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는 삶을 살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면 다시 재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한국의 IMF 경제 위기 이후 멀쩡한 사람들이 노숙자가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신섭 장로(더존비전 대표, 보정교회)도 그런 전철을 밞을 뻔 했던 기업가다. 기업의 총수로 잘 나가던 사업이 정치적 미움을 사고 흑자도산을 했던 신섭 장로는 자살까지 시도했었다. 그러나 실패 속에서 만난 하나님으로 인해 그의 삶은 새로운 차원의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실패가 큰 복 “가장 성공한 사람이 실패한 삶으로 떨어지는 것은 죽음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30대에 20여개의 기업체를 거느리고 부러울 것이 없던 사람이 정치권의 의도적인 개입으로 사업이 줄도산 한 것이 내게는 큰 복이었습니다.”
신섭 장로는 남들에게 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사업을 일으켜 성공했던 그의 아버지가 일본이 망할 것을 직감하고 귀국, 다시 사업을 시작해 성공을 했다. 실패를 모르던 그의 아버지도 신 장로가 대학 3학년 때 사업실패의 어려움을 겪었다.
이미 노쇠해버린 아버지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신 장로에게 어려움이 닥쳤다. 학비를 제때 내지 못해 취업 추천도 받지 못했던 그는 아는 분을 통해 교사로 취업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그에게 교사의 월급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사업을 할 결심으로 교사직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자전거로 약 납품이 첫 직장 그가 잡은 첫 직장은 자전거로 도매상에서 약을 구매하여 소매상인 약국에 납품하는 일이었다. 대학출신이 자전거로 약을 배달하는 것은 자존심을 버리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약을 납품하는 일이지만 막일과 같이 힘들었습니다. 친구들은 좋은 기업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어쩌다 길에서 만난 친구들은 내게 얼굴을 돌렸습니다. 심지어 잘 살던 대학시설 도움을 받았던 친구들은 아예 저를 피했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이를 악물고 성공을 다짐했다. 그의 “긴절히 원하면 반드시 이뤄진다”라는 신념을 믿었다. 뭐든지 집중하면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증명했다. 납품을 하면서 그는 약품의 내용을 모두 외웠다. 약사 못지않은 약에 대한 지식으로 사람들과 신뢰를 쌓았다. 납품을 하던 중에 그는 물류의 흐름을 익혔다. 그것을 통해 그는 약품 회사와 직거래로 납품하는 일을 성사시켰다. 한 번 성공하자 순식간에 일감이 밀려들었다.
약품회사에서 물건을 더 팔아달라고 물건을 대준 것이다. 약을 잘 판다는 소문이 나면서 제약회사에서 서로 자기네 제품을 팔아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도매업을 하다 보니 물류비용으로 인해 직접 운수회사를 차릴 필요성을 느꼈다. 운수회사를 차리다보니 차량정비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자동차정비업소를 차리고, 정유소를 설립하였다. 필요성에 의해 일어난 기업은 결국 건설회사까지 거느린 기업이 총수가 되어버렸다. 30세의 나이에 20개의 기업을 거느린 최고 경영자가 된 것이다.
흑자 도산 하면 된다는 신념이 물불을 가리지 않게 했다. 운송회사든 도매업이든 건설회사이든 가장 매출을 많이 내는 기업이 되고자 했다. 잘 나가다보니 자연스럽게 상류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최연소 라이온스클럽 회원이 되기도 했다. 사이클경기연맹의 충남지부회장을 맡아 4.19 전국대회에서 1위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뭐든지 1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근성이 사회적인 성공을 이끌었지만 결국 그것이 실패의 길로 가게 했습니다. 정치에 도움을 준 것이 화근이 되어 도움을 받지 못한 이들의 정적이 된 것입니다. 정적들은 제 사업을 무너지도록 갖가지 악성 투서를 했습니다. 결국 정치권 윗선의 압력은 회사들이 흑자 도산으로 가게 했습니다.”
