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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기본교리: 연기설
앞서 살펴보았듯이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인도에 퍼져있는 사상을 크게 전변설(轉變說)과 적취설(積聚說) 두 가지로 나눈다. 전변설은 절대자가 있어 이 세계와 인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오늘날 하느님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사고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적취설은 절대자가 세계와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지· 수· 화· 풍· 허공· 득· 실· 고· 락· 생· 사· 영혼 등의 여러 요소들이 모여서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두 견해와는 달리 부처님은 현실세계와 자아가 무명無明에서 연기한다는 것을 깨닫고 연기설(론), 즉 연기법을 말씀하셨다. 그러한 연기의 과정을 다양하게 설명하고 정리한 가르침이 5온(五蘊)· 12처(十二處)· 18계, 삼법인(三法印)과 사성제(四聖諦)· 12인연 등이다. 불교의 교리가 한없이 복잡한 듯하지만,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연기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연기법緣起法: 존재의 관계성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는 연기법(緣起法)이다. 부처님은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깨치신 분이며, 그 진리의 내용은 바로 ‘연기’이다. 부처님은 경에서 이 연기법을 아는 것이 바로 부처님을 보는 것이라고 하셨다.
경전에서는 붓다가 발견한 진리를 ‘법法’이라고 하고 있다. “붓다는 법을 깨달았다.” 또는 “바른 법[正法]을 성취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법’이란 범어 ‘다르마(Dharma)’를 번역한 말이다. 다르마는 ‘유지維持하다, 보전保全하다’ 라는 동사 ‘DHR’를 어근으로 한 명사로서 규범, 의무, 사회질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주원리, 보편적 진리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붓다는 법을 깨달았다. 정법을 성취했다.” 라는 말은 현대적인 표현으로 “붓다는 진리를 발견했다. 진리를 이해했다.” 라는 말과 같다.
붓다가 발견한 ‘법’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자료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는 아슈와지뜨(Asvajit, 阿濕毘) 비구比丘와 뒷날 붓다의 제일 제자가 된 사리뿌뜨라(Sariputra, 舍利弗) 사이에 있었던 대화이다. 이들 두 사람의 만남은 고따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어 붓다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사리뿌뜨라는 라자그리하(Rajagrha, 왕사성) 근방에서 산자야(Sanjaya)라는 유명한 스승 밑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탁발하러 나온 아슈와지뜨 비구를 만나게 되었다. 아슈와지뜨는 붓다가 도를 이룬 뒤 처음으로 제자가 된 5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사리뿌뜨라는 그 비구의 수행자다운 모습과 행동에 감동을 받고 가까이 가서, “그대는 누구이며, 스승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진리를 배웠소?”라고 물었다. 아슈와지뜨는 “나는 나이가 어리고 집을 떠난 지도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치를 잘 설명할 수 없으니 이제 간략히 요점만을 말하겠소.” 라고 하면서 붓다로부터 받았던 가르침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 때 아슈와지뜨가 사리뿌뜨라에게 설명해 준 내용은 짤막한 한 수의 게송으로 전해지고 있다
모든 것은 원인에서 생긴다, 諸法從緣起
부처님은 그 원인을 설하신다, 如來說是因
모든 것은 원인에 따라 소멸한다, 彼法因緣盡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是大沙門說
이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붓다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모든 존재는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서 생기게 되고, 그 원인들이 소멸되면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 는 것이다. 이 게송은 일반적으로 연기법송緣起法頌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연기법緣起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리뿌뜨라는 아슈와지뜨로부터 이 가르침을 듣고 크게 깨닫게 되었다. 그 때까지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이었다. 그는 곧 그의 친구 목갈라나(Moggallana, 목건련)와 함께 스승 산자야를 떠나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증아함』의 상적유경象跡喩經에는 붓다가 깨달아 가르친 진리가 ‘연기법’이라는 것을 좀더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그것을 사리뿌뜨라가 “여러분, 부처님(세존)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연기를 보면 법을 보고 법을 보면 연기를 본다.” 라고 비구들에게 가르친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본다’라는 것은 ‘이해한다’ 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법法을 이해하고 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연기법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붓다 자신이 비구들에게 “(그대들이) 만약 연기를 보면 법을 보는 것이고, 바르게 법을 보면 나(붓다)를 보는 것이다.” 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연기법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연기라는 말은 산스끄리뜨어 ‘쁘라띠띠사무뜨빠다(pratiyasamutpada)’를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pratiya’와 ‘samutpada’라는 2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pratiya’는 ‘....... 때문에[緣],’ ‘.......에 의해서’ 또는 ‘말미암아’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mutpada’는 ‘태어남’, ‘형성形成’, ‘생김[起]’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연기란 ‘..... 때문에 태어나는 것’, ‘.....을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라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경전(『잡아함』 335)에서는 이 연기의 원리를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 此起故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 . 此滅故彼滅.
