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마저 싱그러운 들길을 혼자 가면 나락단 묶음마다 흐르는 고운 달빛 오늘처럼 오롯이 행복한 푸른 밤엔 호수 깊이 파묻힌 저 별들을 조리로 그대 함께 건지고 싶어라
정두수 선생의 '가을밤' 전문이다. 계절은 벌써 가을을 훌쩍 넘어 눈발이 희끗한 오후였지만 선생의 이 노랫말을 만나는 순간 내 가슴엔 가을이 왔다. 예술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시인이자 작사가인 정두수 선생. 그는 60년대 후반부터 가슴을 적시는 노랫말로 우리 국민의 가슴을 매만지며 시대를 풍미했던 문재(文才)다.
그의 글에는 장엄한 지리산의 정기와 넉넉한 섬진강의 정서가 녹아있다. 거침없이 펜을 휘두른 그는 수많은 노랫말을 썼다. 그런 그를 일견 대중가요 작사가로만 알고 있으면 큰 오산이다. 그는 1956년 부산 동래고등학교 재학 시절 ‘올벼’의 동인활동을 시작으로 해서 대학시절 이미 수많은 시를 발표했다.
1964년 서라벌 예대 문창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잡지사 기자로 3년간 활동했으며, MBC 방송 스크립터로도 맹활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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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사가이자 시인인 정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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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그가 쓴 <덕수궁 돌담길>이 대히트를 하면서, 선생은 작사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당시 시 한편 고료가 300원인 반면 작사 한 편은 2000원이 넘었기에 그는 갈등한 끝에 지구레코드사의 전속 작사가가 되었다. 그 시절엔 펜을 들기만 하면 가사가 술술 흘러나와 한달에 30여 편의 작사를 하며- 국내 정상의 트로트 가수 치고 정감 어린 그의 노랫말을 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니- 참으로 혈기왕성하게 젊은 시절을 보냈다.
무려 4000여 곡의 노랫말이 그의 펜 끝에서 탄생되어 국내 최다 작사가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선생은 작사교실을 설립해 걸출한 작사가를 배출했으며 작사법에 대한 저서를 내기도 했다. 그리하여 방송가요대상, 백마가요대상, 난영가요대상, 국제가요대상 등 50여 차례에 걸쳐 큰상을 받아 우리나라 대중가요 노랫말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린 장본인으로 기록되며, 현재까지도 작사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 있다.
요즘 우리 가요계의 노랫말을 보면, 문맥이 잘 맞지 않으며 자극적이고 직설적인 데다가 필요 이상의 영어 가사가 혼재되어 있어 아쉬운 점이 많은 점이 많은 때문인지 선생의 노랫말은 더욱 소중하게 여겨진다.
그런 그가 우리 고장 광주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선생은 초월읍의 아파트 15층에 살고 계신다. 평소 친분이 많은 지인의 안내로 찾아간 선생 댁은 여러 가지 자료들로 꽉 차 있었다. 조금 전까지 이것저것 자료를 정리하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지난 가을 건강이 좋지 않아 수술한 후로는 거의 칩거하며 해묵은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다고 하셨다. 불쑥 찾아간 필자를 고향 출신의 후배 시인이 왔다고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참으로 인정 어린 모습에서 푸근한 사람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벽에 걸린 많은 사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젊은 시절 얼마나 왕성하게 활동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이 건네주시는 네 권의 문예지 속에는 대중가요 노랫말이 아닌 알곡 같은 시들이 수없이 실려 있었다. 그는 틈틈이 시를 써서 발표해 왔으며 한국문학예술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선생이 경남 하동 출신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섬진강 연작시 39편과 하동포구 이야기 연작시 86편, 백두대간 연작시 33편이 특집으로 실린 문예지를 보며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편 한 편마다 꿈틀대는 시혼이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행간마다 묻어나는 시의 정취는 그가 진정한 문장가임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연작시 몇 편을 보자.