잘 나가던 사업이 자금줄이 막혀 줄줄이 도산했다. 기가 막힌 상황에서 그는 두 번의 자살을 기도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그를 기도원으로 내 몰았다. 그는 떠밀리다시피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결혼은 교회에서 했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 뒤로는 철저하게 교회를 멀리했던 신 장로는 모태신앙이었던 아내 덕에 기도원으로 몸을 내 맡긴 것이다.
그는 아내 윤순덕 권사가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어려운 시절에 아무 말 없이 힘든 일을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시댁에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다 처리했다고 한다. 시아버지 병수발에, 동생들 뒤치다꺼리도 도맡아했다. 신 장로는 결혼 한 뒤로 아내에게 자신은 나가지 않아도 아이들의 건강한 교육을 위해 교회를 나가도록 권했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아 교회 나가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신 장로 아내만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출석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삶의 희망을 잃고 기도원으로 간 것이다.
“결혼식 날 빼고는 교회를 간 적이 없는데 사십이 넘어 기도원에 가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찬송가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기도도 어떻게 할 줄 몰랐습니다. 분노, 증오와 원망이 있어 기도를 하면 짐승 같이 소리만 질러냈습니다. 여름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고 교회 봉고차를 운전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겨울, 기도원 뒷산 정상에서 담요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짐승 소리를 내며 기도를 하는 중에 갑자기 빌립보서 2장 5절 말씀이 내 안에서 들려왔습니다.”
성령세례를 받다 신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삶이 기쁘게 사는 길이라는 가르침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자신을 낮추는 마음, 자신을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이 바로 천국이었다. 그 때 신 장로에게 불덩어리가 들어오는 것을 경험했다. 불을 받았을 때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 깨달았다. 지금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아니라 더 갖지 못한 것에 대해 불평, 불만 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내 욕심과 욕망, 아집, 허물, 죄, 원망, 불평, 불만으로 가득한 마음을 비우고 원수를 죽이고 싶었던 마음마저 모두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그 무한한 사람을 느꼈고 그 사랑으로 가슴에 불덩어리가 타오르게 하셨습니다.”
신 장로는 거듭남을 체험했다. 42세의 나이에 인생의 반환점을 돌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도원에 온 사람들이 비로소 사랑스러워보였다. 평소에는 더럽다며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장애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목욕도 시켜주었다. 그는 3년 반 동안 기도원에서 지냈다. 인생 막장을 살아온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며 지냈던 그는 다시 일어나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인생 처음으로 그는 이력서를 썼다.
그가 지원한 직장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외판원이다. 그의 이력서를 본 브리태니커 회사에서는 회의적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책을 팔 수 있겠는가?” 굵직한 회사는 20개나 거느렸던 사람이 백과사전 외판원이 되겠다고 찾아왔으니 당연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3년 반 동안 기도원에서 낮아지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백과사전 세계서적판매왕 회사의 우려를 뒤로 하고 신 장로는 책 판매를 시작했다. 그는 회사에 스스로 자신의 월급을 책정했다. 백과사전 한 질을 판 금액의 16%가 판매사원의 몫이다. 그는 자신에게 스스로 약속하고 책을 팔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는 단순히 책만 팔지 않았다. 복음을 먼저 전했다. 그리고 책을 팔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해 간절히 복음을 전하며 책을 판매했습니다. 날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5시까지 기도하고 7시까지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모든 일을 주님 대하듯 했습니다. 그렇게 책을 팔았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0년 전의 일인데 많이 판매한 날에는 현금가로 179만 2천원짜리 백과사전 30질을 팔았던 적도 있습니다.”
일반 외판사원의 4배 정도 차이가 나는 판매 실적을 6개월 만에 이뤄냈다. 결국 그는 전 세계 54개국 지사에서 뽑은 3백 명이 미국 본사에 초청되는데 뽑혀 가게 되었다. 그는 한 달 가까이 미국을 여행했다. 그의 성공사례는 양종도 새마을연수원에서 발표되기도 했다. 삼성그룹계열사인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에서 간부 사원들의 교육 강사로 초빙되기도 했다.
