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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제 119편
=====119: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자 - 직역하면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 길에 완전한 자'이다. 이 같은 원문의 구문을 중시할 때 '길에 완전한 자'란 여호와의 법을 행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자임을 알 수 있다. 먼저 '길에 완전한 자'란 먼 길을 가는 것에 비유되기도 하는 인생살이에 있어서 완전한 자인데 '완전한'(* , 타밈)이 '비난받을 것이 없는', '오염되지 않은' 등을 뜻하는 것을 고려할 때(70인역, Luther) '길에 완전한 자'란 인생을 살 때 비난 받을 죄악된 행실에 오염되지 않은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자가 되는 것은 그 자신의 노력이나 수양으로만은 불가능하며 자신의 행실을 여호와의 법에 합당하게 쳐서 복종시키는 데서 가능하다는 것이 본절의 주장이다. '법'(* , 토라트)은 '던지다', '가르치다' 등을 뜻하는 '야다'(* )에서 온 명사로 '길을 보임', '방향','지침', '지시', 등을 뜻한다. 좀더 세부적으로는 특정한 경우에 행하여야 할 바를 가르쳐 주는 지침의 의미까지 담고 있다(Vriezen). 물론 이 지침은 제사장이나 선지자혹은 지혜 선생(잠 13:14) 등을 통해 전달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라트'의 근원은 여호와 자신이시다. 여호와의 이 같은 지침, 가르침은 후대를 위하여 법전과 같은 형태로 성문화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그 일환으로 되어진 것이 바로 모세 오경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호와의 법, '토라트'(이는 흔히 알고 있는 '토라'의 복수형이다)를 모세 오경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모세 오경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법을 행하는 자, 그가 길에 완전한 자가 될 수 있고 그러한 자만이 진정 행복한 자라고 본절은 말하고 있다. 한편 본시에서는 몇몇 절을(84, 90, 122, 132절 등) 제외하고는 각 절마다 '율법'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등장한다. 이러한 의미로서 나오는 동의어들은 원어상 9개인데, 이들의 의미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엄격히 구별짓는 데에는 다소 어려움이 따르지만 의미상의 차이를 대략적으로 파악하여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19:2
증거(* , 에두트) - '알다'를 뜻하는 '야다'(* )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본 용어는 하나님의 증거와 선포를 통해 만들어진 두 돌비를 가리킬 때(출 31:18) 혹은 '여호와의 법궤'를 가리킬 때도(출 25:21;렘 3:16) 사용되고 있다. 또한 25:10;132:12 등에서는 하나님이 그 입으로 선포하신 것을 강조하는 의미의 '언약들'로 본 용어가 번역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1절과 본절은 동일하게 여호와의 율법을 강조하지만 1절은 법의 존재 형태라는 측면, 즉 성문화된 여호와의 법을 강조하는 반면 본절은 여호와의 선포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측면의 여호와의 법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겠다.
전심으로 - 신명기적 표현으로서 본 시편의 중요한 특성의 일부를 형성하는 용어이기도 하다(10, 34, 58, 69, 145절).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간절히 여호와를 찾는 자는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신 4:29;렘 29:13).
=====119:3
불의 - 본 용어는 일반적인 잘못, 악 혹은 법정적인 의미의 불의를 의미한다(64:6;대하 19:7;미 3:10). 그러나 사본상의 용례들을 중시할 때 세상에 만연해 있는 악한 원리로 보는 것이 좋겠다.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 문자적인 뜻은 '그의 길들 가운데로 걸어가는도다'이다. 이것은 습관화되다시피 할 정도로 계속적으로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진정 여호와의 법을 따라 사는 자는 이론상으로만 정직하거나 곧은 자가 아니라 실제 삶에 있어서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경건한 자이다.
=====119:4
주의 법도 - 시편에서만 나오는 용어이다. 103:18에서는 '언약'으로 번역되어 있고, 111:7에서는 '하나님의 손의 일들'(말하자면 그의 자기 계시)로 번역되어 있다. 이런 번역 실태를 감안할 때 본 용어는 문맥에 따라 그 번역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듯하다. 본 문맥에서 이 용어는 '법'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여기서 '법'은 다름아닌 그 법을 받은 자가 꼭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서의 법을 말한다.
근실히(* , 메오드) - 문자적인 뜻은 '매우'이나 문맥상 '신실하게', '끊이지 않고'로 번역되거나 '주의하여'로 번역될 수 있겠다(신 24:8). 여호와의 법은 날마다 주의 깊게 묵상하고 살펴서 그 깨달은 바를 정리해야 하며 그 어떤 상황 가운데서라도 그 깨달은 바를 신실하게, 지속적으로 행해야 할 것이다.
=====119:5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 원문을 직역하면 '오! 나의 길들은 당신의 법을 지키도록 설정되었습니다'이다. 자신의 인생의 방향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일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고백이다. 이 고백이 가슴에서 계속 메아리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경건한 자가 아니다. 여기에서 '아할라'(* )는 강한 의지 및 소원을 뜻하는 감탄사인데 이 감탄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서 하나님의 법에 합한 삶을 살기 위한 저자의 의지, 소원은 매우 강렬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왕하 5:3). 하나님께 절대 의존하고 있는 자만이 이런 류의 의지나 소원을 가질 수 있다.
율례(* , 후케카) - 원형은 '호크'(* )인데 이 용어는 여호와의 특별 포고령(2:7) 혹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148:6)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어떤 조건과 그에 따르는 약속이라는 면의 언약(50:16;105:10)과 평행적 의미로 가장 가깝다고 하겠다. 저자가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소원을 나타내고 있는 이유는, 그내용은 명확지 않으나 그러한 삶에 따른 결과적 약속을 암시하는 특정한 언약을 이미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119:6
주의 모든 계명 - 여기서 '계명'은 '미츠오트'(* )로서 솔로몬이 시므이에게 주었던 명령과 같이 권위있는 자가 내린 명령들이나 포고령 따위를 의미하다(왕상 2:43). 유사한 의미로 꼭 준수해야 하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들 혹은 금지령 등을 '미츠오트'라 부를 수 있다. 이 용어의 원형은 '미츠와'(* )인데 신명기에서 '율법'을 지칭하는 용어 중의 하나이다.
주의할 때에는 - 문자적인 뜻은 '주시하다'인데 이것은 계명을 삶의 법칙으로 삼기 위하여 그것을 주의 깊게 묵상하고 계속적으로 의식한다는 뜻이다.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 계명 수행자가 자신의 삶과 율법의 요구를 비교해 보고 수치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계명을 주의 깊게 묵상하며 계속적으로 의식하고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거나 징벌을 받지 않게 된다는 의미이다. 즉, 심리학적인 측면에서의 수치보다는 종말론적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119:7
판단을 배울 때에는...감사하리이다 - 여기에서 '판단'은 '미쉬페테'(* )인데 본 용어는 이곳뿐 아니라 본 시편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 행위가 아니라 율법 그 자체 혹은 판단자이시며 율법 수여자되신 하나님이 내리신 말씀 자체를 의미하고 있다. 이 유사 용례는 출 21:1;24:3;레 18:4, 5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배운다'는 말은 율법을 지킨다는 뜻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율법을 계속해서 배운다는 뜻이며 그 배움은 자의적 연구를 통해서보다는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감동을 통하여 되어진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도 동반되어 있다(73절). 결국 저자는 자신이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배우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19:8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 버리지 말아달라는 표현은 심한 고통 중에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27:9;71:9, 18). 그렇다면 본 구절은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의 상태에 계속해서 놔두지 말아달라는 기도가 되겠다. 혹은 기자가, 주의 도우심 없이는 주의 율례를 지킬 수도 없고 결과적으로 파멸 가운데 처하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Alexander).
=====119:9
청년 - 본 단어를 근거로 본 시편 저자를 청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본절 전체에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은 자신의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청년의 순결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불특정 다수의 청년들에게 교훈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사용하고 있다고 이해 가능하다. 이 사실은 나이가 지긋하고 경험이 많은 자로서 지혜롭고 친근한 충고를 주고 있는 전 12:1을 상기케 한다:"너는 청년의
때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그러나 본 시편의 저자가 나이 많은 노인이 아님은 자신의 지혜가 노인의 그것보다 승하다고 비교하는 대목을 통해 읽을 수 있다(99, 100절). 이 같은 사실들을 종합할 때 본 시편 저자는 젊은 청년이나 노인이 아니며 적어도 인생 경험이 어느 정도 있는 인생 중년에 이른 자라고 봄이 더 나을 것 같다.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 어떻게 하면 인생 여정이 순결하고 바른 것이 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 같은 표현은 이미 지은 죄를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미래의 삶을 바라보는 표현이다. 말하자면 그 아래 자신을 묶어두어서 그의 미래의 여정이 정직하고 영예롭고, 바른 것이 될 수 있는, 그가 채택할 행동 원칙들은 무엇이겠느냐는 것이다. 묻고 대답하는 본절과 같은 형태는 지혜서의 서술 형태를 연상시킨다(25:12;34:12;잠 23:29).
=====119:10
떠나지 말게 하소서(* , 알 타쉬게니). 직역하면 '나로 방황하지 말게 하소서'이다. 본 구절에 사용된 동사의 원형인 '솨가'(* )는 강조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강동사이다(신 27:18).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해 순종하기를 중단할 때 인간의 전 삶의 영역은 흔들리고 방황하기 시작하므로 가르침에 대한 순종을 중단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잠 19:27).
=====119:11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 동사 '차판'(* )은 비밀로 하기 위하여, 누군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숨기다'의 뜻이 있다. 이것은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돈이나 보석 따위를 숨겨두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17:14;욥 20:26). 또한 이 동사는 비밀스럽고 접근할 수 없는 장소인 마음에 무엇인가를 쌓아둔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사상, 의도, 목적 따위를 숨기거나 지혜나 지식 따위를 보물처럼 마음에 쌓아두는 것을 연상케 한다(욥 10:13;잠2:1;7:1).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인 양 기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물처럼 쌓아두었다는 것이다.
말씀(* , 에메르) - 이는 9절에 나오는 '다바르'(* )와 시적 동의어이다. 본 시편에서 이 용어는 보편적 의미의 하나님의 법 혹은 특별한 의미의 그분의 약속들도 뜻할 수 있다.
=====119:12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 바루크 아타 예화). 직역하면 '여호와 당신은 경배를 받으소서'로서 송영의 일종이다. 본 송영은 인생을 선하고 거룩하게 지도하고 인도하기에 적절한 율법에 대한 깨달음에서 흘러나온 것이다(28:6).
=====119:13
모든 규례(* , 콜 미쉬페테) - 직역하면 '모든 판결들'이지만 문맥상 성문화된 법전 혹은 율법 등으로 해석해도 되겠다.