여기에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와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 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발생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소멸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이,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만이 존재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연기법이란 존재의 ‘관계성關係性’을 말하는 것이다.
연기법을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상의성相依性’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있다. 붓다는 ‘연緣’이라는 경전에서 연기를 설명하면서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그것은 상의성이다. 나는 이것을 깨닫고 이것을 이해하였다.”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마하꼬띠까(Mahakattika) 비구는 이 상의성에 대해 사리뿌뜨라에게 갈대 단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비유하면 3개의 갈대가 아무 것도 없는 땅[空地] 위에 서려고 할 때 서로 의지해야 설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일 그 가운데 1개를 제거해 버리면 2개의 갈대는 서지 못하고, 만일 그 가운데서 2개의 갈대를 제거해 버리면 나머지 1개도 역시 서지 못한다. 그 3개의 갈대는 서로 의지[相依]해야 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부연해서 설명하면 A, B, C라는 3요소가 모여 어떤 존재를 이루고 있을 경우 이들 3요소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A가 원인이 될 때는 B와 C는 A의 조건이 되고, B가 원인이 될 때는 A와 C는 B의 조건이 된다. 역시 C가 원인이 될 때는 A와 B는 C의 조건이 된다.
경전에서 들고 있는 비유에서처럼 A, B, C라는 3개의 갈대 가운데서 어느 한 갈대가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다른 2개의 갈대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인 것이다. 3개의 갈대 가운데서 1개의 갈대라도 없어지면 다른 2개의 갈대도 서 있을 수 없게 된다. 즉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도 없다.”는 것이 된다.
연기법이란 이처럼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관계를 가짐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관계가 깨어질 때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연기법을 존재의 ‘관계성의 법칙’ 또는 ‘상의성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바로 존재의 보편적인 법칙이고 그 이법理法이다.
연기의 원리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났거나 또는 혼자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다. 서로는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함께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존재를 성립시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변하거나 없어질 때 존재 또한 변하거나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다. 그것은 공간적으로도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서로 관계를 가짐으로써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홀로 존재하는 것도 있을 수 없고, 영원한 것도 그리고 절대적인 것도 있을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연기법을 때로는 인과법칙因果法則,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처럼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은 ‘인과법칙’이라고 하기 보다는 ‘상의성의 법칙’으로 보아야 더 정확할 것이다. 만약 붓다가 발견한 진리가 인과법칙이었다고 한다면 붓다는 인과법칙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고, 불교의 진리가 독창적인 것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과법칙은 붓다 이전에 이미 다른 종교와 사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법을 설명할 때 가장 기초가 되고 있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라는 말은,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서 ‘저것’이 있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서로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말도, ‘이것’이 사라지는 결과로서 ‘저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인과의 법칙에서는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서 저것이 존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꽃과 열매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꽃이 원인이 되고 그 결과로서 열매가 있게 된다. 이것은 동시성을 말하고 있는 연기법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인과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역시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에 의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과성은 후기 불교에서 많은 발전을 보게 되고, 그것을 설명하는 다양한 교리들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연기법이 ‘상의성의 법칙’이라기보다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처럼 이해되어져서, 이 2가지 개념을 명확하게 구별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연기법은 그 누가 만든 것이 아니다
연기법은 붓다가 만든 것이 아니다. 역시 붓다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이것은 존재의 이법으로서 존재와 더불어 있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붓다와 같은 어느 한 사람이 세상에 출현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사실과 관계없이 존재한다. 붓다는 단지 이 법칙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뿐이다.
경전에서는 붓다 자신이 이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제자가 이 문제 대해 “세존이시여, 이른 바 연기법은 세존께서 만드신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만든 것입니까?” 라고 질문을 했다. 붓다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붓다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진리의 세계[法界]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 붓다는 이 법을 자신이 깨닫고, 옳게 깨달음을 이룬 뒤에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즉 붓다는 연기법의 발견자이지 발명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그는 존재의 법칙인 이 연기법을 처음으로 발견해서 그것을 자신의 문제를 위해, 그리고 중생들의 문제를 위해 응용하고 실천했을 뿐이다.
붓다는 이와 같은 사실을 오래된 길[古道]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광야曠野를 여행하다가 옛사람이 다니던 오래된 길을 만났다. 그는 그 길을 따라갔다가 사람이 살지 않는 옛 성을 발견했다. 그 곳에는 왕궁과 동산과 목욕 못과 깨끗한 숲이 있었다. 그는 이 옛 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모두 그 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여행자는 옛 길과 옛 성을 발견했을 뿐이지 그 길과 성을 자신이 개척하고 만든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붓다도 선인先人들이 밟았던 길을 따라 수행한 결과 법法을 깨달아 붓다가 되었고,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가르쳐 많은 이익이 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연기법은 부처보다 우위에 있다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은 붓다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중요한 것은 법法, 즉 진리이지 사람이 아니다. 붓다로부터 불교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붓다의 존재는 중요하지만, 그러나 법보다는 하위를 차지한다. 붓다 자신도 법에 의해서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한 인간에서 붓다로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역시 불교가 목표로 하는 최고의 이상인 열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붓다라는 한 인격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르친 법, 즉 진리를 이해하고 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고타마 싯다르타 자신 역시 붓다가 된 뒤에도 그가 발견한 법에 이지하고 법에 따라 살았다는 것이다.