신 장로는 책을 판매하여 받은 돈으로 당장 지하실이지만 한 칸으로 된 사글세방을 얻었다. 사업이 망하면서 흩어져 있던 아이들과 아내를 집으로 불렀다. 아내와 두 딸, 그리고 아들을 포함해 다섯 식구가 칼잠을 잘 만큼 비좁은 집이었지만 그 때만큼 행복한 적이 없다고 신 장로는 고백했다.
단칸방에서 살면서도 하나님 앞에 기도와 예배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던 그는 출석하던 개척교회에 건축헌금을 하고 싶어 사글세를 담보해서 헌금을 한 적도 있다. 신 장로는 거래는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자녀들에게 많은 축복을 주셨다고했다.
세계서적판매왕이 된 것이 방송에 소개되면서 신 장로는 기업체에 스카우트가 되었다. 그는 두산 동아프라임(주) 서울사업본부 창설본부장을 시작해 한미약품, 일양약품 판매담당 사장, 엠브로약품 대표이사, 고려인삼제품 대표이사직을 역임하며 재기했다. 그가 가는 기업체마다 ‘기적의 손’이 되었다. 안 되던 사업이 일어나고 부활되었다.
“당신만 오면 우리 회사는 삽니다”라고 할 만큼 기업의 매출을 높이고 조직을 새롭게 하거나 활성화하는 데 탁월한 그는 기업의 스카우트의 대상의 1순위였다. 신 장로는 예전에는 성공에 목표를 두었지만 지금은 복음에 목표를 두고 있다. 낮아지고 섬김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경험하는 현재의 하나님이 된 것이다.
7전8기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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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같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이야기를 담은 신섭 장로의 간증책 <7전8기 은혜> | 그는 자신의 드라마 같은 삶의 이야기 <7전8기의 은혜〉(하늘기획)를 출간했다. 그의 책은 광고도 없이 3주 만에 5쇄를 찍을 만큼 입소문으로 팔려나가기도 했다. 3년 동안 10쇄를 출판한 것을 보면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칠순이 넘은 신 장로는 지금도 여전히 바쁘다. 사업 때문이 아니라 여기 저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전하는 일에 바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부를 좇았다면 지금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둔다. 충분히 넓은 집에서 살 수 있음에도 성남에서 19평의 임대아파트에서 산다.
“이 땅에서 평생 집장만하다 죽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미 천국에 내 집이 있는데 짧은 시간을 집에 투자하는 것은 아깝잖아요? 집 살돈 있으면 하나님의 성전을 더 짓는 것이 낫습니다. 이미 우리 마음이 성전이잖아요, 마음의 성전을 제대로 세우는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부지런한 덕분에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기도원에 있을 때 교통사고를 당해 걷지 못할 만큼 후유증이 심각했는데 고침을 받았다. 그런 무면허 고등학생들이 몰던 차가 들이 받아 식구들 모두 입원한 때도 있었지만 수술 받아야 할 몸을 완치 받기도 했다.
불철주야 떠다니다보니 과로로 인해 급성간염이 생겨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죽을 일도 있었다. 작년의 일이다. 수술을 위해 입원했던 신 장로는 수술 전날인 주일에 노숙자 쉼터인 광야교회(임명희 목사) 집회를 취소할 수가 없어 병원에 강연을 갈 수 있도록 요청했지만 거절했다. 결국 그는 화장실 가는척하고 밖으로 빠져나와 아내가 미리 준비한 옷을 입고 집회에 참석한 적도 있다.