선포하였으며(* , 시파르티) - 원형 '사파르'(* )는 '계산하다', '반복하다', '낭송하다' 그리고 '선포하다'의 뜻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의미들을 감안하고 본 동사 앞에 부사 '입술로'가 있음을 고려할 때 본절은 저자가 하나님의 율법, 그 구체적인 조항들을 반복 낭송함으로써 그것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였던 것을 뜻한다 하겠다.
=====119:14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 본절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좀더 부각시키려면 이렇게 번역해야 옳다. '모든 재물을 즐거워하는 그 이상으로.' 72절과 127절에 의하면 이 같은 번역은 정당하다. 하나님의 뜻이 물질적인 것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때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깊고도 신령한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이다(잠 2:4). 본절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혜의 가치를 말하고 있는 잠언의 구절들을 연상시킨다(잠 3:13-15;8:10, 11, 19;16:16;22:1 이외에 욥 28:15-19을 참조하라).
=====119:15
묵상하며(* , 아시하). 이 말은 단순히 읽거나 낭송하는 수준을 넘어 그 깊은 의미를 깨달아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을 맛보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주의 도에 주의하며 - 계속적으로 율법의 명령을 인생의 안내자로 마음에 두는 것을 가리킨다.
=====119:16
잊지 아니하리이다(* , 에쉬카흐) - 원형 '솨카흐'(* )는 한 인간의 기억력뿐 아니라 그의 고의적 의지 행위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는 동사이다. 말하자면 저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망각지 않는 의지적 노력을 하겠다는 다짐을 보이고 있다(13:1;44:24;74:19;77:9). 구약에서 하나님의 존재 혹은 그 말씀을 망각한다는 것은 기억 불능 그 이상을 의미한다. 곧 그것은 의도적 범죄(106:13, 21), 하나님 언약에 대한 불순종(44:17), 심지어는 우상 숭배(44:20) 등으로도 묘사될 수 있다.
=====119:17
후대하여(* , 게몰) - 이 동사는 어떤 상대에게 선이나 악을 행하는 것을, 혹은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리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여기서는 은총을 베풀어달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13:6;116:7;142:7). 그러나 시편 저자가 자신의 어떤 공로에 근거하여 그 같은 요구나 주장을 하고 있다고 볼 필요는 없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은총, 그분과의 교제, 그분의 간섭을 간청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은총을 내리시고 그분과의 교제가 계속될 때 그리고 시시 때때로 그분이 간섭하실 때 땅 위에서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믿음이다.
=====119:18
기이한 것 - 일반적인 시야로부터 숨겨진, 비밀스러운 것으로서 신령한 의미를 가리킨다. 일단 그것이 밝혀지면 놀라움과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주의 법은 명령 조항을 모아놓은 세상 법 같은 것과는 상이하게 다르다. 그 속에는 인생의 궁극적 지침을 담은 깊고 신령한 의미가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영적 시야를 가질 때에만 파악이 가능하다.
=====119:19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 '객'이란 주지하다시피 그 고향이 다른 곳에 있고 일시적으로 이방 땅에 체류하는 자를 가리킨다. 물론 시인이 실제적으로 타향에서 나그네와 같은 신세로 처량하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러한 실제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마치 고향과 친척을 등지고 떠돌아다니는 외인(外人)과도 같은 험난한 인생살이를 비유로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러한 자각이 있었기에 주의 계명을 향한 열정은 더욱 강렬해졌던 것이다. 진정 하나님께서 그 계명들의 깊은 의미와 참된 적용을 가르쳐 주셔야만 잠시 사는 이 세상에서 성도는 성도답게 살수 있다(39:12).
=====119:20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 '상하나이다'에 해당하는 '가르사'(* )는 계속 문지르거나 두들겨서 결국에는 조각조각이 나거나 부서지는 모습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본절에서 저자는, 자신의 영혼이 거의 기진하고 고갈된 상태에 놓였는데 그 이유는 날마다 하나님의 규례를 좀더 알기를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밝힌다. 다시 말해서 이는 하나님의 규례를 사모하는 시인의 열정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전폭적이었음을 뜻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영혼을 소생케 하시며(23:3) 새로운 힘으로 풍성하게 채워주신다(사 40:27-31).
=====119:21
본절을 원문에 입각하여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당신의 계명들로부터 떠나 방황하는, 저주를 받은 교만한 자를 꾸짖으셨나이다.' 재번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본절은 동일한 한 사람의 특성을 서로 다른 세 가지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먼저 그 사람은 의도적으로 계명에 대하여 태만한 자이며(118절;삼상 26:21),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낙인 찍힌 자이며, 하나님을 의존하는 시편 저자를 조롱하고(51절) 거짓 증거하고(69절 상반절) 압박하고(122절 하반절) 함정을 판(85절) 자라는 의미에서 교만한 자이다. 이 같은 자는 하나님께 꾸짖음을 받았는데 이 꾸짖음이란 말로만 하는 책망이 아니라 심판을 통해 드러나는 실제적인 징벌이다(9:5). 자세히 살펴보면 이 자의 잘못의 근본 원인은 계명에 대한 의도적인 태만인데 아마도 저자는 자신은 계명을 파수하고 순종하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그 대적의 불순종 사실을 역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119:22
떠나게 하소서(* , 갈) - 문자적인 뜻은 '벗기소서'이다. 수치는 흔히 어떤 사람을 덮고 있는 외투나 망토로 비유되곤 하는데 그같은 수치를 벗는 의미를 나타낼 때 이 단어가 사용된다(수 5:9 참조).
=====119:23
방백들(* 사림) - 이는 '통치자들' 혹은 '지도자들'을 뜻할 때 사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 중의 하나이다. 이 용어는 족장들(스 8:29), 장로들(욥 29:9) 혹은 지휘관들이나(왕상 9:22;왕하 1:14) 왕의 관리들(105:22;왕상 4:2;렘 26:10) 등을 뜻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특정 계층의 우두머리, 장들을 뜻하기도 하며(창 40:2;대상 15:22), 보편적으로 위엄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45:16;82:7;사 23:8). 본절에서는 어떤 공동체의 관리들 혹은 영향력 있는 대표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훼방하였사오나(* , 니드바루) - 문자적인 뜻은 '말하였다'인데 수동형을 취한 상호 재귀형 동사임을 고려할 때 좀더 자세하게 '그들이 서로서로 말하였다'로 번역할 수 있겠다. 이것은 시편 저자의 대적들이었던, 공동체 내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저자를 망하게 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위하여 서로 머리를 맞대듯이 가까이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119:24
주의 증거는...나의 모사니이다 - '나의 모사'(* , 아차티)의 문자적인 뜻은 '나의 조언자'이다. 문맥상 조언의 내용은 대적들의 음모를 좌절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겠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적용해 보면, 대적들의 음모를 알아챘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음모를 꾸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어리석어 보이는 행위 같으나 대적의 음모를 이길 진정한 비결은 바로 거기에 있다.
=====119:25
내 영혼이 진토(塵土)에 붙었사오니 - 본 구절을 해석하는 관건은 '진토'이다. '진토'는 우선 지하 세계, 저승, 지옥의 상징어로 볼 수 있다(22:15, 29;44:25;사 26:19). 그럴 경우 본 구절은 저자의 영혼이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한 고통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구절이 된다. 또 한편으로 '진토'는 문자 그대로 땅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경우 본 구절은 고통의 상태를 아뢰기 위하여 땅 위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구절이 된다. 고통의 상태 자체에 대한 호소가 하나님의 도움을 얻는 수단이 되지 못하며 기도만이 그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후자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는 견해이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으로는 본문이 극도의 쇠약함이나 좌절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 이해된다(28, 50, 67, 71, 75, 83, 92, 107, 143, 153절;7:5;22:15, 29;44:25 등 참조). 이와같이 암담한 상황은 시인으로 하여금 더욱더 여호와께 간절히 매어달리게 하는 동인(動因) 역할을 하였다(VanGemeren).
=====119:26
내가 나의 행위를 고하매 - 여기서 '행위'란 문맥상 과거 저자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고통과 좌절을 비롯한 모든 인생의 체험들을 가리킨다. 저자는 자신의 모든 경험들, 특히 그를 아프게 하였던 고통들을 하나님께 아룀으로써 그 문제들을 해결받았던 경험을 갖고 있다. 저자가 죽음에 가까운 고통 중에 있는 지금 과거의 그 같은 경험들을 다시 아뢰는 까닭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이 고통도 해결받기 위해
서이다. 고통 중에 있는 시편 저자들은 흔히 과거 사실에 근거하여 현재의 난제(難題)해결을 위한 기도를 아뢰었다(22:4).
=====119:27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 현재의 고통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깨
닫게 해주시되 하나님의 교훈의 말씀에 입각한 방도를 알게 해주시라는 의미이다. 저
자는 당장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그 모든 행위
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 - 여기서 '기사'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섭
리적 사역을 뜻한다. 그리고 '묵상하리이다'(* , 아시하)는 많은 사람 앞에
서 그 목도하고 깨달은 바를 선포하고 알린다는 것을 뜻한다(Barnes). 결국 저자는 고
통에서 벗어나게 되면 많은 사람 앞에서 그 되어진 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 사역을
알림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119:28
눌림(* , 투가) - 이곳과 잠 10:1;14:13;17:21 등에서만 발견되는 용어인
데 대체로 '비통', '슬픔', '고통' 등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서는 고통으로 인한 슬픔
으로 오랫동안 그 가슴이 눌려온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된다. 이런 점에서 개역
성경의 번역은 적절하다.
녹사오니(* , 달르파) - 원형 '달라프'(* )는 원래 지붕을 뚫고 떨
어지는 빗방울을 연상케 하는 바 '스며 나오다', '떨어지다' 등의 뜻이다(전 10:18).
그러나 한편으로는 '울다'를 뜻하기도 한다(욥 16:20).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보는
것이 무난하겠다. 그 영혼이 마치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다는 것이
다. 그런데 본 용어는 많은 양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걸
쳐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그것이 다 모이면 많은 양이 흘러 내리는 것을 가리킨다. 본
문을 통하여 저자는 그 가슴을 누르는 심한 고통, 지속되는 고통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마음의 눈물을 흘려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오랫동안 눈물을 흘려
왔사오니'로 번역함이 더욱 정확하다.
나를 세우소서(* , 카이메니) - 직역하면 '나를 다시 힘있게 하소서'이
다. 이것은 본 시편에서 자주 반복되는 '소성케 하소서'와 그 의미가 거의 같다. 이
같은 간구를 하면서 저자는 그 성취가 하나님의 말씀(약속)대로 되어질 것을 부연(敷
衍)함으로써 오랫동안 고통당하고 있다는 현실 속에서도 그가 삶의 기준으로 놓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임을 깨닫게 하고 있다.
