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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록대전 재조명
명리학의 고전 <연해자평(淵海子平)>에 간지술의 기원과 탁록대전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황제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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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의 고전 <연해자평(淵海子平)>에 간지술의 기원과 탁록대전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황제 때에 치우가 나와 세상을 어지럽게 함에 황제께서 심히 백성의 고생을 걱정하여 마침내 치우와 탁록의 들에서 싸워 이를 쳐죽였다. 그러나 유혈이 백리에 뻗쳐 이것을 다스리기 어려움에 황제는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비니 하늘이 이를 가상히 여겨 10간 12지를 내리셨다. 황제는 십간을 원으로 포하여 천형을 상징하고 십이지를 방으로 포하여 지형을 상징하고 그 빛을 합하여 직문에 명하여 이를 널리 퍼지게 하니 그 후는 잘다스려졌다."(사주정설, 27쪽)[출처] 탁록대전 재조명|작성자 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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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을 보면, 영국에서 독립하고자 한 식민지의 미국인들 처지와 중원에 있는 식민지를 개척한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음을 느낄 수 있다. 미국인들도 세금의 의무만 지고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듯이 식민지인 중원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이런 반발 분위기를 등에 업고 배달국에 도전한 것이 황제 헌원이었던 것이다. 탁록이란 이름처럼 천자자리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그를 따르는 세력이 배달국을 압도한다고 생각되어 이와 같은 일을 벌인 것이다.
이에 배달국의 치우천왕이 81명의 형제와 군사를 총모집하여 이를 진압한 것이다.
헌원은 운사였다고 하며, 곧 치우천왕의 신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천자자리까지 생각한 것으로 보아
그도 상당한 세력을 가졌던 배달국의 고위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너무 단순한 무기인 활과 돌로 무장하였고, 치우천왕이 헌원을 진압하기 위해 창과 방패를 최초로 사용하였으며, 투구와 갑옷까지 만들어 무장하였다. 수레와 투석기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스페인군과 잉카군대만큼의 차이라고 볼 수있다. 10년동안 73회를 싸웠다고 하는데, 10개월을 과장기록한 것이라 생각된다, 상대가 될 수 없는 무차별 살육이 벌어진 것이다.
아래는 태백일사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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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망과 헌원이 항복하여 조공을 바치다
太白逸史·제3 : 신시 본기少昊大敗 落荒而走 入空桑 偕楡罔出奔. 蚩尤天王 乃卽祭天 而誓告 天下泰平. 更復進兵 圍迫涿鹿 一與而滅之. 管子 所謂 天下之君 頓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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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白逸史·제3 : 신시 본기
少昊大敗 落荒而走 入空桑 偕楡罔出奔. 蚩尤天王 乃卽祭天 而誓告 天下泰平. 更復進兵 圍迫涿鹿 一與而滅之. 管子 所謂 天下之君 頓戰一怒 伏尸滿野者 是也. 時有 公孫軒轅者 土着之魁. 始聞蚩尤天王 入城空桑 大布新政. 而敢有 自代爲天子之志 乃大興兵馬 來與欲戰. 天王先遣 降將少昊 圍迫涿鹿 而滅之. 軒轅 猶不自屈 敢出百戰 天王動令九軍. 分出四道 自將步騎三千 直與軒轅 連戰于涿鹿. 有熊之野 縱兵四蹙 斬殺無算. 又作大霧 咫尺難辨 而督戰 賊軍乃 心慌手亂 奔竄逃命 百里兵馬 不相見. 於是 冀兗淮岱之地 盡爲所據 乃城於涿鹿 宅於淮岱 軒轅之屬 皆稱臣入貢. 蓋當時 西土之人 徒憑矢石之力 不解 鎧甲之用. 又値 蚩尤天王之法力高强 心驚膽寒 每戰輒敗. 雲笈 軒轅記之 所謂 蚩尤始作 鎧甲兜䥐 時人不知 以爲 銅頭鐵額者 亦 可想見其 狼狽之甚矣.
