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가주 불심에 불꽃을 피우게한
SF 한국일보 편집국장 정태수
배경순 북가주 주재기자
2006년 9월 SF 한국일보 매주 목요일 발행되는 종교 섹션에 장엄한 공증도량이 안방으로 찾아왔다. 이 신문을 본 북가주 모든 불교인들은 하나같이 기뻐했다. 종교판만 보면 왜 불교기사는 없고 기독교로 내용 일색인가? 젊잖은 한탄만 하며 종교의 편향성에 큰 목소리 하나 내지 못한 우리에게 불교 섹션을 신설한 그 누군가 때문에, 북가주 불자들이 힘을 얻었고, 함께 모여 불심을 모아 불꽃을 피웠다.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모를 정도로 소극적이고 얌전한 불자들을 잡아끌어 무대로 올리고, 소중한 불교 청년 회원들과 그들의 활동을 보도하였다. 또 신행기를 쓰게 하여 신명을 주고 ,북가주 스님들의 법문, 부처님 가르침과 미주 현대 불교에 보도 된 뉴욕, 남가주소식 퍼내오고 불교 문화를 소개하고 행사를 알려 함께 모이게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추적기사를 쓰다가도 문화면에 쓰여진 속내를 간지럽히는 천부적인 글 때문에 울었다는 독자를 가진 불자, SF 한국일보 정태수 편집국장.
타종교의 막대한 물량공세로 이미 점령당한 결코 호의롭지않는 전쟁터 같은 직장에서, 편집국장이라는 실력하나로 밀어 부치지만, 역시 이윤의 이치로 돌아가는 실세앞에 불교면을 가끔 붙들고 있기가 힘들었다는 그를 북가주 송년모임에서 북가주 불자들은, 잠자는 북가주 불교계를 일깨우는데 큰 공헌을 한 '정태수'기자를 격려했다.
대학 초년병 시절부터, 수사관이나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했다는 정편집국장은, 90년 봄에 중앙일보에 들어갔는데, 그 사연이 기구하다. 시험을 봤다가 면접에서 떨어진후 전공(외국어대 러시아어과 및 외대 통역대학원) 때문에 중앙일보에 드를일이 있었고, 그때 하필 면접 당시 악연(?)--그를 떨어뜨린 고약한 질문을 하신 분--이 있는 분과 대화를 나누게 돼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부랴부랴 다시 붙여줘서 동기들보다 한참 늦게 보결로 입사하게 된 운명적인 직업을 가졌다.
왜 기자를 원했느냐는 질문에 "매력적으로 보였고 적성에도 맞겠다고 생각했지요. 정의감이다 사회의 목탁이다 이런 걸 떠나서 뭘 따지고 파헤치고 하는 것 자체에 흥미가 있는 몸이라서,,,, 또 어린 생각에 끗발도 좀 있고 월급도 많이 준다니까, 그리고 당시에는 언론사 열풍이 불던 때라 두엄 지고 시장 가는 기분으로 나도 해보자 그랬지요."
1990년부터 중앙일보 사회부에서 근무하다 98년 12월부터 중앙일보 LA지사에서 근무했다. 1999년 12월부터 한국일보 LA본사로 옮기고 샌프란시스코지사에는 2003년 9월부터 근무, 편집국장이 된 것은 2006년 여름이다. 종교섹션을 신설하고 그 안에 불교전용면을 만든 것은 편집국장이 된 후 얼마 안된 2006년 9월부터이다.
SF지역 여론을 이끌어가는 가장 큰 언론인으로서 고민 또는 즐거운 보람은?
"일을 갖고 좋다 궂다 따지는 편이 아니어서 언론인으로서 고민은 별로 없습니다. 언론인들이 언론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게을리하면서 그 쥐꼬리만한 언론인 행세를 하는 꼬락서니가 우습고 팔자 고칠 정도라면 혹 모르겠지만 그저 밥 몇 끼 정도에 불과한 돈 몇푼에 간 쓸개 빼주고 사는 언론인 아닌 언론인들이 즐비해서 꼴사나울 때도 있지만, 그건 그들이고 나는 내가 할 바를 하면 되니까 고민이 될 건 없지요. 언론사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샐러리가 적네 어쩌네 하지만, 저야 원래 적은 돈에 맞춰 사는 데 길이 잘 든 편이어서 돈 고민도 별로 없어요.
제가 비리사건이나 의혹사건이나 이런 걸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기는 법이 없이 파헤치다보니 악의적 음해나 모함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도리어 열통을 내고 걱정을 하기도 하지만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그런 수풀 속 뱀 같은 작자들이 여럿 깔려 있으니 저는 더욱 정신을 바싹 차리고 조심조심 그 수풀을 다니게 될 것 아닙니까.