=====119:29
거짓 행위 - 이것은 상식적인 의미의 '속임수' 따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
에서의 '비신실성'을 가리킨다. 저자는 계속되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회의심을 나타낼 수 있는 우려의 상황 속에서 그 우려가 현실화되지 않기를 소원
하고 있다. 많은 성도들은 이유를 알 수 없이 계속되는 혹은 특정한 범죄 따위의 이유
로 인한 고통 속에서 의로우신 하나님의 약속을 의뢰하지 않을 수 있다. 저자는 바로
이 위험을 경계하고 있다.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 자비를 베풀어서 하나님의 법을 공평하게 적
용해 달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현실을 정당하게 해결해 달
라는 것이다. 결국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애원이라 볼 수 있다. 보기 드물게 본
구절은 이중 여격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중 여격이 사용되고 있는 또 다른 성경 구절로
는 창 33:5을 들 수 있다:"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119:30
성실한 길(* , 데레크 에무나) - 문자적인 뜻은 '신실의 길'이
다. 이는 하나님이 행하라고 명하신 길이며(25:12) 또 믿고 따라가기에 합당한 길이
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신실성을 강조하는 본 구절은 앞절의 '거짓 행위'와
반의적 평행구를 이루고 있다.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 - 하나님의 법에 동의한다는 혹은 하나님의 법을
행동의 안내자로 삼는다는 뜻이다.
=====119:31
주의 증거에 밀접하였사오니 - 자기의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고 묘사하는 25절에 사
용된 것과 동일한 동사 '다바크'(* )가 사용되었다. 말하자면 아교를 바른 어떤
물건이 또 다른 물건에 딱 달라붙듯이 하나님의 율법에 딱 달라붙었다는 것이다. 그
율법과 굳게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 무엇도 떼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하
나님께 붙어 있는 상태를 그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신 30:20), 그를 섬기는 것(신 10:
20;13:4) 그리고 그의 길을 걷는 것(신 11:22) 등과 연관시키고 있는 신명기를 연상케
한다. 한편, '다바크'는 하나됨을 암시하기도 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씀에서 그것이 드러난다(창 2:24). 그렇다면 이어지
는 내용, 곧 수치를 당치 않게 해달라는 간청은 자신을 고통 가운데서 구원하지 않으
면 하나님 자신이 수치를 당케 되신다는 암시를 포함하고 있는 간청으로 볼 수도 있
다.
=====119:32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 원문에 있는 이유 접속사 '키'(* )를 포함하여 바로
번역하면 '내 마음을 넓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이다. 이렇게 보면 본 구절은 조건을
붙이는 조건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확신을 표하는 내용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
서 아예 '당신은 내 마음을 넓히셨나이다'로 번역하는 원본도 있다(NEB). 본 구절이
묘사하는 '넓은 마음'은 흔히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상태의 마
음을 의미한다(사 60:5;고후 6:11, 13). 저자는 고통의 상태에서 미래에 맛볼 기쁨과
행복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을 이미 성취한 양 확신있게 묘사하고 있다.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 달려간다는 말은 목표를 앞에 둔 자가 그것을 향
하여 민첩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
라 사는 모습은 그 계명의 길을 걷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특별히 달려간다는 식으로 표
현한 것은 좀더 민첩하게, 활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계명을 지키며 살겠다는 결심을 강
조하기 위함인 것 같다.
=====119:33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 에츠레나 에케브) - 여기서 '에케
브'(* )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 '종말'인데 이 의
미를 취할 경우 본 구절은 인생의 종말을 맞을 때까지 주의 법을 지키겠다는 고백이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상급'인데 이 의미를 취할 경우 본문은 상급으로서의 주의 법
을 지키겠다는 고백이 된다. 후자의 경우는 먼 문맥인 19:11;40:15;70:3 등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그곳들에서는 주의 법을 지키는 것과 상급을 받는 사실의 밀접한 관계성
을 암시하고 있다. 주의 법을 준수하는 것은 그 자체가 상급이라고도 이해해 볼 수 있
다. 그러나 후자는 가까운 문맥의 지지는 받지 못한다. 가까운 문맥(34-40절)은 분명
히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앞만 보고 살겠다는 종말론적 사고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이 가까운 문맥을 중시할 때 후자보다는 사는 날 동안 마지막 순간까지 주의 법
을 준수하겠다는 내용인 전자를 취하는 것이 더 무난하겠다.
=====119:34
깨닫게 하소서(* , 하비네니) - 직역하면 '이해를 주소서'이다. 율법
의 특성 및 그 의무 조항 등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게 해달라는 뜻이다. 27절 상반절
의 반복으로 볼 수 있다.
전심으로 - '갈라진 두 마음이 아닌 하나의 마음으로'라는 뜻이다. 이는 율법만을
인생의 안내자로 삼겠다는 고백으로 볼 수도 있다.
=====119:35
주의 계명의 첩경(* , 빈티브 미초테카) - 문자적인 의
미는 '당신의 계명들의 길'이다. 문자적인 뜻을 보아 알수 있듯이 '첩경' 곧 '지름길'
의 개념은 찾을 수 없다. 여기 사용된 '길'이란 구불구불하지 않은 곧바른 길을 말하
는데, 이 '길'을 다시 한번 언급한 것은 좌로나 우로 치우지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만
을 지키겠다는 소신을 재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다. 아마 이것을 염두에 두고서 개역
성경은 '첩경'이라고 번역한 것 같다.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 같은 태도는 동일한 말씀
을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그것을 즐거워하지 아니했던, 귀를 할례받지 못한 완악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와 상반된 것이다(렘 6:10)
=====119:36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 율법을 준수한다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차
원으로써만은 불가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요청된다(신
5:29). 한편, 금지된 욕망을 그 마음에 불일듯 일어나게 하는 기관으로 익히 알려진
다음절의 '눈'은 본절의 이 '마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탐욕(* , 바차) - '부당히 얻은 소득'이라는 뜻이다. 70인역(LXX)은 이것을
'플레오녀시안'(* )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이 우상 숭배 때 동반되
었던 음란, 호색 행위를 뜻하는 '플레오녀시아'(* )와 그 철자가
거의 유사한 사실에 근거하여 '바차'(* )를 우상 숭배, 혹은 음란, 호색으로 번
역하는 학자가 있다(Stanley). 물론 고전 5:10에서는 음란한 자들과 우상 숭배자들의
연관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히브리어 '바차'가 '강제로 빼앗다', '부당하
게 얻다' 등의 의미를 뜻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착하는 일과 부
당한 소득에 마음을 뺏기지 않는 일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본절을 통하여 암시하고
있다.
=====119:37
허탄한 것(* , 솨우) - 이 용어는 물질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 혹은 도덕
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것을 가리킬 때 쓰인다. 실체가 아닐 뿐 아니라 거짓된 것이 그
본질인 우상을 묘사할 때 이 용어가 자주 쓰인 것은 타당하다 하겠다(24:4;31:6;렘
18:15). 아마도 저자는 '우상'을 염두에 두고서 이 용어를 쓰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
의 말씀에 집착하는 일을 경제적 탐욕에 빠지지 않는 것과 연관시켰던 저자는(36절)
이제 여기서는 종교적 악(惡)에 빠지지 않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다.
=====119:38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 , 아쉐르 레이르아테카) - 문
자적인 뜻은 '당신의 경외를 위한 것(약속)'이다. 이 구절은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진 말씀에 강조가 두어진 표현으로 읽을 수 있고,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로 하여금 거룩한 경외감을 가지고서 그것을 지키게끔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 어떤 표현으로 읽어도 큰 차이는 없겠다.
=====119:39
나의 두려워하는 훼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 여기서 '훼방'은 가까운 문맥에서
'훼방하는 자'에 관한 언급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교만스럽게 떠들면서 저자를 위협하
는 대적들로 볼 수도 있다(42절). 그러나 저자가 계속 밑에 깔고 있는 문맥의 사상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철저히 그리고 계속적으로 지키는 것임을 고려하고 또 본절 하반절
이 하나님의 계명들은 갑갑한 올무와 같은 것이 아니라 계속 지키는 자에게 좋고, 아
름답고 축복이 되는 어떤 것임을 밝히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 훼방이란 하나님의 계
명을 파기하는 것, 곧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과거 하나님의 계명
을 준수함으로써 기쁨과 행복을 맛본 바 있는 저자는, 고통의 현실속에서도 그 계명
지키는 일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다.
=====119: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 고통이 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법도'로 번역된 '피쿠데카'
(* )는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고통당하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공
의의 행위로 보는 것이 낫겠다. 이 같은 주장은 본절 하반절의 '의'가 '구원'을 의미
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통해 지지를 받는다.
=====119:41
주의 인자하심...내게 임하게 하소서(* , 이보우니 하사데카)
- 히브리어에서 동사의 모음 형태는 주어(명사)의 모음 형태와 수(단수 혹은 복수)에
있어서 일치를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본 구절의 경우 주어(명사)에 복수를 뜻하는
'요오드'(* )가 생략되어 있어 단수를 나타내면서 동사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 같은 경우의 동사를 결어적 동사(혹은 결어 동사)라고 부른다. 이때 주어를 구성하
는 명사 '하사데카'(* )는 복수형으로 해석해야 한다. '헤세드'(* )의
복수형 '하사데카'(* )는 강조의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이것은 언약 관계
가 유지되는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무수한 자비 행위를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 할 수 있다. 한편, 앞의 '말씀' 또한 하나님과 저자 사이의 언약 관계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주의 구원(* , 테슈아트카) - '당신의 구원'이란 뜻이다. 본 시편을
통하여 저자가 분명히 밝히는 사실 중의 하나는 모든 구원은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사
실이다(123, 166, 174절). 구원은 결코 인간의 능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은혜에 속한
것이다(33:16;60:12;108:13).
=====119:42
대답할 말 -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대적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도리어 이것은 대적들의 확신에 대한 반박으로 보는 것이 좋다. 아마도
저자의 대적들은 하나님이 저자를 돕지도 구원하지도 않으신다고 믿고 조롱했는지 모
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제 그를 구원하실 때 대적들의 확신은 꺾이게 될 것이다.
이런 미래를 기대할 때 신실한 자는 대적의 조롱이 가득한 고통의 현실을 잠시 침묵하
며 참아야 할 것이다(3:2).
=====119:43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소
망을 두고 그것을 간절히 사모하는 저자의 간청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에 등
이요 길에 빛'으로 믿었기에 그것을 떠나서는 한시라도 살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05절). 한편, 본문의 문맥은 분명히 대적과의 대치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의미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긍정문으로 바꾸어 재번역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신의 진리의 말씀을 신실하게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제게 주십시오.'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 키레미쉬파
테카 이할레티) - 직역하면 '당신의 판단만을 기다려왔기 때문입니다'이다. 저자는 오
직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판단만을 기다려왔다고 고백한다. 이 공의의 판단이 시행될
때, 모든 불의와 교만의 세력들이 꺾이움을 당하고 자신은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굳게 믿고 있다.