『잡아함』의 존중경尊重經에 의하면, 붓다는 정각正覺을 이룬 뒤 앞으로 어떤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정각을 이룬 그가 이 세상에서 스승으로 모시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는 그 자신이 발견한 진리[法]을 의지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붓다는 “오직 바른 법[正法]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아 정각을 이룩하게 하였다. 나는 그것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리라.” 라고 뜻을 정했다는 것이다.
붓다는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들이 의지하고 따라야 할 것은 사물이나 재산이나 사람이 아니라 오직 법이라는 것이었다. 붓다는 임종을 앞에 두고서도 역시 제자들에게 그의 사후에 그 자신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하는 대신 “법을 너희들의 스승으로 삼으라[法歸依].”고 가르쳤다. 붓다는 그를 대신해서 승단을 이끌어 갈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고, 제자들 역시 스승이 돌아가신 후 그들 중의 어떤 한 사람을 승단의 책임자로 정해 붓다의 대신이 되게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붓다가 가르쳐 준 법을 그들의 스승으로 삼았고 법을 의지해 살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법이 중요하다고 해서 법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법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법조차도 버려야 한다. 이것을 『증아함(22경)』에서는 뗏목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즉 뗏목에 의지해서 강을 건넌 사람은 그 뗏목을 강변에 버려야 한다. 뗏목이 많은 이익을 주었다고 해서 강을 건넌 후에도 그것에 집착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이처럼 법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연기법의 응용으로 고의 문제 해결
그런데 이 연기법이 붓다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와 무슨 관계가 있었으며 실제로 붓다는 연기법으로써 무엇을 해결했는가. 그리고 연기법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연기법이 진리라고 해도 붓다 자신의 문제와 관계가 없었다면 ,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인간의 문제와 관계가 없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연기법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붓다 자신의 문제를 포함한 우리 인간 모두의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붓다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인생의 고(苦,duhkha)에 관한 문제였다. 그가 출가한 것도, 6년에 걸쳐 힘든 수행을 한 것도, 그리고 성도成道 후 45년간 쉬지 않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 사람들을 가르친 것도 고苦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붓다의 가르침의 처음과 끝은 ‘고와 고에서의 해탈’이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고 있다. 잡아함의 『삼법경』三法經에서 붓다는 “(고의 문제가 없었다면) 모든 붓다 세존께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세상에 나왔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모든 붓다, 여래께서 깨달으신 법을 사람들을 위해 널리 말씀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붓다는 그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나는 단지 고와 고에서의 해탈만을 가르친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붓다가 발견한 연기법과 고苦 문제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라든지 또는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라고 하는 이 단순한 원리가 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연기법의 입장에서 보면 고의 고유성固有性 또는 실재성實在性은 인정될 수 없다. 고는 신이나 절대자와 같은 어떤 존재가 우리를 벌주기 위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우연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 따라서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과 조건을 제거해 버린다면 고도 사라지게 될 것을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장아함』의 대본경大本經에서 붓다는 “고苦는 성인聖人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역시 인연이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변하는 (성질을 가진) 이 고를 지혜를 가진 사람은 끊어 없앤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붓다는 그가 해결하고자 했던 고 문제에 연기법을 응용해서, 연기법의 원리에 따라 해결할 수 있었다. 즉, 붓다는 먼저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을 추구한 뒤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이 열반이었다. 열반이란 ‘고의 소멸’ 또는 ‘고에서의 해탈’을 의미한다.