한인사회에서, 특히 한인단체를 이끈다는 사람들 가운데 공금 알기를 우습게 알고 예산을 함부로 쓰거나 결산보고도 제대로 하지 않고 넘어가는 사례가 많았는데 제가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하도 집요하게 파헤치니까 많이 정화됐다는 소리를 듣는 게 보람이라면 보람이지요. 그것 때문에 저를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소수의 잘못된 사람들의 불편함을 생각해서 다수의 잘못없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현재 그는 '추적 시리즈'를 통해 사기 친 사람, 감투놀이, 공금횡령 등을 파헤치면서 때로는 소송까지 당해가면서도… 그는 사회의 목탁노릇을 제대로 하고있다. 각자의 위치에 충실한 삶이야말로 부처님 가르침 아닌던가?
표현을 잘 안하지만 북가주 불자들이 매우 감사하고 있는데 어떻게 불교계에 도움을 주시는지요?
"북가주 불교계에는 어떤 도움을 주고 있다기 보다 제가 공부에 도움을 얻고 있지요. 보람이라면, 여러분들이 목요일날 종교섹션 불교면 보는 재미에 사신다는 말을 해오실 때 큰 위안이 되고 책임감도 느낍니다. 다만 북가주 불교계도 이제 많이 모이자, 덩치를 키우자 이런 소리만 할 게 아니라 자신과 이웃에 도움이 되는 일을 실질적으로 해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부처님은 왜 궁궐을 버리고 태자위를 버리고 구도의 길을 나섰는가, 무엇을 깨달았는가, 깨달은 뒤 왜 혼자 즐기지 않고 45년동안 발품을 팔아가며 그렇게 세상을 철환했는가, 이 점에 대해 우리 불자들이 참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라고 봅니다.
혹시 우리는 그 위대한 가르침을 어떤 형식과 도식 속에 가둬놓고 왜소화시켜버리지는 않고 있는지 냉정히 되돌아볼 시기라고 봅니다. 우리는 미국인들에게 불교를 가르쳐주네 포교하네 하지만 실은 진지한 미국인 불자들은 도식화된 불교 정형화된 불교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그야말로 일상생활 한순간 한순간을 수행으로 삼아 열심히 꾸준히 정진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기회가 닿는대로 그런 모습을 지면을 통해 보다 자주 전해드릴까 합니다."
땅끝이라고 알려진 전남 해남이 고향인 그는 1961년 소띠이다. 해남에서 중학교까지 다녔고 서울에 있던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영주지방철도청 소속 제천 조차장역에서 철도공무원 노릇을 한 적도 있다. (당시 국비인 철도고등학교는 형편이 어려운 지방 수재들에게 최고의 선망이었다). 늦게 외국어대에 들어가서 러시아어를 전공했고, 이 대학교 통역대학원을 졸업했다.
결혼은 중앙일보 초년병 기자시절인 1990년11월에 했고 아내 보원 보살과, 딸(세희, 11세) 아들(건희, 9세)을 두고 있다. 미국에 온 것은 1998년12월. 전공이 전공이었던지라 회사에서는 모스크바 특파원 얘기가 있었다. 그도 한때는 그게 꿈이었지만, 그것도 무슨 º슬이라고 그걸 놓고 이놈저놈 엉켜서 암투를 벌이는 꼴을 보고 그는 안한다고 생각했단다. 그러다가 미국에 살던 선배가 오라고 꼬드기고 그러면서 공부 좀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왔다가 9년이 다 돼버렸다는 담담한 미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가치관이 있습니까?
“별것 없습니다. 인생이 별것 아닌 줄 알고 너무 무겁게 비장하게 살지 말자, 이쯤 되겠네요. 불법을 만나기 전에는 가치관, 그러면 줄줄줄 이것저것 댈 게 많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아무말 못하겠네요. 기왕에 왔으니 그냥 사뿐사뿐 살면서 잘 쓰였으면 좋겠네요”. 장래 희망 같은 것 생각해 보신적 있는지요?
“장래희망은 무슨, 그냥 닥치는 순간순간 깨어있기를 바랍니다. 그 자식 세상에 나왔다가 괜히 밥만 축내고 갔단 소리나 안듣게, 장래 장래 하다가 현재를 놓치기 십상이니까, 늘 지금 하는 생각과 짓을 잘 살피면서 살아가겠습니다”
사려깊고, 행둥하는 심지가 곧아도 보통 아닌 그를 우러르니, 없던 기운이 펄펄 솟는다.불자는 일당백이라 !..결코 호의롭지 않는 주변환경에 대한 무력감에도 비겁하게 주저하지 않는 그 용기는 부처님 법을 제대로 배운, 올곧게 실천하고 있음이라. 사람으로 살면서 저만 단단하게 살고있는 그가 부러웠다.
법명또한 그다운 ‘법공’ 그의 언론인의 위치에서 용기있고 떳떳한 주장과 노력으로 불법을 믿고 따르는불자들에게 탁월한 선택을 했다는 희열을 알게 해준 정태수 기자의 행처럼, 불자 각자의 힘을 자신과 이웃을 위해 더 실질적인 행을 했으면 하는 요구를 빌어본다.
첫댓글 와우~ 누룽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