=====119:44
항상 영영히 끝없이 지키리이다 - 저자의 인생관이 다시 한번 강조 요약되고 있다.
그는 금생에서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율법 준수를 그의 존재 목적으로
삼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저자의 인생관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보인 태도와 완전한 대비를 이룬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열조
가...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렘 16:11).
=====119:45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 원문상의 본 구절 서두에 있는 이유 접속사 '키'
(* )를 살려 재번역하면 이렇다:'왜냐하면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기 때문입니
다.' 이것은 하반절이 묘사하는 상황의 근거를 이루는 내용이다. 법도를 구했다는 것
은 하나님의 법을 연구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자유롭게 행보(行步)할 것이오며 - '자유롭게'(* , 바르하바)의 문자적
인 뜻은 '넓은 공간에서'이다. '넓은 공간'이란 행동의 자유를 억제하거나 방해할 것
이 아무것도 없는 곳을 가리키는데, 이 같은 사실은 118:5을 연상시킨다:"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이제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법만을 연구하고 그 깨달은 바대로 삶을 살았던 저자는
고통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누구의 억제도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성경
은 대적의 영향력이나 압박이 없는 약속된 땅을 때때로 이와같이 묘사하고 있다:"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
한...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출 3:8), "저희가 그 나라와 주의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느 9:35). 요컨대 진리를 아는 자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요 8:32).
=====119:46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 - 여기서 '열왕'은 '멜라킴'(* )으로
'왕들'을 뜻하는데 이 용어는 본 시편의 저작 연대를 논할 때, 자주 거론된다. 본 용
어를 '이방의 왕들'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본 시편은 이방의 통치 특히 페
르시아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시대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Perowne). 그러나
'멜라킴'을 반드시 이방 왕들로 해석해야 할 근거는 없다. 문맥상 본 구절은 그 어떤
사람 앞에서도 하나님의 법을 담대히 말하겠다는 뜻을 담은 내용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으며, 그 경우 '왕들'이란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119:47
나의 사랑하는 바 - 70인역(LXX)은 '몹시'라는 부사를 첨가하고 있다. '사랑하다'
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아하브'(* )인데, 이 용어는 인간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
의 사랑 둘 모두에 적용된다.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에 적용될 때 이것
은 감정적인 만족을 뜻할 뿐 아니라 율법에 표현된 하나님의 뜻의 실천을 통하여 드러
나는 순종적 삶 역시 뜻한다.
=====119:48
내 손을 들고 - 성경에서 손을 드는 행위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는데, 축복(레
9:22), 기도(28:2;63:4;134:2;141:2;애 2:19), 맹세(106:26;창 14:22;신 32:40), 어떤
일에 가담하는 것(10:12;창 41:44) 등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기도 혹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사랑을 나타낸다 하겠다.
=====119:49
말씀을 기억하소서 - 여기서 '말씀'은 오랫동안 고통에 머물러 왔지만 저자로 하여
금 새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하였던 약속의 말씀을 뜻한다. 현실적으로 볼 때 온갖 어려
움이 막아서고 사방에 절망의 벽이 가로놓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약속
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는 시인의 모습은 성숙된 신앙 인격의 전형
적인 한 단면을 보여준다.
=====119:50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 무(無)로부터 만유(萬有)를 창조하시며(창 1
장) 모든 약한 것을 치유하시는(107:20)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시인으로 하여
금 고통당하는 현실 속에서도 기쁨과 평강을 잃지 않게끔 만들어 주었다. 여기의 '네
하마티'(* )는 욥 6:10에서만 한 번 더 나온다:"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
니라." 본 유사 어구를 참조했을 때, 본 구절의 의미는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즉 말
씀이 저자의 기쁨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살리셨음이니이다 - 이는 본 시편에서 여러 번 나오는 표현인데 '고통'을 말하는
문맥에서 다시 나온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 용어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의
미보다는 '마음이 새롭게 됨', '새 용기를 부여받음'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할 것이
다.
=====119:51
나를...조롱하였어도 - 본절 하반절과 연결시켜 이해할 때, 역으로 하반절이 본문
의 이유를 나타낸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저자의 대적들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
하였기에 그를 괴롭게 하였다는 말이다. 이 같은 이해의 근거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
고 떠난 사람 곧 '악인'과 '조롱하는 자'라는 명사가 본절의 '조롱하였다'라는 동사
'제딤'(* )과 그 어원이 동일하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와 신앙심이 없는 악인, 혹은 조롱하는 자는 서로 동일한 상태에 있는 자임을 성경
은 말하고 있다:"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
만으로 행함이니라"(잠 21:24). 1:1에 나오는 '악인', '오만한 자' 역시 한 부류이다.
=====119:52
옛 규례 - 여기서 '규례'(* , 미쉬파테카)는 문맥상 '판결들'로 번역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본 용어는 여기서 율법대로 실제로 세계를 판단하시고 통치하시
는 하나님의 조치들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용어는 이스라엘의 과거 역
사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역사(役事)를 상기케 하는 것이기도 하
다. 한편, '옛'(* , 메올람)의 문자적인 뜻은 '영원한'이며, 여기서는 우
주를 다스리는 신적(神的) 통치 원리의 지속성 및 항구성을 암시하는 용어로 보면 되
겠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들이 항상 동일하였다는 것 곧 하나님의 율법이
그러하였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원리를 따라 항상 그 구체적 시행이 뒤따랐다는 것을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위로를 얻었다.
=====119:53
악인들(* , 레솨임) - 시편의 기자들의 대적들을 일컫는 특징적인 호칭
중의 하나이다(3:7;26:5;37:14;58:3;92:7등).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계시를 무시하
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인들이다(53절).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 - '맹령한 노'의 히브리어는 '잘르아파'(* )인
데 이 명사는 '더워지다', '타오르다', '(바람으로 인해 불 따위가) 크게 번지다'등을
뜻하는 동사에서 왔다. 이것은 악인의 태도에 대한 의인인 시편 기자의 반응을 보여주
는 표현이다. 즉, 그의 동료들 그리고 악인들이 율법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들었을 때
시편 기자의 마음속에는 불 같은 것이 타올랐다는 말이다. 이 표현은 역으로 시편 기
자의 율법을 사랑하는 정도를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119:54
나그네 된 집 - 이것은 '땅'을 말한다(19절). 저자는 자신을 마치 길가의 여관에
유숙하는 지나가는 손님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창 47:9).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 '노래'는 찬양의 노래로 보기보다는 기쁨, 행복, 위안,
힘 등으로 이해해야 문맥적이다. 외롭고 고통 당할 때 주의 율법을 깊이 묵상하는 일
은 경건한 성도에게 기쁨과 위안을 가져다 준다.
=====119:55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품성 혹
은 약속하신 바를 역사 속에서 행하신 것을 묵상하고 추억한다는 뜻이다. '밤'은 문자
그대로 시간대로서의 밤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고통과 근심의 때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본 시편 저변에 깔린 상황이 고통의 때임을 중시하고 후기 유대주의 문학에 있
어서 밤이 사단이 활동하는 때로 여겨졌던 사실 등을 고려할 때 후자로 보는 것이 좀
더 낫겠다.
=====119:56
개역 성경에서 본절은 원문과 다르게 번역되어 있는데 원문대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내가 가졌던 이것은 내가 당신의 법도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것'이
란 50-55절에 있는 내용, 곧 저자에게 발생하였던 일들을 가리킨다. 그 일들이란 곤란
중에서도 위로를 얻었던 것(50절), 교만한 자가 조롱할 때에도 주의 법에 굳게 설 수
있었던 것(51절), 율법 묵상을 통해 위안을 얻었던 것(52절), 악인들 때문에 맹렬한
분노에 휩싸였던 것(53절), 순례자와 같은 삶에서 평안을 누렸던 것(54절) 그리고 그
많은 고통의 순간들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였던 것(55절) 등을 가리킨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율법 준수에 따르는 적절한 열매이자 결과이다.
=====119:57
본절의 어순(語順) 배열은 베어 사본(Baer's text)을 따른 것인데 '하였나이다' 때
문에 절 전체가 어색하다. 따라서 '하였나이다'를 삽입구로 처리하면 절 전체의 의미
파악은 한결 쉬워진다. 즉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므로 나는 그의 말씀을 지키리라'로
이해할 수 있다. 변형시킨 본 구절과 문형상으로 유사성을 보이는 구절로는 애 3:24이
있다:"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시편 저자에게 있어서 여호와는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부(富), 명예, 기쁨, 그 이상의
것이었다. 즉, 그에게 있어서 여호와는 전부였다. 그러므로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
키는 일은 당연하기까지 했다. 시편이 취하고 있는 특별한 성격 중의 하나는 여호와를
이스라엘 전체의 분깃일 뿐 아니라 개인의 분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은 때때로 여호와의 분깃 혹은 그분 자신의 소유로 묘사된다(신 32:9).
=====119:58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 말라기 선지자 시대 때 백성들은 본절
의 내용과 흡사한 탄원을 드린 바 있다(말 1:9). 그러나 지금 시편 기자가 드리는 탄
원과 당시 백성들의 탄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시편 기자는 신실한, 갈라지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탄원하였던 반면(2, 10, 34절), 말라기 시대의 백성들은 무례에 가까
운, 마지못해 하는 정신으로 탄원하였던 것이다.
=====119:59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로 내 발을 돌이켰사오며 - 본절은 평이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특히 하반절의 해석은 쉽지 않다. '돌이켰다'는 표현을 '회개
하고 돌이켰다'로 이해하는 학자들은 본절이 이전에 지은 저자의 죄악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본다. 그들은 본절을 저자가 이전에 지은 죄를 회개한 사실을 강조하는 절로
단정한다. 먼 문맥 67절을 고려할 때 이 같은 단정이 무리는 아니다. 심지어 어떤 학
자는 본절을 저자의 회심 강조 구절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견해가 다양할 경우 우리
는 가까운 문맥에 유의하는 것이 요구된다. 가까운 문맥은 일관성 있는 율법 준수를
말하고 있다. 저자는 어떤 난관 속에서도 율법 준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절은 매순간마다 작은 행동 하나를 옮길 때마다 율법의 가르침을 따
라 살기를 애썼던 저자의 율법 중심적인 삶을 강조하는 절로 보는 것이 낫겠다. 이 경
우 '행위를 생각하고'는 행동의 순간 순간들을 가리키고 '주의 증거로 발을 돌이켰다'
는 것은 매순간의 삶을 대처하기 위하여 주의 법으로 나아가 그것을 묵상 적용했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순간 순간의
걸음을 인도하는 분은 여호와이신 것을 기자는 확신하였음에 분명하다(잠 16:9)
=====119:60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 본문은 상반된 내용의 잠언 구절을 상기케 한
다 :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잠 6:18). 저자는 순간
순간마다 적용하여야 할 말씀이 떠오르면 지체치 않고 그 말씀을 따랐다. 그 까닭은
율법 준수는 형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상의 문제, 곧 그의 실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일임을 그가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119:61
악인의 줄 - 시편 기자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그의 대적들이 사용한 온갖 수단에 대
한 상징적인 묘사의 일종 혹은 시편 기자를 둘러싸고 있는 대적의 무리로 볼 수도 있
다. 대적들은 흔히 짐승을 잡기 위하여 그물이나 덫을 설치하는 사냥꾼들로 묘사되기
도 한다(140:5;욥 36:8). 그러나 이와 동일한 묘사가 죽음을 가리키거나(18:4,
5;116:3), 죄를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한다(잠 5:22). 악인이 그를 둘러싸고 그
를 넘어뜨릴 음모를 진행 중인 당시, 그래서 마치 하나님을 무능한 분으로 여길 수도
있는 순간에도 저자는 하나님께 의혹를 품거나 그의 율법을 잊지 아니하였다.