“간에 농이 차서 병원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이 집회를 갔으니 반은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몸이 좋지 않아 말씀 도중에도 오한이 날 정도였습니다. 딸이 소식을 듣고 집회 장소에 찾아와 뒤에서 내려오라고 손짓을 했지만 그냥 진행했습니다. 설교 도중에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나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병원 의사들에게 다 나았다고 말을 했지만 믿지 않고 수술실에 들어갔다. 수술하기 전 다시 검사를 했는데 몸에 전혀 이상이 없었다. 열도 없고 간의 염증도 보이지 않았다. 의사는 통증과 염증 치료제를 썼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나은 것처럼 보인다면서 일단 지켜보자며 수술을 미루었다. 결국 완치되었다는 진단을 며칠 뒤에 받고서야 퇴원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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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에 입원해 간암 수술 하루 전에 믿음으로 광야교회에 집회를 강행했던 신섭 장로는 집회 중에 치료를 경험하는 기적을 체험했다. |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 신섭 장로는 국내 뿐 아니라 미국, 중국 등 해외 집회로 바쁘게 지낸다. 이름이 나 있다 보니 초청하는 일이 많다. 간증 집회에 대한 광고는 전혀 하지 않지만 성도의 신앙생활과 가정생활의 실천적인 그의 간증은 이미 해외 교회에까지 소문이 났다. 이미 미국에서만 45일간 미국 전역을 순회하는 간증집회를 세 번 치렀다.
“집회 요청이 많지만 어려운 교회는 부담이 가는지 잘 초청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려운 교회, 성도가 많지 않은 교회에서 초청하면 좋겠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위로 받고 힘을 얻어 힘 있게 복음을 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 장로는 어려운 교회는 사례를 받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도움을 준다. 복음전도를 위해 사업도 대폭 줄였다. 혼자 인터넷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작은 규모로 운영하고 있다.
그는 사업이 도산하면서 가정이 풍비박살 나고 자녀들이 친척집에 맡겨졌을 때의 아픔을 잊지 않는다. 자녀들이 자신을 위해 기도하며 믿음으로 자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더구나 전혀 재정적인 능력이 없을 때 까마귀를 통해 선지자를 먹이듯이 자녀들의 학비와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것을 보고 그는 자녀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때 책임지신다는 것을 배웠다.
“가정의 믿음의 본이 있으면 자녀들이 신앙생활도 공부도 잘합니다. 신앙교육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잖아요, 교회를 섬기고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것을 몸으로 보이자 아이들이 그렇게 교회를 잘 섬깁니다. 가정과 함께 교회를 섬기는 것을 통해 자녀들이 복을 받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O.K 신 장로는 자녀들이 정말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기가 막힌 도움과 방법으로 유학을 보내는 것을 경험했다. 소련과 국교가 없을 때 큰 딸 신선미는 소련에서 유학을 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대학에서 연수하고 레닌그라드대학 수료, 국립 모스크바대학교 입학과 졸업을 한국인 최초로 했다. 그는 딸이 러시아와 정상회담을 할 때 국가의 가교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일을 담당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목격했다고 했다.
신재권 아들은 국내에서 공부하고 북경대학과 남경의약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한의원을 개원했다. 그가 미국에 갔을 때 한의사인 아들 내외가 또 다른 직업을 가지고 퇴근 후에 직장을 다니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자동차정비공장에서 부부가 기름을 묻혀가며 일하는 것에 그는 놀랐다고 한다. 비록 한의원을 운영하지만 의료보험이 없는 이민자들에게 무료 치료를 하다 보니 병원이 적자라는 것이다.
“남들이 의료선교사라고 할 만큼 어려운 이들을 무료치료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삶에서 겸손히 섬기면서 실천하는 아들 내외를 보니 마음이 찡하더군요, 돌아오는 길에 내 신용카드를 놓고 왔습니다. 선교사들도 돕는데 미국에서 의료선교사역을 하는 아들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비록 아들이 의젓한 믿음 생활을 하고 있지만, 아들 이야기를 하던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것이 아버지 마음인가보다. 그는 부요함과 가난함이 무엇인지 안다. 세상적인 성공이 얼마나 무가치한가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래서인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 정말 중요하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젊었을 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젊었을 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되었으면 합니다. 42살의 하프타임에 정신없이 달려왔지만 지금도 여전히 청년처럼 삽니다. 예수님께 붙잡힌 인생이 가장 즐겁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