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경과를 보면, 먼저 첫 번째 천황 암살 계획이 1910년 5월에 발각되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정부는 전국적으로 고토쿠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사회주의자를 검거하여 가 혹하게 취조했다. 이 과정에서 유도신문, 공갈, 협박, 고문이 자행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26명의 '대역 죄인'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유일한 여성 사형수 #간노스가 管野スガ (1881~1911)는 수기에서 "이번 사건은 무정부주의자의 음모라기보다 오히려 검사의 손에 의 해 만들어진 음모라는 편이 적당하다"라고 썼는데, 사건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재판은 1910년 12월 1일부터 29일까지 초스피드로 끝이 났다. 변호인 측의 증인 소환은 한 건도 허용되지 않은 비공개 재판이었다. 사법대신이 전 인사권을 장악했으며, 대역죄는 3심제가 아니라 1심제였다. 1911년 1월 18일 언도된 형량은 26명 전원 유죄에 24명은 사형, 2명은 유기징역이었으나, 이튿날 천황의 '은사'로 12명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월 24일 고토쿠 둥 11명이, 다음 날에는 간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판결이 선 고된 지 일주일만의 일이다. 무기징역으로 복역하던 12명 중 5명은 병 혹은 정신착란으로 생을 접었고, 남은 7명은 1934년까지 차례로 가석방되었다. 정부는 대역 사건을 "천황을 암살하여 일본 제국의 태양을 없애고 6,000만 국민을 암혹으로 몰아넣는 미치광이 것'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 까지 "일본 역사가 시작된 이래의 불상사"의 진상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고, 사건의 정확한 진상과 경과는 패전 뒤에야 밝혀졌다(.....) 자본가 단체가 한사코 거부했던 공장법도 1911년3월 제정되었다. 러일전쟁 전에는 공장법 반대의 선봉에 섰던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 -(1840-1951)조차 "이제 지금은 이르다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며 법안 통과에 협조했다. 역사 속에서 군주의 자혜는 정치 경제의 모순을 가리는 기제로 종종 동원된다.
대역 사건에 관한 재판 경과는 연일 신문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한국병합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사실 양자 간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확인된 바 없다. 하지만 #대역사건 이 없었다면 고토쿠는 러일전쟁에 반대했듯이 병합에도 한 된다'를 외쳤을 것이다. 병합 추진 과정에서 일본 열도에 살던 조선인 유학생에게는 철저한 감시가 가해졌다. 일본은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제단에 한국의 피눈물을 바쳤고, '안' 으로는 천황을 앞세위 자유와 양심을 압살했다. 서슬 퍼런 대역 사건의 광풍에 숨을 죽이 켜 제국의 신민들은 이웃나라의 침탈에 환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