=====119:62
밤중에 일어나 - 55절에 이어 두번째로 '밤'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고난의 때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하였던 55절과는 달리 본절의 '밤'은 문자 그대로 밤, 곧
일반적으로 잠에 빠져드는 안식의 시간으로 보는 것이 낫겠다. 왜냐하면 '일어난다'는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남들이 깊이 잠에 빠져든 시간에도 일어나서 말씀을 묵
상하고 감사할 정도로 말씀 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주님께서도 날이 밝기 전 한적한 곳
으로 가 기도하기 위하여 일어나셨으며(막 1:35), 때로는 밤을 꼬박 새우며 기도하기
도 하셨다(눅 6:12), 진정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말씀 묵상하기를 좋아하는 자이다
(1:2). 한편, 쿰란 공동체 회원들은 날마다 밤 시간의 삼분의 일을 율법을 읽고 공부
하는 데 투자했다고 한다.
=====119:63
동무(* , 하베르) - 본 용어는 후기 이스라엘의 바리새인 공동체 및 그 회합
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던 용어이다. 그러나 시편 저자가 그와 같은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본 용어를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법을 준수
하는 자들을 마음에 두고서 그들과 자신을 동질화시키는 의미에서 이 표현을 썼을 것
이다.
=====119:64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 감탄사 '여호와여'를 고려할 때
본 구절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마음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그
러한 마음 상태에 있는 저자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는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말씀을 충분히 사
랑하는 마음을 갖는 일이다. 이같은 논조에 근거할 때 여기서 '땅'이란 약속된 땅만을
뜻하지 않고 온 세상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119:65
. 문맥상, 본 시편 기자에게 임했던 선한 일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가 적용된 결
과라는 사실을 강조키 위해 본 구절이 언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 말씀
의 원리들은 그것을 신뢰하고 준수하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계획 되었으며 결국 선
한 결과만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유익, 안녕
등의 선(善)이 확대되는 것은 진리의 말씀과 약속이 퍼져 나가는 것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선대(善待)하셨나이다 - 이것은 여호와의 신실하심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는 표현이
다. 여호와의 말씀과 약속에 의거하여 종의 편에서 충성을 다하면, 여호와 편에서는
축복과 은총을 베푸신다. 이 같은 구도 밑에는 여호와의 신실하심이 깔려 있다.
=====119:66
명철(* , 타암) - 원래는 달고, 쓰고, 시고, 매운 등의 맛의 종류를 분별해
내는 '미각'을 뜻한다(출 16:31;렘 48:11). 그러나 이 용어는 분별력이나 이해력을 뜻
하기도 하며, 어떤 사물의 도덕적 가치를 판단하는 문제, 곧 옳고 그름이나 지혜롭거
나 어리석음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 용어가 적용된다. 바울은 빌
립보 교인들을 위한 기도에서 '총명'이란 말과 '지식'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내
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지식 - 사람들, 사물들뿐 아니라 그것들 사이에 얽히고 설킨 특별한 관계들에 대해
서도 정통(精通)하는 것을 말한다. 즉, 단순한 정보뿐 아니라 그 정보를 앎에 따른 책
임을 관계성 속에서 능숙히 지는 것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
식적으로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 속에
서 말씀이 요구하는 만큼의 합당한 바른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성격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하나님과의 교제'(Vriezen), '하나님께 대한 인
간의 전인적인 반응'(Porteous)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 본문은 시편 기자의 현재 상황을 분명히 밝혀준다. 70인역
(LXX), 벌게이트역(Vulgate) 등의 본문 번역은 현재 시편 기자가 처한 상태를 '비천해
지기 전에는'이라고 실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시편 기자의 이 고난이 단순히 대적들의
적대감 때문에 임했는지 아니면 그 고난이 이웃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낳는 어떤 특정
한 불행을 뜻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릇 행하였더니(* , 쇼게그) - 이는 '방황하다', '실수하다', '범죄하다'
등을 뜻하는데, '범죄하다'를 뜻할 경우 의도성이 없는 죄를 대체로 가리킨다. 여기서
는 그 의무를 잊음으로써 비롯된 죄 정도를 가리킬 수 있다. 그는 말씀 파수의 의무를
잊음으로써 죄에 빠지게 되었다. 많은 성도들의 경우 의도적으로나 적극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지만, 어떤 이유로 인하여 말씀 파수의 의무를 소홀히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적극적인 범죄쪽으로 기울어지고 만다.
=====119:68
선을 행하시오니 - 하나님의 선하심의 특성을 고백하고 있는 이 표현은 저자의 경
험을 통하여 얻은 역동적인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기술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감
상적(感傷的)이거나 형이상학적, 비가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온 우주와 그 가운
데 사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분명하게 깨달아질 수 있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
나 이 역동적인 하나님의 선하심의 발견은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는 일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저자는 율법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속에 나타나는 현
상 가운데 우려할 만한 것은 극단적인 하나님 체험의 노력이다. 그 같은 노력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부재(不在)한 곳에서 하나
님을 체험하려는 자세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 성경 아닌 곳에서의 하나님 체험은 위험
하기 짝이 없는데 사단은 자신이 베풀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베푼 것처럼 영적 체험을
경험케 하기 때문이다. 사단은 감정에 약한 인간을 유혹하여 결국엔 말씀에서 멀어지
게 하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삼고 있다.
=====119:69
교만한 자 - 21, 51절 등에서 언급되었던 동일한 명사 '제딤'(* )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는 대적의 지나치고 포악한 억압을 암시하기 위하여 이 용
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 같다.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 여기서 '치려'는 원래 여러 조각들을 '한데
깁다'를 뜻하는데 주로 한 사람을 겨냥하여 여러 고소들이 걸리는 경우를 묘사할 때
사용된다. 저자의 대적들은 있지도 않은 거짓을 모아 저자를 고소하였다. 78절과 86절
은 본절과 유사한 내용을 전달하는 구절들이다.
=====119:70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脂肪) 같으나 - 여기서 '살쪄'는 '타파쉬'(* )로서
하팍스 레고메논(구약에 1회만 등장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본절 전체의 의미를 규정
하는 일은 쉽지 않으나 '지방' 곧 '헬레브'(* )의 용례가 그 가능성을 열어 놓
는다. 사 6:10은 익히 알려진 구절인데 그곳에 이런 표현이 있다:"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그런데 탈굼역(Targum)은 본 표현 중
'둔하게'를 '기름지게'로 번역하고 있다. 이 번역뿐 아니라 17:10;63:5;사 6:10 등을
고찰해 본 결과 '기름지다'라는 뜻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경우는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의미를 나타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저자의 대적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감각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
씀에 무감각한 상태에서 그를 음해(陰害)하려는 대적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즐거워하고 있다.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 '유익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토브'(*
)로서 문자적인 뜻은 '선하니라'이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고통을 신적(神的)
은총의 표식 혹은 부성애적(父性愛的) 교정(交情)의 한 방편으로 고백하는 이 말은 보
기드문 신앙의 확신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유사한 표현이 94:12에서 등장한다:"여호
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이외에도
욥 5:17;잠 3:11 등을 참조하라). 기자는 고통을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좀더
배우도록 박차를 가하는 신적 교육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119:72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 일반적으로 금이나 은은 '세겔' 혹은 '개' 등의 단위
로 그 수량을 나타낸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확한 수량을 알 수 없는 무한대의 양을 암
시할 때 사용하는 '천천'이란 형용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저자는 그 수가 무한대인
금은을 말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서 귀히 사용하는 금은, 그것도 수를 셀 수 없
을 정도로 무한한 양의 금은, 그것보다 주의 율법이 좋다고 말할 정도로 저자는 말씀
중심의 사람이었다.
=====119:73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 '만들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수니'(* )
는 시편에서 하늘(96:5), 달(104:19), 하늘과 땅(146:6), 바다(95:5),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146:6)의 창조뿐 아니라 인간 창조(95:6;100:3;138:8)를 언급할 때 흔히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일반적인 의미의 창조를 말하는 본 용어 후에 '세우셨사오니'
로 번역된 '예콘누니'(* )를 등장시키는데 이 용어는 하나님이 자기
의 형상을 따라 직접 인간을 빚으신 것을 가리킨다.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 -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신 사실을 고백한 후에 주의 계
명을 배우겠다고 말한 이 소원은 의미가 깊다. 인간은 동물과는 다른 특유의 존재로서
태어난다. 첫사람 아담이 갖추었던 외양 자체도 여타의 짐승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독특한 모습이다. 그러나 외관(外觀)만 갖추었다고 해서 온전한 인간은 아니다. 그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한다. 창조시의 목적에 합한 온
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첫사람의 모습 그대로 태어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한다는 것, 이것이 본 소원의 의미이다.
=====119:74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할 것은 - 여기서 주를 경외하는 자가 시편 기
자를 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둘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는 단
순히 그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으로서의 저자를 본다고 생각할 수 있
는데, 이 경우에는 그들이 저자를 친구처럼 맞고 환영한다는 의미를 첨가할 수 있겠
다.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이 시편 기자의 고통으로부터의 구원 사실을 함께 나누고 따
라서 기뻐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이 경우 저자의 현실이 고통으로부
터 구원받은 것은 아니므로 본절은 미래에 있는 일에 대한 확신도 포함하는 구절이 된
다. 이 두 견해 중 후자가 적절한 견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후 문맥의 주제가 고
통으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이다(75-80절). 상반절의 의미를 이렇게 규정할 때 후반절
의 '말씀'은 일반적인 의미의 말씀이라기보다는 구원 약속에 관한 말씀이 되겠다. 여
기서 '말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바르'(* )는 신적(神的) 약속 혹은 판단하
고 치유하는 역동적인 말씀을 흔히 의미한다(107:20;147:15).
