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병(尹履炳)
1855(철종 6) ~ 1921.
독립 운동가.
조국의 기운(氣運)이 기울어갈 적에 그 조국을 건지려 했고 다시 조국을 잃어버렸을 적에 그 조
국을 되찾기 위해 자기 한 몸의 영화나 안락(安樂)은 돌보지 아니하고 다만 민족의 대의와 불굴의
기백으로 일제의 침략세력과 싸우며 그로 인해 귀양도 가고 무릇 19 회의 옥고 끝에 생명을 버린
순국선열이 계시니 이분이 바로 省齋 尹履炳선생이시다.
자(字)는 계성(繼聖)이며 노종(魯宗)의 후손(後孫 - 33 세손)인 선생(先生)은 철종(哲宗) 6 년
(1885 년) 11월 1일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곡면 왕암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효제충신(孝悌忠信)
의 덕행과 문무를 겸전하니 모두들 선생을 일러 금지산(金池山) 정기를 타고난 분이라 일렀다.
선생은 구국의 뜻을 품고 무과(武科)에 올랐으며 명성황후(明聖王后)가 시해되자 역당들을 소탕
할 계획을 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 42 세 때에 도리어 무고죄(誣告罪)로 고군산도(古
群山島)에 귀양갔다가 다시 풀려나 한성재판소 수반판사(首班判事)에 임명되어 모든 판결(判決)
을 엄정하게 하므로 탐관호족(貪官豪族)도 숨을 죽였고 정의(正義)로서 국맥(國脈)을 바로잡아야
할 것을 애타게 외쳤으며 경부철도 부설권이 일본에 이양되자 러시아는 경의선(京義線) 철도 부
설권을 요구하므로 선생은 통분함을 참지 못하고 일본과 러시아의 요구를 강력히 배격할 것과 간
교한 매국도배(賣國徒輩)를 무찌를 것과 재정(財政), 양곡의 정책 등을 상소했다.
1905 년 51 세 때,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채결되자 국가의 위급(危急)을 상소하는 격문
(檄文)을 지어 전국(全國0에 살포했으며, 이듬해에 농상공부 형판과 평안도 관찰사에 연배(連拜)
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향리(鄕里)에 돌아와 민중(民衆)을 교도(敎導)하려고 동아개진교육회(東
亞開進敎育會)를 창립하고 풍속 선도에 애쓰시다가 1907 년 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동우회를 창
립하니 황실존중과 동양평화(東洋平和)와 청년교육(靑年敎育)이 삼대강령(三大綱領)이었고 수개
월이 채 못되어 회원이 수천명에 달했다.
헤이그 밀사사건에 이어 고종양위(高宗讓位)와 군대해산(軍隊解散)으로 국운이 어두워지자 동
우회원들이 앞에 나서 일경(日警)과 싸운 끝에 선생은 회장(會長)으로서 투옥되었다.
이듬해 54 세 정월에 내란죄라는 평리원(評里院)의 판결(判決)로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2
년이 지나 1910 년 한.일 합방(合邦)후 풀려나서도 불복하는 독립정신(獨立精神)의 고취로 거듭거
듭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고 다시 5~6 년후 광복의 뜻을 품고 북만주로 향하던 도중 북청(北靑)
에서 선조 문숙공(文肅公 - 瓘)의 현몽(現夢)으로 결심을 굳혔으나 불행하게도 일본경찰에 체포돼
경성으로 옮겨와 갇혔다가 이른바 회유정책으로 1개월 뒤에 방면되었다.
1919 년 65 세 때 3.1운동에 가담해 열렬한 투쟁을 전개하다가 서울 적선동에서 체포되어 법정에
서 굴(屈)하지 아니하고 민족(民族)의 대의(大義)를 떨쳤으며 일제(日帝)의 만행을 큰소리로 꾸짖
고 심리조차 거부하더니 1921 년 겨울 병으로 보석되어 고향(故鄕)에 돌아와 마침내 11 월 17 일
향년 67 세로 세상을 여의였다.
그러나 선생의 의기(義氣)와 정신은 조국의 산천(山川)과 역사와 함께 길이 남아 우리들의 갈 길
을 밝혀주실 것이다.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77년에 논산군 노송면 병사리에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으셨다.
(자료출처 : 파평윤씨대관)
첫댓글 1855년 생이십니다.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