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로니아의 나보니두스 왕은
이란 남부 아케메네스 왕조 (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 와 동맹을 맺어
메디아를 정벌하였고,
아케메네스는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인 키루스 2세(Cyrus the Great)가 연 왕조다.
아스티아게스는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바빌론과 손잡았다가 훗날 바빌론에 망했고,
키루스는
바빌론과 연합해 메디아를 무너뜨리더니
급기야는 바빌론에 칼을 돌렸다.
키루스는
주변 부족 국가들을 통합해
동으로는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 서로는 힌두쿠시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기원전 539년 바빌로니아를 정벌한다.
한때의 동맹이던 나보니두스는 폐위됐다.
키루스 2세는
아주 관대한 정책을 펼쳐 피정복민의 관습과 신앙을 지켜줬다.
오히려 피압박 민족들에게 '해방자'로 추앙됐다고 하는데,
바로 성경에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바빌로니아에 노예로 잡혀 있던 유태인들('바빌론 유수')을
해방시켜준 것이 바로 이 왕이다.
구약 에스라와 이사야에는
'고레스 왕'으로 표기돼 있다.
키루스는
이란인들에게는 아주 위대한 왕,
너그럽고 지략이 뛰어난 왕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한다.
키루스 2세는
이집트마저 정복하길 원했지만 당대에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의 소망을 이뤄준 것은
아들 캄비세스 2세였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스스로 이집트 27왕조의 파라오가 되었으나
왕이 이집트에 가 있는 동안
정작 이란에서는 쿠데타 기도와 혼란이 벌어졌고,
캄비세스 2세는 에티오피아 원정이 실패한 뒤 자살했다.
캄비세스 2세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즉위한
다리우스 1세는
인도 북부에서 오늘날의 불가리아 남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헬레네스(그리스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가 온 것이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를 최초로 건설했다 하니,
수에즈 운하의 원형이 그 옛날에 만들어졌던 셈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거대 제국을 페르시아라고 불렀는데,
파르시어를 쓰는 사람들의 땅이란 얘기다.
이것을 유래로, 이란어를 파르시라고 한다.
그러니 '이란 제국'이 맞는 말이지만 지금은 '페르시아'가 일반화된 용어로 자리를 잡았다.
메디아를 필두로 줄줄이 이어진 왕국들을
모두 '페르시아'라 하고,
메디아 왕조, 아케메네스 왕조 식으로
'왕조'를 붙여 구분하니 뿌리는 다 똑같다.
페르시아에 정복된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아테네가 여기 끼어들어서 전쟁이 난다.
다리우스 1세가 쳐들어와 3차에 걸친 전쟁이 벌어진다.
다리우스의 1차 원정은 폭풍으로 실패했고,
2차 원정에서는 유명한 '마라톤 전투'로 퇴각한다.
헤로도토스는
마라톤 전투를 대서특필했지만
페르시아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았던 전투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당시 병력규모로 미뤄 과장되어 있을 소지가 높다고 지적한다.
다리우스 1세는
3차 원정을 준비하던 중에 숨졌다.
뒤를 이은 인물은 전임자 만큼이나 명성을 떨쳤던 크세르크세스 1세이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의 원정대도
살라미스 해협에서
아테네 해군에게 궤멸됨으로써
10여년에 걸친 원정을 실패한다.
전쟁의 패배, 결말은 '국력 쇠퇴'다.
피정복민들이 크세르크세스 사후
줄지어 반란을 일으키고 지배층은 분열됐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메디아 왕조와 달리
중앙 집권 체제와 사회·경제적 토대를 갖춘 명실상부한 제국을 만들었다.
당시의 행정과 치안, 세금 제도 등을 담은 상세한 기록들이 전해온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촘촘한 도로망과 국가가 운영하는 驛馬(역마) 제도이다.
전국 어느 곳에건
보름 이내에 중앙 정부의 뜻이 전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서
지금의 터키 북쪽 리디아 속주까지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었고,
이 네트워크는 속주들의 반란을 막는 안보 시스템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