=====119:75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 하나님의 도우심과 징벌의 시행은 전횡적(專橫的)이지
않고 완벽한 공의에 입각한 것이라는 뜻이다(40절).
성실하심으로(* , 에무나) - 언약 용어로서 그의 말씀 혹은 특정한 언
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된다. 하나님은 언약에 불순종하는 자에
게는 징벌을 내리시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하는 일을 일관성있게 시행하신다. 저자
는 자신이 고통당하는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인 것을 고백한다. 즉, 그
는 그의 고통은 알게 모르게 지은 죄에 대한 징벌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서 정
당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119:76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신 공의의 원
칙 때문에 그의 백성이 범죄할 경우 징벌을 내리시지만 무제한 징벌의 고통 가운데 버
려두지 않으시는데 그 탈출 장치가 바로 그분의 인자하심에의 호소이다. 아마 저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과거에 체험고서 거기에 근거하여 현재의 호소를 드리고 있는지
도 모른다(94:17이하 참조).
=====119:77
긍휼히 여기심 - 하나님은 불의의 세력으로 인해 고통에 처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
시며(69:17, 18;79:8), 특별히 당신을 경외하며 당신과의 언약 관계에 신실한 자들에
게 각별한 긍휼을 베푸신다(103:13;106:45, 46;사 14:1;30:18). 하나님의 자비가 그의
백성으로부터 거두어진다면 그들에겐 죽음밖에 없을 것이다(렘 16:5).
살게 하소서 - 고통이 없는 삶, 더 나아가서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해달라는 말
이다.
=====119:78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소서 - 악인이 수치를 당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잘 알려진 시
편의 소재들 중의 하나이다(35:4, 26;83:17 등). 이 경우 우리는 악행자 자신에 대한
적개심이 아닌 죄 자체에 대한 적개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즉, 이러한 기도문에
서 기도자들은 죄를 지은 사람보다는 그 죄 자체를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119:79
주를 경외하는 자로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 - 교만한 자가 수치를 당하고 난 후에,
시편 기장의 결백성 여부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어서 고통 중에 있는 그로부터 멀어졌
던 경건한 동료들을 자기에게 모아달라는 간청이다.
그리하시면 저희가 주의 증거를 알리이다 - 여기서 '저희'란 그에게 모여든 경건한
동료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고통받던 의인의 상황을 뒤바꿔 놓으셨을 때 경건한 그
의 동료들은 그에 대한 오해를 풀 뿐 아니라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서로 나누
게 될 것이다.
=====119:80
내 마음으로 주의 율례에 완전케 하사 - '완전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밈'
(* )의 문자적인 뜻은 '순전한', '갈라지지 않은' 등이다. 결국 저자는 일심
으로 율법만을 바라보고 그대로 살기를 원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결코 수치
가운데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다.
=====119:81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 칼레타 리트쇼아테카 나프쉬) - 직역하면 '나의 영혼은 당신의 구원 때문에
약해졌습니다'이다. 여기서 '약해졌습니다'에 해당하는 '칼르타'(* )는 73:26
에서 '쇠잔하나'로 번역되고 있다. 기자는 극도로 쇠약하고 곤핍해질 정도로 구원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졌다. 한편, 본절의 이면에는 인간적인 노력이나 능력으로써는 결
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교훈이 깔려 있다고도 볼 수 있다(33:16;60:11;108:12;146:
3).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사랑으로 베푸실 때만 얻을 수 있다(37:
39;62:2;144:10;사 45:17; 렘 3:23).
=====119:82
언제나 나를 안위하시겠나이까 - 여기서 '언제나'로 번역된 '마타'(* )는 의
문 대명사인데, 당하고 있는 고통의 기간이 너무 길다고 하소연하기 위하여 시편 기자
들이 흔히 사용하는 관용구로서, '얼마나 오랫 동안', '언제'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관용구는 오늘날의 성도들도 흔히 사용한다. 하나님은 그 백성의 신앙을 연단하기
위하여 마치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에 개입하지 않으실 듯이 고난의 기간을 연장하시
곤 한다.
내 눈이...피곤하니이다 - 오랫동안 약속의 성취, 곧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다
리느라고 지쳐 있는 상태를 암시하는 본 구절은, 동일한 상태에 대한 보다 회화적인
묘사인사 38:14을 연상케 한다:"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
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中保)
가 되옵소서."
=====119:83
연기 중의 가죽병 - 본 이미지의 출처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가능성이 제시된다.
그 하나는 텐트 안에 걸려 있는 가죽병이다. 팔레스틴 유목민들은 텐트 생활을 하였는
데 텐트안에는 음료로 마시는 포도주를 담은 가죽병이 걸려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텐
트 안에서 불을 지필 경우 연기는 빠져 나가지 못하고 공중에 달려있는 가죽병을 까맣
게 그을려 놓는다고 한다. 이때 여러 차례 연기에 그을려진 가죽병은 역경으로 인한
고통, 슬픔 등의 상징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연기 위에 달려 있는
가죽병이다. 고대의 관습 중의 하나는 포도주를 익히기 위하여 연기를 피우고 그 위에
포도주를 담은 가죽병을 달아 매단다. 그러나 이 경우는 앞의 경우와는 달리 고통을
통한 품성의 연단을 상징할 때 사용되는 이미지이다. 본절의 경우는 전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문맥이 연단을 위한 고통을 말하고 있다기보다는 고통 자체, 고
통의 정도에 대한 묘사에 기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랜 고통으로 말미암은
자신의 영육간의 형편을 연기에 찌든 가죽병에 비유하고 있다.
=====119:84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 이제 환난의 짐에 너무 눌려서 오래 살기를 희
망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의 대적으로부터 구원받는 것
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빨리 개입해 주시라는 간청을 담고 있다. 시편 기자들은 어떤
특정한 상황, 특히 고통의 상황 가운데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
중재를 요청할 때 바로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나를 핍박하는 자를 주께서 언제나 국문하시리이까 -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를 핍
박하는 자를 언제 심판하실 것입니까'이다. 문자적 표현 그대로 원수가 심판받을 날을
묻는 내용이 아니라 그 심판의 때가 지연되고 있음을 하소연하는 내용으로 보아야 한
다. '나는 그날을 기대합니다. 나는 원수 심판에 대한 당신의 약속을 의지합니다. 반
드시 행하실 것이면 이제 빠른 시간 안에 행하십시오.' 결국 이 하반절도 상반절과 마
찬가지로 빠른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는 기도라고 볼 수 있다.
=====119:85
교만한 자(* , 제딤) - 이것은 사회적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탈법적인 행
위를 일삼는 비윤리적인 폭군형 지도자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러
나 본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면서 저자를 모해(謀害)하는 상류 계급을 뜻하
고 있다(21, 51절).
웅덩이를 팠나이다 - 성경은 흔히 의인의 대적을, 무고한 희생물을 잡기 위하여 덫
을 놓는 사냥꾼에 비유하고 있다(35:7;57:6;렘 18:22). 아마도 본절이 의도하고 있는
저자의 대적은 그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고도로 은밀한 그리고 외관상 합법적인 것으
로 보이는 음모를 짰을 것이다.
=====119:86
주의 모든 계명은 신실하니이다 - 하나님의 계명은 진리이며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품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때가 차면 계명이 명시하고
있는 축복과 저주는 분명한 현실로 드러날 것이다. 저자는 감당할 수 없는 누적된 고
통의 상황 속에서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계명 내용을 신뢰하려고 하고 있다. 그는 결코
감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무고히(* , 쉐케르) - 문자적인 뜻은 '거짓, 속임수'이다. 말하자면 대적들
의 핍박의 근거는 거짓, 속임수라는 것이다. 그들은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 저자를 비
방하고 모함하였다.
나를 도우소서(* , 아제레니) - 이는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아무도 의지할 곳이 없는 고아와 같은 자가 사용하는 표
현이기도 하다(10:14). 이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저자가 얼마나 외로운 상태에 있었는
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19:87
거의 멸하였으나 - '멸하였으나'의 원어는 81절에서는 '피곤하오나'로 번역된 것이
다. 본절의 의미는, 대적의 핍박은 너무 가혹하고 또한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기
때문에 저자의 기력은 거의 고갈되었고 이제는 기진하여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나는 주의 법도를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 - 죽음에 가까운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법에 더욱 집착하였다는 말이다. 핍박의 결과는 저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
에서 멀어지게 하기는 커녕 더욱 가까이 가게 하였다는 이 고백을 통하여 대적들의 핍
박 목적이 저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으리라고 역으로 추측
할 수 있다. 주의 말씀에 착념하는 이러한 태도는 재앙이나 고통이 있기도 전에 하나
님의 법을 잊었던 이스라엘 선조들의 태도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렘 16:10, 11).
=====119:88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 저자 자신의 어떤 공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적 품성을 따라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간구이다. 앞의 문맥은 저자가 장기간의 고
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뢰해 온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같
은 태도를 근거로 저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그런 자
신의 공적 따위가 아닌 하나님의 자비적 품성에 의거해서 저자는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다.
주의 입의 증거 - 아마도 하나님의 법 전체를 의미하는 말인 것 같다. 저자는 하나
님의 자비적 품성에 근거한 도움을 요청한 후 자신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
는 삶을 살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어떤 조건부가 아니다.
=====119:89
주의 말씀(* , 데바르카) - 원래 하나님의 모든 목적과 뜻을 가리키는 용
어였으나, 후대에 들어서는 기록된 말씀까지도 이 용어에 포함되고 있다.
하늘에 - 하나님의 목적과 뜻, 그리고 성문화된 성경 말씀의 불변성, 영원성을 암
시하기 위하여 본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89:2). 하나님이 율법으로 명하신 것은 항상
율법으로 남아 있을 것이며, 그가 확증한 진리는 항상 진리로 남아 있을 것이며, 그가
약속한 것은 영원히 진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신.구약 성경은 말씀의 불변성, 영원성
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다(사 40:8;벧전 1:24, 25 등).
=====119:90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 시대는 바뀌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
다. 태양이 계속 돌고 산이 그대로 있고 시내가 변함없이 흐르듯이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세대에 적용된다.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 천지 창조 때 형성된 것들은 세대가 바뀌
어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강, 시내 그리고 물의 근원, 땅이 내는 과실과 화초들, 부드
러운 공기, 따가운 햇살, 땅 속의 금, 은, 그외의 진귀한 광물들, 그리고 물 속의 각
종 어류들, 비록 부패되기도 하고 고갈되기도 하지만 땅이 존재하는 한 천지 창조 때
형성된 이와 같은 것들은 계속 존재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베푼 은혜로
운 약속인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에 존재하고 적용된다. 저자는 하나님 말씀의 신
실성 및 영구성을 효과적으로 입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천지 창조 및 그 보존 사역을
덧붙이고 있다.