결국 연기법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용해 고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붓다는 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를 사람을 위해서도 가르쳤다. 그래서 고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설명과 방법을 고안해 낼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은 지혜의 수준이나 그들의 성향, 또는 처해 있는 상황이 모두 달랐으므로 그것에 맞추기 위해 여러 가지 교리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다양한 교리들이 생겨나게 된 이유이다. 무아無我 이론이 그것이고 무상無常 이론이 그것이다. 사성제四聖諦, 12연기十二緣起, 공空의 교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불교의 모든 교리의 유일한 목표는 고의 해결, 즉 열반의 성취일 뿐이다. 한 경에서는 이것을 “모든 강물은 바다로 향한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도 한 곳으로 향한다. 즉 고와 고의 소멸(열반)로 향한다.”라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결국 바깥세계의 관계성에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작용에 대한 관계성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외연기와 내연기
일반적으로 외부의 자연 현상에 관계되는 연기를 외연기(外緣起)라고 부르고, 내부의 정신 현상에 관한 가치적 연기를 내연기(內緣起)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지만 외연기는 주로 복잡한 내연기를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비유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경우에 쓰인 것이며, 연기가 말해진 본래의 목적은 내연기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전변설과 적취설은 ‘세상 자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사고의 중심이 있다고 한다면, 연기법은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사고의 중심이 있다. 즉, 연기법은 바깥 사물의 상호관계성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작용의 상호관계성에 중심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기에 이렇게 살고 있는가, 내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기에 이렇게 생사고락이 펼쳐지는가?’를 살펴보게 된다. ‘이것’과 ‘저것’은 사물과 사물 또는 대상과 대상이 아니라, ‘무명’, ‘행’, ‘식’ 등 12연기 지분으로 마음 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전유경(箭喩經)』에 나오는 ‘독화살의 비유’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부처님 제자 말룽카 존자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세상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이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없는가? 아니면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가? 부처님은 이러한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태도가 못마땅하고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 세상은 항상하다고 말씀한다면 수행을 계속하겠지만, 항상하지 않다고 하면 부처님을 비난한 뒤에 떠나야겠다.’
이에 부처님께서 독화살의 비유를 들면서, ‘독화살이 몸에 박혔으면 독화살을 먼저 뽑아야 한다. 그런데 그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화살의 재료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치료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곧 죽게 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세상이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는 이 소견 때문에 나를 따라 수행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세상이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은 있다. 또 나는 세상이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수행이 아니므로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고,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부처님께서 한결같이 말하는 법은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라고 말씀하신다. 사성제는, 괴로움[苦]은 갈애[集] 때문에 생기고, 괴로움을 떠난 열반[滅]을 팔정도 등의 수행[道]을 통해 이르게 된다는 부처님 가르침이다. 즉, 갈애와 무명으로 얼룩진 마음 작용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므로, 팔정도 등의 수행을 통해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은 ‘세상이 끝이 있는가, 없는가?’ 등 세상 자체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에 중심이 있다. 굳이 말한다면 ‘세상(우주)이 끝이 있는가, 없는가?’ 에 대해서 부처님이 그 해답을 모르며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고 중심이 다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듯 연기법은 불교의 모든 교리들의 사상적 이론적 근거가 된다. 붓다의 가르침은 그 설명이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모두 연기법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불교의 모든 교리들은 연기의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응용 이론들이다. 그것들은 연기라는 하나의 샘에서 흘러나온 크고 작은 물줄기와 같은 것이다. 모든 존재는 왜 무아인가. 세계는 왜 무상하며 공空인가. 그것은 연기적이기 때문에 무아이고 무상이고 공인 것이다.
업력業力의 인과법칙
‘업業’이란 글자는 팔리어로는 까르마(Kamma)라고 한다. 행위 혹은 조작이라는 의미이다. 의도적인 신체적 언어적 심리적[身口意] 행위는 모두 다 ‘업’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사람의 일체의 심신의 활동을 가리킨다. 일반인들이 말하는 일체의 착한 행위나 악한 행위는 모두 다 업을 구성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업이란 도덕적인 혹은 부도덕적인 의지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일체 의지력의 동작 반응 혹은 결과이다. 까르마(Kamma)를 또 다른 의미로는 인과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업業’이 의지력의 반응인 이상 의지력이 조작한 선악의 모든 업의 종자는 아뢰야식에 간직되고, 그 종자가 연을 만나면 현행現行하게 된다. 현행할 때에는 그 과보가 분명하여서 반드시 착한 원인은 착한 결과를 낳고 악한 원인은 악한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게 이른바 인과법칙이다. 『잡아함경』雜阿含經은 “뿌린 씨앗에 의지해서, 그대는 같은 열매를 거두게 된다. 착한 일을 한사람은 착한 열매를 거두어들이고. 악한 일을 한사람은 악한 열매를 거두어들인다. 무슨 씨앗을 뿌렸는가에 따라서 그대는 그 열매를 맛보게 된다.”고 말한다.
업에 대하여 미란타왕문경(彌蘭陀王問經)에서 나가세나 존자와 미란타왕은 다음과 같이 묻고 답한다.
“왕이 물었다.
존자여, 모든 사람은 어찌하여 똑같지 않습니까. 즉, 어떤 사람은 단명하고, 어떤 사람은 장수하며, 어떤 사람은 잘 앓고, 어떤 사람은 잘 앓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밉상이고, 어떤 사람은 미인이며, 어떤 사람은 힘이 약하고, 어떤 사람은 힘이 세며,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어떤 사람은 부자이며, 어떤 사람은 비천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고귀하게 태어나며, 어떤 사람은 우둔하고, 어떤 사람은 영리합니까.
존자는 왕에게 반문했다.
모든 식물은 왜 똑같지 않습니까. 어떤 것은 신 맛이 나고, 어떤 것은 짠 맛이 나고, 어떤 것은 쓰고, 어떤 것은 맵고, 어떤 것은 떫은맛이 나고, 어떤 것은 단맛이 납니까.