가슴이 이렇게 저미도록 가을 햇살 서걱이는 날엔 섬진강 나루로 가자 나룻배 떴다 해서 물새 울고 가는 세월 비켜설 수 있겠는가 흐르는 강물에 내려앉는 저녁 빛은 그냥 두자 빈 나룻터 빈 나룻배 텅 빈 노을 -'섬진강 1' 전문
동백꽃은 기다림에 지쳐서 핏빛 울음을 터뜨리지만 섬진강 자락의 대밭 난초는 어디 그렇던가! 평생 그리움에도 구김살 없이 저만치서 기다리지 않는가 -'섬진강 4' 전문
울화통이 치밀어 돌아누웠던 백두대간 산들이 잘려진 몸을 일으켜 다가서고 있다 깊이 박힌 나무의 뿌리는 무성한 가지와 잎을 피우기 위해 물줄기 흥건한 곳으로 결국 뻗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지금 남녘을 향해 다가서는 백두대간이여 우리 조금만 더 다가서 보자 -'백두대간 18' 전문
남쪽바다 끝에서 소백산맥 마지막 묏부리는 그만 힘이 부쳤는가 금오산(소오산)은 노량바다를 감싸 안고 풍광명미의 한려수도 뱃길 터놓았구나 -'하동포구 이야기 8' 전문
몇 편의 시를 읽으며 그의 문학적 깊이와 넓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질화로 잿불을 다독거리듯 시를 향한 그의 가슴은 잠시도 식은 적이 없다. 평생을 글밭에서 삶을 경작하며 고삐를 꼭 쥐고 살아왔으리라. 선생의 가슴에 켜 둔 시의 불꽃은 도무지 꺼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선생은 근래 들어 건강이 나빠졌다. 지나온 삶을 반추하며 회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선생에게 광주의 풍광은 많은 위로가 되어 준다고 하신다.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선한 풍광이 너무나 곱다며 함께 보기를 권하는 선생의 가슴은 아직도 풍부한 시적 감성이 샘솟는 듯해 보였다.
선생의 노래비는 현재 우리나라 도처에 15개나 세워져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작년에는 고향인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주교천변 600여 평의 부지에 선생의 노래비 공원이 조성되었다. 이 공원에는 80년 전과 동일한 물레방아를 만들어 재현했고 <물레방아 도는데>, <시오리 솔밭길> 노래비와 정자, 디딜방아, 연못 등을 곁들여 그가 우리나라 작사계의 거목이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반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 공원에는 선생의 노래를 부른 국민 가수 나훈아의 팬클럽 회원 3000여 명이 노래비를 관람키
위해 이곳을 다녀간 것을 비롯해 지금까지 많은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힘입어
하동군은 하동출신의 가수 이필원 씨를 비롯해 남진, 주현미, 설운도 ...... 등의 가수를 초청해 제 1회 ‘정두수 가요제’를 열었다. 하동군은 기금을 더 조성하고 인근 2000여 평을 더 매입하여 공원을 확장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화란 여러 사람이 두루 공유할 때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그것이 대중예술이든 순수예술이든 많은 사람의 가슴에 안겨들어 삶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한 몫을 한다면 그 가치는 소중한 것이다. 현대의 대중문화는 일부층의 고급문화와 기층의 토착적인 민속문화 사이에서 생겨나 중간문화에 이르렀고, 생활수준의 향상과 교육 수혜의 확대로 자연스럽게 향유 범위가 넓어져 대중문화의 성립의 기반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대중이 교육에 의해서 사회화되는 기회가 증대되고, 매스 미디어와의 접촉기회가 많아졌다는 사실은 확실히 문화의 대중화를 상징한다 하겠으며, 대중문화를 좀더 정화하여 우리 삶의 한 표현 방식으로 살뜰히 다듬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선생이 우리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 여겨진다.
선생의 가형(家兄)은 문단에 잘 알려진 정공채 시인이다. 선생의 선친께서는 정공채 시인에게 공자와 같은 품성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공채’라 이름 지었고, 선생에게는 두보와 같은 문장가가 되라고 ‘두채’라 이름 지었다 한다 (작사를 하면서 두수라는 필명을 사용함). 이러한 선친의 마음을 두 형제는 심중 깊숙이 헤아려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 했다.
<아네모네>, <흑산도 아가씨>, <그리움은 가슴마다>, <가슴 아프게>, <물레방아 도는데>, <공항의 이별>, <시오리 솔밭길>, <과거는 흘러갔다>, <덕수궁 돌담길>, <마포 종점> 등… 주옥같은 가요들은 지금도 추억에서 생생하지만, 선생은 이제 건강에 자신이 없어 자꾸 쉬어가려 하신다. 고향의 물레방아는 아직도 우리들 가슴에 쉼 없이 돌아가고 있는데.
경희대 성악과 출신의 천상배필인 이영화 여사는 그 눈빛만큼이나 마음 품도 깊어 보였다. 그래서일까. 선생은 자꾸 그 품에 젖어들고 싶어 하는 듯하여 마음이 짠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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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시 거목 이십니다 우리 카페에 초대 하시지요.
멋진 기사 실어갑니다
멋진 기사를 실었군요. 열정이 넘치는 장기자, 사랑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