=====119:91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 레
미쉬파테카 암두 하옴) - 직역을 하면 '당신의 규례들로 인해 그것들은 이날 굳건히
서 있습니다'이다. 여기서 '규례들'이란 어떤 명령 형태로 주어지고 그에 따라 판결하
는 하나님의 율법, 규례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굳건히 서 있다'라는 동사의 주어가
생략되어 있는데 문맥상 '하늘과 땅'(89, 90절)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이런 사실들
을 종합하여 본 구절을 의역하면 이렇다:'하늘과 땅, 곧 온 우주 만물은 당신의 율법
에 의거해서 오늘날까지 굳건히 서 있습니다.' 말하자면 온 우주는 하나님 통치의 견
고성, 지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 만물이 안정성(견고성), 지속성을 유지하게 되
는 까닭은 마치 종이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듯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때문이며
그분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19:92
율법은 본 시편 기자의 즐거움이었다(24절). 그는 그것을 행함으로써 기쁨을 누렸
다. 만일 그가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고 율법을 멀리했다면 그는 고통 주에 절망하며
재기 불능의 처지로 전락했을 것이다(73:27). 그러나 본 구절의 강조점은 고난 중에
진통제 역할을 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사실에 있기보다는 율법을 멀리하는 자는 결국
망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19:93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 이것은 영적인 삶, 곧 회심에 따르는 영생으로 볼 수 있
고(약 1:18) 말씀 순종에 따르는 풍성한 삶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당장 겪고 있는 고
통을 넉넉히 이겨내는 능력있는 삶으로 보는 것이 보다 문맥적이다(94, 95절). 저자는
주의 법을 영원히 잊지 않는 것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첩경임을 알고 있었다.
=====119:94
나는 주의 것이오니 -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사실을 강조하는 저자의 이 확신은 동
시에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근거가 된다:"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
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143:12).
=====119:95
엿보오나(* , 키우우) - 원래 '숨어서 기다리다'는 뜻이다. 이것은 시편 저
자를 멸할 구체적인 음모를 가지고 그의 대적들이 그것을 실행할 기회만 찾고 있는 것
을 가리킨다.
생각하겠나이다(* , 에트보난) - 일반적으로 '지키다', '준수하다'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집착하다', '고수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본절이 그려내고
있는 대비적 긴장감과 조화를 이룬다. 자신을 멸하려고 하는 대적의 무서운 음모가 자
신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저자는 결코 흔들림이 없이 주의 율법만을 고수하고
거기에 집착하고자 다짐하고 있다.
=====119:96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 여기서 '완전'으로 번역된 '티클라'(*
)는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지만 동일 어근 '타클리트'(* )가 여러
곳에서 나오므로 그 의미를 추정할 수 있다. 먼저 욥 26:10에서는 '경계'로 번역되고
있고, 욥 11:7에서는 '온전'으로 각각 번역되고 있다. 한편, '끝'은 어떤 사물의 한계
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할 때 본문이 암시하는 바는, 인간이 만든 모
든 완전하다고 하는 사물 따위는 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연구하고 탐색해 들어가면
인간적 산물의 뿌리, 근거는 금방 드러나게 되어 있다. 또한 이 말은 인간이 만든, 완
전하다고 하는 사물은 모두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한계
성과 결함은 이어지는 하반절 내용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심히 넓으니이다 - 완전하다는 인간적 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율법)은 완전
히 이해될 수 없고 그 진정한 근원적 특성은 간파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흔히
완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하나님 율법의 범위 및 영성(靈性)에 대한 바른 견해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완전한 기준을 갖고 있어서 그 기준에 합하는 행동을 한 후
에는 자신들은 완전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보다 고상한, 아니
참기준인 하나님의 율법에 자신들의 행위를 비춰볼 경우 자신들은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인데 그 뿌리가 분명히 보이는 세상적 기준과는 달리 하나님의 율법의 참
본질, 기준은 가히 깨달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만든 어떤 기준을 따라
살면서 나는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면서
나는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욥 9:10). 이것이 본절이 말하는 핵심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편 저자의 겸손을 읽을 수 있다. 계속해서 저자는 자신이 고통 가운데서 하
나님의 율법을 따라 그것에 집착하며 산다고 고백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머리로써는 완전히
깨달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자는 하나님 율법 중심적인 삶과 아울러 완전
한 율법 이해에 이르지 못한다는 자각에 따른 겸손을 잃지 않고 있다.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 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그 강도에 스스로 놀라서 이 같은 감탄문을 사용하고 있다. 저자가 이토록 강렬하게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이야말로 참으로 복되고
아름다운 것임을 절감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1:2). 그에게 있어 율법은 억지로 지켜
야 하는 의무 조항이 아니라 가까이할수록 평강과 즐거움이 풍성해지는 지속적인 사랑
과 묵상의 대상이었다(Alexander). 이 사실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에게 신앙
생활의 귀중한 모본을 제시한다. 신앙의 본질적 깊이를 맛보지 못한 사람은 흔히 단순
한 의무감 내지는 습관적 매너리즘에 사로잡혀 별다른 감동도,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
는 것이다.
=====119:98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 주의 계명은 원수들이 가진 것과는 차
원이 다른 지혜를 가르쳐서 저자로 하여금 원수들의 모든 모략과 술수를 능히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는 고백이다. 물론 이 지혜란 정략적이고 교묘한 혹은 인간적인 지혜를
뜻하지 않는다. 이제 그 지혜로 말미암아 저자는 그의 대적보다 지혜로울 뿐 아니라
그의 스승들보다도 지혜롭고(99절), 노인보다 지혜로울 것이다(100절). 또한 이 지혜
는 학술적인, 혹은 기술적인 지식이 아니라 인생의 근본적인 목적과 삶의 지침을 깨닫
게 하는 지혜요, 여호와를 경외케 하는 지혜이며, 또한 그로 하여금 모든 악(惡)을 피
하게 하는 지혜이다(101절). 본절의 주어로서 '주의 계명'으로 번역된 '미초테카'(*
)는 복수형이지만, 동사인 '테하크메니'(* )는 단수로 되어 있
다. 히브리어에서는 주어와 동사의 수가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70인역(LXX) 같은 경우
는 '주의 계명' 대신 '당신'이란 단수로 바꿔 번역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
러나 그같은 수정은 원문적이지 않다. 우리는 '미초테카'를 모든 계명들을 의미하는
대표 단수격의 용어로 보면 되겠다(19:7).
=====119:99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 여기서 시편 기자는 개인적인 지적 수
준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지혜의 두 근원을 대조하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
면 그는 지혜 선생들로부터 온 가르침과 여호와의 법으로부터 얻은 가르침을 대조시키
고 있다. 세상 지혜 선생들이 가르칠 수 없는 지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
혜와 하나님이 인애(仁愛)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분인 것을 깨닫게 하는 지혜
이다. 특히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악인과 의인을 공평히 대하시는 분임을 경험했고 다
시 그 경험을 기대하고 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 9:23, 24). 시편 저자는 이 같은 지혜를 말씀
묵상을 통해 얻었노라고 고백했다.
====119:99.100
인간적인지식은 물질적 풍요나 육체적 편이는 가져다 줄수 있을지 모르나 영적인 문제에대해서는 아무런 답변도 해줄수없다
그러나 말씀을통하여 얻게되는 영적지혜는 현실적인 문제뿐만아니라 영원한 생명에관한 위대한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는것이다(요5:39,딤후3:16-17)
====119:101
본절은 말씀을붸는삶에 있어서 의지적인 결단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말씀에대한 단순한 지적 이해를넘어서 죄악에대한 과감한 단절을 요구한다
다름아닌 의지로결단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생동적인 신앙이 바로 말씀을붸는 삶인것이다(약2:26)
====119:103
내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꿀은 모든자연시품중에 가장단맛을 지닌 음식물로서 (삿14:8,9,18,:겔3:3:계10:9.10)그당도와 영양가에있어 최고의 수준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한 꿀에 비유된 것은 말씀의 가치와 효능에대한 최대한의 찬사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말씀은 1)영적영양가가 뛰어나 성도의 영혼을 기름지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며(시1:1-3) 2)하나님과의 깊고도 감미로운 교제를 나누게한다
====119:104,105
내길에 빛이이니이다 , 하나님의 말씀은 죄로인해 어두움속을 헤메는(23:4)인간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빛이다(요1:4).그러나 죄로인해 영적소경이된자들 (마6:23.요3:19)은 이빛을 눈으로 보지 못할뿐아니라 마음으로 깨닫지못한다(요1:5). 이빛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며 (요1:9.10.12:35.36.46)이밝은빛을 따라사는자가 바로 성도인 것이다
====119:108
낙헌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마음을 표현하기위해 드리는 화목제의 일종으로서 자원제라고도 불리운다
따라서 본절의 내입의 낙헌제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나의기도와 찬양이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말씀에대한 시인의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잘나타나 있다
====119:109.110
시인이 악인의 간계에 인하여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을때에 그에게 한가지 위안을 주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하고 인간적 기지와 욕구대로 행동 하였더라면 목전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일시적 안락보다는 영원한 구원을 향한 비젼을 지酣기 때문에 말씀대로만 살아갈수 있었던 것이다
====119:113-119
말씀에대한 사랑과 경외. 여기에서 시인은 주의 말씀에대한 그의사랑을 표현하면서 주의 말씀을 거역하는자의 모습 및 그결말을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다
그들은 두마음을 품는자이며 113절.행악자이며 115절 . 주의 율례에서 떠나는 자이며118절.
