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시| 권애숙
입주하실래요? 외
그 언덕에 이름을 내려놓은 꽃나무 하나가 살았어요. 진한 꽃숭어리 아득하게 천 리를 만들었지요.
믿어라 안 카나. 이 축포를 안 믿으마 뭘 믿겠노.
꽃잎에서 번지는 수북한 말들엔 은근한 독성이 있어 사방팔방이 희미하게 부풀었어요. 날아가는 꽃잎들이 휘청, 방심한 눈들을 가리고 무너졌지요.
꽃나무가 쏟아내는 말들에 주변이 홀리던 어느 날 갈퀴를 날리며 태풍처럼 달려온 말 떼가 간드러지는 나무의 허리를 꺾었지요. 엎어진 욕망과 솟구친 좌절 사이로 감감하게 흩어지던 허구들.
질척한 땅속에서 꿈틀거리던 나무의 뿌리는 무기 같은 입들을 철철이 지상으로 밀어내고
묵은 이무기에 감염된 그 동네는 귀가 아주 멀거나 입이 찢어지게 크지 않으면 입주를 할 수 없다고 하네요.
어떻게 자격이 되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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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 모월 모일
돌아와 사진을 확대하다 만났어. 썰물에 붉은 내부를 던져놓은 한 사람. 젖은 모래밭 구석에 엎드려 글자의 마지막을 파고 있더군. 그렁그렁 패인 마음의 옆구리가 쏟아졌어.
활짝 피어 놀이를 쏟는 패거리들 너머로
젖은 모래밭을 천천히 걷는 맨발들 사이로
먼 곳을 당겨와 날개를 접는 한 무리 철새들 뒤로
들리지도 읽히지도 않는 sos
해변으로 모여든 풍선들은 바닥에 엎드려 무엇을 새기거나 지우지 않아.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부푼 머리칼을 흔들면 까르르 구르는 소리들 모래밭을 디디고 날았어.
위태롭게 달고 다니던 내 안의 sos를 꺼내 만질 때 둥근 눈물이 떨어져 꼬리에 붙더군. soso. 안심한 먼 곳이 희미하게 웃었어.
아직은 그저 그런 나를 꺼내 사진 속 모래밭에 접어 넣는 모년 모월 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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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애숙
경북 선산 출생. 1994년 《부산일보》 시조 당선, 1995년 《현대시》 등단. 시집 『당신 너머 모르는 이름들』, 『흔적극장』, 『맞짱 뜨는 오후』, 『카툰 세상』, 『차가운 등뼈 하나로』 시조집 『첫눈이라는 아해』 동시집 『산타와 도둑』. 산문집 『고맙습니다 나의 수많은 당신』 .김민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