존자여, 그것들은 각기 다른 종자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전생의 행위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같지 않습니다. 즉, 전생 행위의 결과로 목숨의 긺과 짧음· 가난함과 부유함· 신분의 높음과 낮음· 아름다움과 추함· 현명함과 어리석음 등 차이가 생깁니다. 이것을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라문 학도들아, 생존은 제 각기 자기의 업(業)을 가지고 있고, 그 업을 이어 받으며, 그 업을 모태(母胎)로 하고 친척으로 하며, 또 그 업에 의존하는 것이다. 업은 생존을 비천한 것과 존귀한 것으로 차별 짓는다.’
잘 알겠습니다. 존자여.
왕은 물었다.
존자여, 이 명색(名色: 정신과 육체)에 의하여 선행이나 악행을 짓게 되는 업(業)은 어디에 머뭅니까.
대왕이여, 그림자가 형체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업은 인격적 개체에 수반됩니다.
업은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직 열리지도 않은 과일을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까.
존자여, 그럴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생명체의 연속이 끊어지지 않는 한 ‘그 업이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지적할 수 없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존자여”
업은 인간의 행위, 즉 삶이다. 우리는 의도 없이 다른 생명을 죽일 수도 있다. 만약 업이 실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부지불식간에 행한 악업에 의해서 괴로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업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업의 결과, 즉 보報는 마음의 상태로 나타난다. 우리의 삶은 마음에서 비롯되며, 삶을 통해 마음은 항상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 이렇게 마음에서 비롯된 삶이 업이고 삶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마음이 보이다. 부처님이 이야기하는 업보業報는 삶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마음이 업에 따라 형성되는 것을 연기한다고 말하고, 실체성이 없기 때문에 무아라고 말한다. 이러한 마음은 결코 바라문교의 아트만도 아니고 자이나교의 명아命我도 아니며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도 아니다. 지금 여기 살아 움직이는 우리의 삶이 곧 마음이다. 이 마음에서 갖가지 중생의 세계도 일어나고 부처의 세계도 나타난다.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하는 까닭은 착한 삶을 통해 즐거운 마음이 형성되기 때문이며, 악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까닭은 악한 삶을 통해 괴로운 마음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불타가 ‘고의로 업을 지의면 반드시 그 보를 받는다.’고 이야기한 것은 업을 지어서 그 보를 받는 불변하는 실체가 있어서 업을 짓고 보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비롯된 업을 지으면 그 결과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불타가 이야기하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이게 바로 업력의 인과법칙이다. 사람마다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 것[自作自受]’으로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한다. 자기에게 어떤 결과가 있다면 그 원인 종자로부터 온 것이다. 마치 어떤 종자가 열매를 생겨나게 하고 그 열매는 그 종자로부터 오는 것과 같다. 이게 바로 ‘인과는 어둡지 않다[因果不昧]’는 것이다.
붓다는 사람들에게 업력과 인과를 믿으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업력의 인과법칙에 의하여 업보에는 3시三時의 업보가 있다고 설법 했다. 첫째는 순현수업順現受業이다. 현생에 업을 짓고 현생에 그 과보를 받는 것이다. 둘째는 순차수업順次受業이다. 현생에 업을 짓고 다음 생에 그 과보를 받는 것이다. 셋째는 순후수업順後受業이다. 현생에 업을 짓고 다음의 다음 생이나 여러 생의 후에 과보를 받는 것이다.
이는 곧 과거ㆍ현재ㆍ미래 삼세를 통해 인과는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 원인을 지으면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는다. 선에는 선한 과보가 따르고 악에는 악한 과보가 따름은 곧 업력의 인과법칙으로 정해진 이치로서 그 누구도 도피할 수 없다. 오로지 완전히 바른 의지력으로써 행위도 선하게 하면서, 자애慈愛· 용인容忍· 너그러운 용서, 그리고 다투지 않음· 집착하지 않음 등의 미덕을 지니고 이타적인 선업을 향해서 노력해야 한다. 행복의 꽃과 열매는 사람마다 자기의 마음 밭에서 가꾸어야 한다.
인연因緣과 과보果報
인연으로 만법이 생겨난다[因緣生萬法]는 이론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과보가 생겨남을 말하는데, 인因은 사물의 본원이고 연緣은 도와주는 힘[助力]이다. 그리고 과보果報는 뒷날 오게 되는 결국結局이다. 인으로부터 과를 얻음은 온통 연의 힘으로 조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에 대한 연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연緣이란 일체의 사물 사이에 일어나는 일종의 상호교섭 관계를 가리킨다. 불교는 이러한 관계들을 연구 분석하여 심心과 색色이라는 두 가지 법으로 나누어 논한다. 심법心法은 네 가지 연에 의지해서 일어난다.