세상의 모든악인들이다119절. 이들의 악한모습을 생각해 보았을 때 시인의 마음은 한층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그의 말씀에 대한 기쁨으로 가득차게 되었을 것이다
====119:113
두마음 품는자. 문자적으로 의심하는자르르 의미하며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붸는 자를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들은 외식하는 자들이거나 신앙과 불신앙사이에서 방황하는사람들인데 이러한 이중적인 신앙으로는 하나님의 능력도 .기쁨도 맛보지 못하며 영적인 자유도 체험하지 못한다
참된신앙은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고독한 길인 것이다
====119:116
내소망이 부끄럽지 말게하소서. 시인이 이같은 간구를 할수 있었던이유는 그의 소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존적인 것이었다
이에 비추어 성도들은 자신의 궁극적인소망 이 어느곳을 향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아야한다
====119:119
주께서 세상의 모든악인을 찌끼같이 버리시니. 악인들은 세상에서 흥황하는것처럼 보이지만 그끝은 결코 평안하지 않다
(73:1-19).공의로운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생각하면서 시인은 다시 말씀중심의 삶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119:120
악인들의 최종적인 멸망은 시인으로 하여금 경건한 두려움으로 옷깃을 여미게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포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대하여 경외하는마음 자세인 것이다
====119:123
말씀에 대한 시인의 열정이 온몸과 마음을 쇠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깨달음과 보상앞에서 크나큰 기쁨과 감사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이든 심는대로 거두게된다(고후9:6)
====119:126
악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율법을 폐하였으므로 세상은 불의와 무질서로 가득차게 되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일어나 이모든악들을 물리치고 그의 법을 회복하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119:129
주의 증거가 기이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지식을 초월하기에 이를 깨달을수록 더욱 그깊이에 경탄하게된다
====119:130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암흙에 처한 자에게 생명의 빛을비추어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능력이 있다(요1:4.5)
====119:131
이것은 재미있는표현으로서 시인의 말씀에대한 지극한 열정을 보여주는 뽀다른 묘사이다
너무나 말씀에 갈급한 나머지 시인은 마치 먼거리를 질주한후 정신없이 숨을 헐떡이는 것과같은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119:136
본절은 주의 집을위하는 열심히 나를삼키고 라고한69:9의 표현을 생각나게한다
그의 큰슬픔의대상은 하나님의 법을무시하고 훼방하는 악인들의 소행 이었가
오늘날의 성도들도 이세대의 악함을 아파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중보의 사역을 감당하여야 한다(눅19:41)
====119:137
주는 의로우시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은 그의 말씀의 공의성에대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119:139
136절과 비슷한 표현으로서 악인들의 악행에대한 시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내주고 있다
오늘날 성도들은 자신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轨날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의 가증한 행실에 대해서는 불타는 의분을 그리고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는 애타는긍휼을 지닐수 있어야 하겠다
====119:140
심히 정미하므로. 이는마치 철광석이 용광로에의해 용해되어 불순물이 제거되고 순도높은 금속으로 제련되어지는것과 같이 순수와 진실만이 존재하는상태를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의 첨삭도 불허하는 (계22:18.19)진리 그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때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개인적인 사견으로 억지로 풀거나 (벧후3:16)혼잡케 해서는안된다(고후4:2)
====119:143
본절은 기독교의 묘한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성도들은 환경적인 압제를당하나 그이면에는 말씀을통한 하나님의 평안과 즐거움이 있다
이러한 환경을 초월한 즐거움과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에대한 깊은 사랑을통하여 얻어질수 있는 것이다
====119:145-152
위경으로부터 구원호소. 이부분에서도 시인은 위기에서의 구원을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본시 전체의 분위기가 그러하듯이 시인은 줄곧 괴로운 상황에 직면하여 주의말씀을 바라보고 있다
====119:145.146
시인은 그의구원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응답이있을 경우 당신의말씀을 더욱잘지킬 것을 고백하고 있는데 이는언뜻보기와는 달리 결코 조건부적인 기도가 아니라 왜냐하면 그가 말씀을준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답을 바라서기 보다는 말씀자체를 더깊이 사모했기 때문이다
이는오히려 주의 율례를 지키는 즐거움을 좀더 보전하기위해서 구원을 간구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성도들의 가누도 하나님의 영광과 말씀을위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119:147
유대인들은 하루중 아침 .한낯 저녁시간을 정규적인 기도시간으로 정해 놓고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하였다(55:17)蝡러나 시인은 기도와 말씀에대한 열정으로 충만하여 도저히 아침까지 기다릴수가 없었다
본절은 시인의 급하게 기도해야할 위기상황과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모든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인의 신앙자세를 잘 나타내준다
====119:148
말씀에 대한 시인의 열심은 깊은밤중에도 잔자는 것을 잊어버린 채 말씀을 묵상하게 하였다
이러한 깨어있는 신앙은 주의재림이 임박한 이시대의 성도들에게 더욱강력히 요청되는바이다(마25:1-13:26:41)
====119:150.151
악의세력이 창궐하는주변상황에 직면하게되면 진리대로 순응하는삶은 어리석기 짝이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어떤불의의 세력보다 더가까이 계시는 하나님과의 내밀한 교제를 통해 이모든 유혹을 이겨냈다
====119:157.158
시인은 이러한 삶을 살수있었던 것 은 끊임없이 말씀을묵상하며 (15.23.27.48.157절)그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했을뿐아니라(12.26.44.69.97.115절)어떠한 고통속에서도 주의 법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10절)오히려 그말씀을 더욱 사랑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119.127절)
====119:162
심각한 역경을 극복하게 한 주의말씀은 생사가 엇갈리는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들이 획득한 전리품에 비유될수 있었다
====119:164
하루..찬양하나이다. 여기에서 일곱 번이라는숫자는 완전성을 상징하는것으로서 시간에 얽매이지않고 항상주를 찬양하는태도로 가리킨다(12:6:잠24:16)
====119:170
주의말씀대로 나를건지소서.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음으로서 고난을받는모든자들을(암5:12:딤후1:8:2:9:벧전3:14)필히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50:15:91:15)시인은 어떠한 고통속에서도 이언약을 버리지 아니하여기에 구원에 대한소망을 간직할수 있었던 것이다
====119:173
주의손은 개개인에게 복을주시고 (37:24:104:28)성도들을 견인하시는(요10:28.29)도움의 손이요 또한 구원을 베푸시는 (78:1)능력의 손이기도 하다
=====120:2
궤사(詭詐)한
혀(*
, 라숀 레미야) - 문자적인 뜻은 '속이는
혀'이며 속임수와 이중성이 가득한 사람을 가리킬 때 쓰이는
용어이다. 여기서는 앞의
'거짓된 입술'과 동의어적으로 쓰였다. 어떤 학자들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본 용어를
생략하거나 중시하지
않는데(Gunkel, Oesterley) 맛소라 사본의 한 구절, 한 글자를
소중히 여기는 우리로서는 그들을 따를
수 없다. 오히려 동의적 내용의 반복은 강조로
본다. 다윗은 흔히 이런 식의 고통을 털어놓는데 특히,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시련을
묘사할 때 '속이는 혀'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Barnes). 한편, 부정적으로든 긍정
적으로든 혀가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에 대해서는 성경 곳곳에서 강조되어 있는 바이다
(34:13;잠 13:3;21:23;약 1:26;3:6;4:11;벧전
2:1;3:10).
=====120:3
너 궤사한 혀여...주며...더 할꼬 - 본 구절의
의미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저의 위에 쌓여질 재앙은 무엇일까? 네가 도대체 어떤 징벌을 받게 될까?'이다.
우리
는 성경의 다른 저주의 글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겠다.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삼상 3:17;20:13). 문법상으로는 본문의
동사들의 주격을 반드시 여호와로 간주하는 일이 필연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궤사한 혀에 대한 심판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말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Alexander).
=====120:4
장사의...숯불이리로다 - 본절의 표현은 (1)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의 57:4이나 "저희가 칼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의 64:3과 같은 반역적인 혀에 대한 묘사이거나, (2) 그러한 죄악된 성향
에 적합한
징벌, 즉 혀에 대한 징벌로 볼 수 있다. 성경은 거짓말하는 혀는 날카로운
검, 혹은 날카로운 화살과 같으며 지옥의 불을 쌓는
것 같아서(약 3:6) 그러한 식으로
혀를 사용하는 자는 전능자 하나님의 불과 화살에 의해서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나를 에우는 자가 그 머리를 들 때에 저희 입술의 해가 저희를 덮게 하
소서 뜨거운 숯불이 저희에게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저희로 빠
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140:9, 10). 우선 자신은
인애를 베풀지만 대적과
반역을 만날 뿐인 상황을 불평하듯 호소하고 있는 사실을 고려할 때는 전자의 해석이
타당한 것으로 보여진다. 후자의 해석을 따를 경우는 바로 그러한 반역적 이웃의 머리
에 하나님의 징벌이 임하기를 소원하는 내용이
되는데, 본 문맥에서는 궤사한 혀를 놀
리는 자들에게 임하게 될 무서운 형벌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봄이 더
자연스러
울 것 같다.
로뎀나무 - 제롬(Jerome)이 노간주나무(juniper)로 칭했던 이 나무의
학명은 제니
스타 모노스페르마(아랍어로는 레템)이며 저명 학자에 따르면 이 나무의 뿌리는 사막
에서 연료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일단 불을 붙이면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열기를 유
지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Burckhardt). 동일 수목이 왕상
19:4과 욥 30:4에도 언급
되어 있다. 후반절은 이 나무의 뿌리가 양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사실 그 뿌리는 몹시 써서 양식으로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오히려 몸을 덥히기
위하여 연료로 사용된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사 44:15과 비교하라). 제롬은 이 나무에
관한 경이로운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한 무리의 여행객들은
바로 이 나
무로 불을 때서 식사를 하였는데 그곳을 떠난 지 일년후 동일한 장소에 다시 와보니
그때까지 꺼지지 않은 불씨를 잔화(殘火)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De mansion
-ibus Israel ad
Fabiolam 15장).
숯불은 불태우는 듯한, 삼킬 듯한 혀에 대한 혹은 그 같은 혀에 대한 징벌을
묘사
하기 위한 이미지이다.
=====120:5
메섹 - 이는 '두발'과 함께 거멍되었던 인물의
이름인데(창 10:2;겔 27:13) 여기서
는 그의 후손으로서 흑해와 아락시스 사이에 위치한 코카사스의 남동쪽에 거주했던 야
만족을
가리킨다.
게달은 이스마엘의 후손으로서(창 25:13) 아라비안 반도를 누비며 약탈을 일삼던
무리들이다. 이 두 족속들은 각각 팔레스틴의 북쪽과 남쪽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기자는 본 시편 저작 당시 자신을
둘러 싸고있던 자들의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성격을
드러내려고 이 두 민족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 특히 '메섹'은 겔
38:2에서 이스라엘
을 침고하는 이방 연합군의 지도자들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유하며(* , 가르티) - 이 단어는 영구적인 거주가
아니라 마치 여행객이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머무는 것과 같은 일시적인 체류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이
다. 메섹, 게달과 같은 야만 이방족 사이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 여행자처럼 잠시 머
물고 있는 형편이라는 사실
등을 고려하여 어떤 학자들은 본 시편의 저작 시기를 바벧
론 포로 이후로 보고 있으나 다윗이 황망히 피난 다니던 시절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다.
=====120:6
화평을 미워하는
자(*
, 소네 솰롬) - 여기서 '소네'는 단수형
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을 고려할 때 의미는 복수형으로 이해해야 한다. 말하자면 대표
단수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여 70인역, 시리아역 등은 복수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120:7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 아니 솰롬) - 문자적인 뜻은 '나는
평화'이다. 유사한 예로 개역 성경 109:4에서는 '나는 기도'를 '나는
기도할 뿐이라'
로 번역하고 있다. 이 두 구절에서 공히 대명사
'아니'(* )는 강조형으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