그것은 하나의 고무책이요. 신앙이야. 미개사회에서만 통용돼. (156) [들뢰즈에서는 필연의 귀결은 야만(국가)시대이며, 양상이 펼쳐지는 시대는 자본(제국)의 시대이다. 원시(야생)의 시대는 토지에 각인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간단하고 도식적이고 필연화돼. .. 당위(sollen)하고 결부시켜. 그러나 실제로 해놓고 보면 혁명 때나 열광적이지, 혁명된 뒤에는 사람들이 수동적이 돼. .. 베르그송은 그런 철학이 아냐. 자기 창조(se créer)거든. 자기 사느냐 못사느냐는 자기에게 달려 있고, 자기가 잘 살 수도 있고 못 살 수도 있다는 이론이거든. .. 생명현상이 자구 남한테 의존하면 안 된다, 망한다는 얘기야. 자기가 스스로 능동적으로 활동하고, 기술을 발달시키고, 자기가 먹을 것 벌어들이고, 인간을 심각하게(sincere) 생각해. 이건 전형적인 서구라파 철학이야. (157)
박: .. 플라톤에서는 추상적 공간이 객관적으로 성립하지. 나도 그것이 성립하는 것 같아. 이론적[논리적]으로는 맞아. 그런데 베르그송은 그것이 기능[자름]의 대상으로서만 성립해. 그 점이 항상 문제가 돼. 그러니까 완전한 형이상학은 없다고 말 할 수 있어.(158)
플라톤 철학의 난점이 뭐냐하면, 형상(eidos), 능동자(poioûn)[데미우르고스], 무한정자(apeiron)를 놓는데, 능동자와 형상을 넘어서는 존재자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지. .. 그러니까 <kath’hauto(즉자성)>[자기 동일성]라는 말을 쓰지. 그러니까 우습지. 베르그송 철학은 근대학문의 입장에 바탕을 두고 있어. 거기서 형상의 사상이 무너져 버렸지. 갈릴레오에서 무너져 버렸어. 마음대로 쪼개지니까. 형상 사상이 무너져 버리고 유동(flux theory)만 나와. (158)
플라톤의 형상 학설에서 여러 개의 다(多)의 내용이 있다면 반드시 무한정자가 들어 있고, 따라서 조금은 물질적(material)인 것이 아니냐 말이야. 그런데 우리 무의식[기억] 속에 어떻게 물질적인 것이 의식화되지 않고 있을 수 있느냐, 그 설명이 베르그송에는 없어. 이것이 난문(aporia)인 것 같아. (159) [다(多)의 존재자들이 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페이론이 섞여 있기 때문인데 존재들 각각은 서로 다르지만 각각이 고유한 질을 지닌 등질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박: ... 베르그송이 생명 현상을 비물질적이라고 한 것은 분명히 들어 맞아. 연속성에 반대되는(opposite) 기능이니까. 그것을 빼버리는 기능이니까. 또 실증적으로도 그렇게 주어지고. (159)
박: .. 그것을[운동장을] 우리가 표상(Vorstellung)이나, 상(image)라고 하고, 개념은 달라. 개념은 상에서 연장성을 빼버려야 돼. 그러니까 개념은 내포(implication)를 가지고 있다는 거야. 정의(definition)의 대상이야. ../ .. 표상(phantasia)하고 개념(concept)하고 구별해야지. (160) [ 판타지아는 의식 차원에서 표현이라면 개념은 내용이지. 신체적이고 도덕적 차원이 아니다. 그런데 신체적이라고 하려면 연장성과 결합하고 또 행동과 결합해야 한다.]
박: .. 내부 세계가 무슨 표상화가 돼? .. 프랑스 심리학자들은 그건 아니라는 거야. 베르그송도 그렇고, 지금 발달심리학자들은 그런 것 인정 안해. 실제로 안에 없어. 우리가 어디 표상화해서 얘기하나? 다 무의식 속에서 의도(intention)만 가지고 얘기하지. (161) [기억 세계를 그릴 수 없다. DNA가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표현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
박: .. 그런데 베르그송의 기억이론을 보면, 이런 감각적인 것도 순수 기억[추억] 속에 들어가면 무의식화 된다는 거야. 경험상으로 옳아. ..뇌수에 가까워 짐에 따라 연장성을 띠어. 표상을 해. 그 말은 심리학적으로는 옳아. 그런데 이제 이론적으로 난점이 자꾸 생긴다는 것이지. 어려운 문제야. .. 순수한 질(quality)이라는 것은 비물질적(immaterial)이라고 봐야 한다는 얘기가 되지. (161) [사실 순수 질은 없다. 진동이다. 그러니까 순수질이라고 논리적 규정하는 것은 개념(관념)이지 이미지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한계, 즉자적인 것(kath’hauto)을 생각해야 돼. 내가 항상 생각하는 것은 플라톤의 형상은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한계에서 성립하는 거야. 아까 내가 접촉(contact)이란 말을 쓴 것이 그런 뜻이야. (162)
박: .. 즉자적이라는 성격만 가져[논리적 정의만]. 저 초월적 일자 속에 못들어가고. 초월적 일자 속에 색깔이 있다느니 하는 말 못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동자(proton kinoûn)에도 그런 문제가 생겨. 순수 현실태(energeia)라면, 형상(form)에 대한 현실태라면, 질료(matter)가 없는데 그 속에 무슨 형상이 있겠느냐는 문제 생겨. (162) [논리적 정의 속에는 질료가 없다. 유클리트 기하학의 도형은 형상이 아니라 정의로만 성립한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도형을 그리고 다양한 표현을 하는 것이리라.]
(1986년 6월 21일)
(13:14, 51UK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