첫째는 친인연親因緣이다. 자기 마음속의 업식종자業識種子를 말하는데, 이것은 심법을 성숙시키는 주요 원인이다. 그러므로 친인연이라고 한다. 둘째는 등무간연等無間緣이다. 우리의 반연攀緣하는 마음을 말하는데, 앞생각[前念]과 뒷생각[後念]이 이어지면서 끊어지지 않으므로 무간연이라고도 한다. 셋째는 소연연所緣緣이다. 심념의 반연 대상을 가리킨다. 경전은 “마음은 본래 일어나지 않고 경계로 인하여 있다[心本不生 因境有].”고 말한다. 그러므로 일체의 외부 경계는 다 소연所緣의 연緣이 된다. 넷째는 증상연增上緣이다. 앞의 세 가지 연 이외의, 증가시키는 기타의 모든 힘을 증상연이라고 한다.
이상의 네 가지 연이 법을 생겨나게 한다. 예를 들어, 흡연자는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자기 마음속의 습기종자로부터 나오는데, 그게 바로 친인연이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구생각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무간연이다. 담배를 보았다면 담배가 바로 소연연이다. 담배 중독증이 크게 폭발하는 것이 증상연이다. 이 네 가지 연이 흡연 행위를 성숙시킨다.
색법色法은 친인연과 증상연 이 두 가지 연에만 의지하여 생겨난다. 예를 들어 한 알의 야자수 종자를 땅에 심을 경우, 종자는 야자수 나무를 생겨나게 할 수 있는 것을 갖추고 있어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친인연이 된다. 그리고 비옥한 땅, 햇빛ㆍ공기ㆍ온도ㆍ수분 등은 야자수 종자가 발육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힘이므로 이들은 증상연이 된다. 세간의 일체법이 생겨나는 데는 이상의 네 가지 연과의 관계를 떠날 수 없다.
과보에서 과果 자를 연구해 보면 역시 현과現果ㆍ내과來果ㆍ후과後果라는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행한 선악의 원인이 현생에 성숙하여 열매를 초래한 것은 현과라고 부르고, 내생에 성숙하는 것을 내과라고 한다. 그 이후의 여러 생에 성숙하는 것은 후과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과가 어떤 일이나 어떤 사물이 생장하고 공功이 이루어지는 필연성을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세의 시간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 인因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초래하는데, 그 사이의 관계는 지극히 복잡하지만 조리 있고 문란하지 않아서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다.
과보에는 현생에 성숙하는 것이 있고, 내생에 성숙하는 것이 있으며, 후생에 성숙하는 것이 있는데, 그 원인은 대략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의 힘이 시간적으로 늦은가 빠른가에 있다. 예컨대 한 알의 오이 씨앗과 한 알의 복숭아 씨앗을 동시에 땅에 심었을 경우, 오이는 심은 그해에 나고 자라서 오이열매를 맺지만 복숭아씨는 싹이 나서 3,4년을 지나야 복숭아 열매를 맺는다. 나머지 하나는 연의 힘의 강약에 있다. 네 가지 연이 함께 나아가서 조건이 다 갖추어졌을 때는 자연히 더 빨리 성숙한다. 그렇지 않고 도와주는 연이 한 가지나 두 가지만 있다면 그 힘이 충분하지 않다. 토양이 좋지 않거나 햇볕이 충분하지 않거나 공기가 부족하다면, 이 오이나 복숭아의 성숙은 자연히 늦어지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연과보의 정해진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다. 인과법칙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면, 왜 세상에서 선을 행한 수많은 좋은 사람들이 좋은 죽음을 맞지 못하거나 혹은 괴로운 과보를 받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나쁜 사람들이 날마다 향락을 즐기고 부유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모습을 현실 속에서 보게 되느냐고 회의懷疑한다. 이런 이치는 삼세인과三世因果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간단하다. 좋은 사람이 금생에 괴로운 과보를 받는 것은 그가 과거세에 심은 악의 원인이 금생에 연이 성숙되어 괴로운 과보를 먼저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생에 비록 잘 했다할지라도 착한 인연이 박약하고 선한 연이 성숙되지 않으면 내생이 되어서야 좋은 과보를 받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나쁜 사람이 나쁜 일을 해도 도리어 좋은 과보를 받는 것도 그런 이치이다. 그가 전생에 심은 좋은 원인이 이미 성숙되어 먼저 복보를 누리고, 금생에 지은 나쁜 원인은 업연이 아직 성숙되지 않아 괴로운 과보가 아직은 내생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더라도 도피할 수는 없다. “인과는 결국 과보가 있다. 단지 일찍 오느냐 늦게 오느냐만 다툴 뿐이다[因果到頭終有報 只爭來早與來遲].”라는 말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인과법칙에는 또 두 가지 요점이 있다. 그 하나의 요점은 인과는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원인을 짓지 않으면 모를까, 만약 지었다하면 좋던 나쁘던 그 종자가 영원히 아뢰야식 속에 머물러 소멸하지 않고 있다가 연을 만나면 현행을 일으키고 과보를 불러온다. 만약 나쁜 원인을 짓고서도 나쁜 과보를 받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방법이 없다. 방법을 갖고 싶다면 오직 불법을 닦고 익혀 삼계의 번뇌를 다 끊고 출세간의 성과를 얻어야 윤회하면서 과보를 받는 고통을 면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요점은 선악의 업을 서로 상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악한 인연을 심었다면 그 과보를 받아야하지, 좋은 일을 좀 다시 했다고 해서 마땅히 받아야 할 죄를 상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행을 많이 하고 착한 연을 많이 증가시키면 무겁던 악한 과보가 가벼워질 수는 있다. 동시에 착한 연을 증가시키고 악한 연을 점점 감소시키는 것도 착한 과보를 빨리 성숙 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좋은 인연으로부터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사람이 살면서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