소호가 크게 패하여 낙담하고 황무지로 도망하더니 공상으로 들어가 유망과 함께 빠져나와 달아났다. 치우천왕께서 즉시 하늘에 제사하여 천하태평을 맹세하였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포위하고 압박하니 일거에 그들을 멸망시켰다. 관자에서 말한바 대로 “천하임금께서 별안간 전쟁할 적에 한번 성을 내시자 엎드러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다”함이 바로 이것이다. 그때에 공손 헌원이라는 자가 있었으니 토착민의 수괴였다.
치우천왕께서 공상에 입성하여 새로운 정치를 크게 펼친다는 소문을 비로소 들었다. 그리고는 감히 자기가 대신하여 천자가 되겠다는 뜻을 지니고 마침내 군대를 크게 일으켜 공격해 와서 더불어 싸우고자 하였다. 치우천왕이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어 탁록을 포위하고 압박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다.
헌원이 오히려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감히 백번이나 출전하므로 치우천왕께서 9군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네 갈래 길로 나누어 출전시키고 자신은 보병과 기병 3000을 거느리고 곧바로 진격하여 헌원과 더불어 탁록에서 연이어 싸웠다. 유웅이라는 들판에서 군사를 풀어 사방을 압축하고 참살하니 그 숫자를 셀 수조차 없었다.
또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하고 싸움을 독려하니 도적의 군대는 마침내 마음이 두렵고 손이 떨려 달아나 숨으며 목숨을 위해 도망하니 100리 안에 군사와 말을 찾아 볼 수 가 없었다. 이에 기주와 연주와 회대의 땅을 모두 점거한바 되었고 마침내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지방에 머무르니 헌원의 무리가 모두 신하를 칭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개 당시 서쪽 땅의 사람들은 화살과 돌의 위력만 헛되게 의지하여 갑옷의 쓸모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또 치우천왕의 높은 법력과 강력한 의지에 맞닥뜨리니 마음이 놀라고 간담이 서늘하여 매번 싸워도 모두 패하였다. ‘운급 헌원기’라는 책에서 이른바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한 자”라고 하였으니 역시 그들의 낭패가 심한 것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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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왕이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헌원의 무리가 신하로 복종하였으나, 엄청난 승리뒤에는 엄청난 부귀와 타락도 함께 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후대에 요임금과 단군의 신하 순임금이 작은 나라지만 이에 반발하여 따로 독립했다고 생각합니다. 단군조선(BC 2333년)도 규원사화기록처럼 오래가지 못하고 1195년 또는 1205년만에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환단고기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2096년이라 연장시켜 놓은 것입니다. 단군조선이 망한 뒤 열국시대(BC1138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열국시대를 통일한 왕이 바로 부여의 동명왕이며. 그때가 BC232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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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북부여사
기사 8년(BC232)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 하시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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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에서는 해모수로 기록하였는데, 왜 추모왕의 아버지인 해모수를 동명왕으로 왜곡해 놓았는지는 의문입니다. BC37년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을 동명성왕이라 하였는데, 이는 후대에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추모왕이 부여 동명왕을 계승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해 동명성왕이라 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당나라의 가언충이 고려비기를 운운하며 900년이란 한것은 바로 위와 같은 사실이 반영된 것입니다.
동명왕을 해모수라 하며, 추모왕을 동명성왕이라 하였음은 역사왜곡인데, 이런 위사를 만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정당성을 주변에 홍보하기 위한 왜곡된 기록이라 생각됩니다.
고구려 귀족들은 동명왕과 추모왕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짜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연개소문의 아들 남산의 묘비 중에
男產遼東朝鮮人也昔者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朱蒙孕日臨浿水而開都
남산은 요동조선사람이다. 옛날에 東明이 氣를 느끼고 호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臨해 수도를 열었다.
즉 고구려를 개국한 사람은 동명이었고, 계승한 사람은 주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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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치우천왕의 높은 법력이란 글을 읽고 몹시 당황했는데, 위서의 흔적이 아니라 사실의 흔적이라 생각된다, 불교나 도교에서 법력이란 용어를 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어떤 분을 만나고 보니, 치우천왕에게도 법력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우천왕이 대단한 법력의 소유자였으리라 생각하게 만든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