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만난 것은 인도네시아 프람바난 사원에서였다.
내가 사원 중심에 가장 높이 솟은 시바 사탑에서 두르가Durga 여신상을 보고 나와 돌계단에 섰을 때
옆에 그가 앉아 있음을 알았다.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그가 '인연은 본래 정해져 있는 것인가?'라고 물었던 것 같은데,
나는 로로 종그랑 공주의 슬픈 운명을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의 제안으로 사원을 걸으며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그의 말이 새상스럽게 들렸다.
'사유思惟의 유랑자'라고 한 소개가 흥미로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길 위의 어느 날이었이었다.
산문 / 시집 『존재감 산책』(2023, 보민출판사) 중에서
산문 「길 위의 어느 날」 p10
봄, 내게 오는 것들
박유진
올봄, 비가 잦다
꽃길목마다 바람과 시샘 비,
샘 견딘 꽃들은 피어나고
봄밤 하루 품으면 연둣빛,
강가 풀들과 숲의 나무들은 좋겠네
허투루 오는 것이 어디 있으랴
비, 풀 한 포기, 꽃, 연두빛,
무심으로 내게 오지는 않은 듯하여
이 생애 인연으로 맞이하려
한 그루 나무로 숲에 섰네.
꽃의 두근거림
박유진
길섶 문득 제비꽃을 만나면
꽃의 눈으로 세상을 보리라
처음 피어나는 두근거림으로
숲은 깨어나
뿌리들이 서로 얽혀갈 때
낮잠 달게 자고 일어난 듯
나뭇잎들들 서로 따스하게 부비고
어린 단풍나무 하늘로 기지개를 켜지
꽃은 발돋움하여
하늘에 솔방울을 매달면
밤이면 별이 반짝이고
가슴에는 둥근달이 떠오르지.
- 박유진 산문 / 시집 『숲의 기억』(2022, 보민출판사)
어떤 단어를 떠올리면 마음의 별이 반짝일 때가 있다.
갑자기 떠오른다기보다는 나뭇잎 응축 끝에서
비로소 굴러 떨어지는 이슬방울 같은 것이다.
'존재감'은 그렇게 떠올랐다. 존재감은 이슬방울이다.
들판의 꽃과 산의 초록, 나비와 딱정벌레가
모두 제 나름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한 풍경을 이루듯이
존재감은 생명력의 샘이다.
인생여행길에서 만난 그와 산책하며 나눈 이야기들을
존재감의 제단에 바친다.
당신은 그에게, 그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2023년 새해 아침
유문정에서
박유진 서문
『존재감 산책』(2023, 보민출판사)
촛불
박유진
촛불을 켠다
가까운 어둠부터 눈을 뜨고, 뒤 켠 어둠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슬금슬금 물러나
커튼 뒤에서 옹기종기 눈을 반짝인다
찰칵, 형광 불에 화들짝 달아나던 어둠처럼
갑작스런 눈부심이 서툰 나에게
먼둥에 먼 산 뒤로 비켜주던 밤처럼
오, 정겨운 어둠이여!
촛불 하나 띄워두고
하염없이 누워 나는
그 은은한 빛으로 은은해한다
작은 눈이 봄밤들을 지나 꽃이 되었듯이
나뭇잎 하루만큼씩 들고 지며 가을빛이 되었듯이
네가 한 점 반짝임으로 찬찬히 번졌듯이
오, 촛불처럼 내게 오는 것들이여!
- 『존재감 산책』(2023, 보민출판사)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은하수처럼 쏟아지는 숲길을 좋아하다고 그가 말했을 때, 그 숲길에 들면 영혼이 맑게 헹구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모든 사유를 내려놓고 한나절 또는 반나절쯤이라도 숲길에 머무르고 싶다는 그의 말에 나는 사유의 유랑자가 사유를 내려 놓으려 하다 · · · 푸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머무름의 희원希願에 순순히 공감했다. 머무름 · · · 얼마나 포근한 시간인가! (산문 / 시집 『존재감 산책』(2023, 보민출판사) 중에서, 산문 p45 「머무르고 싶은」)
그냥 이대로가 좋겠네
박유진
그대 언젠가는 알았으면 좋겠네
별빛처럼 그대 눈이 반짝일 때
내 마음이 반짝였다는 것을
그대 작은 웃음 물결처럼 밀려올 때
내 가슴이 넘실대었다는 것을
그대 언젠가는 알았으면 좋겠네
연둣빛 봄이 푸르게 물들어갈 때
나는 그대 빛으로 물들었다는 것을
언젠가는 그대 몰랐으면 좋겠네
반짝이고 넘실대며 물드는
그냥 이대로가 좋겠네
『