윤회輪廻
윤회라는 말은 samsara를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sam'과 'sara'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sam’은 ‘함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ra’는 ‘달리다. 빠르게 움직이다. 건너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SR’에서 유래한 말이다. 따라서 samsara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함께 달리는 것.’ ‘함께 건너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중국의 번역가들은 이것을 윤회, 즉 ‘도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경전에서는 윤회를 중생들이 여러 세계를 수레바퀴가 돌아가듯 그렇게 돌고 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 존재가 죽으면 이 세상이나 다른 세상에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되고 그 곳에서 살다가 죽으면 다시 그 곳이나 다른 세상에 태어난다.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태어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는 여러 가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삶과 죽음을 끝없이 되풀이한다. 그래서 이것을 ‘도는 것’ 즉 윤회라고 한 것이다.
윤회의 원리는 간단하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 짓는 모든 업(業=行爲)은 틀림없이 결과를 낳게 되고 그 결과가 다음 생生을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업의 결과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윤회는 계속된다. 그러나 업의 결과가 모두 소진되어서 없어지면 윤회는 끝나게 된다. 이것이 해탈 또는 열반이다.
윤회는 욕계· 색계· 무색계 등 3계, 또는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수라도· 인간도· 천상도 등 6도를 통해 전개된다. 3계와 6도는 다른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세계다. 단지 그것을 구분하는 방법의 차이 때문에 다르게 설명되고 있을 뿐이다.
욕계란 욕망의 생활을 하는 존재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그리고 저급한 신神들이 사는 세계다. 색계는 욕망을 떠났으나 아직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사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존재들은 ‘천상天上의 존재’ 또는 ‘신神’이라 불린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신은 아니다. 천상에서 살 수 있는 선업善業의 결과가 다하면 다시 다른 세계로 윤회 전생轉生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의 육체는 미묘한 물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무색계는 욕망은 말할 것도 없지만 육체조차도 없는 존재들이 사는 세계다. 이들은 순전히 정신적인 존재들이다.
지옥, 아귀, 축생 등 3도는 나쁜 세계이므로 3악도惡途라 한다. 지옥은 주로 땅 밑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사는 중생들은 업이 다할 때가지 긴 세월 동안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 아귀도에 사는 중생들은 목구멍이 바늘처럼 가는 반면 배는 대단히 큰 존재들로서 항상 배고픔과 목마름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다. 축생도는 모든 종류의 벌레들, 물고기, 새, 짐승들이 사는 곳이다. 아수라도는 항상 신들[諸天]을 상대로 싸움을 하는 존재들이 사는 곳이다.
인간 아수라 천상의 3도는 선업을 지은 존재들이 사는 좋은 세계로 3선도善途라고 한다. 6도 가운데서 인간도는 중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윤회라는 말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순환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윤회하는 존재는 6도의 세계를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죽고 태어나면서 순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도에서 목숨을 마치고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지옥이나 축생도에 떨어질 수도 있다. 역시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도에나 지옥에 태어날 수도 있다.
윤회의 시작은 알 수 없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무시無始, 즉 ‘시작이 없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끝은 알 수 있다. 붓다처럼 법을 깨쳐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게 되고 이미 지은 업이 모두 소멸되면 윤회의 바퀴는 멈추게 되는 것이다.
윤회의 주체 문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윤회를 한다면 바로 이 영혼이 다른 몸을 받아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힌두교와 자이나교는 어떤 존재가 죽어 육체가 살아지면 영혼과 같은 존재인 아뜨만(atma, 自我)이나 지와(jiva, 생명의 원리)가 윤회를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무아(anatman)를 주장하는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할 수 없다. 불교에 의하면 인간 존재란 비실체적非實體的인 몇 개의 요소들[五蘊]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 임시적으로 모여 있는 하나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 고정 불변하는 어떤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존재가 사라질 때 ‘누가’ 또는 ‘무엇이’ 그리고 ‘어떻게’ 이 생生에서 다음 생으로 윤회전생하게 되는 것인가.
사실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 이 문제는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이다. 부파불교 시대에 이르러 이 문제는 부파 간에 하나의 중요한 교리적인 설명이 등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곳은 『잡아함(335)』의 제일경공第一空經이다.
이 경에 의하면 윤회를 위해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영혼과 같은 어떤 것이 반드시 옮겨 가야 할 이유는 없다. 윤회란 고정 불변하는 어떤 주체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아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변화하면서 ‘계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붓다는 “업과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존재는 없다. 이 존재(죽는 존재)가 사라지고 다른 존재(태어나는 존재)가 서로 계속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다른 곳에서는 우유의 비유로써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우유로 4종의 요리를 만들 수 있다. 즉 우유가 낙酪이 되고, 낙이 생소生酥로 되고, 생소가 숙소熟酥로 되고, 숙소가 제호醍醐로 된다. 우유가 낙에서 제호로 될 때 우유에서 제호까지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유가 변해서 낙이 되고, 낙이 변해서 생소로 된다. 그리고 생소는 변해서 숙소로 되고 숙소가 변해서 제호로 된다. 낙은 더 이상 우유가 아니고 생소 역시 더 이상 낙이 아니다. 우유에서 제호 사이에는 동일성은 없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우유 없이는 낙이 있을 수 없고, 낙 없이는 생소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숙소 없이는 제호도 생길 수 없다. 물이나 기름과 같은 다른 물질로서는 아무리 우유에서와 같은 조건을 갖추어 준다 해도 낙이나 소나 제호는 얻을 수 없다.
나비의 비유를 들어 이것을 좀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나비의 알[卵]은 애벌레로, 그리고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변하고 번데기에서 결국 나비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알의 상태에서 나비로 되는 전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고정 불변하는 것이 전달되지 않는다. 알이 변해서 애벌레로 되고 그리고 애벌레가 변해서 번데기로,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로 되는 것일 뿐이다.
알과 나비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알의 상태에서 나비로 되기까지 변하지 않고 옮겨 가는 ‘어떤 것’은 없지만 알과 나비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나비 알 속에는 이미 나비가 될 수 있는 조건이 들어 있다. 그래서 나비는 나비 알에서만 나오지 모기 알에서는 나올 수 없다.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아 윤회 이론에서도 한 존재가 다른 존재로 윤회할 때 고정 불변하는 영혼과 같은 실체가 옮겨 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변화해서 다른 존재로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업(karman)이다. 한 존재가 살아 있을 때 지은 업은 잠재적 에너지, 즉 업력業力 상태로 그 존재 속에 축적되어 있다가 존재가 죽으면 그 업력이 작용해서 다음 존재를 만든다는 것이다.
과거에 지은 업은 현재의 존재를 만들었고 현재 짓는 업은 미래의 존재를 만든다. 업의 성질에 따라 우리는 천상의 존재가 되기도 하고 축생畜生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아뜨만(atman)과 같은 윤회의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나비의 알이 나비로 되는 데 고정 불변한 어떤 요소가 없어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직 문제가 남아 있다. 현재의 존재에서 다음 존재로 넘어가는 영혼과 같은 것이 없다면 현재의 존재가 지은 업의 결과[果報]는 누가 받게 되는가. 윤회와 업 사상의 중심이 되는 것은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그 결과를 받는다.’라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인데 업을 짓는 존재와 그 과보를 받는 존재가 동일하지 않는다면 이 원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유와 나비 알의 비유에서처럼 전자와 후자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원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우유와 제호는 같은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우유의 질이 좋지 않을 때는 그 결과인 제호도 질이 좋지 않을 것이다. 나비의 알이 병든 것이라고 한다면 그 알이 변해서 되는 나비 역시 건강한 나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우유와 제호, 또는 나비의 알과 나비는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우유나 나비 알이 가진 결함에 대한 결과를 제호나 나비가 받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좀 후기 경전이기는 하지만 『밀란다팡하』에서는 이것을 망고의 비유로써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남의 망고 밭에서 망고를 훔치다가 주인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망고 도둑은 그 나무 주인에게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도둑의 논리는 주인이 심은 망고는 이미 오래전에 땅 속에서 썩어 버렸고 자신이 딴 망고는 주인이 심은 그 망고와는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그럴듯하지만 결국 망고나무 주인이 심은 망고가 자라서 망고나무가 되고 그 결과로서 현재의 망고 열매가 열렸기 때문에 현재의 망고는 그 나무를 심은 사람의 것임에 틀림없다. 현재의 망고와 과거의 망고는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무아 윤회 이론에서의 과보 문제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존재와 현재의 존재는 다르지만 과거의 존재가 지은 업의 결과는 현재의 존재가 받게 된다. 『밀란다팡하』에서 나가세나 장로는 이것을 간단하게 한마디로 결론 내린다. “다시 태어나는 자는 죽은 자와 다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지은 업(의 과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송찬문 편역 불교교리사상입문<초안>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